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생태문명과 원형原型문학 - 『한국수필』 3월호를 읽고-

느림보 이방주 2021. 2. 13. 12:09

생태문명과 원형原型문학

- 『한국수필』 3월호를 읽고-

 

이방주

 

21세기를 지배하는 화두는 생태문명이어야 한다. 우리 인류는 지난 수세기 동안 산업과 물질문명에 기대어 풍요를 누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인류가 잊고 있었던 것은 그러한 풍요가 자신의 삶의 터전인 생태계를 끊임없이 파고 헤치고 할퀴면서 누리는 폭력적 문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언젠가는 인류의 삶에 큰 재앙이 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면 14세기 유럽의 인구를 3분의 1이나 감소시켰던 페스트의 대유행을 들 수 있다. 이후 유럽 인구를 13세기 수준으로 회복한 것은 17세기에 이르러서 가능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페스트로 사망했는지 알만하다. 20세기 들어 지구온난화로 페스트에 못지않은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점도 우리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가이아(gaia)는 ‘대지’나 ‘역동적인 지구’를 뜻하는 말로 알려졌다. 영국의 과학자이며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인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은 지구는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이며 그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유지하려고 스스로를 조정하고 변화한다고 주장했다. 지구는 기후 생태계의 변화 같은 온갖 변화에 대응하면서 생명체들과 같이 호흡하고 반응하여 스스로를 조율하고 조정한다는 의미이다. 페스트의 대 유행은 중세의 유럽문명의 번성에 대한 가이아신의 지구 조율활동이라 해도 억측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코로나19가 창궐하는 것도 가이아신의 조율활동이라 생각할 수 있다. 지난날의 구제역, 조류독감 등이 모두 개체수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가이아신의 노여움이라 생각하면 두려운 일이다. 무언가 새로운 이념을 추구해야할 때란 생각이 든다.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지난 세기가 물질문명이었다면, 이제는 생태주의 문명으로의 전환이 가이아신의 노여움을 피하는 인류의 살 길이라는 생각이다. 지금이라도 우리의 삶의 방식을 영구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순환과 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우리의 생각을 전환해야 한다. 순환적 삶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생태문명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부족하지 않다. 생태문명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相生)의 원리를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고 수필문학이 그러한 이념을 담아내야 한다.

민속애서는 상생의 원리를 음양오행설에서 찾고자 한다. 오행의 상생원리는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의 생성원리를 일컫는다. 결국은 우주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물질이 상호공존 생성한다는 원리이다.

