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월평) 죽음, 아름다운 공명(共鳴)- 『한국수필』 7월호를 읽고-

느림보 이방주 2021. 6. 27. 23:06

죽음, 아름다운 공명(共鳴)

- 『한국수필』 7월호를 읽고-

 

이방주

 

포스트코로나시대 대중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TV 프로그램은 아마도 ‘M트롯’이었을 것이다. 대면 공연도 없는데 안방까지 스며들어 감염병에 찌든 사람들을 열광하게 했다. 수필도 이만큼 대중을 열광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그러나 수필이 트롯만큼 독자들의 가슴에 미적 울림을 전했는지 돌아보면 기가 죽는다. 우리 수필가들은 트롯 가수들만큼 수필 때문에 아파본 적이 있는지, 그들만큼 피나는 노력을 한 적이 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미스터트롯 가수 탑 세븐의 공연을 안방에서 보면서 수필의 예술성을 생각해 보았다. 가수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했다. 예를 들면 가수 P는 음악 이론 공부를 많이 했는지 이지적으로 흐름과 구성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이와 달리 가수 I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곡조와 노랫말을 변용하고 해석하여 부르는 노래로 들렸다. 두 사람이 다 같이 자신의 곡이 아니고 다른 가수의 곡을 받아 자신에 맞게 해석하여 부르는데 이지적인 음악과 감성적인 음악이 시청자에게 주는 울림은 달랐다. 듣는 사람에 따라 울림의 정도와 양상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음악은 논리보다 감성이 더 울림을 주는 예술인지 많은 사람들이 가수 I가 부르는 노래에 더 감동하는 것 같았다. 가수 I는 다른 가수의 곡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석하고 상상을 통하여 자신의 노래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필 창작 과정도 이와 같다고 본다. 체험을 해석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과정이 없으면 독자에게 울림을 줄 수 없다. 대상을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철학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체험의 재구성이 없으면 울림을 줄 수 없다. 수필 창작과정에서 소환되는 체험은 일단 과거의 기억이다. 과거의 기억을 ‘있는 그대로’ 소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있는 그대로의 체험은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형상이 필요하다. 여기에 수필적 상상이 필요하다. 수필적 상상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 사건을 개연성 있게 결구하여 사건을 창조하는 허구와 달리, 기억을 소환하여 선명하고 인상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체험을 재구성하고 가미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필은 대상이 되는 소재나 제재에 대한 해석이 수필적 상상의 과정을 통하여 예술적으로 형상화될 때 독자에게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 물론 체험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단순하게 마무리해 버리면 공감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리 아름다운 언어로 풀어내도 개인적인 이야기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체험의 해석이 인간의 삶을 개념화하고 개념화된 삶에 가치를 부여해야 작가의 상상이 독자의 가치관을 일깨우는 공명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수필 창작에서 이런 과정이 생략되거나 무시되면 개인의 푸념이나 넋두리로 전락하고 만다.

대부분의 수필 독자들은 수필 한 편을 읽고 작품을 통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는 관심이 없고, 서사(이야기)에만 관심을 두면서 이야기 내용에 대하여 공감하거나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서사를 뼈대로 삶의 철학과 정서를 전달하는 수필의 언어도 비유와 상징이 있고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이다. 수필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수필에 대한 무지 또는 오해이기도 하지만, 수필가들이 수필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야기 전개로 그치기 때문에 받는 뼈아픈 대가라고 생각한다. 한국수필 7월호를 읽으면서 이와 같은 느낌이 더욱 절실해졌다.

이번호에도 많은 작품이 수록되었다. 특집 1 [7월의 마음]에 12편, 특집 2 [대구수필문학회] 14편, 특집 3 [7월의 향기] 15편, 사색의 뜰에 16편으로 60편 가까운 작품이 실렸다. 그런데 이번 호는 죽음을 제재로 한 작품이 많은 것이 특징이었다. 또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불교적 화두를 중심으로 한 작품들이 보였다. 그래서 이번호 월평으로는 한국문학에서 죽음 제재가 어떻게 해석되고 수필에는 어떻게 수용되었는지 생각해보기로 한다. 죽음이라는 제재의 수용이 독자들에게 어떻게 울림을 주고 공명을 가져오는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일 것 같다.

