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관계’의 해석으로 영혼을 치유하는 철학적 속삭임

느림보 이방주 2020. 12. 24. 17:05

<한국수필  2021년 1월호 월평>

‘관계’의 해석으로 영혼을 치유하는 철학적 속삭임

- 『한국수필』 1월호를 읽고 -

 

이방주

 

수필가는 창작에 앞서 수필문학의 개념을 분명히 규정하여야 한다. 수필의 범위를 정하고 타문학 양식과 다른 특성을 알고 수필을 써야 ‘넋두리’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다. 허구적 양식인 시나 소설과는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야 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언어나 구성도 달라야 한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와 수필은 태생부터 다르다. 시가 태초에 인류가 신에게 드리는 소망의 말씀으로 시작되었다면, 수필은 현대를 사는 철학적 인간이 이웃에게 들려주는 치유의 속삭임이다. 그래서 시는 일방적이고 수필은 쌍방 간에 소통하는 목소리여야 한다. 시인은 평범한 인간의 소망을 신에게 대신 기도하는 사제司祭라 한다면 수필가는 이웃과 아픔을 나누는 곡비哭婢와 같다.

수필을 신변잡기라고 정의하면 대부분 수필가들은 ‘잡기雜記’란 말에 거부감을 갖는다. 그러나 ‘수필은 신변과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사실 이 두 말은 거의 같은 의미라 생각한다. 잡초가 모여 이루어진 초원이 아름다운 것처럼 신변의 일상을 모아 이루어낸 잡기도 초원과 같은 아우라가 존재하기에 신변잡기라는 말에 섭섭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느 원로 평론가는 좋은 수필을 쓰려면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찾아 일상을 떠나야 잡기를 면한다고 말해서 잡기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드러냈다. 그러나 김열규 교수는 신변잡기란 잡동사니가 아니라 ‘우리 몸 둘레의 곱고 아리따운 글 모음’이라 하여 일상과 잡기를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주제를 먼저 정하고 그에 맞는 소재를 찾아 새로운 체험을 기획하면 그것은 허구적 경험을 탐색하는 것이다. 소설가가 작품을 구상하고 현지를 답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소설은 허구적 체험이 보배이지만 수필의 허구적 체험은 속임수다. 수필은 기억을 소환하여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진실한 체험이 깊은 공명을 준다. 아니면 소재를 대하는 순간 바로 해석에 들어가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수필 쓰기의 자세이다. 그 만큼 일상과 신변은 수필의 바탕이 된다.

문학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아가는 예술이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가상의 세계이든 체험의 기억이든 그것은 문학적 현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객이 비극을 관람하면서 배우의 정서를 대신 경험하여 심적 카타르시스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학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말한 것이다. 복잡하게 분화된 현대사회에서 문학의 카타르시스 효과는 치유의 기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이전 2020년을 준비할 때 수필은 이미 치유를 중요한 과제로 삼기 시작했다. 일례를 들어 2020년 한국수필문학상 수상작인 김애양 수필가의 『고통의 자가 발전소』 는 수필이 철학적 인간의 치유의 속삭임이라는 말을 확인해 주었다.

2021년을 여는 『한국수필』 1월호를 읽고 수필의 창작과 감상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학테라피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더 깊게 하게 되었다. 많은 작품들은 ‘관계關係’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치유 효과를 담아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것은 2020년대 한국 수필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계 양상을 원형적으로 궁구하고 상상함으로써 치유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작품을 읽으면서 가슴 뛰도록 기쁜 마음이었다.

관계란 말에서 ‘관關’은 처음에는 대문의 빗장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러다가 요새를 의미하는 말로 바뀌었다. 조령 삼관문의 주흘관主屹關, 조곡관鳥谷關, 조령관鳥領關은 영남과 호서를 이어주는 관문이란 뜻이다. 이와 같이 관關은 대문의 빗장에서 요새로 바뀌었다가 다시 관과 관을 이어준다는 의미로 ‘관계’라는 말이 생겨났다. 관계는 인간관계로부터 인간과 역사와의 관계,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 등으로 서로를 이어줌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수필은 주로 인간관계를 제재로 삼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는 그 종류도 많고 양상도 다양하다. 가족관계, 동료관계, 학연관계, 또 수필가와 상관물과의 관계도 들 수 있다. 그 양상도 수직, 수평, 상하관계 등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수필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원형적 의미를 천착하여 문제를 일반화시킴으로써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다.

