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무심無心 앤솔러지Anthology (무심수필 3호 작품 해설)

느림보 이방주 2020. 10. 4. 15:37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휴머니티의 속삭임

- 무심無心 앤솔러지Anthology -

 

이방주(수필가 문학평론가)

 

무심 앤솔러지가 지향하는 가치

 

《무심수필》 3호 발간을 축하한다. 2018년 8월 24일 16명으로 출발한 무심수필문학회는 22명의 단단하고 열정적인 회원으로 정착하여 《무심수필》 3호를 내기에 이르렀다. 창간호에는 14명 회원이 35편의 주옥같은 작품을 실었다. 작고 수필가로 우리 고장 목성균수필가의 작품을 실은 뜻은 우리가 지향하는 수필 세계를 어렴풋이 그리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초대 수필로 충북의 대표 수필가인 반숙자, 박영자 수필가의 작품을 실었다.

《무심수필》 2호에는 18명 회원의 작품 36편과 회원 5명의 등단 작품과 심사평, 수상소감을 실어 동인지를 더 든든하게 했다. 초대 수필로 장호병 한국수필가협회 이사장, 최원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변종호 충북수필문학회 회장의 작품을 게재하여 품격을 높였다.

《무심수필》 3호는 창립 3년째를 맞아 그간 공고해진 회원 작품 수준과 보다 높아진 품격을 작지만 단단한 그릇에 넘치도록 담았다. 19명 회원의 작품 38편을 실었다. 회원 3명의 등단작품과 월간 《수필과비평》 편집장 한경선 수필가, 충북수필문학상 수상자인 임정숙 수필가, 김윤희 수필가의 작품을 실어 동인지를 빛나게 했다. 《무심수필》 3호부터는 작품 해설을 통하여 회원들의 작품을 바르게 이해하고 문학적 가치를 돋보이게 하기로 했다. 이제 세 살, 힘겨운 걸음마를 시작했지만 문단에 주는 바람은 결코 비틀거리지 않음을 작품으로 보여 준다. 무심 아기가 아기장수가 되어 큼직한 발걸음으로 미호천으로 금강으로 서해 바다로 성큼성큼 나아갈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과 비평가들은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동인지 형태의 출판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 독일에서도 동인지 형식의 편집, 경영, 출판이 이루어져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한다. 동인지는 상업적 잡지 출간에서 밀려난 예술 작품을 모아 출간을 시작하였지만 1930년대를 넘어서면서 오히려 문학 발전의 산실이 되었다.

우리나라 동인지의 역사도 결코 짧은 것이 아니다.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등이 중심이 되어 1919년에 《창조》를 낸 이후 1920년대에는 동인지를 중심 무대로 문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0년대 활발한 동인회 활동을 간추려보면 김억, 남궁벽, 염상섭, 황석우의 《폐허》(1920), 변영로, 황석우가 중심이 된 《장미촌》(1921),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의 《백조》(1922), 김억, 주요한 김소월 등이 참여했던 《영대》(1924)가 발간되었다. 이 중에서 《장미촌》은 최초의 시 전문 동인지로 드디어 장르별 동인지가 등장했다. 그 후에는 《시문학》(1930), 《문예월간》(1930) 같은 종합문예지 성격의 동인지가 등장했다.

동인지가 있으면 당연히 동인회가 존재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문학 동인회의 역사는 조선 영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천택 김수장을 중심으로 한 경정산가단敬亭山歌壇, 김수장의 노가재가단老稼齋歌壇이 그것이다. 물론 가객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지녔지만 시조 창작이 중심활동이었으니 일종의 문학동인회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이들이 편찬한 ≪청구영언≫, ≪해동가요≫, ≪가곡원류≫는 오늘날의 앤솔러지Anthology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앤솔러지는 주제나 시대 등 한 가지 기준에 따라 시나 단편소설들을 선정해 한 권으로 묶은 것을 말한다. ‘꽃다발’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앤톨로기아(Anthologia)'에서 유래되었으며 우리말로 ‘시화집, 명시선집’ 등으로 풀이한다. 문학뿐만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에서도 ‘작품 선집’이라는 의미로 널리 쓰인다.

우리 무심수필문학회는 수필 창작을 공부하는 문우들의 모임이다. 여기에는 수필가로 등단한 사람도 있고, 등단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고, 등단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수필 창작을 목적으로 하고 수필을 통하여 삶의 행복을 찾고 아픔을 치유하고자 하는 뜻을 함께 할 뿐이다.

한국 현대수필의 발흥은 1920년대 계몽을 목적으로 한 작품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 당시는 전문적인 수필가는 없고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수필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수필가가 등장하였고 독자적인 장르로서 지위를 확보하였다. 당시의 현대수필의 유형은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로 확립되는 듯했다. 수필문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으나 한국 전통수필의 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문학 장르가 우리 전통적 양식에 서구의 문학 형태를 받아들여 창조적으로 발전한데 비해 수필은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서구의 수필이지 우리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수필의 원류를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에서 찾고자 하지 않는다. 고려 말 이규보, 이곡의 한문수필인 이른바 ‘설說’은 모든 면에서 현대 한국인의 정서와 사고의 관습에 익숙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주제의 통일성, 구성의 논리성, 호흡의 장단과 문세文勢의 완급에 대한 적절한 조절, 간결한 표현미는 우리 민족의 정서와 부합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사물을 인식하는 관조적 시각과 문장 리듬에 대한 감각 같은 소중한 요소는 서구적 수필을 따르는 현대수필이 놓치고 있는 소중한 가치이다. 고려를 넘어 조선의 김수온, 박지원, 정약용, 유방선에 이어지는 수필을 보면 체험을 해석하고 거기에서 생활 철학을 발견하는 상상의 과정은 우리 민족만이 가진 소중한 자산이다. 무심수필문학회에서는 설에서부터 기원하는 이러한 수필의 성격을 전통수필이라고 개념화하고 계승하여 현대화하는데 뜻을 같이하였다.