 

인간은 태어나면 죽게 마련이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큰 사건은 탄생과 죽음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인생의 많은 사건은 대개 운명적으로 주어지기도 하고, 의지적 선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탄생은 운명적이지만 죽음은 운명적인 죽음 뿐 아니라 스스로 선택에 의한 죽음도 있다. 그래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9~1939)는 사람에게는 삶의 본능(Eros)과 함께 죽음의 본능(Thanatos)도 있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 자신의 정체성, 현재의 사랑, 삶의 조건을 유지하거나 제고(提高)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삶의 본능이다. 삶의 본능이 정체성의 유지로 나타나든, 사랑과 성애의 욕구로 나타나든 세계는 자아의 상승하는 욕구를 모두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아와 세계는 충돌하고 갈등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삶의 본능이 세계와 충돌하여 갈등이 극심해지면 사람은 자신의 유지를 포기하고 좌절하여 죽음을 택하게 된다. 태초의 탄생 이전의 원향(原鄕), 고통 없는 평화의 세계로 회귀하고 싶어 한다. 이것이 죽음의 본능 타나토스이다.

죽음의 가치는 삶의 방식으로 평가 받는다. 사람들은 때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영생(永生)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가치 있는 삶으로 부활한다는 의식이다. ‘나’가 죽은 그 자리에 삶이 비로소 가치 있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삶과 죽음의 모순된 두 사건이 지양(止揚)되어 하나로 완결되는 것이다. 이것을 죽음의 변증법이라고 하겠다. 죽음의 변증법적 미학은 우리 민족이 이루어낸 문학 작품에서 문학양식을 불문하고 찾아낼 수 있다. 삶이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면 죽음은 자연 법칙에 따른 일반 질서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의 삶을 경건하게도 하고, 사색과 상상의 영역을 깊고, 넓고, 한 차원 높게도 한다. 죽음은 삶의 바탕이며 삶의 모든 영역에 전제된다.

죽음을 제재로 한 작품으로 명향기의 <바람이 되어>를 공감하며 읽었다. 이명자의 <숨비소리>, 김옥매의 <사발꽃의 눈물>, 박필우의 <무용(無用)66>, 박향숙의 <별을 품다>, 이명환의 <재천 오빠>, 이문자의 <봄날이 간다>, 이미선의 <아버지의 여행>, 이재은의 <애도의 시간>, 유연선의 <나이를 먹다> 이삼헌의 <그 한 장의 사진>등이 눈에 뜨인다. 김태실의 <누렁이의 로맨스는 어디로 갔을까>는 개의 사랑과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서사로 울림을 주었다.

한국인은 죽음을 세속적이고 일상적 공간에서 성스럽고 초월적인 공간으로의 변증법적 통합을 이루는 사건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적이고 역설적인 상상으로 이루는 죽음에 대한 수용이다. 이런 측면에서 명향기의 <바람이 되어>가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어머니의 유골을 수장(水葬)하면서 느낀 감정을 술회했다. 좁은 관 속에서 서서히 삭아 바스라져가던 육신을 진작 너른 자연으로 보내드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가루가 된 재가 물줄기를 따라 너른 정원에 흙을 적셔 꽃도 피우고 나무도 자라게 하리라는 생각에는 새로운 세계로의 순환이라는 사고를 담고 있다.

 