관계와 치유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한국수필』 1월호에 게재된 작품을 살펴보니 뚜렷하게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이 있었다. 유영란의 「미끼」, 김자인의 「덤」, 김종란의 「사람을 찾습니다」, 김서현의 「받아 읽기」, 김미정의 「그 남자의 기억」, 등이 삶의 여정에서의 남과의 관계를 제재로 형상화한 작품들이다. 치유를 중심화제로 다룬 작품도 보였는데 권유경의 「웅녀 신화」, 김윤희의 「고향의 까치밥」, 박미정의 「난로가 있는 풍경」, 김용순의 「사리암에 오르며」, 정성영의 「아주 특별한 여행」을 들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 중에서도 관계의 본질을 추구하여 원형성을 밝혀냄으로써 치유를 가져오는 작품도 있었다. 이승애의 「구석의 시간」은 관계에 대한 본질 추구 과정에서 수필적 상상이 단계적으로 매우 깊이 있게 이루어져 결국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작품으로 보였다.

 

김자인의 「덤」은 물질적으로 얻을 수 있는 ‘덤’을 영혼에 영양을 주는 ‘덤’으로 승화시키는 수필적 상상의 깊이로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단골이라면 으레 얻게 되는 덤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즉 병원이나 마트, 미용실 등 자주 드나드는 단골에서 전해주는 편안함과 인정, 인심이 진정한 덤이라고 해석하여 공감을 주었다. 작가의 덤에 대한 신선한 해석은 독자가 작품에서 얻는 또 하나의 덤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이해한 덤은 결국 혼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골집 주인과 고객 사이의 좋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결미에서 이렇게 돌아본다.

 

단골 가게는 믿음, 편안함, 든든함이 덤이다. 늘 정해놓고 드나들다 보면 서로 믿고 의지하게 된다. 진심이 전해져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된다면 단골은 서로에게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병원의 의사나 슈퍼 주인에게 따뜻한 마음을 받으려고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고객이라는 입장에서 친절하기만 바라던 것은 아닌지, 떠나고 난 후에야 그 인정이 덤이었던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수필이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라면 이 글은 일상의 인간관계에서 물질적 덤보다 소중한 것은 관계에서 주고받는 정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때가 되어 밥을 먹지 못하면 허기가 진다. 그 허기는 음식물을 먹으면 채워지지만, 사람 마음속의 허기는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라고 독자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독자 스스로 상상을 통하여 그것은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정이라는 것을 깨닫도록 촉구한다. 수필이 교훈성을 지녀야 한다고 해서 직접 가르치려 하면 문학성을 잃어버리고 교술에 머무르게 된다. 이 작품에서처럼 깨달음의 실마리는 넌지시 일러줘야 더 큰 공감을 얻게 된다.

 

관계를 통하여 상생의 이치를 깨우치는 작품으로 유영란의 「미끼」가 있다. 이 작품도 김자인의 「덤」과 같이 한국수필 14선에 선정되어 다시 게재된 작품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와 첫 관계를 맺는 것은 부모님이다. 그러나 가장 오랫동안 가장 가까이 맺어지는 관계는 부부 사이라고 말하고 싶다. 「미끼」는 남편이 던진 미끼에 걸려 결혼한 후 지금은 가족의 안온을 위해 작가 자신도 남편에게 미끼를 던진다. 물론 그것은 사랑의 미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속아주는 것이고 그것이 생활을 원활하게 하는 예의이며 지혜로 알고 살아간다. 사랑의 손짓을 미끼로 이해하는 신선한 해석이 좋았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 속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몰라서 속을 수 있고, 가끔은 알면서도 속아주는 아량을 가져야 할 것 같다. 돈 벌기 힘들다는 남편의 넋두리에 당신 없으면 우린 다 굶어 죽는다는 속임수가 힘내라는 응원의 소리라는 것을 남편은 안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하는 것 역시 내 지갑을 부풀리고 가정을 훈훈하게 하는 미끼이다.