《무심수필》 3호는 이와 같이 앤솔러지Anthology의 성격을 지닌다. 무심 앤솔러지에 실린 신작 38편의 작품을 이와 같은 측면에서 가치를 찾아보고 미래로 나가기 위한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전통수필에서 지향하는 수필의 형식은 체험의 철학적 해석을 아름다운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체험은 진실해야 하고 해석은 명쾌하고 설리說理에 맞아야 한다. 형상화는 인상적이고 선명해야 한다. 체험의 철학적 해석이 명쾌하고 설리에 맞으면서도 미적 울림을 주려면 문학적 상상이 필수이다. 문학적 상상의 전략을 알아야 작가가 드러내려는 메시지가 교술적 가르침을 떠나 독자에게 공명의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무심수필》 3호에 실린 38편의 회원작품을 대별해 보니 존재에 대한 고민과 역사와 시대에 대한 갈등이 드러나 있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함께 그리움과 고독이 있으며 생태적 상생에 시선을 둔 작품으로 대별할 수 있었다.

 

체험의 해석은 존재를 드러내는 삶의 지혜

 

존재란 의식으로부터 독립하여 외계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존재란 말은 매우 어렵게 들린다. 그것은 서양 철학이나 동양철학에서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추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수필에서 존재에 대한 고민이란 세계에 자아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며 존재하느냐 하는 삶의 직접적인 문제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영역에서 어디에 어떻게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존재하느냐 하는 선택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선택의 순간에는 선택하는 주체의 가치관이 그 기준이 될 것이다.

존재의 문제를 숨김없이 고백한 수필로 강현자의 <바위틈에 피는 꽃> 김승형의 <새끼고양이의 수필나기> 김일복의 <화단> 서강석의 <착각> 이승애의 <어느 날 훅 들어오는 게 있다> 이우주의 <나의 버킷리스트> 최아영의 <삵> <스님, 불 들어갑니다> 최운숙의 <지음知音> <해후> 홍현숙의 <나는 청소부> 등을 들 수 있다. 존재 문제를 다룬 작품이 많은 것만 봐도 존재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보편적이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강현자는 <바위틈에 피는 꽃>에서 ‘나’의 진짜 모습을 찾아 진정한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꾀하고 있다. 거기에는 희생이 따르지만 결국 홀로서기를 한다. 그것은 어머니가 일러준 ‘바위틈에 핀 꽃’이기에 힘에 겨워도 결국은 꽃을 피우고야 말 것이라는 신념에 따른 결과였다. 여기서 바위틈은 존재의 영역이고 꽃은 실존의 형상이다.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는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함께 성찰의 결과를 진정성 있게 고백하고 있다.

김승형은 <새끼 고양이의 수필나기>에서 다음과 같이 부끄럽고 창피했던 자신의 존재 극복을 위한 꿈을 토로했다.

 

오늘은 수필교실 개강일이다. 서둘러 문을 나서며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헛간 문지방에 앉아있는 새끼고양이의 눈을 보았다. 가슴이 마구 뛰며 요동쳐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새끼고양이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수필이었다. 백미러에 비친 응원하며 배웅하는 새끼고양이의 눈빛을 등에 업고 청주교대로 향했다. 달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경쾌했다. 나의 수필나기 서곡이다.

 

영혼이 맑은 고양이의 눈을 닮아 편견 없이 자연을 이야기할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을 찾아 수필나기에 나서는 모습이 경쾌하다. 새끼고양이에게서 수필나기의 지혜를 깨우치는 순간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부끄러운 존재에 대한 고백은 고백하는 순간 독자와 공동의 부끄러움이 된다. 진정성 있는 고백은 작가와 독자의 아픔을 치유하는 지혜로운 선택이다.

김일복의 <화단>은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화단 만들기를 화소話素로 제시한다. 존재의 영역을 바꾸면서 마음에 심을 꽃밭을 구상한다. 새로운 존재의 모습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연두처럼 파란 새싹이 돋는 마음의 화단을 본다. 수필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이렇게 넌지시 일러준다. 수필의 맛을 아는 이는 마음의 꽃밭에 수필 꽃을 심을 것으로 확신한다.

