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와 파토스의 미학
허상문
들어가며
과학 기술과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적 삶에서는 갈수록 이성과 지성의 논리가 삶의 중요한 태도로 여겨진다.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준 편리와 안락에 깊이 침윤되어 사람들은 점차 정심세계의 중요성에는 관심이 사라져 가는 듯하다. 기술과 자본의 힘에 의존하다 보니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는 거듭된 불화와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코로나19’라는 정체불명의 질병이 창궐하고 있는 것도 인간과 다른 생물,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생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인간다운 삶은 타자(세상)를 위한 공감과 희생을 가능케 하는 사랑의 감정으로부터 성숙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고하고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점차 소멸해 간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심미적 삶의 가치는 더욱 절실하게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 이성보다는 감성적 삶의 태도가 더욱 필요하다. 심미적 삶의 가치란, 빈센트 것과 같은 ‘예술적 경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는 문학과 미술과 음악 같은 예술적 창작활동을 의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예술가나 비평가가 예술적 아름다움의 감각과 경험을 특별하게 보여주는 것을 뜻한다. 반드시 예술적 체험이 아니라 하더라도 삶의 어떤 특수한 상황에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요컨대 심미적 경험이란 인간에게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그 능력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감정이나 활동을 이해하거나 미적 특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심미적 경험이 예술적 기준의 특질로서 작용하는 과정을 말과 글로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방식은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는 표현과 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수사학이라고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그 시대의 말과 글을 위해서 는 물론 25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전달방식으로 유효하다. 그는 올바른 시(문학)을 위한 미적 경험의 표현으로서의 수사학과 설득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그것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관계는 일반적으로 말을 통한 ‘설득’과 글을 통한 ‘수사’라는 수단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쉼 없이 타인을 설득하거나 타인에게 설득당하면서 살아간다. 사람은 이성적 동물이지만 이성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이를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진정한 설득과 수사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지 명료하고도 생생한 가르침을 준다.
그는 수사학과 설득의 중요한 요소를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 로고스(logos)의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는 각각 개별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혼합되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진정한 기능을 이룰 수 있다. 먼저 누군가를 설득하는데 있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에토스이다. 아무리 이치에 맞게 로고스로 상대를 설득한다고 해도 화자의 에토스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타인의 마음은 절대 움직이지 않는다. 에토스는 말하는 자의 행위나 능력이 아니라 화자와 청자 간 상호작용의 결과물로 화자의 명성과 평판 그리고 육감적으로 느끼는 신뢰감 같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글쓰기를 우해서 에토스보다 더욱 중요한 게 필요한 영격은 파토스와 로고스이다.
파토스는 저자가 독자 설득하기 위해 사용하는 감정적 호소로서 독자의 감정을 이용하여 그들의 입장을 바꾸거나 결정할 수 있도록 호소하는 수사의 방법이다. 파토스는 독자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감정인 분노와 온유, 호의와 적대감, 공포와 두려움, 친절과 불친절, 동정심과 자비 등을 포함한다. 이 감정은 독자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저자가 독자들에게 이야기할 때 생겨난 것이다. 반면에 로고스는 무엇인가를 증명하려는 담론 혹은 그 자체에서 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호소를 의미한다. 로고스적 호소는 연역적인 방법인 삼단논법과 귀납적인 방법인 범례의 유형으로 나누어지면서, 그 내적 논거들을 얼마나 잘 발견하고 활용하고 있는가와 관련된다. 로고스가 변증법이나 논리학과 가까운 것도 바로 이러한 측면 때문이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말의 설득보다도 글의 수사방식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서구 사상은 목소리가 직접성을 가진 것으로 선호하고, 반면에 문자는 간접성을 지닌 것으로 저급하게 취급했다. 이는 로고스라는 그리스 말의 의미만을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로고스라는 뜻은 ‘이성’이기도 하고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성의 사유는 목소리 안에서 충만하게 구현될 수 있지만, 문자는 이 로고스와 이질적으로 그 ‘바깥’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문자의 등장은 음성이라는 로고스의 활동에 손상을 끼치면서 안과 밖이 전도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소 이래 서구에서는 음성중심주의가 뿌리 깊은 사상이었지만, 데리다 같은 사람은 서양 철학에서 뿌리 깊은 음성중심주의의 ‘해체’를 강조했다.
말과 글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문명의 발전 이래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 과학화 되어가면서 이성과 지식은 발전을 거듭해 왔지만, 그에 맞서는 감성과 정신의 영역은 갈수록 위축되어 왔다. 더 나아가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는 극심한 로고스적 삶의 중심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파토스적 삶의 태도를 상실하거나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삶과 문학에서 이성과 감성은 빛과 어둠과 같이 서로 조화하고 화해함으로써 그 상반성을 극복하고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달에는 이방주의 <보리누름에>, 윤미애의 <매霉가 필 때>, 김미화의 <새가 된 물고기>를 읽어본다.
이방주 <보리누름에>
그것이 가난이든 아픔이든 때로 추억은 아름답다. 지나간 시간은 때로 봄날의 아지랑이같이 눈앞에서 피어올라 생각할수록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 속엔 항상 춥고 배고팠던 기억과 우리들의 초상이 담겨 있다. 만약 그 시절이 호의호식하던 시간이라면 우리의 추억을 그렇게 자극하지는 않을 것이다. 너나없이 가난하고 헐벗고 쪼들렸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더욱 생생하다. 일 년에 한두 번 명절 때에만 고깃국을 먹을 수 있었고 쌀밥은 할아버지 진짓상에만 올려놓던 시절이었다.