 

미끼는 부부간의 상생의 지혜이다. ‘미끼’가 다소 부정적인 느낌을 주는 어휘이지만, 이 글에서는 사랑하는 부부 사이의 귀여운 은어처럼 사용되어 오히려 효과를 거두고 있다. 부부 사이에서 관계에 대한 신선한 해석과 아울러 사용한 어휘, 매끄러운 문체까지 통일성과 긴밀성을 유지하여 유쾌한 울림을 준 작품이다.

 

좋은 관계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갈등과 삶의 문제가 진단이라면 좋은 관계는 치유하는 처방이 된다는 말이다.

김윤희의 「고향의 까치밥」은 관계를 통하여 치유를 얻어내는 삶의 지혜를 작품화했다. 고향마을 한글 글방에서 글공부하는 할머니들은 어쩌다 들르는 길손 같은 자식들을 위해 찬 서리를 이고, 나무 꼭대기에 매달려 날짐승들에게 자신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까치밥과 같다고 했다. 그들의 허기진 삶을, 평생 마음속에 쟁여놓았던 한을 실타래 풀 듯 풀어 『고향의 까치밥』이라는 글집을 만들었다. 그 글집에 대하여 이렇게 풀어내었다.

 

한겨울 감나무의 까치밥으로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들, 여든을 넘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글씨를 쓰고, 평생 마음속에 쟁여 놓았던 한을 타래실 풀 듯 타래타래 풀어놓았습니다. 글집에 녹아 있는 삶을 들여다보면 그 자체가 허기진 생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까치밥이 되어 세상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 땅의 어머니, 할머니의 삶을 까치밥이라는 상관물에 빗대어 공감을 준다. 이와 같이 상관물에 빗대어 주제를 강화하는 기법은 수필의 문학성을 한 단계 상향시키는 효과를 준다. 까치밥과 어머니들 그리고 글집의 원형성을 궁구함으로써 상관성을 찾아내어 주제로 담아내는 솜씨가 남다르다. 이 작품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는 ‘가슴이 뭉클해’오는 치유를 받고 독자는 공감과 미적 울림을 통하여 치유를 받는다. ‘까치밥’이 된 고향의 어머니들도 이 글을 읽으면 모든 고난이 행복으로 승화될 것이다.

 

상관물의 원형성을 천착하여 관계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치유를 얻는 작품으로 이승애의 「구석의 시간」을 발견한 것은 『한국수필』 독자의 행운이다. 이 작품은 그만큼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작가의 아픔은 암투병중인 오빠와 경증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돌보면서 삶이 구석에 몰린 상황이라는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구석’은 대체로 공간적인 의미를 지니는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공간과 시간의 의미를 함께 지닌다. 작가는 자신을 위한 시간보다 타인을 위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자신과 투병중인 오빠와의 관계, 자신과 노모와의 관계를 구석이라는 시간적 공간적 의미를 전제로 하여 생각에 잠긴다. 작가의 사색은 체험한 사실보다 구석의 원형성을 찾아내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구석의 단순한 의미는 책장과 소파 사이의 물리적 공간이었지만 여기서 자신의 삶의 구석을 생각하게 되고 가족이 구석의 삶을 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구석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물론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신의 섭리는 참으로 묘했다. 원할 땐 주시지 않더니 불현듯 허락해준 구석은 아늑함보다는 가시방석이었다. 은밀한 공간의 즐거움은 허황한 꿈이었다. 격리되고 단절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매달려 있던 끈들이 뚝뚝 끊어져 나갔다. 우리의 구석은 평온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그저 밀봉된 책장처럼 묵묵히 견딜 수밖에 없는 자리일 뿐이었다. 불안감이 먼지처럼 쌓여가고 듣지 않아도 될 말들이 몰려들어와 자리를 어지럽혔다.

