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수필적 상상과 존재의 정립挺立 강현자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

느림보 이방주 2021. 5. 17. 21:12

<발문>

수필적 상상과 존재의 정립挺立

- 강현자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 -

 

이방주

1. 들어가기

 

수필을 체험의 문학이라고 말하면 고맙고, 사실의 기록이라고 말하면 섭섭하다. 솔직히 말해서 수필가는 ‘문학’이란 말에 감사하고 ‘기록’으로 폄훼될까 두렵다. 그러나 수필이란 문학 양식에 수용되는 기억은 재생되는 순간 있는 그대로의 순수한 사실이라 하기 어렵다. 수필가라는 문인의 상상력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재생하는 데는 체험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개입되기 마련이다. 작가는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체험을 보다 의미 있고 인상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이다. 뿐만 아니라 정감과 분위기를 위해서 상상적 환경을 가미하기도 한다. 주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러한 상상과 재구성은 수필의 문학적 미감을 확대하는데 기여한다고 본다. 이러한 수필쓰기의 기법을 ‘수필적 상상’이라 할 수 있다. 수필은 사실의 문학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수필적 상상이 없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니라 기록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수필이 굳이 문학성이라는 구속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적 울림이 없이 독자의 감동을 불러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강현자 수필가의 첫 수필집 《나비가 머무는 이유》는 수필적 상상에 의해 체험의 기억을 해석하고 존재를 정립挺立해가는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은 기억을 토대로 오늘의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배어나서 읽는 사람의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는 어려운 시절 청주에서 태어나 청주중앙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 그러나 삶의 자갈길에 부는 돌개바람은 그를 문학의 세계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삶은 누구에게나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닌가 보다. 그의 앞에는 ‘돌너덜길만 기다리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삶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는 서문에 해당하는 작가의 말에서 ‘모과향은 갈라진 틈에서 더 진하고, 나비도 상처 난 꽃잎에 더 많이 모이듯이 사람도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나서야 향기를 품는다.’라고 말한다. 삶의 어려움을 문학의 원동력으로 승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는 기어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불같은 열정’을 ‘바위틈에 피는 꽃’으로 피워내었다. 어린 시절 꾸었던 문학을 향한 꿈을 2019년 월간 『한국수필』의 배를 타고 고통의 강을 건너 문단의 언덕에 오름으로써 이루게 된다. 그가 존재하는 공간은 바위틈이고 걸어가는 길은 돌너덜길이었지만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향기 높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었다.

작가는 ‘괭이밥풀의 씨오쟁이를 터뜨리듯’ 내면의 모든 것을 쏟아낸다고 했다. 이 말은 수필 창작에서 자기 성찰과 고백의 중요성을 토로한 말이다. 강현자는 등단하기 전에 경향의 백일장에 참여하여 많은 수상을 하였고, 2018년에 동서문학상을 받았으며, 2019년에는 직지백일장에서 우수한 작품으로 입상하여 이미 그가 문학의 길에 들어서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등단과 동시에 지방 일간지, 전국 우수 수필전문 문예지에 투고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런 그는 수필을 향한 열정으로 등단 1년 만에 작품집을 낼 만큼 잠재되어 있던 불같은 열정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강현자의 수필집 《나비가 머무는 이유》에는 44편의 작품을 주제나 체험의 양상을 기준으로 5부로 나누어 실었다. 1부 ‘나를 보내며’에는 유년시절부터 현재까지 성장 과정의 굴곡을, 2부 ‘봉달희’에는 존재의 모습과 깨달음을, 3부 ‘괜찮아’에는 관계를 통한 존재의 이유를, 4부 ‘잠시만요’에는 삶의 문화 속에 존재 방법의 고민을, 5부 ‘자줏빛 억새꽃’에는 상생과 생태주의 시각으로 보는 미래의 삶과 존재 의미를 담아냈다. 표제 ‘나비가 머무는 이유’에서 ‘나비’가 존재의 실체라면 머무는 곳은 존재하는 세계이며, ‘이유’는 존재의 의미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석은 작가의 생활철학을 바탕으로 한다면 표제작인 <나비가 머무는 이유>에서 ‘여름 한나절 괄괄한 땡볕의 등살과 작달비에 숱한 고난을 겪느라 생채기투성이인 백일홍에 나비가 모이는 이유’라며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가치를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작가의 체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그의 존재가 해석되는 과정과 의미를 짚어보고자 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오는 깨달음과 성장과정의 아름다움을, 관계를 통한 존재의 방법, 일상적 삶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생태주의 사고와 상생의 문화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수필적 상상을 통한 형상화 과정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독자들에게 작품을 이해하는 징검다리가 되리라 믿는다.