서강석은 <착각>에서 어려움 속에서 남의 도움 없이 성공하는 과정의 마음가짐을 담담하게 그러나 매우 아프게 고백하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첫걸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바르게 존재하는 첩경임을 일러준다. 그런 가운데 ‘나는 잘하고 있다’든지 ‘나는 아직 부족하다’라고 스스로를 평가하는데 이것은 착각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잘하고 있다고 자만하거나 못하고 있다고 평가 절하하는 것이 곧 착각이고 삶의 폭우 속에 존재할 위험 요소란 말이 이 작품의 메시지이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르게 분석하는 것이 바르게 존재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체험을 통한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승애는 <어느 날 훅 들어오는 게 있다>에서 죽음 체험의 기억을 소환한다. 관 속에 누워 죽음이란 세계를 체험하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생애를 돌아보면 누구나 용서할 일보다 용서받을 일이 많아서 죽음의 순간에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에게 어떻게 생애를 보낼 것인가에 대한 소중한 답을 아름다운 문학적 언어로 속삭여준다.

이우주의 <나의 버킷리스트>는 밀물처럼 왔다가 거품을 삼키고 떠나는 한 해에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를 영화를 통하여 깨닫는 과정을 이야기하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소망 리스트가 있지만 이것을 다 실현해도 소망은 남게 마련이다. 이곳의 아픔을 탓하며 저곳을 소망하여 그곳에 이르러도 결국 일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일상은 존재의 원천이고 사고의 발원지이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준비하는 것이 인생의 버킷리스트란 말이 울림을 준다.

최아영은 <삵> <스님, 불 들어갑니다>를 통하여 존재와 존재의 인식 문제에 관하여 깊이 있게 접근하였다. <삵>은 김동인의 소설 <붉은산>에 나오는 ‘삵’이란 별명을 가진 인물의 사람살이법에 대해 탐구하면서 자신을 반성하였다. 삵의 죽음과 대학 시절 싫어했던 한 학우의 죽음을 관련지어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탐구하였다.

 

스무 살에서 멈춰버린 눈동자가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야 함부로 누구를 미워하거나 덥석 정에 빠져들지 않을 만큼, 약간은 관성에 절은 연륜이어서 때론 밋밋하기도 하다만 과거엔 왜 그리도 양 극단을 향해 내달렸는지. 생각해보면 지독히도 싫었던 그 아이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가 어쩌면 내 안에 숨어 있던 나의 실체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가 없는데도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나도 ‘삵’이었을 수도 있었을 것을.

 

최아영은 이 작품에서 기억을 소환하여 오늘의 나를 돌아보고 있다. 수필이 체험의 문학이라면 체험은 언제나 과거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여 오늘의 나를 돌아보는 것이 수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억의 표현이 문제이다. 기억을 얼마나 생생하게 재생해 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기억의 재구성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인상적으로 전달하여 과거를 현실성 있게 표현하는데 성공하였다. 그의 존재 탐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스님, 불 들어갑니다>에서 문학회에서 동인들과의 관계를 탐구하며 ‘누구를 만나 무엇을 듣고 보느냐에 따라 삶이 결정되는’ 자신의 존재 만들기에 대해 스님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현실을 되뇌고 있다.

최운숙은 <지음知音>에서 차를 통한 벗과의 사귐에 대해 나지막하게 속삭이고 있다. 그는 벗이 죽자 거문고의 줄을 끊었다는 백아와 종자기의 사귐과 아울러 추사 김정희와 초의선사의 금난지교金蘭之交를 들어 차를 통한 자신의 벗과 사귀는 법을 돌아보았다. 그러면서 자신의 우정을 ‘마시는 찻물이 내 가슴 깊숙이 새로운 길’이 지음의 기쁨으로 향하기를 기대한다고 끝을 맺는다. 우정으로 이루어가는 정신세계를 짧은 글에서 심도 있게 다루어 수필의 맛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해후>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문제를 보물이 되어 돌아온 옛 동료들과의 만남에서 깊이 있게 깨닫는다.

 

내가 갈구했던 것들, 소망했던 것들이 아직 내 안에 있는지. 어떤 언어 하나에 내 세계를 가두었던 것이 내 의식 속에 아직도 살아있는지. 오늘 그들을 보며 비로소 나는, 거미줄 같은 욕망들이 하나씩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바다의 짭짤한 기운이 걸러져서 심심해진 것과 같다. 비켜서고 누운 그들을 통해 나의 심심해진 생각이 그들을 향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걸어온 길을 보듯이 그들은 나에게서 걸어온 길을 보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것이다. 그것이 우리네 삶이다.

홍현숙은 <나는 청소부>에서 세상의 이기적이고 비문명적인 오류와 그런 오류 속의 쓰레기를 청소하는 자신의 존재의 나아감에 대해 아프게 토로하고 있다. 그는 회사에서 한꺼번에 부당하게 해고당한 동료들과 함께 투쟁을 통하여 복직했다. 그러나 회사와 갈등은 계속된다. 불공정한 세계와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정신력으로 버텨내야 하는 자기 존재를 이렇게 돌아본다.

 

앞으로 나아갈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다시 되돌아올 때 보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되돌아본다는 것은 내가 살아가는 삶과도 일맥상통한다. 그것을 한 가지씩 알아가고 깨닫는 일이 내 삶의 지혜가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수필은 갈등 속에나 핍박 속에서나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가운데 정신적으로 우뚝 선다. 불공정을 일삼는 존재들은 자신이 계속 추락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그는 <FM 90.7MHZ>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라디오가 청춘을 무한대로 재생시킨다면서 노래에 빗대어 ‘서두르지 않아 언젠가 분명 저 태양 너머 무지개에 다다를 거야’라고 확신한다.

