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하동포구에 떠오른 무지개, 그 실존의 흔적 -김규련 작품론-

느림보 이방주 2020. 7. 27. 04:28

김규련 작품론

 

하동포구에 떠오른 무지개, 그 실존의 흔적

 

이방주

 

□ 적막한 우수 빛깔의 무상無常

 

수필가 김규련(1929~2015)은 자신의 수필을 ‘적막한 우수 빛깔의 무상無常’이라고 했다. 무상은 허무함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함을 의미한다. 그가 말하는 무상은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나고 변하고 없어지고 또다시 나는 것이어서 그대로인 것이 없는 삶의 변화를 의미한다. 김규련의 수필에는 무상한 인생의 끊임없는 순환이 녹아 있다.

소목素木 김규련은 1968년 《수필문학》에 작품 〈강마을〉을 발표하여 등단한 이래 2015년 6월 별세할 때까지 《강마을 1977》 《거룩한 본능 1979》 《종교보다도 거룩하고 예술보다도 아름다운 1985》 《素木의 횡설수설 1989》 《높고 낮은 목소리 1992》 《귀로의 사색 2003》 《즐거운 소음 2007》 《이 분들이 계셨다 2011》 《흔적 2012》 등의 작품집을 냈다.

김규련 수필의 가치를 알아보려면 모든 작품을 소화해야겠지만 《거룩한 본능 2011 범우사》 《즐거운 소음 2007 좋은수필사》 《흔적 2012 도서출판 그루》에 수록된 100편 내외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대표작들을 실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주로 선집을 대상으로 하였다.

수필은 생활인의 문학이다. 수필은 생활인이 생활인에게 들려주는 나지막한 속삭임이다. 시는 인간이 신에게 일방적으로 드리는 소망의 말씀이라면, 수필은 이웃이 이웃에게 들려주는 따뜻한 치유의 속삭임이다. 시인은 사제에 가깝고 수필가는 아픔의 치유사이며 함께 울어주는 곡비哭婢와 같은 이웃이다. 그래서 수필은 생활이 절절하게 녹아들어야 깊은 울림을 준다.

수필은 일상의 철학적 해석이다. 수필에는 일상에서 소환한 진실한 체험이 녹아 있어야 한다. 진실한 체험의 진정성 있는 고백이 독자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지름길이다. 수필이 어떻게 일상을 떠날 수 있는가.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주제를 정하고 소재를 찾아 나선다면 그것은 이미 의미를 전제로 한 허구적 체험이 될 것이다. 김규련은 일상의 체험에서 명상으로 자아의 실체를 각성하고 깨우침을 얻어 영성에 도달한다. 그의 말대로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점오점수漸悟漸修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의 작품은 일상이라는 소재에서 상상을 통하여 영성을 얻어내어 영격에 이르렀기에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일상의 해석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는 존재의 각성에 있고, 불교적 인과 연을 바탕으로 한 선적 달관에 있으며, 자연에 대비되는 현대 문명에 달관한 선인仙人의 경지에 이른다. 그런 가운데 삶의 영적 승화를 획득한다. 거기에는 은근하지만 확고한 수필관도 숨어 있다.

일상에 대한 철학적 해석만 있고 그 해석을 형상화하지 못한다면 울림의 에너지를 얻지 못해 문학이라기보다 단순한 교술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인식과 해석은 문학적 형상화로 긴장된 질서를 지닐 때 예술성이 배가된다. 김규련 수필에서 인식의 형상화 과정은 매우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영적 세계에 이르는 수필적 상상의 전략만 살펴보기로 한다.