노자의 도경(道經)은 유무상생(有無相生)의 원리를 이렇게 말한다. ‘有無相生 難易相成 長短相較 高下相傾 音聲相和 前後相隨’(유와 무는 서로 살게 해주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 이뤄주며 길고 짧음은 서로 비교하며, 높음과 낮음은 서로 기울며,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앞과 뒤는 서로 따른다.) 이 말은 있음과 없음이 함께하는 대화합의 정신을 강조한 노자 사상의 핵심이며, 갈등과 대립으로 사는 현대인들이 미래를 살아갈 새로운 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자연, 동양과 서양, 종교와 종교 등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상생을 통해 화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래의 우주 변화에 적응하는 원리인 상생은 다시 말하면 생태주의 사고이고 인류의 정책이 그렇게 바뀌어나가는 것이 곧 생태문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수필』 3월호를 읽으며 특기할 만한 것은 특집으로 [코로나시대 살아가기]를 머리에 두고 모두 17편의 작품을 실었다는 점이다. 그 밖에 특집 2 [3월의 마음]에 17편, 특집 2 [3월의 향기] 17편을 두었다. 이렇게 구성하여 코로나 시대를 맞아 반성과 살아내는 지혜, 그런 가운데 느끼는 자연과의 조화, 자연에서 받아내는 지혜를 담은 작품을 게재하였다. 한편 마지막으로 [사색의 뜰] 17편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조화를 삶의 철학으로 삼는 상생의 이념을 담은 작품을 실었다. 이번 호의 68편의 작품은 생태문화를 바탕으로 한 상생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상생과 생태주의 이념은 대상의 원형적인 특성을 추구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수긍하게 된다. 문학에서 원형적 상징성은 분석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카를 융(Carl Gustav Jung)의 원형(原型 archetype)에 대한 개념 정의를 응용하여 생각할 수 있다. 융의 정의에 의하면 원형이란 인간 심리의 잠재적 가능성의 총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근원적 체험으로서의 원형은 비개인적이고 보편적일수록 단순하거나 희미하다. 원형은 집단 무의식의 실재적 내용을 구성하고 있기에 모든 문화에서 동일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신화나 전설, 전래 동화, 종교적 전통과 비법(秘法)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융은 집단 무의식은 인간에게 주어진 여러 가지 근원적 유형(archetype)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였다. 이 근원적 유형은 지역, 역사, 문화, 인종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행동유형을 말한다. 이것이 우리 마음속의 종교적인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정의를 원용한 문학 평론가들은 인간의 다양한 경험은 다음 세대에 신비스럽게 전승된다고 하였다. 논리 이전의 사고에 바탕을 둔 원초적 심상유형과 상황은 독자와 저자에게 감정적 정서적 공감을 불려 일으킨다는 것이다. 체험의 공유, 기억의 소환에 의한 정서적 교감을 통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수필은 원형성의 구현이 시간과 공간, 이념의 차이를 초월하여 미적 울림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므로 수필적 상상의 전략에서 원형성의 추구는 마지막 단계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을 상생의 바탕으로 생각한다면, 이혜복의 <다르니 다행>이 구체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라 볼 수 있다. ‘그’와 나는 다른 성향 때문에 상처 받지만, 다르기 때문에 상생한다.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낳고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생성하고, 어려움과 쉬움도 서로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는 기능을 추구하고 나는 감성에 기울어져 혼자 아파한다. 하지만 ‘일머리도 밥벌이에도 취약한 내가, 달라도 너무 다른 그의 덕을 보는 게 더 많으니’ ‘그가 나와 같지 않음을 천만 다행’으로 알고 서로를 보완하고 새로운 것을 이루며 변증법적으로 살아간다. 노자의 도경(道經) 2장의 상생 원리를 눈에 보는 듯하다.

최은정의 <숲속의 귀>는 진정한 소통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 작품이다. 작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그에 있는 로베르소 성의 숲을 산책하면서 청동 조각의 수많은 귀를 발견한다. 그리고 ‘말이 진실하고 우리 귀에 순순히 다다른 적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소통에 대한 소망을 이렇게 고백한다.

 

하기야 인간이 개하고 친한 이유 중에는 개가 사람의 말은 알아들어도 전하지는 못해서일지 모른다. 그래서 개를 믿는다는 소리도 들었다. 나도 이 숲의 귀에 대고 가슴 속에 쌓여있는 말, 할 수 없는 말들을 실컷 해보았으면 했다. 하지만 안 하기를 잘했다. 봄이 되어 싹이 트면 내가 한 말들이 피어나서 바람에 날렸을지 모른다.

 

작가는 ‘귀는 진리의 곁문이고 거짓이 들어서는 대문’이라고 하면서 진실을 나눌 수 있는 소통을 소망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늘의 소통은 곧 고급스런 상생의 지름길이다.

강정숙의 <먼 여정(旅情)>은 시대의 아픔으로 65년 전 이별했다 재회한 여정을 그린 작품으로 눈을 끌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왜관전투에서 실종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남편을 평생 그리워하다가 생을 마감한 부인이 한줌 재로 돌아와 재회하는 먼 여정을 마무리한 사연이다. 작가와 기념비, 기념비의 주인공과 작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기념비로 인해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 작품의 의미를 두겠다.

