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상생相生의 변증법 -『한국수필』 2월호를 읽고 -

느림보 이방주 2021. 1. 23. 21:50

한국수필 2월호 월평

 

상생(相生)의 변증법

-『한국수필2월호를 읽고 -

 

 

문학 작품이 독자를 붙잡는 것은 미적 울림이다. 문학 작품은 인지적 정의적 심미적인 요소들에 의해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들을 미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작가의 상상력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한 마디로 문학의 예술적 울림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서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필도 문학이므로 상상에 의한 형상이 있어야 독자들에게 울림을 주고 작품에 붙잡아 둘 수 있다. 수필은 체험과 사실의 문학이라 해서 마치 상상은 필요치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상상과 허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이다. 문학은 상상에 의해 태어나고 수필도 분명히 문학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허구를 수용할 수 없지만 상상은 반드시 필요하다. 수필이 체험과 사실의 문학이므로 그 체험이 진실해야 한다는 말을 오해해서 수필의 상상을 부정하기도 한다. 상상을 허구와 혼동하여 이해하기 때문에 수필에서 상상을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수필에서 체험의 진실성이란 사실 여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체험은 물론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어야 하지만, 아울러 우리네 삶의 모습을 철학적으로 개념화하고 보편화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체험이어야 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의도적이거나 가식적이지 않은 진정성 있는 체험이어야 한다. 곧 가치 있고 진정성 있는 체험이야말로 수필이 필요로 하는 진실성이라고 할 수 있다.

허구와 상상은 분명히 다르다. 허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문학적 필요에 의해 개연성 있게 꾸며내어 감동을 주는 가상적 현실이다. 허구도 상상력의 소산이지만 소설이나 희곡에서 수용하는 개념이지 수필에서 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 수필에서 상상이란 무엇인가? 수필에서 상상이란 사실과 체험을 바탕으로 수필가가 그것을 진정성 있게 전달하기 위하여, 또는 주제를 좀 더 밀도 있고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약간의 과장, 강조, 순차성을 변경하는 등의 사고과정을 의미한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 사실이 아니라 존재하는 사실에 대한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또는 사실에 대한 깊이 있는 본질 천착과 개성적인 해석까지 포함한다. 이것을 수필적 상상이라고 말하면 허구를 위한 상상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적 상상은 어떻게 수필창작에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수필가들이 창작에 적용할 수 있는 수필적 상상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상상력 이론에서 배울 수 있다. 안성수 교수는 바슐라르의 문학적 상상력의 체계에서 수필적 상상의 위계와 체계를 물질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원형적 상상력의 순서로 생성 발전하는 유기적 메커니즘으로 설명하였다. 물질적 상상력이란 대상에 숨겨진 존재의 물리적 본질을, 역동적 상상력은 물질에 감추어진 물질적 바탕을 적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조건을 넘어서게 하는 도약의 힘을 의미한다. 곧 자아를 돌아보고 개념적 본질을 궁구할 수 있는 힘이다. 원형적 상상력이란 시공의 세계를 초월한 원초적 이미지와 의미를 해석해내는 힘이다. 이와 같은 상상력의 단계는 1차적 상상에 의해 2차적 상상을 2차적 상상에 의해 3차적 상상을 생성해 내는 유기적 관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곧 상생의 변증법이다.

『한국수필 』 2월호를 읽으며 의미 있게 다가온 것이 바로 이러한 수필적 상상의 단계에서 변증법적 생성이란 상상의 원리이다. 물론 대부분의 작품이 치유와 생태의 상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상생의 소중함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변증법적 상생의 원리를 적용하여 형상화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강미란의 <나의 섬>은 생태주의적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작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는 삶의 고통이 전혀 없는, 환희와 경이로움에 가득 찬 유토피아를 찾아 끝없이 갈구한다. 그렇지만 결국은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여 삭이고 녹여 다져야 진정한 나의 유토피아인 나의 섬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제 이상의 유토피아를 내려와 현실의 유토피아로 돌아온다. 하지만 그토록 원하던 나의 섬에 도달하지만, 나의 섬을 비켜 수평선 저 멀리 또 다른 섬으로 떠나고 싶어진다. 나의 섬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많은 섬 중의 하나이다. 내 마음이 머무는 동안만 내가 소유한 나의 섬이고 나만의 유토피아일 뿐이다. 나의 섬은 내 삶의 꿈이고 내 삶이 쉬어가는 곳이다.

 

나를 찾아 꿈에 그리던 유토피아를 찾고 보니 바로 내 앞에 펼쳐진 시간, 지금, 이곳이 진정한 나의 섬임을 깨닫는다. 이상의 유토피아에서 현실의 유토피아를 찾았지만, 또 다른 섬을 찾아 나서게 된다는 인간 본성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이 작품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변증법적 상생의 상상으로 자아를 돌아보는 역동성이 돋보인다.

 

김정옥은 <꺼꾸리>에서 우연히 운동 삼아 꺼꾸리를 타면서 뒤집어진 세상을 본다. 우리 일상에서 뒤집어지는 여러 사례를 들어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결국 나 자신도 사고를 뒤집으면 인생의 마음밭을 고를 수 있을 거라는 사유를 함으로써 수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을 잘 살려냈다.

