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회 충북수필문학상 심사평
어머니의 길
김윤희
‘가 봐야지, 가서 꼭 한 번 만나봐야지’
오래전부터 그리던 곳을 향하고 있다. 차창에 눈을 매단 채 앉아 있어도 마음은 몇 시간째 서성거린다. 드디어, 율포 앞 바다 새벽안개에 머리를 감고 가지런히 참빗질한 그를 처음으로 만났다. 산기슭 구릉 따라 푸르게 일렁이며 가슴을 열고 다가오는 봇재다. 더러 소릿재로 불리기도 하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한쪽은 판소리 서편제가 터를 내린 곳이고 또 다른 쪽은 보성 남쪽 끝 바닷가 마을을 끌어안고 있는 녹차 재배지이다.
해안을 굽어보는 활성산의 봇재가 바다의 물결마냥 남실남실 굽이치고 있다. 율포 앞 바다와 산 구릉이 밤마다 무시로 은밀히 마음을 주고받는 동안 서로 닮아가면서 만들어냈을 이 초록 물결에 나의 달뜬 마음이 먼저 첨벙 뛰어들어 길을 잡는다. 점점 몸이 맑고 가뿐해져 가는 느낌이다. 녹차 밭으로 접어드는 오솔길에 빼곡히 들어선 수만 그루의 삼나무 숲 초록 물이 이미 내 온몸에 촉촉이 스며들어 찌든 마음을 말끔히 녹여내고 있는가 보다. 지금 이대로 저 앞에 그득 펼쳐진 녹차 향을 담을 수만 있다면 나 또한 한 그루의 차나무가 되어도 좋을 것만 같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 따라 차밭 한가운데 안기고 보니 꽃보다 더 아름다운 눈부심도 잠시였다.
등성이로부터 구불구불 끝없이 흐르는 골 이랑을 타고 통증처럼 지긋이 가슴을 눌러오는 정체 모를 이 아릿한 느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 야들야들한 고갱이 다 내어주고 푸른 힘줄로 뒤둥그러져 녹차 밭 가득 차나무로 서 계신 어머니들을 본다. 그들의 고달픈 삶이 긴 그림자로 어룽거리며 가슴 한켠으로 파고들어선 때문일까?
곡우 5일 전, 찻잎 끝마다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있을 때 손끝으로 한잎 한잎 따서 만든 우전차는 더없는 영광이다. 곡우 지나 5월 초 찻잎이 참새의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따내어 만든 작설차는 차마 작아 애가 타지만 그래도 보람이다. 잎이 점점 커지면서 중작, 대작으로 이름도 바뀌고 커지는 잎에 비해 가치는 떨어지지만 이쯤 이르러도 깊고 완숙한 맛을 낼 수 있어 흐뭇하다. 6월이 지나 급기야 떫은맛을 내고야 마는 굵은 찻잎은 하찮은 말작으로 모자라는 자식에게 속정이 더 가듯 애틋함으로 떠나보낸다.
이렇듯 때맞춰 제 그릇 모양과 크기에 맞게 자식들 하나하나 떼어 보내고 뒤두러져 억센 힘줄로 뿌리를 지켜내고 있는 녹차 밭은 내가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아프고 그리운 고향이요,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몇 해를 두고 그리도 마음이 끌렸던 곳이었나 보다. 어머니 품처럼 끝없이 펼쳐진 녹차 밭을 통째로 가슴 가득 안는다.
때마침 물기 머금은 남도의 바람 한 줄기가 귓가를 스친다. 느릿느릿 봇재를 넘어오는 바람결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애절한 가락. 눈먼 송화의 판소리가 초록너울 따라 가랑가랑 들려오는 듯하다. 서편제의 가락을 타고 토해놓는 송화의 서름제 소리는 피를 토하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득음, 그 한恨의 소리다.
판소리는 맺고 푸는 데 따라 한가하고 서정적인 느낌의 진양 장단에서부터 중모리를 거쳐 춤을 추는 듯 하다, 때로는 통곡하는 듯 중중모리가 펼쳐지는가 하면, 핏대선 목 줄기가 끊어질 듯 숨 가쁘게 휘모리장단을 몰아치기도 한다. 여기에 노래로 부르는 ‘소리’와 말로 엮어내는 ‘아니리’와 몸짓을 하는 ‘발림’이 고수의 신들린 추임새와 적절히 조화로울 때 제대로의 맛깔스런 소리를 우려낼 수 있다고 한다. 엮는 목, 끊는 목, 짜는 목, 깎는 목. 서로 다른 목을 감고 풀어내며 어우러지는 것이 어디 판소리뿐이겠는가?