<보리누름에>는 사라진 시간 속에서 과거의 삶과 의미를 추적한다. 보리밭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보리밭은 “고통과 낭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어린 시절 배고픈 하굣길에 바라보던 누런 들판은 소담하기는 해도 어쩐지 고통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보리밭둑에는 어김없이 피어나던 하얀 찔레꽃 향기도 아르다움으로보다 서러움으로 다가왔다.
찔레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면 보리를 베고 타작하는 고통이 기다렸다. 가을걷이 때까지 싫어도 먹어야 하는 보리밥이 고통처럼 기다렸다. 보리 베기를 하는 날만큼 짜증나게 더운 날도 없었고, 보리타작하는 날만큼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뜨거운 날도 없었다. 이날은 꼭 오래된 무명 조끼적삼을 입었다. 마당에 보릿단을 펼쳐 놓고 한나절 도리깨질을 하고 나면 어깻죽지가 벌겋게 익었다. 온몸이 보리까락으로 까끌까끌했다. 따가운 햇살은 등줄기가 젖을 새도 없이 땀을 걷어갔다. 몸에 붙은 보리까락은 물로 씻어내도 남고, 무명 적삼에 묻은 보리까락은 보릿짚을 태우며 불꽃에 그슬려도 남았다. 기억은 지금까지 남아 보리밭둑을 걷기만 해도 온몸이 까끌까끌해진다.
“오래된 무명 조끼적삼”처럼 한결같이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가난이 미덕이 아닐진대 화자는 가난을 예찬하려는 것도 아니고 간혹 매스컴에 보도되는 것처럼 지독한 가난을 옹호하려는 것도 아니다. 헐벗고 굶주렸던 고통스럽게 처절했던 삶을 미화하려는 것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가난도 익숙하면 정다운 것이지 부유하모다 가난이 낯익고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그래서 화자는 말한다. 보리밥이 고통스러운 것은 맛 때문만은 아니었다. 도시락이 꽁보리밥이라는 불편한 자존심 때문이었다. 보리밥은 곧 가난이라는 부끄러움이 그들을 힘들게 했다.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을 때는 뚜껑으로 반쯤 덮고 먹었다. 부끄럽게 숨어서 먹어야 하는 점심시간의 무너지는 자존심은 어린 시절의 고통이었다. 하지만 가난도 간난 나름이다. 옛날의 가난은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의 가난이어서 없어도 가난인 줄 모르고 서로 나누며 인정을 나누었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보릿고개’를 넘던 그 시절은 아름답고 행복했다. 가난이 행복일 수 있던 시절이다 보니 간난에서 배어 나오던 우애와 화합을 오늘날 같은 현대적 삶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보리 베기를 하는 날이나 타작할 때 감나무 아래 들마루에서 먹던 햇감자도 그렇고, 꽁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고추장에 풋고추를 찍어 함께 먹던 가족들의 웃음도 지금은 다 그리운 옛날이다. 보릿단을 마당에 깔아놓고 형제들이 도리깨질로 장단을 맞추던 추억도 그리운 한 가닥 아름다운 그림이다. 형제들은 서로에게 우애를 가르쳤다. 이야말로 고통에서 저절로 배우는 화합하는 삶의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우리에게 행복의 길이 열리는 것은 얼마든지 ‘가난’을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여긴다. 가난 속에서 존재의 부유함을 이루는 거야말로 풍요로운 가난을 느끼는 길이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가난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직 자신에만 집착하고 몰입하면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소유하고자 하고, 그러한 소유욕이 결국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서 가난이 아름답다는 것은 소유에서 자유로워지고 자기중심적 인간에서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화해하는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보리가 익어갈 때 까끌까끌한 추억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찔레꽃 하얗게 피어난 밭둑이 그리운 것은 가난해도 마음만은 행복했던 옛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얗게 표백된 가족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돌이킬 수도 찾아갈 수도 없는 고통을 나누는 화합의 지혜이었다.
보리누름에 배바우 마을 보리밭둑길을 걸으며 나는 옛날을 찾아가고 초여름 강물은 미래로 달려간다.
그 옛날에는 가난에서 “고통을 나누는 화합의 지혜”를 배웠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자꾸만 물질 만능으로만 치닫는 세상에서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아름다웠던 날들을 회상하며 인간다운 참모습을 찾고 싶을 때가 있다. 오직 하나같이 물질적 풍요만을 추구하는 시대에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를 물으면서 화자는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그리하여 자신도 모르게 물질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실을 경계하며 행복했던 옛날을 되돌리고자 한다. 작가는 현대의 로고스가 지배하는 삶의 세상에서 인간적이고 정신적인 파토스의 삶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에 빠져 살아가는 삶의 상황에서 가난에 대한 기억은 파토스의 그리움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존중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부의 유혹에 빠져 가난했던 날의 평화로움과 아름다움을 외면하고 만다. 부유한 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던 시절의 나도 소중한 나다. 모진 가난 속에서도 인간적 자존심은 새파랗게 살아 있었다.
<보리누름에>는 적게 소유하며 사는 선택적 가난의 삶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하여 가난하던 시절의 아름다움과 고통의 연대를 통한 풍요로움의 세계로 들어가는 소중함을 경험하게 된다. 가난은 때로 비정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마음은 풍요롭고 맑은 영혼을 간직함으로써 가난은 보약이 될 때도 있다. 일부러 가난을 선택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고 청빈한 삶의 정신을 간직하고자 하는 삶의 소중한 의미를 <보리누름에>는 일러준다. 물질과 이서의 위력이 아무리 맹위를 떨치는 삶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과 영혼의 보편적 진리를 간직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도리이다.
(수필과비평 2020년 7월호 이달의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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