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서재/문학과 수필평론

자연에서 이룬 존재의 정원

느림보 이방주 2020. 7. 8. 09:03

강흥구 수필가의 수필집 《산밭에 핀 도라지꽃》

자연에서 이룬 존재의 정원

 

이방주 (수필가, 문학평론가)

 

□ 들어가기

 

사람들은 누구나 삶의 세계에 존재한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소크라테스 이전에 엘레야 학파를 세운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 기원전 510년경~450년경)는 존재는 모든 것이 가진 속성일 수도 있고 물리 세계 너머에 또는 그 위나 뒤에 있는 대상이나 영역일 수도 있다고 했다. 불가(佛家)에서 존재(存在)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파악하기 위해 일정한 조건을 채운 현상들을 두루 일컫는다. 보통 그 현상들이 물리적인 인과 관계를 가질 때 ‘존재한다’라고 인식된다. 그리고 그 존재의 실체는 오감에 의해서 알아낸다. 장폴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는 인간은 실존적 존재임을 밝히고 실존은 본질에 앞서는 것이며 주체성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였다. 그는 인간의 의식과 자유의 구조를 밝히면서 실존의 결단과 행동과 책임과의 연대성을 강조하였다. 기원전의 철학자로부터 20세기 철학자들까지 존재에 대한 견해는 물리적 존재 너머의 존재까지를 존재로 인식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사르트르는 존재 너머의 영역이나 본질을 넘어서 주체성을 포함하여 실존이란 명제로 제시하였다.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사이의 C(Choice)이다.’라고 말했다.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 말은 선택의 순간에 결단과 행동 그리고 선택 이후의 책임을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인과관계를 가지는 현상을 존재로 파악하는 불가의 가르침과도 상통한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수없이 선택의 순간을 맞이한다. 아니 한 발 내딛는 순간을 모두 선택의 기로(岐路)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로는 선택을 강요받기도 하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선택에 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선택의 순간에 작용하는 주체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친구를 선택하고, 학교와 전공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처럼 중대한 선택 뿐 아니라 글을 쓰면서 단어를 선택하는 일, 점심 메뉴를 정하는 일처럼 단순한 선택에도 고민이 필요하다. 작은 선택에서도 생활 철학을 바탕으로 결단해야 하고 당연히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 모두가 인과관계에 의해 연대한다. 선택이 씨앗이 되어 우리는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렇게 존재가 끊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될 때 그리고 그런 존재가 가치를 지닐 때 아름다운 삶의 역사가 지속된다.

강흥구 수필가의 수필집 《산밭에 핀 도라지꽃》 출간을 축하드린다. 강흥구 수필가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알아가고 대화를 통해 그들이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가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표제 《산밭에 핀 도라지꽃》에서 존재의 영역은 산밭이고 존재는 도라지꽃이다. 도라지꽃은 산밭에 존재한다. 강흥구 수필가는 상관물 도라지꽃이 되어 산밭에 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뿌리가 굵어가고 있다. 산밭의 도라지꽃은 자신의 생각대로 존재의 영역인 산밭을 선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필가 강흥구는 자신의 가치관과 주체적 선택으로 산밭을 삶의 영역으로 삼았다. 작가에게 산밭은 자연에서 찾아 이룬 존재의 정원이다. 스스로 산밭에 핀 도라지꽃이 된 것도 그의 주체성과 가치관에 의한 선택이다. 그러므로 그의 정원은 실존의 의미를 지닌다. 그는 오늘도 산밭에 살면서 꽃을 피우는 도라지로 살고 있다.