 

2. 깨달음과 성장의 미학

 

성장은 호기심과 도전으로 이룰 수 있다. 호기심도 없이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강현자는 유년 시절부터 호기심 많은 소녀였으며 주어진 삶의 세계에 끊임없이 도전하여 ‘끝내 꽃을 피우고’야 마는 삶을 살았다.

호기심은 도전을 유발한다. 호기심은 선천적으로 무엇이든 알고 싶어 하는 행동의 원인이 되는 감정이다. 인간은 호기심에 의해 어려움에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를 갖게 되고 그 도전에 의해서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깨달음을 얻으며 성장한다. 개인의 성장은 인류문화의 성장으로 확장된다.

강현자는 <막내의 반란>에서 호기심과 도전이라는 기억을 소환하여 작품에 수용한다. ‘땀을 뻘뻘 흘리고 악다구니를 해가며 불을 끄고’ 쾌재를 부르는 사촌오빠를 보면서 ‘덩달아 신이’ 나고, ‘악마가 죽고 난 검은 자리는 우리의 영역이 되었음을 무언으로 인정하며 승리의 쾌감’을 함께 느낀 것이다. 내심으로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도 생겼을 것이다. 그 쾌감의 요인이 된 호기심과 ‘불같은 열정이 가슴 밑바닥에 꿈틀거렸다’고 술회한다. 기어이 불장난을 시도한다. 언니오빠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년의 도전은 어이없는 패배로 끝나고 만다.

 

화마가 훑고 간 그 자리에 언젠가는 새 살이 돋아날 것이다. 어린 시절 나의 엉뚱한 반란으로 어른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키며 나의 삶을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디뎠다. 지금도 새로운 반란을 준비 중이다. 불이 쇠를 녹여 문명을 만들고 흙이 불을 만나 예술을 탄생시키듯 이제 화마가 아닌 화신으로 나의 미래를 꿈꾸어 본다.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어왔던 문학을 향한 꿈에 새로운 도전의 성냥불을 긋는다.

<막내의 반란>에서

 

예상되는 결과에 미리 두려움을 느끼면 호기심에 도전할 수 없다. 도전하지 못하는 삶은 존재 의미도 없고 그 존재를 드러낼 수도 없다. 작가는 유년의 기억을 회상하며 ‘크고 작은 반란을 일으키며’ 문학을 향한 꿈에 도전한다. ‘오르고 나면 도전하지 않은 것이 부끄’럽던 그의 존재의 싹이 이미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이러한 의문은 도전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고민일 것이다. 작가의 유년시절 어머니는 ‘바위틈에 피는 꽃이라며 촉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시’곤 했다. 작가는 ‘바위틈’이란 고난은 생각하지 못하고 ‘심산유곡에서 고고하게 핀 꽃’이라는 존재의 모습에만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는 ‘무지개를 올라타기만 하면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러나 ‘생의 한가운데 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를 찾는데 엄청난 희생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나는 홀로 섰다’고 토로한다. 존재를 확인하는 깨달음을 얻는데 그만큼 아픔이 따른 것이다.

1부 ‘나를 보내며’에 실린 여덟 편의 작품은 유년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존재를 확인해가는 과정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수록하였다. <비광>에서 작은엄마의 삶으로부터 나를 찾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뒤로 가는 여행>에서 ‘한 뿌리 나무에서 제각각 여러 갈래의 나뭇가지로 살아온’ 형제들과 함께 형제 관계, 부모의 사랑, 다락방의 추억을 통하여 비 오는 날 ‘운동장에 피어난 수많은 물꽃’ 같은 외로움을 겪고 ‘행복은 불편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비 내리는 농다리에서>는 자신에게 엄마의 존재에 대한 섭섭함이 배어 있다. 엄마의 정은 늘 ‘손에 닿을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섭섭해 하고 원망하지만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을 되돌아보게 된다. 부모의 사랑은 늘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모 사랑은 섭섭한 것임을 이 작품이 일러준다.