 

한 인간의 삶의 여정이 여기 있다. 삶의 희로애락, 생로병사는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오직 그 만이 보여주고 그려내는 시간의 무늬이다. 일상이 모여서 규정되어지는 삶은 광활한 시공간의 이동이다. 낙동강 변을 걷다가 만난 먼 이국(異國)의 한 여인의 삶의 시간이 낙동강으로 이어져서 휴전중인 우리의 현실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삶의 평화로움에 잠시 잊고 있었던 한국전쟁을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주었다. 벽안의 청년과 그 가족, 특히 그의 아내의 삶 속으로 스며든 한국전쟁의 아픔과 슬픔은 그의 먼 여정을 붙들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슬픔의 지층은 있다. 그 여인의 지층은 65년이라는 두께로 가라앉아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그 슬픔의 지층이야말로 우리를 평화로 불러내는 휴전이 아닌 종전으로 이어지는 통로인지도 모르겠다.

 

추억에 잠기어 과거와 소통하는 작품으로 하재준의 <마음의 향기가 되어>가 있다. 작가는 ‘적막에 휩싸인 채 고요히 깊어만 가는’ 밤에 ‘창을 통해 어리어 오는 내 젊은 날의 모습’에 잠기어 추억을 소환한다. 추억은 영영 사라져버린 정으로 생각했는데 가슴 속 깊은 곳에 뿌리박고 있었다. 그렇게 불현듯 떠오른 지난날과 소통한다.

상생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담아낸 작품으로 장은영의 <같이>를 들 수 있다. 남편과 등산을 갔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나 위험한 물길을 건너면서 ‘같이’의 소중함을 드러냈다. 상생의 이치를 행동 서사로 보여준 작품이다. 손잡고 물길을 건너는 것은 함께하는 인생을 의미를 이렇게 드러내었다.

 

어찌 보면 인생은 같이한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누군가와 같이해야만 가능해지는 여정이다. 그건 가족일 수도, 지인일 수도 있지만, 생면부지의 타인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울고 싶을 때 따뜻하게 내 손 한번 잡아 줄, 그리고 내가 손잡아 줘야 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세상을 살아갈 힘이다. ‘같이’는 굴곡의 고통이 당연한 인생길에서 삶의 강한 물줄기를 끌어내고 유도해내는 마중물인 것이다. ‘같이’의 가치를 새삼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 글은 인생에서 상생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 굴곡과 공통이 존재하는 삶의 여정을 위험한 물길로, 상생하는 모습을 손잡고 건너는 부부라는 상관성에 빗대어 인상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이밖에 정(情)과 소통으로 상생하는 모습을 보여준 작품으로, 김하임의 <함께 걸었다>는 공동생활로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삶을 표현했고, 백승국의 <말이 그립다>는 정정당당하고 자랑스러운 말, 말다운 말로 상생하는 진리를, 이정자의 <거리두기>는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느슨한 결합’에 의한 ‘다양성과 창의성’이라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손자와의 느슨한 결합을 추구하는 의미 있는 상생을 추구하는 체험을 담았고, 김백옥은 <마지막 남긴 한 마디>에서 60여년 정든 아내를 보내면서 인생을 한 폭의 드라마 같다고 이별의 순간을 술회하였다. 김은애의 <품안에서> 1972년 단양 남한강 시루섬 홍수 이야기를 모티프로 어머니의 정과 사랑, 그리고 주민들이 함께 살아남는 치열한 생존의 의미를 표현하였다.

한국의 전통 수필은 합리적인 이성이 지배하는 서구적인 에세이가 아니라,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어루만짐이 주는 정서적 관계 회복이 깊은 울림을 주는 우리 고유의 ‘수필’이다. 이런 면에서 서구적 생태주의 사고와는 차별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내는 지혜의 실마리를 찾는 상생과 생존의 사고가 우리 문학에 전통적으로 담겨온 공동 심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곽명옥의 <녹차를 만들며>, 서강석의 <소나무의 꿈>, 박기옥의 <유채꽃 단상>, 을 살펴보고자 한다.