노년에 수필선집 《흔적》을 내면서 ‘내 삶의 흔적이 남루하고 가긍하고 부끄럽게 느껴’진다고 토로한다. 그가 걸어온 50여 년 수필 인생이 남루하고 가긍한지는 독자가 가늠할 뿐이지 스스로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점수頓悟漸修, 점오점수漸悟漸修하는 존재의 각성

 

돈오돈수란 한 순간에 문득 깨달음을 얻는 것을 말한다. 점오점수는 어떤 수행의 과정이나 단계를 거쳐 점점 깊이 있게 이치를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김규련은 수필 창작과정에서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말하기도 했다. 문득 깨달음을 가져오는 과정에는 반드시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이루어내야 하는 수행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의 작품은 그가 수행 같은 일상 속에서 깨달음을 얻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작품 〈고백〉 〈노객의 자명등〉 〈황혼의 여로〉 〈바위〉 〈까치밥〉 〈영산홍과 놀다〉 〈칠안저고리〉 〈자기 비문〉 〈파한의 나들이〉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는 없다. 그의 작품에는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의 지혜를 문득 깨닫는 모습도 보이고 보다 바람직한 삶의 철학을 지니기 위해 정진하는 과정도 배어있다.

창작 수련의 필수적인 과정은 자기 고백이다. 자신의 창작 수준에 대해 정확하게 돌아보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문학성을 제고하는 지름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수행과 깨달음의 출발은 성찰과 자기 고백이다. 고백은 현재를 고백하기도 하고 과거를 고백하기도 한다. 또는 미래 자신의 삶을 설계하여 고백하기도 한다. 어떤 고백이든지 자기를 돌아보고 객관화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다시 말하면 개인적인 감정이나 정서만이 아니라 보편화된 자아를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백은 하나의 수행과정이기에 성찰과 각성으로 존재를 차근차근 확인하는 점오점수가 아닐까 한다.

작품 〈고백〉에서 수필적 자아를 객관화하여 교직을 중심으로 자신의 일생을 되돌아본다. 작품 〈황혼의 여로〉 〈노객의 자명등〉에서는 노년의 고독, 질병, 가난, 무위無爲 등 노인사고老人四苦를 노궁老窮이라면서 정인情人과 같은 수필을 사랑하며 노궁에서 벗어난 자신을 돌아보았다. 결국 ‘수필가는 영혼의 화가’라는 명제로 자각하면서 구도자의 자세로 깨달음을 추구해야 한다. 〈바위〉에서 바위를 조화의 명수, 집념의 화신, 염원의 상징으로 궁극적 본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무설無設의 설設’을 품고 있음을 밝혀냄으로써 존재의 원형성을 천착해낸다. 수필 창작에서 본질 추구는 곧 치곡致曲하여 견색見賾에 이르는 길이라는 본보기가 된다. 곡절을 끝까지 천착하면 나만의 독창적 인식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바위의 불변성이 곧 자신이 지향해야 할 가치의 세계임을 자각하여 고백한다. 〈바위〉에 드러난 각성의 과정은 점오점수의 과정으로 보여 더 든든하다. 그밖에 〈까치밥〉은 자기희생의 질서, 〈영산홍과 놀다〉는 우주의 순환질서, 〈칠안저고리〉는 모친에 대한 그리움을, 〈자기 비문〉은 자기 각성을, 〈파한의 나들이〉 삶과 죽음의 세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존재를 깊은 명상으로 확인하였다.

 

사람이 사바에 나와 그늘과 빛 따라 울고 웃으며 뒹굴다 보면 그 한 뉘는 잠깐이다. 이것을 온몸으로 절감하자면 망구望九의 산등성이에 올라 봐야 할 것이다. 팔순 줄에 든 사람은 가시권의 끝자락에 나부끼는 마른 잎새와 같다.
〈노객의 자명등〉
인간은 역시 인간이기 때문에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때로는 난처한 자기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부득불 이웃을 헐뜯고 모함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은 가을 강변에 나가 여래의 마음처럼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용서해야 할 것입니다.
〈무정설법〉
세상 문물은 바뀌고 또 바뀌었다. 그리고 인심도 변했다. 이제는 마음의 뜨락에 잡초만 무성해도 손에 쥔 것이 많으면 사람대접을 잘 받는 세월이 되었다고 할까. 어느덧 나도 이런 시류에 휩싸여 슬픈 반백半白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오늘도 바람 부는 행길을 뛰고 있다.
〈어느 자세〉
자기의 비문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스스로가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다음날 세워질 자기의 비문을 의식하지 않으며, 또 의식하지 아니하려 하고 의식에서 해방하려 하는데 현대의 위기가 있지 않을까.
〈자기의 비문〉