 

이제 내 사고(思考)나 슬슬 뒤집어 볼까. 남편과 나의 입장을 바꾸어 보고, 걱정될 일도 더 큰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거꾸로 생각하는 거야. 지는 것이 이기는 거다. 한 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돋움이라고 말이지. 작은 소리가 큰 울림이 되기도 하고 강한 것이 오히려 약하기도 하잖아. 슬프지만 살아가는 것도 뒤집어 보면 결국 죽어가는 거야.

 

작가는 마음밭 이랑을 뒤집으며 돌덩이처럼 단단한 흙을 부드럽게 부수고 자갈을 골라내고 바람이 다가오면 넌지시 엎치겠다고 다짐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와 대상의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면서 멈출 것과 나아갈 것을 고려하여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곧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한 단계 높은 삶의 철학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작품은 문장을 독백적인 어조로 종결하여 속삭이는 듯한 친근감을 주는 효과를 얻어냈다. 이와 같은 종결어미를 쓸 때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색한 문장이 나오지 않도록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상생의 변증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서태수의 <합수머리 변증법>을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물줄기가 부딪치는 합수머리 소용돌이에서 합수의 변증법을 발견한다. 물길은 자신의 형상이나 색깔을 온전히 지니려 고집하지 않는다. ‘물맛도 바꾸고 색깔도 바꾸고, 더러는 탁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함께 더러워지기도 한다.’ 합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내는 과정을 상상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합수머리에서는 혁명의 기세로 부딪치지만 승자의 행진은 패자를 포용하는 유유한 평화로움을 갖는다는 합수머리의 변증법에서 현 정치의 세태를 꼬집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합수머리에서 상생의 원리를 배우는 것이다.

 

물줄기가 부딪치는 합수머리에는 항상 소용돌이가 인다. 물기둥이 솟고 물거품이 일고, 비늘을 번쩍이며 살점이 튕겨나가는 용틀임의 육탄전이다. 물머리가 부딪쳐서 용솟음치면 먼 길에 함께 달려온 몸통이 어깨를 겯고는 넌출지고 소쿠라져 상대를 휘감는다. 맨 끝에 달라붙은 물꼬리도 물똥의 튀기며 엉겨든다. 반드시 두 물머리 중 어느 하나는 온몸이 부서져야 끝나는 절체절명의 소용돌이다.

 

합수머리의 모습을 이와 같이 묘사했다. 실제로 경험한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작품에 맞게 재구성하는 수필적 상상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이러한 부딪침은 ‘더 깊고 넓은 물굽이를 형성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임을 강조한다. 합수의 모습을 상관물로 오늘날 정치 사회를 꼬집고 있다. ‘인간의 선거가 합수머리 변증법적 융합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인위적 가치관의 몰입’이라 비판한다. 이것은 강물의 근원을 고찰해야 해결된다. 강물의 세찬 물줄기도 근원은 작은 석간수이거나 실개천이거나 옹달샘 같은 더 작은 물줄기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히면서 선거판이나 편향적인 정치적 가치관에 얽매인 현실을 꼬집었다. 이 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민주주의 선거는 인류가 창안해낸 최선의 정치 제도이다. 다수결 승자의 원칙을 따르되 공동의 화합으로 운영하는 정신,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민주(民主)’와 ‘공화(共和)’의 참된 의미일 것 같다. 선거의 계절이든 선거가 끝난 세월이든, 합수머리의 변증법적 지혜를 실은 강물은 세상의 희로애락을 싣고 아름다운 산야를 휘돌아 감돌아 유유히 굽이지고 있다.

 

상상의 전략적 단계에서 역동적인 상상을 거쳐 원형적 상상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와 같은 구성으로 매듭을 지은 이 작품은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길순의 <합수>도 역시 합수를 상관물로 하여 부부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상생의 가치를 구현한다. 작가는 퇴직한 남편과 함께 양평 두물머리를 찾는다. 그곳을 다녀오면서 작은 마찰이 생기는데 부부싸움에서도 장점을 찾아내어 자신의 단점을 보완하는 부부 이력이 흐뭇하다. 두 물이 만나 합수하듯이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부부의 연을 맺어 인간 느티나무를 잘 키워왔다는 작가는 남편을 위해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가 고민 중이다.

 

우리의 만남은 어떤 인연이 있어 이어진 것일까. 나는 충청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서울에 살던 그와 만나 성사된 결혼이다. 그간의 모르고 살아온 세월은 각자의 영역이다. 두물머리처럼 두 사람이 합수해 40여 년 동안 한 길을 걸어왔다. 우리가 살아온 삶속에 어렵고 힘든 고비가 왜 없었을까만, 두 사람은 어렵고 힘든 고비를 잘 이겨낸 것 같다. 젊었을 때는 고생도 고생인 줄 모르고 지나 왔다. 다행히 큰 우한 없이 건강했으니 앞만 보고 달려올 수 있었다. 남에게 뒤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인간 느티나무는 푸르게 푸르게 무성하게 피워냈었다.