곽명옥은 <녹차를 만들며>에서 차를 우려 마시면서 ‘인생이 그냥 쉬운 게 아님’을 깨닫는다. 차를 만드는 모든 과정과 삶의 상관성을 통하여 인생의 본질을 표현하였다. 결미에서 ‘차 잎의 강한 성깔을 죽이고 삭여 은은한 향과 맛이 우려지는 차가 된다. 사람의 성질도 잘 다듬으면 온화한 성품이 되듯, 나의 아집도 뭉겨져 순해진 것 같다’고 고백한다. 상상의 단계에서 역동적으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서강석의 <소나무의 꿈>은 서두에서 소나무 분재를 서술자로 하여 억지로 만들어진 소나무의 삶을 하소연한다. 그러나 소나무는 기쁘지 않다.

 

나는 도도해도 될 만큼 멋들어진 자태로 가치가 높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우러르며 놀랄 만큼 큰 금액으로 흥정을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마음껏 자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팔다리를 뻗을 수 없었다. 조금만 자유를 누리려 해도 어김없이 손도 잘리고 발도 도막났다. 몸통은 굵은 철사로 감아 비틀리고 팔과 손끝은 가는 철사로 감아 이리 꺾이고 저리 꺾였다. 잎에 닿는 따사로운 햇빛도 발을 담가야 하는 물과 양분도 관리 감독 아래에 배급을 받았다.

 

그래도 소나무는 행복하지 않다. 자신의 꿈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나무의 시점으로 인간의 소용대로 성장이 억제되는 자연과 생태계를 돌아본다. 사람들은 소나무 분재만 자신의 의지대로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러한 통제를 가하는 것이 현실이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 정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에게 원하는 것도 더 많아’지는 오늘날 현실을 바라보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문명 아닌 문명을 비판한다. 이것은 상대를 불행하게 하는 것이므로 ‘상대를 존중하고’ ‘추구하는 삶의 방법’을 인정하고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작품은 생태주의 사고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되돌려 자기고백을 한 것이기에 감동을 준다. 대상의 본질과 그에 따른 해석이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고이다.

이러한 본질을 추구하는 생태주의 사고로 인간의 삶을 돌아보는 작품으로 박기옥의 <유채꽃 단상>이 있다. 이 작품은 산책길에서 ‘원주민의 삶을 한방에 밀어내고 상춘객을 유혹’하는 유채꽃을 바라보며 그 꽃의 본질을 생각한다. 유채는 본래 화초가 아니라 채소이고, 씨앗은 기름을 짜기도 한다. 유채꽃이 먹거리라는 본질을 버리고 완상용이 되어버린 현실을 개탄한다. 그래서 ‘먹거리에 대한 경외감’을 버리고 마치 화류계로 빠진 것 같은 배신감을 느낀다. 이 작품은 인간이 자연의 본질을 왜곡하여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삼은 치졸함을 비판하고 있다. 중반부에 새댁 시절 겪은 일화를 통해 생태계를 대하는 인간의 욕망을 경계하고 있다. 그밖에 김남희는 <흙>에서 흙을 밀어낸 시멘트를 문명 발달이라 여기는 현실을 꼬집었다. ‘지구의 살갗인 흙은 점점 피부를 잃어가’고 시멘트나 다른 것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며 안타까워한다. 여기에 물질 중심의 문명을 생태 중심의 문명으로 바꾸어야 된다는 생각이 스며있다. 윤소천은 <아리랑이 흐르는 증암천>에서 자연 그대로 묻혀 사는 즐거움을 그렸다. 이 작품도 자연친화적인 생태주의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정숙의 <소소한 일상 속의 작은 기쁨>은 코로나 시대에 혼자 살면서 얻는 작은 기쁨을 그렸다. 작가는 숲속의 새를 불러오고 화초를 사랑하면서 ‘친구처럼 찾아와 주는 새들과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꽃을 바라보는 일상이 행복이라 생각한다. 자연과 상생하는 생태주의 삶의 지혜를 담아냈다.