 

〈노객의 자명등〉은 작가 자신뿐 아니라 인간의 삶을 관찰과 통찰로 잎새와 같은 운명으로 자각하는 과정이고, 〈무정설법〉은 자연에서 거짓 없이 삶의 진리를 배워야 하는 본질을 터득하였으며 〈어느 자세〉나 〈자기의 비문〉은 현대인의 가치관의 위기를 한탄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개인적인 정서를 일반적인 정서로 보편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김규련 수필가는 일상을 깊이 있게 관찰하고 관조하여 삶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대상을 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그의 각성이 자신에 머무르지 않고 보편화된 자아를 고백하였다.

 

□ 인연생기因緣生起의 세계관으로 선적禪的 달관의 경지에

 

김규련 수필은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연기설은 우주의 삼라만상은 모두가 원인과 결과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작품을 읽는 동안 ‘인연생기因緣生起’ ‘연기緣起’ 같은 단어들이 꼬리를 몰고 일어난다. 모든 존재와 현상은 씨앗[因]을 심고 조건[緣]에 맞아야 존재가 형성된다. 석가모니는 참선에 들었던 부다가야에서 인연생기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인연생기라는 진리를 믿는다면 붓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수필이 저절로 써진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 수필은 수필修筆과 같아서 우선 붓을 닦아야 한다. 붓을 닦는 일에는 먼저 마음을 닦아 가지런하게 해야 하고, 진정성 있는 체험을 해야 하고, 대상을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고, 그에 대한 통찰과 해석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부단한 문장 수련이 추가되면 금상첨화이다.

김규련 수필가는 선적 명상으로 삶의 노고老苦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거미〉에서는 노인사고의 고독고, 병고, 빈고, 무위고를 넘어서 ‘깊고 푸른 안목으로 우주 자연을 응시’하여 미추도 없고 귀천도 선악도 없는 달관의 경지에 든다. 〈구름나그네〉는 구름나그네가 되어 자연의 모습에서 수난의 역사를 통찰한다. 〈봄의 뒷모습〉에는 부부간의 인연의 끈을 쟁기의 타줄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나는 인연연기로 잠시 결합된 존재이다. 나의 실상은 비존재요 공空이 아닐까. 무아無我인 내게 내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니거늘 무엇이 내 것 될 수 있으랴. 일용하는 사물은 잠시 잠깐 빌려 쓸 뿐이다. ‘참나’는 내 영혼 속에 숨어 있는 자성自性 뿐이다.
〈황혼의 여로〉
타줄의 역학 관계 속에서 부부의 지순한 애정이 오가고 있음을 읽는다. 다음 순간 타줄이 한 가닥 더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내와 남편의 가슴과 가슴 사이에 인연의 타줄이 이어져 있지 않은가. 이 타줄을 통해 서로가 지녀온 삶의 방식과 보람과 애환이 물들어 가고 옮아가고 닮아 가리라. 마침내 기쁨과 눈물을 같이 느끼는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닌가.
〈봄의 뒷모습〉

 

〈황혼의 여로〉는 자아와 세계는 인연생기의 섭리에 따라 잠시 하나가 된 존재이기에 본디 ‘나’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세상에는 내 것도 없고 내 것 아닌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자칫 이것을 허무주의로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허무가 아니라 무상이다. 무상은 없음이 아니라 변화하고 순환한다는 의미이다. ‘나’와 세계는 잠시 결합될 수도 있고 분리될 수도 있다. ‘없음’이 ‘있음’이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란 말이다. 나를 없음으로 보면 세계도 없음이다. 그러니 ‘참된 나’란 내 영혼 속에 숨어 있을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이 명상은 달관을 낳는다. 수필은 명상의 문학이고 무위에 이르는 달관의 문학임을 보여준다.