존재에 대한 객관적 깨달음은 <나를 보내며>에서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신부전증을 앓고 있는 언니에게 콩팥을 주기로 결정하기까지의 피할 수 없는 내적 갈등이 배어난다. 수술 받으러 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공간 이동에 따른 심경의 변화를 교차구성으로 형상화하였다.

 

육신이란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니 원래부터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탈무드에서는 한 개의 촛불로서 많은 촛불에 불을 붙여도 처음 촛불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 나는 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 내 몸의 일부가 저 작은 몸속으로 들어가 언니를 꼿꼿하게 일으켜 세울 수 있다니……. 내일이면 나는 또 하나의 내가 되어 언니의 몸과 마음을 지켜낼 것이다.

<나를 보내며>에서

 

마음의 평정은 ‘나는 내 것을 잃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 것을 돌려주는 것이다.’라는 존재의 확인이 찾아준다. 이런 사고는 ‘동기간同氣間’이라는 동양적 사고에서 근원한다고 본다. 동기란 글자 그대로 하나의 기운〔氣〕을 함께 지니고 태어난 사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기氣를 공유하기 때문에 형제는 한 몸이다. ‘두려움의 벽을 넘어서’ ‘마음이 홀가분해’져 병실 문을 열게 되었을 것이다. 유아적 불장난이라는 도전은 성인이 되어 형제간의 사랑을 위한 자기희생에 도전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쉰아홉 그리고 예순>에서 예순에 자전거를 배우며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아 새로운 갑을 향하는’노정을 깨닫는다. ‘내리막’이라는 새로운 갑은 ‘겸손’이라는 삶의 지혜를 다짐하게 된다. 오름의 성장에서 내려오기를 결의하는 것은 변증법적으로 무르익어 발효된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다짐한 것이다. 내리막은 곧 인생의 완성을 향한 오르막이라는 의미 깊은 울림을 준다.

존재를 확인하는 작품으로 <봉달희>와 <봉달희에게>를 들 수 있다. <봉달희>는 일회용 커피를 화자로 하여 작가와의 상관성을 밝혀 존재를 돌아보는 작품이다. 화자를 바꾸어 해학적인 어조로 조곤조곤 속삭이는 언어에 담긴 삶의 철학에 공감한다. <봉달희에게>는 작가 자신을 화자로 하여 ‘봉달희’와 관계 변화에 대해 성찰하는 과정이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와 인식도 변할 수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존재에 대한 자기 인식은 관계의 해석에 따른 의미도 있음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울림>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사춘기를 맞은 제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존재하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아이들은 만 가지 소리를 낼 수 있는 울림통’으로 인식하면서 ‘내가 불어주는 입김’이 바람이 되어 아이들의 울림통에 미치는 영향으로 빗대어 자아의 정체성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대금 소리는 입김의 미세한 세기로 우주의 기운을 모아 담은 듯 사람들에게 갖가지 울림을 준다. 바람을 세게 넣는다 해서 소리가 더 아름다운 것도 아니요, 입김을 약하게 넣는다 해서 소리가 작은 것이 아니다. 입김을 어떻게 불어 넣느냐에 따라 저마다의 소리로 사람의 감성을 사로잡는 것이다. 그 소리가 각양각색이듯이 아이들도 마음의 울림통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울림>에서

 

작가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훈훈한 바람’이 울림통을 거쳐 아름다운 소리가 나고 그 울림통에 따라 다른 이에게 또 다른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모습에서 관계의 해석과 존재의 방향을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현재의 나를 있게 한 인연을 표현한 작품으로 <부모산에 올라보니>를 들 수 있다. 부모산에 올라 삼십 년 만에 돌아온 고향에서 이방인처럼 살아온 지난날을 털어버린다. 부모산을 비롯한 고향의 모든 자연이 인因이 되고 현재의 삶이 연緣이 되어 진정 따뜻한 품으로 자기 존재의 근원을 자각한다. 부모산이 진정 부모라는 근원 말이다.

인생길에서 이와 같은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성장 과정을 하나의 사건에 담아낸 작품이 있다. 바로 <귀가>이다.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는 중에 스마트 폰을 잃어버리는 ‘사건’을 체험으로 한 글이다. 1, 2, 3으로 나뉜 중편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글에서 숨 막힐 정도의 긴장감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오리무중에서 자신의 존재로 돌아와 ‘청량한 바람이 짙은 안개를 거두어’가고 상대와 자신과의 존재를 확인하고 안도하게 된다. 그리고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첨단 기기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따뜻함’이란 깨달음을 얻는다. 결국 인간은 나비가 앉아 머물러야 하는 꽃에 대한 확고한 존재 인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삶의 체험을 그의 말대로 ‘씨오쟁이 터뜨리듯’ 고백하여 독자에게 미적 감동을 준다.