오장과 육부를 휘돌아 폐부 깊숙한 속으로부터 꺼내놓은 그 한의 소리는 한평생 속으로 삭이고 녹이며 온몸을 우려내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의 숨결이요 향내임을 오늘에서야 녹차 밭 한가운데서 가슴 시리게 느끼며 하늘을 본다. 얼마만큼 내어주고 삭여야만 내 안에서 스스로 자연과 조화로운 그 깊은 맛과 그윽한 다향茶香을 우려낼 수 있을까.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한 내 어머니의 길, 그 사랑 내림이 타령처럼 녹차 밭 가득 아리게 물너울을 만들며 번져가고 있다.
옷을 벗다
김윤희
4년간 걸치고 다녔던 옷을 벗었다. 독특한 디자인으로 유명브랜드에 속한다. 게다가 전국 지역별 한정판에 속하니 대다수의 사람은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관심 밖이고, 갖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간엔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진다. 선호도도 극명하게 갈린다.
보통 4년 단위로 선을 보이는 이 한정판 브랜드는 인격적으로 잘 갖추어진 사람이 입어야만 명품으로서 빛을 발할 수 있다. 그 빛은 이중성을 띤 마력을 지녔기 때문에 함부로 탐할 일이 아니다. 마력의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경우도 있고, 돈푼깨나 지녔다고 암암리 밑돈을 들여 차지하려는 부도덕의 불씨도 예서 비롯되는 경우도 많다.
사람과 옷이 들어맞지 않아 휘휘 겉도는 줄도 모르고 제멋에 겨워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 명품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브랜드의 가치 선호도는 떨어지지 않고 있다. 명품을 한번 걸쳤던 사람들은 이미지가 주는 가치와 향유의 틀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는 속성을 보이는 것 또한 일반적이다.
나는 평소 올곧은 내면의 품격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내가 누구입네’ 겉치레 명품을 걸치고 다니는 모습을 마뜩찮게 여겨왔다. 그런 내게 본의 아니게 유명브랜드가 주어졌다. 군의회 의원이란다. 내 이미지와도 맞지 않고 감당할 주변머리도 못되는 주제에 얼결에 얻어 걸친 복색이다. 좋아하지 않는 대열에 끼어 으쓱 어깨를 올린 셈이다.
제법 옷태가 난다며 부러움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느꼈고, 옷의 위력 또한 적지 않았지만 명품다운 품격을 갖춘 자만이 누릴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여 왠지 불편하고 어색했던 의원의 복색, 그 허울을 미련 없이 벗었다. 가뿐한 마음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명 브랜드에 어깨가 눌리고 구속이 됐었나 보다.
명품이라 통용되는 브랜드에 진품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이 교묘하여 짝퉁 브랜드가 진품보다 더 버젓이 행세를 하니 진품은 외려 뒷전으로 물러앉는 경우를 가끔씩 본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새삼 마음이 씁쓸하다. 목소리 큰 짝퉁이 고요한 명품을 앞지른 지 이미 오래된 마당에 진위 여부에 연연하는 것 자체가 외로운 갈등일지도 모른다. 잘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옷을 걸치고 슬쩍 명품 대열에 편승해가려는 부류가 비단 정치인들을 비롯한 어느 일부만의 세계는 아니다. 여기저기 유명브랜드를 자처한 복색의 난립이다.
도대체 옷이 무엇 하는 물건이던가. 애당초 원초적인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시작되었다, 자신을 보호하며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설은 분분하지만 모든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의복에 집착한다. 옷은 오랜 세월 인간의 몸과 밀착돼 오면서 ‘가림과 보여줌’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띠는 것조차 인간의 속성과 닮아 가고 있는 요물이다.
인간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기본 요소로 의식주를 든다. 그중에서 먹는 것보다 의복이 맨 앞에 꼽히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먹고 자는 일은 본능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의복을 입을 때는 생각을 병행하게 된다. 때와 장소, 만나는 사람에 따라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사람은 늘 정갈하고 단아한 품격으로 나타날 것이요. 그러지 못하고 옷 자체의 외양에 목적을 두다 보면 명품이라는 브랜드에 휘둘리기 십상이다.