〈봄의 뒷모습〉은 부부간의 인연은 분명하지만 구체적 형상이 없다. 형상이 없는 것을 형상으로 보여 준 것이 타줄이다. 기막힌 혜안이다. 인연생기라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이만큼 혜안으로 달관에 이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인연생기의 철학이 바탕이 되고 있다. 그의 수필을 읽으면 그가 어떤 생활철학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냈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달관의 경지에서만 달관의 경지에 이른 수필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 자아와 세계의 합일로 영적 승화

 

김규련 수필가는 창작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영격지수靈格指數를 높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영격지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명상과 독서를 중심으로 수행을 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영격이란 흔히 불가에서 말하는 세 가지 독이 되는 마음의 뿌리[三不善根]로부터 벗어나서 달인이나 도인이나 진인眞人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세 가지 독이 되는 마음 곧 탐진치란 탐욕貪慾, 진에瞋恚, 우치愚癡를 말하는데 이로부터 벗어나는 명상이 창작에 앞서 이행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성수 교수는 작가들의 숙명적 과제로 영성계발을 요구했다. (《수필 오디세이》, 2015 수필과비평사) 그에 의하면 ‘예술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작가가 영성을 깨워 소재를 통찰하고, 다시 그 내용을 문학적 언어로 재현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영성이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창작 과정에서 영성을 깨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말은 김규련 수필가의 영격지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안성수 교수는 영성계발을 위한 명상을 ‘제재 선택―몰입―진정성 공간이입―우주적 통찰―깨달음(절정체험)―문학적 재현’의 6단계로 이루어진다고 설명하였다.

김규련 작품은 대부분 명상으로 삶의 영적 승화를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거룩한 본능〉 〈미완의 꿈〉 〈아픔의 흔적〉 〈개구리 소리〉 〈맥문동〉 〈강마을〉 〈섬진강의 달밤〉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삶의 본질을 꿰뚫어 격물치지로 영적 승화를 이루었고, 자연과 문명의 대비를 통하여 또는 현대 문명을 누리면서도 지난 시대를 그리워하기도 하면서 문명 속에서도 자연을 누리는 선인 같은 풍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황새도 영물일까. 산골의 날씨는 무섭게 추워지려는데 짝을 버리고 혼자 남쪽으로 갈 수 없었던 황새의 정, 조류에 따라서는 암수의 애정이 별스런 놈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그들의 본능이라 했다. 그러나 어쩐지 그들의 하찮은 본능이 오늘따라 인간의 종교보다도 더 거룩하고 예술보다도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거룩한 본능〉
나는 어린 시절을 강마을에서 자랐다. 남해대교에서 섬진강을 따라 70리, 뱃길로 한나절을 가면 포구가 있다. 이 H포구는 어느 산기슭에 울먹이며 물새 한 마리를 묻어주던 소녀도 이제는 불혹不惑의 유역을 흐르고 있을 것이다. 낙엽으로 지는 세월 속에서 얼마나 많은 애환의 기슭이며 영욕의 여울목을 그녀는 지나갔을까. 사랑도 미움도 서러움과 기쁨도 어쩔 수 없이 흘러간다는 강물의 슬기를 사무치게 느꼈으리라. 강물의 흐름이 곧 여래의 마음인 것을
〈강마을〉

 