우리네 삶은 변화의 가능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다. 변화는 그냥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하게 하는 요인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 요인의 중심에 ‘관계’가 있다. 상대와의 관계, 환경과의 관계 등 많은 관계에 의해서 삶의 양상은 변화한다. 이러한 관계와 존재의 변화를 <깔딱고개>에서 본다. 작가는 집 가까이 목령산을 오르며 가파르게 경사진 ‘깔딱고개’ 아래에서 발길을 돌린다. 그러나 ‘생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 원인을 ‘자극이 없는 삶은 나를 점점 나태하게 만든다.’고 분석한다. 그리고는 지금의 편안함보다 새로운 도전을 선택한다. 작가는 깔딱고개와 관계에서 가파른 길에 도전하는 변화를 추구한다. 그리고는 결국 ‘40분 어치의 습관’에 의해 변화된 자신의 모습에 놀란다. 관계의 인식은 <출렁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상대는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인데 내가 마음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진 채 걸어온 것은 아니었을까. 믿음은 남이 내게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믿어야 한다는 것을 예전엔 알지 못했다. 다리의 난간을 흔든 것은 남이 아닌 바로 나였다는 것을 진작에 깨달았다면 그동안 걸어온 인생길이 좀 더 순탄하지 않았을까. 내가 제아무리 동동거린대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캐필라노 출렁다리는 흔들리지 않고 내 마음만 흔들렸던 것처럼.

<출렁다리는 흔들리지 않았다>에서

 

도道는 상대와의 관계에 의해서 변화되고 달리 인식되는 것이다. 또한 도가 변하지 않아도 내가 변하면 그것은 변화된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이다. 상대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수필에 수용되는 체험은 작가와의 관계의 해석에 따라 변화한다. 대상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고 상상하느냐에 따라 무명에서 삶의 철학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3. 관계 인식을 통하여 터득하는 존재의 방법

 

존재의 공간은 세계와의 관계에 의해서 ‘우연은 새로운 인연을 만들’듯이 정해지기도 한다. 새로운 인연은 소통을 통하여 관계를 짓게 마련이다. 단절된 세계와의 관계의 벽을 허물지 못하고 ‘자신만이 물에 뜬 기름’이 된 삶을 <대문 줌 열어 봐유>, <이층집 여자>에서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벽이 있기에 소통은 어렵다. 벽은 성벽일 수도 있고 비무장지대일 수도 있지만 가장 무서운 벽은 마음의 벽이다. 사실 마음의 벽이 성벽도 쌓고 울타리도 치게 마련이다. 마음의 벽이든 성벽이든 원하는 이들은 관계로 소통을 이룰 수 있다. ‘관關’은 닫힌 문이지만 열림을 전제로 한다. 문이 열리면 바로 ‘계係’로 이어진다. 관계는 둘 사이에 연결되고 사회와 연결되어 나아가 사람들과 정서적이고 문화적으로 연결되는 개인이 사회화하는 삶의 방식이다. 위 두 작품에서 소통을 가로막는 벽은 대문으로 형상화되었다. 같은 체험을 화자를 달리하여 바깥과 안의 시선으로 형상화한 글은 소통하지 못한 아쉬움의 표현이다. 관계의 소중함을 이렇게 토로한다.

 

호냐는 지 아무리 잘났어두 말짱 헛일인거 몰러유? 그라니께 남으집 대문을 지집 드나들 듯 허능규. 새닥이 그걸 몰랐등규. 동네 사램덜언 새 식구가 와서 워티기 잘 해 나가나, 뭐래두 도와줄 기 읎나 싶어 자꾸 디다봉긴디 이층집언 그게 싫었등게뷰. 관심을 간셉이라구 생각한 모냥여유. 인저와서 말인디유 새닥네가 오해나 풀었으믄 좋겄어유. 그니두 우덜이랑 친해보구 싶었겄지 시상에 이웃지간에 담 쌓고 살구 싶은 사램이 워딨겄슈. 근디 노상 대문을 짱궈노니께 도통 말두 안 통허구 물에 기름 뜨득기 호냐 그륵허다 이사를 갔내벼유.