인류의 발달과 더불어 가장 섬세하고 민감하게 동참해 온 것이 의복이다. 때때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표출되기도 하고, 옷을 만들고 입는 것 자체까지 모두 창조적인 행위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이미 정신문화의 근간이 되어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성직자나 전문 직종에 속한 사람들의 정형화된 의복은 물론, 일반인의 평상복 속에서도 어느 정도 성격이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의 말에 의하면 “옷을 선택하고 입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에게 가장 잘 맞고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 입어야만 착용감도 좋고, 옷과 나, 즉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말하는 것일 게다. 내면이 옹골차게 갖추어진 인격이 자신에게 적합한 품격의 옷과 조화로울 때 비로소 우아한 명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질 것이다.
의원이라는 옷을 벗으며 진정 명품다운 명품으로서의 삶을 꿈꾸어 본다.
일상에서 삭이고 우려낸 삶의 원형성
심사위원 이방주
제 27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작으로 김윤희 수필가의 <어머니의 길> <옷을 벗다> 두 편을 심사위원 전원이 합의하여 결정하였다.
충북수필문학상은 충북지역 수필가들의 창작 의욕과 수필문학의 질적 향상을 위해 충북수필문학상 규정에 따라 후보를 선정하고 후보 중에서 작품성과 본회 발전의 기여도를 다방면으로 평가하여 결정한다.
충북수필문학회의 회원수가 100명에 육박하므로 이제는 작품성에 조금 더 평가의 비중을 두기로 하였다. 그 결과 김윤희 수필가의 수필 <어머니의 길> <옷을 벗다>가 높은 점수를 받아 수상자로 결정되었음을 밝힌다. 물론 본회 발전을 위한 기여도 면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최근 우리나라의 수필 문단은 수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21세기 수필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수필의 소재나 주제의 영역을 넓히려고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하기도 하고, 단순해 보이는 대상도 그 본질을 깊이 추구하여 거기에 담긴 삶의 지혜를 천착해내기도 하며,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연작으로 창작하는 수필가도 있다. 타문학 양식과 접목하여 새로운 형태를 추구하는 실험적 수필을 시도하는 수필가도 있다. 또한 무한 경쟁 사회에서 받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치유의 문학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현대 수필이 고려 말부터 전승해오는 한국수필의 맥을 다시 찾는 것 같아 수필의 밝은 미래를 기대해 본다.
수상작으로 뽑힌 김윤희 수필가의 <어머니의 길> <옷을 벗다> 두 작품에서 한국 수필이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엿볼 수 있어 반가웠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이 두 작품에서 전통의 맥을 이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문학적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수필은 철학적 메시지를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해야 한다. 일상적 소재로부터 삶의 원형성을 구현해내는 구성과 전개는 수필이 아니면 이루어내기 어려운 작업이다. 대개의 수필가들은 다른 문학양식에 비해 수필은 천시된다고 불평한다. 수필가는 이런 불평에 앞서 수필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다른 문학양식으로는 이룰 수 없는 메시지를 담아 미적 감동을 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김윤희 수필가는 이 두 편의 작품으로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뚜렷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작가로서 자신의 존재 가치도 확실히 드러냈다는데 심사위원들이 의견 일치를 보았다.
수필은 일상 곧 체험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그래서 수필은 체험과 사색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체험은 진실하고 사색은 논리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작가의 체험과 사색의 내용을 진솔하게 고백해야 읽는 이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 거기에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라는 의미가 있다. 고백은 가치가 있어야 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부끄러운 사건도 고백하는 순간 보편적 사실이 되어버려 독자와 부끄러움을 나누어 갖게 된다. 그러나 감춤이 남아 있는 고백은 독자를 기만하는 것이므로 감동을 불러올 수 없다.
수필이 체험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란 말은 일상에 대한 인식은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야 하고 표현은 수필가가 인식한 내용을 문학적 언어로 속삭여야 한다는 말이다. 인식은 독창적이어야 하고 속삭임은 잔잔해야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 작품을 이해할 때는 체험에 대한 철학적 인식에 설리說理가 있는가 하는 것과 인식의 형상화가 구체적이고 인상적인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좋은 수필을 창작하려는 이러한 노력을 수상작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윤희 수필가의 수상작 <어머니의 길>에서 작가는 녹차 밭에 대한 그리움으로 남도의 녹차 밭으로 향한다. 그러나 막상 녹차 밭에 이르러서는 그리움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한다. 이것은 그냥 단순하게 녹차 밭에 이르는 순간 차밭이 어머니로 보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그 과정에 작가의 사색과 수필적 상상이 개입된 것을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곡우 5일 전, 찻잎 끝마다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있을 때 손끝으로 한잎 한잎 따서 만든 우전차는 더없는 영광이다. 곡우 지나 5월 초 찻잎이 참새의 혓바닥만큼 자랐을 때 따내어 만든 작설차는 차마 작아 애가 타지만 그래도 보람이다. 잎이 점점 커지면서 중작, 대작으로 이름도 바뀌고 커지는 잎에 비해 가치는 떨어지지만 이쯤 이르러도 깊고 완숙한 맛을 낼 수 있어 흐뭇하다. 6월이 지나 급기야 떫은맛을 내고야 마는 굵은 찻잎은 하찮은 말작으로 모자라는 자식에게 속정이 더 가듯 애틋함으로 떠나보낸다.