가루가 된 재가 물에 녹으며 아래로 아래로 떠내려갔다. 물줄기를 따라 리조트로 내려오니 길고 큰 연못이 보였다. 그 연못에서 어머님의 숨결이 느껴졌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라고 한다. 이 물줄기가 너른 정원의 흙을 적셔 꽃도 피우고 나무도 자라게 하리라. 연못에서, 분수에서. 바람에 날리는 분수의 이슬방울에서, 어머님의 모습이 아롱거렸다. 분수의 물방울이 바람을 타고 날고 있었다. 날아가 구름도 되고 바다도 될 것이다. 어느 날은 비가 되어 나의 어깨를 적실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자연으로 돌아간 어머니와의 재회를 이렇게 꿈꾼다. 작가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넘어 ‘죽음을 일상에 끌어들여 시간과 공간을 몸으로 느끼면 영원을 연습’한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안타깝고 애틋한 감정이 일상적이고 세속적인 세계에서의 사고라면 ‘자연이 된 어머님의 숨결’을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느끼는 것은 일상이 초월적이고 신성한 세계로의 변증법적 변화를 이룬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작가와 작가 형제가 느끼는 어머니의 숨결은 모든 인간의 어머니인 ‘당신의 목소리’로 확장된다. 개인의 체험을 인간의 보편적 체험으로 개념화하여 전할 수 있는 수필문학만의 특성을 발휘하여 죽음 제재를 수용하였다.

 

이명자는 <숨비소리>에서 극한 상황에서도 삶을 연장하는 숨비소리의 의미를 전한다. 바다 밑을 드나드는 해녀의 고된 숨비소리처럼 시련은 삶의 필수과목이었음을 깨닫고 지난날의 고단함은 오늘을 살아내는 마중물이 되었다며 감사해 한다. 숨비소리로 지탱하는 절박한 삶의 소리처럼 지나온 삶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자양분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해녀들은 욕심을 버리고 자신의 능력에 맞게 숨을 조절하기 위해 산소통을 지고 바닷속을 누비지 않는다고 한다. 해산물의 보존도 배려하고 자신의 삶도 숨비소리로 지탱한다. 그들의 고된 삶 속에서도 자연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름답다. 인생길에는 수만 가지의 소리를 내며 살아간다. 기쁨, 아픔, 슬픔, 즐거움, 등등. 그러나 숨비소리만큼 절박한 삶의 소리는 없을 것이다. 쇠는 불 속에 넣어봐야 단단함을 알듯이 나의 지나온 삶 속에서도 숨비소리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양분이 되었으리라.

 

죽음의 암흑에서 헤어나는 절박한 소리이지만 해녀들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도 자연에 큰 욕심을 내지 않고 산소통을 버리고 숨비소리로 지탱한다고 한다. 현실에서 크게 얻으려 욕심내지 않는 죽음에 대한 도가적(道家的)인 달관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재은의 <애도의 시간>은 죽음을 순환적 섭리나 변증법적 재생으로 해석하지 않고 영원한 이별이라는 측면에서 ‘이별 의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서두에 ‘죽은 자의 세계는 우리와 얼마만큼 가까울까?’라며 의문을 제기하여 삶과 죽음의 거리감을 인식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사별의 슬픔에 대한 공포이다. 죽은 자에 대한 총체적 애도 속에 담긴 다양한 느낌과 교차하는 허무감을 떠올린다. 이 작품에서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은 이별을 49재라는 불교의식으로 법당에서 거행하면서도 의식을 대하는 가족들의 생각은 모두 다르다. 자식들 중 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작가 자신도 기독교인이다. 어머니는 토속 신앙을 가진 분이고 작가의 남편도 샤머니즘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다. 불교 신앙을 가진 이는 없으면서도 이들은 대웅전을 통합적 공간으로 삼아 49재로 이별 의식을 수렴한다.

 

이별은 이별의 순간이어야만 이별인 줄 안다. 결코,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떠나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작별의 인사말을 떠올리는 것이다. 대웅전의 엄숙한 마룻바닥 위에서 어색하게 앉아 환히 웃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보는 것. 그 눈 맞춤 속에서 우리는 아버지에게 잘 가시라고 손을 흔든다. ‘날 지켜준다고 했잖아’라며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원망 섞인 어머님의 그리움은 그 대웅전에 세 번 방문하는 동안 조금씩 가라앉았다. 어머님은 그 절을 떠날 때마다 그리움을 일곱 번에 나누어 한 개씩 절에 두고 오는 듯하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님은 다소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작가는 ‘이별이 긴 게 아니라 만났던 나날을 소환하는 것, 남은 자들을 위한 마음의 위로, 떠난 자에 대한 마음의 정리’를 할 작별의 시간을 충분히 누려야 비로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며 애도의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렸다.