이 두 작품에서 작가는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욕심 없이 자신을 비운 진실하면서도 참된 자아로 진정성을 회복하고, 대상이 되는 존재의 본질을 궁구하여 자기만의 독창적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때 묻지 않은 본연의 자아를 만난다. 이와 같이 가장 순수한 자아를 찾았을 때 작가는 우주를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눈이 되어 세계를 통찰한다. 즉 자연과 인간세계를 하나의 세계로 볼 수 있게 되어 황새의 생태가 거룩하게 보이고 강물의 흐름이 역사를 넘어 여래如來로 보이는 영적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통찰하기 위해서는 자아가 대상에 몰입하여 하나가 되고 세계는 자아로 스며들어 세계와 자아가 합일의 과정에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자아―우주―황새, 자아―여래―강마을의 합일이 이루어지면 황새나 강마을의 현상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그 대상의 본질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에게는 황새의 죽음이나 강의 흐름이 자연의 섭리, 우주의 본질 작용으로 보이게 된다. 이렇게 명상으로 인식의 과정이 영적 경지에 이르면 명상 과정을 구조화하게 된다. 위에 열거한 작품뿐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명상이 영적으로 승화되어 형상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 무언의 대상에서 침묵의 언어를

 

수필은 철학적으로 인식하여 문학적 언어로 형상화해야 하기에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해 표현 과정이 쉽지 않다. 이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한다. 노자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비상명名可名非常名’이라고 하여 도의 언어적 표현의 어려움을 말했다. 불가에서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하여 불연속적인 언어로써 연속적인 도를 잘라 말할 수 없는 한계를 수긍하였다. 이렇게 철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기에 명상이 필요하고 영격지수에 따라 작품의 질이 정해진다고 했는지 모른다. 프랑스 소설가 구스타프 플로베르의 일물일어설도 표현의 어려움을 역설적으로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즉 어떤 사물을 논리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말은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만큼 개념과 기호 사이의 논리적 거리를 좁히기 위한 수련을 강조한 말이라 풀이된다.

영격지수를 강조한 김규련 작품이 미적 울림을 가져올 수 있었던 형상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아름다운 문장, 비유와 상징을 통한 낯설게 하기 기법, 표현의 참신성 같은 것은 생략하더라도 수필적 상상의 전략적 기법은 빼놓을 수가 없다. 수필 창작과정에서 진정성 있는 체험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독자를 유인하는데 언어적 한계가 있다. 허구가 아닌 사실의 기록에서 정서를 객관화하는데 ‘읽는 재미’를 독자에게 제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효과를 거두는 것이 사실적 체험의 분위기와 정서를 상상으로 구조화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와 같은 수필적 상상은 가스통 바슐라르의 문학적 상상 이론을 토대로 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물질적 상상-역동적 상상-원형적 상상’의 단계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 〈바위〉에서 상상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바위가 산에 있으면 온갖 수목과 어울려서 산세를 돋보이게 한다. 바위가 계곡에 있으면 흐르는 물과 더불어 산의 경관을 아름답게 한다. 바위가 들에 서 있으면 나부끼는 억새와 정동의 대비로 살아있는 자연의 구도를 보게 된다.
㉯ 바위는 오랜 인고의 시간이 다져져서 마침내 고체화된 세월의 모습이다. 어떤 바위는 불덩어리를 식혀온 기나긴 풍상의 세월이 감춰져 있고 또 어떤 것은 물밑에서 꾸준히 이뤄온 퇴적의 흔적이 있다.
㉰ 바위를 한참 바라보면 마침내 바위 속에 응집해 있던 무량의 시간들이 폭풍으로 돌변해서 가슴을 흔들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떤 것은 원을 그리며 지나가는가 하면 어떤 것은 직선을 그으며 지나간다. 또 어떤 것은 점선으로 고리를 이으며 지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우주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 그리고 실존적인 시간들이 저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있는 것 같다.
㉱ 바위는 교만과 자랑이 없는가 하면 불평도 다툼도 없이 그저 존재한다는 자기 몫을 다하여 묵묵히 있을 뿐이다. 때때로 바위는 표리부동한 인간의 모습과 조석으로 바뀌는 인심을 보고 히죽히죽 웃기도 한다. 바위에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불사고不思苦, 불사락不思樂을 알리는 침묵의 언어들이 달려 있다.