이렇듯 때맞춰 제 그릇 모양과 크기에 맞게 자식들 하나하나 떼어 보내고 뒤두러져 억센 힘줄로 뿌리를 지켜내고 있는 녹차 밭은 내가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곳이지만, 아프고 그리운 고향이요, 어머니의 품속과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몇 해를 두고 그리도 마음이 끌렸던 곳이었나 보다. 어머니 품처럼 끝없이 펼쳐진 녹차 밭을 통째로 가슴 가득 안는다.
-<어머니의 길>에서
수필 창작을 위한 인식의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치곡致曲과 견색見賾이다. 치곡은 대상의 곡절을 끝까지 궁구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격물하여 치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견색이란 모든 사람이 다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어서 나에게만 보이는 것을 찾아낸다는 말이다. 녹차 밭이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보인 것은 김윤희 수필가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다. 찻잎이 차가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찻잎의 고통과 희생을 궁구해 낸 것이다. 그것이 우전차, 작설차에 이르고 잎이 커지면서 중작, 대작이 되었다가 모든 것을 다 퍼주고 나면 떫은맛을 내는 말작이 되고 마는 과정을 파고들었다. 찻잎이 차가 되는 과정에서 아무도 볼 수 없는 그 너머에 있는 ‘모자라는 자식에게 속정이 더 가듯 애틋함으로 떠나보내는 말작’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견색이다. 김윤희 수필가는 <어머니의 길>이라는 짧은 글에서 소설이나 시로서는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은 것이다.
흔히 우리는 좋은 글을 쓰는 조건으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을 든다.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독창적 인식은 바로 어떤 영감으로 이루어지거나 천부적 재능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부단한 노력으로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하면서 수필적 상상의 단계적 전략을 익히며 노력해야 한다. 수필적 상상의 단계는 대상에 대하여 물질적 본질을 분석한 다음, 자신의 삶과 견주어 성찰하는 역동적 상상을 한 다음, 삶의 개념적 철학의 원형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렇게 상상하는 단계는 바로 집필의 과정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길>에서 이 작품이 원형성을 구현해 내는 모습을 다음에서 볼 수 있다.
때마침 물기 머금은 남도의 바람 한 줄기가 귓가를 스친다. 느릿느릿 봇재를 넘어오는 바람결에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애절한 가락. 눈먼 송화의 판소리가 초록너울 따라 가랑가랑 들려오는 듯하다. 서편제의 가락을 타고 토해놓는 송화의 서름제 소리는 피를 토하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는 득음, 그 한恨의 소리다. (중간 부분 생략)
오장과 육부를 휘돌아 폐부 깊숙한 속으로부터 꺼내놓은 그 한의 소리는 한평생 속으로 삭이고 녹이며 온몸을 우려내 자식을 키워온 어머니의 숨결이요 향내임을 오늘에서야 녹차 밭 한가운데서 가슴 시리게 느끼며 하늘을 본다. 얼마만큼 내어주고 삭여야만 내 안에서 스스로 자연과 조화로운 그 깊은 맛과 그윽한 다향茶香을 우려낼 수 있을까.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한 내 어머니의 길, 그 사랑 내림이 타령처럼 녹차 밭 가득 아리게 물너울을 만들며 번져가고 있다.