수필 창작은 일상의 체험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는 작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수필은 끊임없는 자기 수양 끝에 좋은 작품이 이루어진다. 작품에서 보듯이 수행은 특별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겪는 체험을 남다른 사색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돌려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필적 상상이고 체험의 철학적 해석이다.

 

시대와 역사에 대한 고민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이 없으면 시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다산이 아들에게 들려준 가르침이다. 여기서 시란 곧 모든 문학을 의미할 것이다. 수필이 역사와 시대를 돌아볼 줄 모른다면 자기 푸념이란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한 작품으로 권명희의 <성城 알아가기> 서강석의 <콩밭> 유동진의 <전횡> <여군에 지원한 딸아이> 황다리아의 <나의 스토브리그Stove League> 홍현숙의 <나는 청소부>가 눈에 뜨인다.

권명희는 <성城 알아가기>에서 산성산사 답사기인 수필집 《가림성 사랑나무》 저자와 상당산성을 걸으면서 역사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오히려 ‘역사를 알고 나면 마음 편히 산성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것은 성을 쌓을 때의 민중의 고통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로이다. 성을 쌓는 일이나 성을 지키는 일이나 성을 공격하는 일이나 모두가 피를 흘리고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다. 또 그런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밝히는 일도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임을 알고 숙연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강석은 <콩밭>에서 정치인 지망생이 갖는 이상과 현실 정치의 괴리를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은 본래의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비본래적인 일인 콩밭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콩밭은 대개 본질에서 멀리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사업을 하는 본인은 본래적인 일인 사업보다 콩밭인 수필 교실에 가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콩밭은 비본래적이지만 행복한 콩밭이라 규정하였다. 정치인들의 본래적인 목적은 국민의 행복과 나라의 발전인데 정쟁과 난투극이라는 콩밭에 가 있다. 누구나 순수한 사랑을 꿈꾸듯 바른 정치를 꿈꾸던 정치인들과 함께 손잡고 아름다운 콩밭에 가는 이상 실현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이 작품은 정책적인 명제를 가르침에 휩쓸리지 않고 담담하게 고백하는 표현으로 울림을 더하였다.

유동진은 <전횡>에서 중국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중국 사회가 황금만능주의로 변하는 세태를 꼬집었다. 누구나 먼저 돈을 벌면 된다는 정책이 굶주림에서는 벗어나게는 했지만 중국 역사의 근간인 유교 윤리를 퇴색시키고 가난한 사람을 천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숫타니파타의 경전에 있다는 싯다르타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결코 그의 신분에 의해서 비천해지거나 고귀해지지 않는다. 인간을 비천하고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신분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다.’ 그녀의 행동은 비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데도 승용차가 내뿜는 위세가 자신의 고매한 인격이자 사회적 신분이라고 착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싯다르타의 말을 토대로 자신도 사업을 하면서 전횡을 부렸을지 모르는 삶을 돌아보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이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은 점이 돋보인다. 우리 전통수필은 체험이나 사회 현실을 비판으로 끝내지 않고 자기 성찰을 계기로 삼는다. 이것이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와 다른 전통수필만이 갖는 특성이다. 또 다른 작품 <여군에 지원한 딸아이>에서도 중국에서의 체험을 토대로 우리나라의 양성평등 의식의 현실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한 가정의 성평등 의식의 묘목이 자라서 미래의 양성평등의 숲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심정을 밝혔다.

황다리아는 <나의 스토브리그Stove League>에서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병폐와 악습 관행을 들추어내는 것에 의미를 둔다. 이 작품도 ‘내 인생의 스토브리그’를 생각하는 것으로 돌아오면서 마무리진다.

홍현숙의 <나는 청소부>는 존재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지만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내비치고 있다. 가진 자들의 횡포가 민중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고 정신적 고통인가 하는 점이 이 글에 드러나 있다.

 

꽁꽁 얼어붙은 잔디 위로 바짝 말라붙은 이쑤시개 굵기의 흩어진 다리뼈가 설핏 보인다. 정체모를 조각들이 비참한 형체로 남아있다. 그 조각을 하나씩 하나씩 모았다. 새끼손톱만 한 작은 두개골과 가슴뼈, 다리 끝에 매달린 네 개의 발톱이 추위에 널브러져 있다. 이 뼈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독수리와 매의 짓일까. 까마귀의 습격일까. 당연한 생태계의 모습이 참혹하고 섬뜩하다. 조류들도 약자에게 이리도 냉혹한 사회구조였던 걸까. 한참 동안 우울했다.

 

가진 자들을 독수리에 비유한 약자의 작은 두개골과 뼈의 잔재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이 글을 읽고 가진 자들은 진솔하게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와 시대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도 수필에서는 잔잔한 속삭임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예리한 칼끝과 같다. 이것이 수필의 묘미이다.

 

가족 사랑에서 인간 사랑으로

 

역사가 바뀌고 사회가 변하면 사람들의 이념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수천 년 우리의 역사가 그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본능적으로 내재된 사랑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의 심성을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말한다. 휴머니즘은 인간과 인간의 사랑, 인간의 동물과 식물에 대한 사랑, 사회와 역사에 대한 사랑 등 모든 인간적인 사랑이며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을 말한다. 또한 그러한 본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마음 자세를 말한다. 사회의 이념이 수없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이 휴머니즘이다. 인간성 존중과 인간 해방의 사상은 시대의 인간성 완성과 인간적 교양의 원동력이 되었다.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철학적 속삭임이다. 수필은 철학적 인간이 자신의 삶의 철학을 아픔을 가지고 있는 이웃에게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는 휴머니티의 속삭임이다.