자연에서 색채의 원형성을 발견하여 삶을 개념화하는 지혜를 담아낸 작품으로 강현자의 <자줏빛 억새꽃>이 보인다. 작가는 코로나19로 집에 갇혀 지내다가 답답함으로부터 탈출하듯 자전거를 타고 미호천으로 나간다. 자전거길 양옆에 피어나는 억새꽃이 자줏빛인 것을 발견한다. 나아가 갈대꽃도 단풍잎도 처음엔 자줏빛이고 아기도 태어나는 순간 붉은 빛임을 떠올린다. 여기서 붉은빛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원형상징성을 발견한다. ‘자연은 붉은빛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나 보다. 붉은색이 갖는 신비로움이 놀라웠다. 우주 만물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인가.’라며 붉은색이 갖는 신비로움과 우주만물이 하나로 통하는 원형성에 놀란다. 이 글에서 억새꽃은 다만 소재일 뿐 주제로 향하는 사유의 실마리는 시작을 의미하는 ‘붉은빛’이다. 작가는 다시 서양의 붉은빛으로 눈길을 돌린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이집트로부터 유대인의 대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해낸다. 여기서 붉은 피는 구원과 부활을 의미함을 발견한다. 작가는 동양에서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 먹는 팥죽의 붉은빛도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란다.

 

팥죽으로 잡귀를 막는 동짓날을 ‘작은설’이라고 했으니 이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민족도 붉은 피의 표식으로 고난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했다. 갓난아기의 피부가 붉은 것처럼 미호천변의 억새도 아파트 정원의 단풍나무도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자줏빛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붉은빛의 이전은 고통이요 이후는 희망이라는 변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자연과 인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 시공을 초월하여 ‘붉은빛의 이전은 고통이요 이후는 희망이라는 변화가 존재한다.’는 원형성을 깨닫는 과정은 놀라운 사유이다. 여기서 그는 최근 한 가수의 언택트 공연에서 포스트코로나시대 변화의 실재를 보면서 이렇게 희망을 말한다.

 

이번 재앙은 첨단, 최첨단을 향해 치닫던 사람들에게 숨을 돌리고 되돌아보라는 신호가 아닐까. 거리에 자동차가 줄고 집집마다 씀씀이가 간소해졌다. 모임을 줄이고 외출을 줄이니 공기는 더 깨끗해지고 하늘은 맑아졌다. 죽어가던 지구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중간 생략)---혹독한 추위와 진통을 거쳐 붉은 생명이 태어나듯이 우주 만물은 순환 속에서 변화하고 또 존재한다. 오늘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붉은 태양이 내일을 준비하려 산을 넘는다. 미호천 붉은 억새에서 나는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화의 융성 뒤에는 늘 재앙이 오고 재앙이 있은 후에는 도약이 있는 변화와 순환의 역사였다. 작가의 말대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21세기의 혁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이러한 사유는 자연과 사물, 문화의 원형적 상징성을 발견하여 생태계에서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지혜를 얻어내어 작품에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생태주의 사고를 바탕으로 독자에게 치유의 효과를 주어 지적, 감성적 울림을 준다.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고 원형적인 상징성을 발견하여 작품화하는 방법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미적 울림을 주는 수필적 상상의 전략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수필은 ‘붓이 가는 대로 쓰는 것이기에 구성이 필요 없다.’라는 이론에 일침을 가하는 작품이다,

『한국수필』 3월호는 좋은 작품이 많았다. 지면 관계로 모두 언급하지 못하여 아쉽다. 특히 코로나시대 살아내기를 화소로 삼은 작품이 많아 문화의 역사를 기록하는 역할도 했다고 본다. 3월의 작가들은 구성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으며, 코로나19 이후에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생태문명과 상생에 많은 관심을 보여서 『한국수필』이 우리나라 수필문단의 선도적 역할을 하는 것 같아 흐뭇했다. 한편 원로 작가들이 노련하고 품격 높은 필력을 보여 든든한 반면, 일부 작품에서는 서두 부분에 주제를 강화하는데 무의미한 문장을 길게 나열하여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은 개선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