 

구석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역동적 상상에 의하여 긍정적인 인식으로 변용된다. 즉 구석의 삶이라는 부정적 상황을 ‘품어주고’ ‘눈물을 닦아주고’ ‘신이 마련해 준 타협의 장소’ ‘꿋꿋하게 정진하는’ ‘두려움을 희석해 주는’ ‘회초리로 가르치는’ 신의 영역으로 승화하여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구석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쉼의 자리요, 정화의 자리가 되기도 하고,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 자리, 잃어버린 희망을 찾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나에게도 이 구석의 시간은 이 모든 것을 아우른다. 구석에 있으면 경쟁할 필요도, 남을 시기하거나 질투할 이유도 없다. 이곳은 남의 모습보다 내 모습을 더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이 은밀한 자리에서 마음에 군불을 지피며 오순도순 살고 있다.

 

암울한 현실에 처한 자신의 자리가 모두에게서 밀려난 구석이지만 구석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상처받은 마음의 치유의 자리, 잃어버린 희망을 찾는 자리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러한 작가의 변증법적 사고 과정은 ‘구석’의 곡절을 궁구하는 치곡致曲의 과정을 통하여 작가만이 찾아내는 견색見賾에 이른 것이다. 구석의 원형적 본질과 삶의 원형적 본질을 찾아 그 상관성을 발견함으로써 얻어내는 치유의 효과이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작가의 씩씩한 긍정의 내면이 독자로 하여금 마음을 따뜻하게 하고 구석이란 의미를 재조명한 점을 높이 살만하다. 이 작품은 관계의 원형적 해석으로 영혼의 치유를 이루는 철학적 속삭임이라 할 수 있다. 수필문학의 특성을 이해하고 격을 높인 작품이라 하겠다.

 

이밖에 이순금의 「서리」는 아픔을 치유하는 수작이나 지난호의 월평에 언급되어 생략한다. 김종란의 「사람을 찾습니다」는 작가의 솔직한 내면을 남편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한 점이 흥미로웠고, 김서현의 「받아 읽기」는 미운 사람에 대하여 그의 마음을 받아 읽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면서 관계의 속성을 드러내었다. 김미정의 「그 남자의 기억」은 산책길에서 만난 정체 모를 남자에 대한 연민을 통해 소외된 이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가슴 따뜻한 글이었다.

삶의 아픔은 관계에 대한 의미를 재고함으로써 치유에 이르게 된다, 권유경의 「웅녀신화」는 웅녀신화에서 웅녀가 수행修行을 했던 굴처럼 가슴 속에 굴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은 코로나19에 대한 일반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마스크 안에서 내뱉는 말의 순화를 불러내었다. 김용순의 「사리암을 오르며」는 사리암 1008 계단을 오르며 흘린 고행의 땀으로 우울했던 심신을 희열로 바꾸는 치유를 맛본다. 믿음에 별 관심이 없던 작가는 1008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토로한 점이 독특했다.

 

2021년 새로운 시대 한국수필의 지향점은 아무래도 관계와 치유가 아닌가 한다. 관계는 인간관계 이외에도 사회와의 관계, 역사와의 관계 등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관계의 양상도 참으로 다양하다. 1월호 게재된 작품에서 ‘관계’와 ‘치유’의 수용은 관계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치유가 가능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관계’와 ‘치유’라는 화두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읽다보니 좋은 작품을 다 언급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다. 전체적으로 미적 울림을 주는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다. 그러나 몇 작품은 일상과 신변의 소재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지 못한 글도 있었다. 수필이 일상의 진술에 머무르면 넋두리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고 독자를 지나치게 가르치려 하면 교술敎述이라는 벽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관계의 원형적 해석이 영혼의 치유를 이룬다면 그것은 곧 상생相生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포스트코로나시대, 관계와 치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생태주의와 상생을 고민하는 작품이 기대된다. 다음 호에 더욱 좋은 작품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