사랑을 제재로 한 작품으로 강현자의 <함박꽃> 고미화의 <벚꽃 단상> 권명희의 <유리를 사이에 두고> 김일복의 <코로나19를 겪는 우리 딸> 김정옥의 <보자기, 어깨에서 날다> 김주민의 <밥풀> 신금철의 <손을 씻으며> 이승애의 <아버지의 손> 이우주의 <할머니와 곁간> 장은영의 <이른 봄의 훈풍> <보물찾기>가 있다.

강현자는 작품 <함박꽃>을 통하여 이기적인 계산으로 사랑의 끈을 잘라버리는 요즘 사랑법과 다른 ‘순자’의 사랑을 말한다. 순자의 사랑법이란 우리네 모든 어머니의 사랑법이다. 함박꽃을 바라보며 수틀에 함박꽃을 수놓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누구나 가족에 대한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하게 되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이어진다. 우리네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사랑을 받았다 해도 그 사랑은 늘 어긋나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토로한다.

 

왕자는 이웃나라 공주를 그리다 모란이 되고, 공주는 왕자를 못 잊어 찾아갔다가 모란 옆에서 함박꽃이 되었다는 전설처럼, 사랑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그리움을 부른다. 어쩌면 내내 그리워하다 어긋나버리는 게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한 여인의 외로움도 설움도 그것은 사랑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가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남겨진 엄마 걱정에 쉬이 눈을 감지 못하셨건만, 이미 치매를 얻으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세월의 강은 이미 다 흐르고 난 뒤였다.

 

‘사랑은 기다림이고 기다림은 그리움을 부른다’는 말이 깊은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이 글에서 사랑의 결실은 결혼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사랑은 그 너머의 그리움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이로써 사랑의 원형성을 드러냈다. 그 원형성 때문에 누구나 이 글에 공감할 것이다.

고미화의 <벚꽃 단상>은 인내로써 시댁 가족들과의 사랑을 이루는 과정을 담담하게 고백하였다. ‘신앙은 궁극적인 목적지로 안내하는 등대’라는 믿음이 삶의 과정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기준이 되고 지표가 되었다는 말이 울림을 준다. 이 글에서는 가족사랑으로 머물지 않고 4월이면 다시 기억되는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사랑, 최선을 다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되었다.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라고 한다. 개성의 문학이라고 해서 정서와 사상이 개인적인 것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은 수필의 특성을 오해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독창적인 인식은 삶의 개념적인 원형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 글은 가족사랑이 사회를 넘어 자연과 우주로 확산되는 사고를 보여 가치를 높였다.

권명희의 <유리를 사이에 두고>는 코로나19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를 유리 너머로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참아낼 수 없는 슬픔을 토로했다.

 

천근같은 발길을 돌려 자동차 시동을 겁니다.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니 엄마의 몸은 더욱 크게 흔들립니다. 엄마와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집니다. 몸부림치는 엄마를 두고 발길을 돌려야만 하는 마음에 객지로 떠나며 우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했을 엄마 마음이 들어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슬퍼도 울지 못하고 견뎌내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저리도 슬프게’ 내린다고 하여 치매 어머니를 둔 모든 사람들의 슬픔으로 공유하게 하였다.

김일복의 <코로나19를 겪는 우리 딸>도 역시 가족사랑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이 작품은 코로나19로 실직한 딸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나들이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치 친구처럼 다정한 부정이 딸의 마음을 치유해가는 모습이다. 딸에 대한 사랑은 화두일 뿐이다. 딸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서사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즉 생명을 빼앗아가는 바이러스와 함께 가야 하는 시대에 사회가 나아가야 하는 자세를 시사하고 있다.

김정옥의 <보자기, 어깨에서 날다>는 손자에 대한 사랑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그러나 손자 사랑에 머물지 않는다. 대부분의 수필 작품이 손자를 소재로 삼을 경우 손자의 영특함을 자랑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사랑으로 끝을 맺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손자 사랑은 도입 화소일 뿐 제재는 보자기이다. 보자기의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이 남다르다. 일반적인 쓰임새에서 시작한 그 본질은 결국 ‘허물을 덮는다’는 원형성을 이렇게 찾아낸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한다. 보자기는 사랑이다. 감사함은 드러내고 부끄러운 허물을 감싸주며, 덮고 가려주는 보자기에게서 사랑과 포용과 배려를 배운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맺힌 크고 작은 오해도 보자기의 고를 풀듯 술술 풀리기를 바란다.
손자가 두른 보자기가 복을 둘러싸고, 꿈과 희망을 선물해 주는 요술 보자기였으면 좋겠다.

 

손자 사랑이 보자기를 타고 우주로 날아가 온 세상을 덮으면 작가의 사랑도 세상을 덮을 것으로 기대한다.

김주민은 <밥풀>에서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진하게 담아서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밥풀’이라는 아주 작은 소재가 우리 민족의 마음 바닥에 깔린 정서를 모두 일깨워 드러내고 있다. 그런 밥풀도 낯설게 다가올 때가 있다. 뇌졸중을 앓으신 아버지가 어린 시절에 우러러보이던 그 당당함을 잃어버리고 입가에 밥풀의 묻히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훈장’으로 윤기 없이 퇴색해버린 아버지에 대한 진한 사랑이 묻어난다.