 

㉮는 바위의 물질적 상상이다. 바위의 외적인 모습을 묘사했다. 외적인 모습이라도 바위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상상하여 분위기를 형상화했다. ㉯는 상상을 통하여 바위의 형성과정에 내재되어 상징하는 인생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에서 바위와 자신의 관계를 연계하여 인식하였다. 역동적 상상이다. 바위에 비친 나의 내면과 아울러 나에 비친 바위의 내면이다. 세계의 자아화에서 자아의 세계화로 상상이 진행되었다. 수필적 상상에서 역동적 상상이 자기 고백의 열쇠가 된다. 〈바위〉를 비롯한 김규련의 작품은 역동적 상상의 단계에서 충분히 자아 성찰과 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이 과정에서 변증법적 사고로 원형성을 찾아내는 설리를 엿볼 수도 있다. ㉱에서는 바위의 본질을 추구하여 그 원형성을 드러냈다. 바위의 불변성이 인간의 표리부동함이나 조변석개와 대비되어 인간을 조롱한다. 그러면서 바위의 원형성인 ‘침묵의 언어’를 확인하였다.

창작과정에서 대상에 대한 수필적 상상의 단계적 수용은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그는 이런 유의 작품에서 그의 말대로 수필도 구성이 없으면 안 된다는 점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김규련은 수필적 상상의 구조화로 바위처럼 무언의 대상에서 침묵의 언어를 찾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어떤 수필가의 작품론을 위해서는 그가 가진 수필관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김규련은 수필가를 ‘영혼의 화가’라 했다. 〈억새풀꽃 나의 수필〉에서 ‘나의 수필은 한 촉의 억새풀이고 싶다’면서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자신의 개성을 말하였다. 수필은 작가 자신의 목소리이고, 수필에서도 반드시 구조가 필요하고, 감동에 따라 음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피력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음향은 남도의 판소리나 폭포소리를 넘어서 득음한 소리 같은 음향이기를 소망한다. 〈나의 삶과 수필문학〉에서는 수필가로서의 삶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자괴의 독백〉에서는 ‘수필은 관조의 문학인가 하면 사색의 문학’이고, ‘감동의 문학이면서 예찬의 문학’이라고 했다. 그는 짧은 문장이라도 뜻이 깊어야 하고, 진솔하고 정직한 체험의 고백이 있어야 하며, 장인다운 솜씨와 오묘한 깨달음이 조화를 이룰 때 좋은 수필이 된다고 하였다.

 

□ 하동포구에 떠오른 무지개

 

素木 김규련만큼 수필가로서 자부심을 가진 수필가도 드물 것이다. 스스로 억새풀 같은 수필을 쓰고 싶다고 고백한 만큼 그의 작품은 난초 같은 격조를 원하지 않았으나 난초보다 격조가 있고, 국화처럼 화사함을 원하지 않았으나 국화보다 화사하다. 억새가 그렇듯이 그가 원하는 것처럼 ‘적막한 우수 빛깔의 무상無常’이 오히려 읽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그는 하동 섬진강 포구에서 태어났으나 대구 경북에서 문학 활동을 했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의 하동포구를 잊지 못했다. 그의 수필은 하동포구에 떠오른 우수 빛깔의 무지개이다. 그의 무지개는 허망한 무지개가 아니라 억새꽃 같은 존재의 각성이 있고, 삶의 본질을 꿰뚫는 영적 승화로 선禪적 달관의 경지에 이른 실존의 무지개이다. 그는 수필을 쓰는 반백년에 점오점수하듯 자연과 문명을 초탈한 자연 속의 선인이 되었다. 그가 후배 수필 지망생들에게 강조한 영격지수를 스스로 도달한 실존의 무지개로 떠올라서 수필가의 본보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