-<어머니의 길>에서
남도 봇재로 불리는 소릿재를 넘으며 판소리 서편제를 생각한다. 소릿재를 중심으로 판소리는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뉘는데 동편제가 웅혼하게 터져 나오는데 비해 서편제는 기교가 있고 깊은 한이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 다시 판소리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지고 그 탐구는 결국 어머니의 한의 소리로 연상된다. ‘오장과 육부를 휘돌아 폐부 깊숙한 속에서’ ‘한평생 속으로 삭이고 녹이며 우려낸’ ‘어머니의 숨결이요 향내’이다. 차향과 판소리 어머니의 본질이 하나가 되어 자연과 천리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아울러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길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어머니의 길을 ‘그 사랑내림이 타령처럼 녹차 밭 가득 아리게 물너울’을 만드는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김윤희 수필가의 <어머니의 길>은 수필이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라는 특성을 바탕으로 수필적 상상을 통하여 원형성을 구현해 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수필이 아니면 이루어 낼 수 없는 작가가 독자에게 주는 치유의 속삭임이다. 또한 여성이 바로 나아가야 할 한국의 어머니의 길을 넌지시 제안하였다.
수필은 체험의 해석이라지만 때로는 심경을 토로할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자아의 심경을 일방적으로 토로해버리면 자칫 시적 언어가 되기 쉽다. 수필은 독창적 인식을 보편화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의 태생은 원시시대에 신에게 드리던 말씀이 아니라 문명한 시대에 인간이 인간에게 주는 따뜻하고 잔잔한 치유의 속삭임이기 때문이다. 이때 상관물의 속성에 빗대어 속삭임으로써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울림을 줄 수 있다.
상관물이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빗대어 표현하기 위해서 들여오는 사물, 사건, 정황을 말한다. 시에서는 객관적상관물이라고도 한다. 우리 고대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고려 말에 쓰인 하나의 수필 양식인 ‘설設’을 보면 대개 상관물을 통하여 삶의 지혜를 교훈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교훈성 때문에 최근에도 수필을 교술敎述이라고 저렴하게 일컫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수필은 도덕적 교술로 매듭짓는 글은 거의 없을 것으로 안다.
김윤희 수필가의 <옷을 벗다>는 상관물을 통해서 자신의 심경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구성으로 울림을 주고 있다. 한 때 진천군의회 의원을 지낸 그는 의원의 임기가 끝난 그 홀가분함을 ‘옷을 벗다’라는 상관물을 통하여 고백하였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영예로운 자리에서의 자신의 체험에 대하여 스스로 고백하면 자칫 오만이나 자화자찬이라 오해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옷을 벗었다’는 상관물을 통하여 고백함으로써 옷을 벗는 행위의 원형성 때문에 모든 이의 공감을 얻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옷의 본질을 추구하여 상관성이 있는 다른 삶의 행위들과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인류의 발달과 더불어 가장 섬세하고 민감하게 동참해 온 것이 의복이다. 때때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이 동시에 표출되기도 하고, 옷을 만들고 입는 것 자체까지 모두 창조적인 행위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이미 정신문화의 근간이 되어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성직자나 전문 직종에 속한 사람들의 정형화된 의복은 물론, 일반인의 평상복 속에서도 어느 정도 성격이나 직업을 짐작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
(중간 부분 생략)
의원이라는 옷을 벗으며 진정 명품다운 명품으로서의 삶을 꿈꾸어 본다.
- <옷을 벗다>에서
일상에서 ‘옷을 벗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행위는 다양하다. 곧 ‘옷’이란 상관물로 대신할 수 있는 일이 다양하다는 말이다. 그 다양한 일들을 ‘내면이 옹골차게 갖추어진 인격이 자신에게 적합한 품격의 옷과 조화로울 때 비로소 우아한 명품으로서의 가치가 높아질 것’ 이라고 옷의 원형성을 찾아내어 독자들에게 울림을 준다. 그는 실제 지방의회 의원으로 있으면서 지방의 문학과 문화 수준을 높이는데 헌신한 공적은 지방 곳곳에 증거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적합한 품격의 옷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성찰하였다. 이와 같은 겸손은 그만큼 그의 봉사하고자 하는 성취동기가 높았음을 암시한다. 이와 같이 역동적 상상의 내용을 상관물을 통하여 자신의 체험을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형상화에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전통 수필의 구성법을 이어받은 것으로 생각되어 반갑다.
이 두 작품을 통하여 살펴본 바와 같이 김윤희 수필가는 한국 고유의 수필을 계승하면서도 수필문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수필은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는 수필문학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삶의 철학을 아름다운 문학으로 형상화하여 문학에서 수필의 존재를 한층 공고히 했다고 생각한다.
제 27회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앞으로 문운이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장 : 김홍은
심사위원 : 박영수, 엄갑도, 이방주, 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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