신금철의 <손을 씻으며>에는 손을 소재로 삼대에 걸친 가족 사랑을 형상화되었다. 손녀의 손으로 시작한 서사는 내 손으로 향한다. 거칠고 검버섯이 있지만 자랑스러운 삶의 흔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작품 서사의 중심에는 ‘어머니의 손’이 있다. 어머니 손은 거칠어도 온기가 있고 재주가 있고 야무지다. 자랑스러운 내 손이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호강이다. 가족과 이웃에 사랑을 베푼 어머니의 손을 그리워하는 지금 마음의 병까지 씻으려는 다짐으로 손을 씻는다. 손을 상관물로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이승애는 <아버지의 손>으로 사랑의 기억을 부르고 있다. 아버지는 고인이 되셨지만 닥종이 인형으로 아버지의 손을 만들어 놓고 가족 이웃사랑의 표징으로 삼았다. 종이 인형 손이지만 온기를 느낀다. 아버지 손에 대한 그리움은 결국 내 손에 대한 성찰을 불러온다. 그리고는 손을 이렇게 개념화한다.

 

손은 인생을 대변한다. 울퉁불퉁 거친 굵은 곡선을 따라 커다랗게 펼쳐진 손을 본다. 손은 생명의 힘이다. 음식을 만들고, 건강을 예견하고, 정을 나눈다. 또한 의사소통의 도구요, 사물을 재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의 손이 없다면 이 세상은 마비되고 말리라.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오히려 불의라고 말했다. 명석한 머리. 튼튼한 다리. 영롱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손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생각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아버지의 손을 화소로 시작하여 모든 이의 손으로 수렴된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내 손’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독자의 사랑과 그리움을 불러오게 된다. 일상의 단순한 소재도 해석에 따라 깊은 철학을 내포하는 예이다.

이우주는 <할머니와 곁간>으로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할머니 사랑의 기억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미처 받지 못한 사랑을 채워주신 할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표현했다. 인생의 가을을 맞아 더욱 간절해진 그리움으로 단풍잎을 덮고 계실 할머니를 찾아간다. 그리움이 행동을 불러온 것이다.

장은영은 <이른 봄의 훈풍> <보물찾기> 두 작품을 모두 사랑을 주제로 하였다. <이른 봄의 훈풍>은 제자 사랑을 소재로 하지만 결국은 그 제자가 박사 학위를 받을 때까지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담았다. 박사 학위를 받은 제자의 점심 초대를 받고 그 어머니의 고백을 듣고 가슴 깊은 곳에 훈풍을 느낀다. 그러면서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고통의 옹이가 가슴에 행복을 심어줄 것이라 믿는다. <보물찾기>는 남편과 등산을 하면서 낙엽이 지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의 희생적 삶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가 소중한 가치라는 보물을 찾게 해 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자연과 우주의 원리 속에서 자아 성찰하는 사고의 과정이 울림을 준다.

이 11편의 작품들은 모두가 가족 또는 제자 사랑을 화소로 하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주제로 하였다. 수필에서 감동을 주는 제재 중의 하나는 사랑이고 휴머니즘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고독은 그리움을 부르고

 

이양하는 그의 수필 <나무>에서 ‘고독’이란 말로 나무의 속성을 설명하였다. 즉 나무는 자기에게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 알고 불만을 표하지 않으며 묵묵히 현재의 사명을 다하고 하늘의 부름에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는 고독을 즐길 줄 안다고 하였다. 그것이 고독이란 말이다. 소월素月은 그의 시 <고독>에서 고독은 ‘설움의 바닷가’ ‘탄식의 바닷가’에 있는 모래밭이라 하면서 ‘오늘도 지는 해니 어서 져다오’ ‘뚝 씻는 물소리나 들려나 다오’라고 노래하였다. 자아가 처한 현실에 순응하는 것이 고독이란 말이다.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라는 사전적 의미 외에도 현재를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즐기는 것이라는 문학적 속성도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고독과 고독하기에 그리운 심정을 그린 작품으로 고미화의 <고독에게> 김승형의 <길 위에 너를 묻다 그리고 피어나다> 최명임의 <바람아 바람아> <흔적을 붙들고> 황다리아의 <내 영혼의 잔치국수>가 보인다.

고미화의 <고독에게>는 고독에게 쓰는 편지 형식으로 고독의 속성을 밝히면서 자신의 고독을 고백하였다. 고독의 근원은 그리움이라면 그리움을 밝히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특히 이중섭이 그리워한 일본인 아내에게 보내는 은지 그림을 보면서 ‘긁다’에서 온 ‘그리움’의 어원을 찾아내는 기발한 사고가 돋보인다. 유년 시절의 그리움으로부터 젊은 날의 그리움으로 먼 훗날 누군가의 빈 가슴을 다독이는 소박한 작품 창작을 기원한다. 고독은 사람을 스러지게도 하지만 고독으로 내면의 샘에서 걸작품을 길어 올릴 수도 있다고 하여 고독을 긍정하였다. 절대자에게 허물을 하소연하고 위로받을 때에도 함께 하는 것이 고독이라는 맺음이 울림을 준다.