시아버지의 죽음 의식을 지내며 느끼는 애도의 시간을 덤덤하게 표현했지만 수많은 감정을 담았다. 이미 예견된 죽음이라 하더라도 떠나보내고 남은 자는 이기적인 작별을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충분히 마음으로 애도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이 안타깝다. 장례 절차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와서도 아직 마음의 이별을 하지 못한다.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시아버지와의 사별에 대한 깊이 있는 감정을 가감 없이 담담하게 고백하는 방법으로 더 큰 슬픔과 허무감을 표현하였다. 깊은 울림으로 공명을 가져 오는 작품이다.

 

이삼헌의 <그 한 장의 사진>은 유방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처제를 봉안묘에서 이별하고 내려오면서 갖가지 죽음에 대한 상념에 사로잡힌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은 사자의 생전의 삶으로 평가된다. 또한 죽음 이후 장례 절차를 보면서 사후에서조차 서열화 되는 것 같은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쿠웨이트 국왕의 간소한 무덤, 무소유의 상징인 법정의 사리 채취조차도 없었던 다비의식, 진시황제의 삶에 대한 인간의 집착, 우리나라 C모 장군의 소박한 장례를 대조한다. 결국 인간의 삶과 죽음은 윤회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최소공약수를 찾아낸다.

 

불교에서 보면 생로병사는 윤회의 한 과정일 뿐이다. 이승에 와서 잠시 육신을 빌려 머물다가 한 줌 흙이 되어 다시 윤회의 길을 떠난다. 끝없이 반복되는 윤회의 과정에는 태어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러다가 불교의 팔만대장경을 한 글자로 압축했다는 공空사상을 꿰뚫게 되면 비로소 열반에 들어 해탈의 경지에 든다. 법정 스님은 아마도 그 경지에 이르렀을 것이다.

 

이슬람교는 죽음이란 흙에서 나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과정이라고 한다. 불가에서는 생로병사의 단순한 과정으로 본다. 진시황제가 원한 것처럼 영생불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권력과 사치 영예와 부(富)도 모두 사후에는 평분(平墳)에 눕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세계의 서로 다른 죽음에 대한 인식을 제시하고 결국은 공(空)으로 돌아간다는 원형적 개념으로 마무리하여 울림을 준다.

 

이밖에 죽음 제재를 의미 있게 수용한 몇 작품이 보인다. 서금복은 <즐겼다>에서 MRI 찍는 두려움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자기공명영상법이라고 하는 이 촬영은 자력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장을 이용하여 생체를 촬영하기에 관처럼 기다란 통에 들어가 기분 나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촬영해본 사람은 공감하겠지만 크게 보면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김옥매의 <사발꽃의 눈물>은 어머니의 삶에 대한 눈물의 고백을 표현하였다. 어머니의 고단했던 삶을 사발꽃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죽음 앞에 미처 고백하지 못하고 떠나보낸 어머니. 가녀린 꽃대 위에 핀 불두화에 어린 빗물처럼 자신도 어머니를 휘청이게 했던 빗물이었음을 고백한다. 잠시 기댈 수 있는 담장이 필요했던 어머니에게 도리어 비가 되어 무게를 더했다며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그렸다.

죽음에 관한 화두는 독자의 관심이 많다. 따라서 깊은 철학적 사유가 따르게 마련이다. 수필을 쓰면서 제재로 삼은 죽음에 대한 체험은 단순한 이야기의 서술로 마감하는 경우가 많다. 죽음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확장하여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가치관과 정서에 호소해야 공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듯이 미적 공명이 없으면 그 본질적 가치를 상실하게 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수필은 체험의 문학이다. 그러나 체험을 그대로 진술하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체험의 기록에 머무르게 된다. 체험을 철학적으로 해석하고 문학적으로 상상하여 형상화함으로써 독자들을 공명의 세계로 불러들여야 할 것이다.

한국수필 7월호는 많은 작품들이 해석과 상상이라는 수필의 기본 요건을 놓쳐 체험의 기록, 살아가는 단순한 이야기라는 오해를 받을 것 같아 안타까웠다. 다음호에는 해석과 상상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