<대문 점 열어 봐유>에서

 

새댁은 ‘목인사나 까딱하고 돌아설 만큼 수더분하지도 못했’고 마을 노인들의 ‘수군거림이 등 뒤에 머물러’ 점점 거리감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온통 도시에서 이사 온 젊은 부부에게로 쏠렸’기에 경계하는 마음으로 오히려 ‘아파트에 살 때의 습관대로 대문을 꼭 걸어 잠’그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만 새댁과 소통을 원하며 답답해했던 것만은 아니다. 새댁으로 불리는 작가도 마을 사람과 소통되지 않음이 답답하다.

 

급식실에 모인 자모들은 여자만 빼고 모두가 서로 잘 아는 눈치였다. 웃으며 인사는 했지만 그들 사이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갈 만큼 비위가 좋은 것도 아니어서 내내 뻘쭘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궁금해 하는 이야기는 언제 나올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층집 여자>

 

벽 너머의 사람들과는 화제도 다르고 가치도 달라서 말을 통할 기회를 엿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나 나의 존재는 관계를 이루지 못하면 무엇이든 결코 이룰 수 없다는 삶의 철학을 깨닫는다. 이와 같이 소통하지 않은 인간의 비극이 드러난 작품으로 <잎새는 서로 손을 잡지 않는다>가 있다.

발효된 상처가 아름다운 삶의 향기로 깨달음과 성장을 가져온 작품으로 <나비가 머무는 이유>를 들 수 있다. 작가는 ‘나비가 머무는 꽃들은 하나같이 상처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비는 예쁘고 고운 꽃에만 찾아들 것이라는 관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그러한 의문은 한 여인의 삶에서 깨닫게 된다. ‘질곡의 삶’에서 상처가 발효되어 향기로 승화된 아름다운 삶을 발견한다.

 

나이 드는 동안 우리는 저마다 숱한 자갈밭이나 가시밭길을 건넌다. 갈기갈기 찢겨 울부짖으며 고름이 터지고 나면 그제야 상처가 아문다. 새살이 돋기까지 마음엔 수없이 소용돌이치는 게 있다. 끝 갈 데까지 가고 난 뒤에 결국 미워하는 마음이 미안한 마음으로, 억울했던 분노가 용서와 화해로 바뀐다. 많은 것을 겪은 후에야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 눈감아줄 줄 아는 여유가 생긴다. 점점 사람의 향기가 짙어가는 것이다. 여름 한나절 괄괄한 땡볕의 등살과 작달비에 숱한 고난을 겪느라 생채기투성이인 백일홍에 나비가 모이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나비가 머무는 이유>에서

 

그리고는 곧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혼자만 존재하고 고고한 것이 아니라 주변과 많은 인연이 맺어지기를 소망한다. 인연을 소망한다면 자신이 씨앗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인연因緣은 ‘나’가 因이 되고 세계가 緣이 되는 것이 아닐까? 곧 나가 씨앗이라면 세계는 나로부터 이어지는 관계의 끈이 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이렇게 인연의 원리를 비쳐내었다. 사람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은 관계의 끈에 연결되어 인연을 맺으며 사는 데에 의미가 있다. ‘관계’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방도를 깨달으며 인간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을 작품에 수용한 것이다.

 

4. 생태주의와 상생相生의 문화

 

문화란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해 습득, 공유, 전승이 되는 행동 양식, 또는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해 낸 물질적, 정신적 소산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도덕, 종교, 학문, 예술 및 각종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수필에는 수필가가 살아온 생활양식과 문화의 양상이 수용된다. 작가의 과거의 삶의 방식에 따라 현재의 문화적 가치관이 정해지고 현재의 생활방식에 의해 미래 삶의 방향이 좌우된다.

언어는 문화를 담는 그릇이다. 작품에 쓰인 어휘들로부터 작가가 살아온 문화를 짐작할 수 있다. ‘양짓말, 거문배, 콩서리, 소소리바람, 논두렁, 작은엄마, 쫀드기, 옥춘당, 국수 꽁댕이’와 같은 어휘를 따라 잃어버린 옛문화를 찾아간다. 이렇게 구수한 우리네 정감은 장터문화에서 드러난다. <장터 칼국수>에서 ‘혀로 느끼는 맛보다 마음으로 먹는’ 문화야말로 우리네가 아직도 붙잡고 있는 ‘봉창은 얇아도 사람 사는 인정이 도타운’ 정情의 문화이다.