김승형의 <길 위에 너를 묻다 그리고 피어나다> 는 과거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과거의 마을, 전답, 용두레, 둠벙, 친구들과 함께하던 과거는 마르지 않는 생명의 원천이라 했다. 그리고는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고향의 모습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

 

잿빛 하늘에도 선명한 너의 그림자를 가슴에 담고 양지바른 울타리 아래 된서리에도 시들지 않고 피어있는 국화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 길 위에 너를 묻고 국화꽃 한 송이를 놓는다. 고장 난 벽시계처럼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가슴속에 멈추어 있던 네가 다시 피어난다.

 

그리운 과거는 묻혀도 새롭게 태어나게 마련이다. 그리움을 에너지로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전통은 전수되고 후손에게 계승하게 마련이다.

최명임은 <바람아 바람아> <흔적을 붙들고>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리움을 그렸다. <바람아 바람아>에서는 가슴에 바람이 든 지아비가 아내를 독수공방시키고 떠돌았지만 부부에게 그리움은 남아 있었던 원초적 그리움을 그려냈다. <흔적을 붙들고>는 고향집을 찾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한 옛날의 추억을 그리워한다.

 

우물을 들여다보다 눈물 한 점 떨어진다. 그리움이다. 우물 안은 사람 손을 탄 지 오래, 풀 잎사귀 유들지고 물이끼는 푸른 핏빛처럼 선명하다. 지금도 변함없이 솟아오르는 정화수는 아마도 놓고 가신 어머니의 염원이리. 천년을 갈 것처럼 시멘트로 우물 담을 올렸던 아버지는 백 년도 못살고 가셨지만, 담은 여전히 굳건하다.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잡초에다 훠이훠이 뿌렸다. ‘부디 너희라도 무성 하여라.’

 

고향은 어머니 아버지가 계셔야 푸근하고 풍요롭다. 부모님이 안 계신 고향은 찾아가도 더 진한 그리움만 불러온다. 그러나 추억은 남아있게 마련이므로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황다리아의 <내 영혼의 잔치국수>는 잔치국수를 만드는 과정에서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신혼 시절에 친구들과 함께 먹던 잔치국수를 ‘내 영혼의 잔치국수’로 규정하고 그날에 대한 그리움을 인상적으로 표현하였다.

 

생태적 상생의 시선

 

상생相生이란 말은 본래 음양오행설의 상생 원리를 일컫는 말이었다. 즉 金生水, 水生木, 木生火, 火生土, 土生金의 상생 원리를 말한다. 오행의 상생 원리는 생활의 모든 분야에 수용되었다. 훈민정음 창제 원리에도 오행 상생 원리가 적용되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상생은 예나 지금이나 생활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생태학에서는 공존이나 공생을 말한다. 그러나 상생相生이란 말은 공존이나 공생의 의미를 모두 포괄하는 것보다 더 넓은 의미를 지닌다. 도덕경에 유무상생有無相生이란 말이 있다. 없음과 있음이 서로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함께 사는 대화합의 정신을 강조한 말이다. 현대인은 좌와 우, 있음과 없음, 흑과 백, 선과 악으로 이분법적 사고에 젖어 있다. 그러나 생태적 상생은 인간과 자연, 동양과 서양, 종교와 종교가 상생을 통해 화합을 이루어야 밝은 문화를 이룰 수 있다는 미래지향적 원리이다.

생태적 상생의 가치를 담는 수필 쓰기가 최근 들어 새로운 경향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상생의 가치를 담은 수필은 이미 우리 고전수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구의 영향을 받아 생태와 상생의 원리를 작품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자연 생태와 상생의 철학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강흥구의 <나사못> <이끌림> 김정옥의 <수필집과 옥수수> 김주민의 <겨울을 기다리는 마음> 신금철의 <거스름돈과 잔돈> 등의 작품에서 생태적 사고와 상생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강흥구의 <나사못>에서는 일상에서 어떤 물건을 접속하거나 접합하는데 필요한 나사못에 대한 질료적 의미, 기능적 본질을 궁구하는 과정에서 그 철학적 의미를 깨닫는다. 물체와 물체를 이어주는 작지만 소중한 나사못을 보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나사못 같은 존재를 찾게 된다. 그것은 곧 정이라 결론 내린다. 상생의 매체임을 알 수 있다. <이끌림>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도움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면서 인연의 보이지 않는 끈에 이끌리어 상생의 세계로 들어서게 됨을 발견한다. 그리고는 이런 보이지 않는 이끌림의 뜻에 어긋남이 없게 가꾸고 지키며 살아가기를 다짐한다. 상생의 원리에 순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김정옥의 <수필집과 옥수수>는 조금 다른 구성으로 생태적 사고와 상생을 논하고 있다. 작가는 수필집을 한 권을 선물하고 옥수수 한 자루를 보답으로 받는다. 그리고는 수필집이 완성되는 과정과 옥수수가 익어가는 과정에서 사색 또는 자연과 상생하는 원리의 공통점을 이렇게 파악한다.