 

그곳에 서 있는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처럼 푸른 기운으로 살기 위해 긍정적이고 건강하게 살 것을 다짐한다. 부부의 해로를 합수로 빗대어 표현한 점과 나이 들어가는 부부의 모습을 수령이 수백 년이 되는 느티나무에 빗댄 점에서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열정의 푸른 시절을 다 보낸 우리는 지금 어떤 빛깔로 인생을 얼마큼이나 물들이고 있을까. 지나온 세월의 무게는 벗어버리고, 편안하고 고운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다. 커다란 수술자국을 감내하면서도 우람하게 버티고 선 느티나무처럼 우리도 푸른 기운을 잃지 말고 살아가자.

 

결미에서 부부의 다른 점을 두물머리처럼 하나의 느티나무로 키워내는 변증법적 상생을 이루는 점이 독특하다. <합수머리>가 변증법적 상상과 묘사에 중점을 두어 정치적 현실의 문제 해결방안을 제시하였다면 이 <합수>는 합수를 상관물로 부부의 성격을 말하기 위주로 전개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묘사를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보여주기와 말하기의 글쓰기 전략의 장단점은 독자가 평가하기 바란다.

 

상생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김진곤의 <동주현상 80리 길을 가다> 는 섬진강 끝자락 하동포구 80리길에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지켜낸 정병욱교수 생가에서 민족시인 윤동주와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생각한다. 친일과 항일의 갈등, 극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이 진영 갈등이 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상생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류영철의 <물 먹이는 여자>는 건강을 위한 아내의 물 사랑 때문에 겪게 되는 부부간의 일상을 재미있게 풀어 갈등이 상생의 원리로 승화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류차열의 <안나푸르나여!>도 안나푸르나에서 자아의 변화를 깨닫는 과정을 순차적 구성으로 표현하였으며 박남순은 <마음을 가리진 말자>에서 자연에서 배우는 사람살이의 모습을 깨닫는다. 특히 자연 속에서 마스크를 벗고 사람들과의 소통도 가능한 상생의 공간임을 드러냈다.

관계와 치유를 제재로 한 작품으로 박재만의 <아버지가 이상하신 걸까>가 있다. 이 작품은 비합리적인 선택이 때로는 인간을 따뜻하게 하고 사회를 밝게 해준다는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다. 시선을 달리하여 마음의 치유를 얻는 점이 독특하다. 이지안의 <홍시의 시간>은 홍시를 상관물로 친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으로 치유를 얻는 작품이다. 어려움에 처한 친구가 이를 극복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홍시가 익어가는 시간이 다르듯이 사람도 저마다 살아가는 온도와 시간이 다름을 인식한다. 친구와의 따뜻한 우정이 배어나서 크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전영구의 <삶의 거품>은 거품 가득한 허황된 삶에 대한 집착의 치유를 주제로 다룬 작품이다. 정지연의 <아픈 손가락>은 계절의 모습과 아픈 손가락의 모습을 교차하는 구성으로 아픔을 치유해 가는 삶의 과정을 전한다. 이 작품은 계절이 변화하는 모습을 매우 아름다운 언어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묘사하여 작품성을 더한 점이 감동을 준다.

 

월간 『한국수필』은 1971년 창간하여 창간 반세기를 맞는다. 그간 한국 수필문학의 방향타가 되어 수필의 문학성 확보에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또한 21세기 한국 수필문학의 미래를 좌우하는 역할을 『한국수필』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국수필』에 게재되는 작품 한편 한편은 한국의 수필문학사라는 성을 쌓는 한 장의 벽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작품 청탁을 받고 작품을 게재할 때 어떤 벽돌이 될까를 심사숙고하여 퇴고를 거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수필』 2월호를 읽고 몇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수필은 체험과 사실의 문학이지만 제재에 대한 상상과 해석이 예술적 가치를 부여한다. 일상과 체험에 대하여 작가 나름의 해석을 하고 의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체험과 사실만을 나열하는 것으로 그치면 미적 공감을 불러올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수필은 현실에 대한 인식과 그에 대한 형상도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다. 체험과 사실을 토대로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가장 인상적으로 형상화 되어야 독자에게 감동을 줄 것이다. 체험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은 문학의 범주에서 멀어질 우려가 있다,

셋째, 수필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는 구성이다. 문단구성은 소주제별로 뚜렷하게 해야 의미의 혼선을 가져오지 않는다. 만약에 한 편의 수필이 한 문단으로 이루어진다면 독자들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하나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하서 하나의 소주제만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단 구분 뿐 아니라 기본적인 어법을 잘 지키지 않은 글은 작품성을 반감시킬 수 있다.

넷째, 문인은 국어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 외국어가 국어처럼 쓰이고 해외문학의 번역 작품이 많이 읽히는 현대에는 국어도 영어나 일본어의 번역체 문장으로 잘못 쓰는 경우가 종종 있으므로 함께 조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수필』 2월호에는 수필문학사에 길이 남을 훌륭한 작품이 몇 작품 있었다. 한편 개인적인 체험에 그쳐 삶의 철학적 의미로 개념화하는데 미흡한 작품도 있었다. 다음호에 더 진한 감동을 주는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