근대문명이라고 하는 지난 세기가 물질문명이었다면, 21세기는 생태주의 사고로 상생하는 문화로 전환해야 한다. 문명이 오히려 덫이 되기 때문이다. 생태문명은 자연과 인간의 상생의 원리를 인지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하고 수필문학이 그러한 이념을 담아내야 한다. 강현자는 이러한 이념을 작품에 담아냈다. ‘세상은 점점 자동화, 인공지능화가 되어’ 문명이 인간을 얽어매는 덫이 되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패스트푸드에 물들고 ‘내 가족마저 눈여겨 볼 겨를이 없는’ 현대인에게 ‘잠시만요’하고 외친다. 문명비판적인 시선은 생태주의적인 사고로 자연과의 상생을 지향한다. <슈퍼 땅콩>에서 ‘슈퍼 땅콩을 어찌 나 혼자 키웠겠나’ 하고 돌아보며 ‘모종비, 명지바람, 햇발, 까치의 노랫소리’의 공덕까지 칭송하면서 ‘고라니도 먹고 두더지도 먹고 까치도 배불리 먹었’으니 만족한다고 한다. 자연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태주의 사고이고 상생의 지혜이다. 잡초를 뽑으면서도 ‘나나 바랭이나 대지가 품은 자식인 것을’하면서 자신을 꾸짖는다.

생태주의 사고에 의한 상생의 철학은 사물의 원형성을 추구함으로써 다가설 수 있다. 그의 작품 <자줏빛 억새꽃>을 보면 억새꽃이 자줏빛인 것을 발견하고 자줏빛의 원형상징성을 궁구한다. 생각해보니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자줏빛이었다. 여기서 붉은빛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원형상징성을 발견한다. ‘자연은 붉은빛으로 새로운 시작을 알리나 보다. 붉은색이 갖는 신비로움이 놀라웠다. 우주 만물이 하나로 통하고 있음인가.’라며 붉은색이 갖는 신비로움과 우주만물이 하나로 통하는 원형성에 놀란다. 이 글에서 억새꽃은 다만 소재일 뿐 주제로 향하는 사유의 실마리는 시작을 의미하는 ‘붉은빛’이다. 작가는 붉은색에 대한 서양의 신화적 상징성에 눈길을 돌린다. 구약성경 출애굽기에 이집트로부터 유대인의 대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해낸다. 여기서 붉은 피는 구원과 부활을 의미함을 발견한다. 작가는 동양에서도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는 동지에 먹는 팥죽의 붉은빛도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놀란다.

자연과 인간,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 시공을 초월하여 ‘붉은빛의 이전은 고통이요 이후는 희망이라는 변화가 존재한다.’는 원형상징성을 깨닫는 과정은 놀라운 사유이다. 여기서 그는 최근 한 가수의 언택트 공연에서 포스트코로나시대 변화하는 문화의 실재를 보면서 이렇게 희망을 말한다.

 

이번 재앙은 첨단, 최첨단을 향해 치닫던 사람들에게 숨을 돌리고 되돌아보라는 신호가 아닐까. 거리에 자동차가 줄고 집집마다 씀씀이가 간소해졌다. 모임을 줄이고 외출을 줄이니 공기는 더 깨끗해지고 하늘은 맑아졌다. 죽어가던 지구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중간 생략)…혹독한 추위와 진통을 거쳐 붉은 생명이 태어나듯이 우주 만물은 순환 속에서 변화하고 또 존재한다. 오늘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어느새 붉은 태양이 내일을 준비하려 산을 넘는다. 미호천 붉은 억새에서 나는 ‘다시 시작’이라는 희망의 불씨를 본다.

<자줏빛 억새꽃>에서

 

인류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문화의 융성 뒤에는 늘 재앙이 오고 재앙이 있은 후에는 도약이 있는 변화와 순환의 역사였다. 자연과 사물, 문화의 원형상징성을 발견하여 생태계에서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는 지혜를 얻어내어 작품에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대상의 본질을 추구하고 원형상징성을 발견하여 작품화하는 방법은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미적 울림을 주는 수필적 상상의 전략에서 마지막 단계이다.