 

알찬 찰옥수수와 오달진 수필 선집. 알알이 영근 알곡과 오랫동안 사색하고 성찰하고 예리하게 통찰한 작가의 씨앗으로 맺은 결실. 자연이 수정受精해서 옥수수 알곡이 맺었듯, 세간의 삿된 마음을 작으나마 수정修正할 요량으로 펴냈을 터이다. 동식물은 암, 수가 수정하며 열매를 맺고 자손을 퍼뜨린다. 하지만 바람과 중력의 힘만으로 수정이 이루어진 옥수수처럼 수필도 무수한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중력의 힘으로 눌러 다독이며 맺은 열매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의 신비가 이룬 탱탱한 알알과 글 한 편 한 편에 숨은 의미가 맞잡이다.

 

옥수수가 익어가는 과정이 상생의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듯 수필 한 편도 ‘흔들리는 마음의 중력의 힘’과의 상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이 작품은 생태학적 상생과 사고의 상생의 관계를 찾아내었다. 수필이란 장르만이 가능한 효과를 거두어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공고히 하였다.

김주민은 <겨울을 기다리는 나무들>에서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들에서 생태의 원리를 발견한다. 겨울에 옷을 벗는 나무는 역설적이게도 더 단단해지려는 훈련 과정이라 했다. 그런 가운데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이 자연 생태의 원리이다. 나무가 겨울을 준비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작가는 다짐한다. 이 작품은 나무의 생태적 원리와 인간의 상생 원리를 하나로 묶어 생각하는 기발한 사고를 보였다.

신금철의 <거스름돈과 잔돈>은 물건을 수선하고 거스름돈을 받지 않았거나 택시를 탔을 때 잔돈을 받는 것을 생략했을 경우와 시내버스를 탔을 때 큰돈밖에 없어 누군가에게 잔돈 도움을 받았을 때 감사했던 경험을 화두로 하였다. 결국 잔돈 거스름돈은 필요한 사람에게 서로 양보하고 도움을 주는 상생의 원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나 명예와 부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잔돈의 쓰임새처럼 사람의 쓰임새도 마찬가지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가진 게 많다고 모두 가치 있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가진 게 많지 않아도, 낮은 자리에 앉았어도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고 베풂에서 행복을 얻는다면 그 삶은 가치 있는 삶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사회는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도 서로에게 도움을 줄 때도 있고 도움을 받을 때도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 사회에서의 상생의 원리라는 원형성을 구현하였다.

생태적 상생의 원리를 수필에서 받아들이기에는 더 많은 배경지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미흡한 점이 있더라도 다만 몇 작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이미 21세기 새로운 시대의 수필을 선도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고 시작된 것으로 보여서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무심 앤솔러지의 형상화 기법

 

무심 앤솔러지의 형상화 기법은 다른 동인지와 몇 가지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는 구성에서 전통수필의 구성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고려 말의 한문수필이나 조선시대의 한문수필을 몇 편이라도 읽은 독자라면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바로 사실과 체험을 사색을 통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의미화 과정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이런 구성법은 독자에게 진한 인상을 주고 쉽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점을 가진다. 고전수필 한 편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면 사실의 체험 부분과 철학적 해석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실의 체험 부분은 서구의 미셀러니에 가깝다면 철학적 해석 부분은 에세이에 가깝다. 이런 구성의 수필은 그 명칭을 에세이나 미셀러니로 번역할 수 없다. 또 경수필이니 중수필이니 하는 구분법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수필’이라고 해야 한다. 무심 앤솔러지의 작품들은 대부분 이와 같은 ‘수필’ 구성법을 따르고 있다. 작품 한 편을 두 부분으로 정확하게 나누지는 않았지만 문단별로 아니면 한 문단 안에서도 이러한 구성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옛 수필의 구성법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이런 구성법이 쉽게 감동을 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사고의 과정이 이런 구성법으로 훈련되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사색과 철학적 해석 과정에 수필적 상상의 단계를 적용하는 전략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단계는 어려울 것 같지만 매우 간단하다. 대상에 대하여 먼저 물리적으로 또는 질료적으로 본질을 추구한다. 다음에는 물질적 본질을 역동적으로 자아에 견주어 보는 역동적 상상의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 다음 원형성을 구현해내는 것이다. 이런 상상의 전략으로 창작에 임하는 것은 끊임없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사고를 완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셋째로 소재를 단순한 소재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내면의 상관물로 삼아 심도 있게 궁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상관물의 본질을 고백하면서 은근히 자신을 고백하는 이점이 있다.

마지막으로 밝힐 무심 앤솔러지의 공통적인 장점으로 개인의 정서와 철학을 삶의 원형으로 개념화하여 표현한다는 점이다. 수필은 개성의 문학이라 하여 자칫 개인적 정감으로 끝나버리면 그것은 자랑거리, 푸념, 넋두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냥 재미있는 일화나 이야기로 전락해버린다.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인식해야겠지만 결국 삶의 보편적 개념으로 수렴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원형성을 구현하면 모든 독자의 공통 사건으로 귀결되므로 울림을 주게 된다. 이러한 사례들을 일일이 예문을 들어 설명하는 것이 좋지만 지면 관계로 여기서 줄이고자 한다.

붓은 동물의 수염이나 꼬리털로 이루어져 심이 없지만 잘 닦아서 쓰면 심을 중심으로 만든 펜이나 연필보다 더 힘 있고 큰 글씨를 쓸 수 있다. 무심無心은 언뜻 보면 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크고 강한 심이 있다고 자부한다. 그러니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더 큰 글씨로 힘 있는 글을 뚜렷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