 

5. 수필적 상상과 형상

 

모두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수필은 문학이기에 체험을 바탕으로 상상에 의해 살을 붙이는 언어 예술이다. 이 작품은 수필적 상상이 작품 전체에 스미어 있기에 독자에게 문학적 감동을 준다.

《나비가 머무는 이유》가 메시지를 단단하고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독자를 미적 감동에 젖게 하는 형상화 방법을 몇 가지 들어 본다. 첫째는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상관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담아 전하는 점이다. <쉰아홉 그리고 예순>에서 보면 자전거 타기와 삶의 과정에서 처신의 방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수필이 아무리 교훈적인 문학 양식이라 하더라도 덕목을 직접제시하면 교술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우리가 체험에서 생활철학을 얻어내는 전통수필을 지향하지만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를 추구하여 수필의 영역을 확대하는 수필가로서 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는 시점을 변화시키거나 서술자를 바꾸어 설정하여 호기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봉달희> <대문 줌 열어 봐유> <괜찮아>는 서술자를 바꾸어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작품의 뼈대가 되는 서사적 줄거리에 흥미를 더하고 있다. 흥미만 더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 줄거리를 명징하게 하고 관점에 객관성을 더하였다. <대문 줌 열어 봐유>나 <장터 칼국수> 는 충청도 방언으로 서술하여 방언의 문화적 가치와 미적 효과를 증명하였다.

설명에 의존하지 않고 진술과 묘사를 적절히 안배하여 매우 인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인상적 묘사는 작품마다 찾아볼 수 있으므로 따로 예를 들지 않겠다.

구성에 특이할만한 것은 교차적 구성이다. 소환된 기억과 현재의 사건을 교차한다든지, 공간의 변화와 내적 갈등을 교차한다든지 하는 기법으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외적 상황과 내적 심리가 유기적으로 결속되기 때문에 독자에게 명징하게 메시지가 전달되고 미감에 젖게 한다. <나를 보내며>는 공간의 이동에 따른 내적 심리의 변화가 세밀하게 형상화되었으며, <장터 칼국수>는 과거 언니의 칼국수와 현재 진천 장터의 칼국수를 교차하여 묘사함으로 문화의 향수에 젖에 한다.

강현자 수필가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에 드러난 형상화 방법은 수필이 그냥 붓이 가는 대로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면서 작품성을 확보하였다.

 

6. 휘갑치기

 

강현자 수필가와 인연은 의미가 매우 깊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이미 우리 지방 수필창작교실에서 수강하여 문학 일반에 대한 지식을 갖춘 상태였다. 좋은 문장과 수사법에 대한 지식도 충분했고 무엇보다 독서량이 많았다. 그가 어린 시절을 농촌에서 보낸 것도 생태주의 사고와 상생의 문화를 담아내는 훌륭한 영양이 되었다.

대개의 첫 작품집의 화소는 과거 성장과정과 가족 간의 사랑에 관한 기억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현재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 그에 다른 미래에 지향하는 세계에 대하여 깊이 있는 고민을 담아내는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역사, 문화,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는 것이 수필가로서의 교양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강현자의 《나비가 머무는 이유》는 작가 자신의 깨달음과 성장의 문제, 관계의 해석과 존재의 문제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다루기도 했지만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로 나아갈 바를 재단하기도 한다. 특히 문화와 문명에 대한 시각은 과거에 대한 향수만 불러일으키고 끝맺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인간다운 삶의 가치를 화두로 제시하기도 한다. 작품에 수용된 강현자 수필가의 체험은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사적 정서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체험은 독특하고 개성적 인식으로 진술되었지만 인간의 일반적인 삶의 유형으로 개념화되어 있다. 이러한 수필적 상상의 전략과 그에 따른 의미화 작업은 미래 수필이 지향해야 하는 과제를 이행한 것이라 생각되어 반갑다.

존재에 대한 깨달음과 정신적 성장, 생태주의 사고와 상생의 문화, 전통문화에 대한 시각과 그에 따른 정감이 가는 우리말 어휘 사용은 미래 수필가의 사명을 마음에 새긴 작가로서의 공적이다.

수필문단에 등단하고 무르익을 사이도 없이 낸 첫 작품집이다. 그러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대상에 대한 인식의 독창성이나 형상화의 기법이 창작 수련의 정도를 가늠케 한다. 따라서 이 책이 한국 수필문학사에 커다란 주추가 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작가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끊임없는 창작 수업으로 미래 한국 수필문학 발전에 큰 기둥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