강흥구 수필가는 ‘수필은 쓰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것’이라 한다. 이 말은 아주 단순하지만 수필문학의 특성을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흔히 수필은 고백의 문학이라고 말한다. 체험을 솔직하게 아니 진솔하게 고백한다는 말이다. 강흥구 수필가가 담은 이야기는 곧 고백의 말이다. 그런데 그냥 고백하면 개인적인 정서의 토로로 끝나버릴 수가 있다. 문학이 아니라 그냥 이야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아를 객관화하여 고백해야 한다. 이른바 자아 성찰이라고 한다. 자기를 객관화하여 돌아보고 거기에 체험을 담아야 한다. 체험에 담긴 철학이 보편적인 가치를 지닐 때 진정한 고백이 된다. 그의 말대로 ‘살아온 이야기, 살고 있는 이야기, 앞으로 살아갈 모든 대상들과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를 남김도 감춤도 도색도 없이 고백하면 수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수필을 철학적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수필에 담는 이야기는 대개 서사가 뼈대가 되고 서정이 살이 된다. 강흥구 수필가의 말대로 과거, 현재, 미래의 고백이 서사로서 뼈대가 된다면 살이라 할 수 있는 표현, 나아가 형상화는 어찌 해야 할까. 누구는 수필은 ‘철학과 문학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철학적인 내용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해야 한다는 말로 풀어서 이해한다. 수필은 체험의 진실성이 있어야 가치 있고 고백의 진정성이 있어야 울림을 준다. 그렇다고 철학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교술에 머물고 만다. 강흥구 수필가는 전할 이야기를 ‘도라지 꽃망울을 터트리는 마음’으로 표현하는데 주로 상관물을 통하여 주제를 담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수필집 《산밭에 핀 도라지꽃》은 주옥같은 작품 58편을 수록했다. 작품은 다시 주제별로 귀농 귀촌, 인생을 담은 책, 사라져 가는 별, 액자 속의 풍경화, 해를 등진 해바라기, 떨켜 등 6개의 장으로 나누었다. 각 장별로 주제는 귀농의 행복, 인생의 의미, 가족사랑, 세계 속의 자아, 자연의 섭리와 자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담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크게 보면 자연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담으면서 자연과 생태계를 소중하게 여겨서 개발과 핍박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소통하며 살아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자연과 함께 약자라고 생각되는 여성에 대해서 수평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생태여성주의(에코페미니즘 ecofeminism)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강흥구 수필에 드러난 이러한 사상과 가치관은 인간의 일은 자연의 일을, 자연의 일은 인간의 일을 상관물로 삼아 빗대어 표현하였기에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한국 전통수필은 체험한 사건에 관련지어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삶의 문제를 찾아 제기하고 해결의 방법을 시사해 주는 치유의 문학이었다. 그래서 전통수필의 형상화 기법을 적용하여 문학적 효과를 이루어낸 방법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 생태여성주의 사고

 

생태여성주의 또는 에코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자연과 여성을 약자로 보고 있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서 핍박의 대상이 되고, 여성은 독선적인 남성에 의해 구속과 지배의 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생태여성주의는 생태주의와 여성주의를 동시에 지향하는 사상이다.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은 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의 합성어이다. 에코페미니즘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74년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즈 드본느(Francoise d'Eauabonne)라고 한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1855년경 아메리카 원주민인 스쿼미시(Suquamish) 부족의 시애틀 추장이 미국 피어스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 자연과 인간이 형제이고 인간은 자연의 일부 즉 생태계의 일부라는 사상을 담고 있었다. 이것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생태주의 사고는 프랑스아즈 드본느가 말하기 이전에 이미 사람들 마음속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동양사상에서는 이미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서구의 개발론자들은 자연을 개발 이용후생의 대상으로 여겨 온 것이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태도도 이와 비슷한 것으로 파악된다. 강흥구 수필가의 《산밭에 핀 도라지꽃》을 읽노라면 시애틀이 피어슨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의 이런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우리의 핏줄 속을 흐르는 피처럼 나무속을 흐르는 수액을 잘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한 부분이며 땅 또한 우리의 일부입니다. 향기 나는 꽃은 우리의 자매입니다. 곰과 사슴과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입니다. 바위, 수풀의 이슬, 조랑말의 체온, 사람 이 모든 것이 한 가족입니다.’
- 시애틀의 편지 일부

 

나무속을 흐르는 수액을 우리의 핏줄을 흐르는 피와 하나로 보았다. 나무와 사람은 한 형제이고 자매라는 생각이다. 인간은 생태계를 이루는 일부일 뿐 다른 것이 아니다.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인간들은 스스로 문화인이라고 당연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이다. 자연은 지배하고 개발하고 마음대로 이용하고 핍박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구라는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처럼 생태계에서 동등하게 생존할 권리를 가진 존재이다. 이러한 사고를 《산밭에 핀 도라지꽃》 에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도라지꽃을 피운 산밭은 도라지만의 삶의 공간이 아니라 작가의 삶의 공간이다. 도라지꽃이 곧 작가이고 작가가 곧 도라지꽃이다.

 

아침 이슬로 배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달콤한 새소리를 마신다. 고구마의 하루가 시작된다.
- <고구마>
땅은 어머니이다. 씨앗을 받아들여 생명을 싹틔우고 탄생하게 한다. 각종 영양소를 부족함 없이 공급하여 튼튼하게 자라게 한다. 꽃 피우고 열매를 맺어 성취감을 맛보게 한다. 길고 긴 세월이 흐르면 땅은 다시 거두어 간다. 모두 땅 속에 묻혀 흙으로 돌아간다. 땅은 자연이고 자연은 어머니이다.
- <땅>
해바라기는 해와 소통하며 살기를 빌고 있을 것이다. 노란 꽃을 닮은 달과 소통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빨간색의 해와 놀아야 노란색이 돋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아야 씨가 영근다. 많은 사람들이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나에게 먼저 눈길을 주어 다가설 수 있도록 했듯이, 자연도 등 돌리고 외면하는 해바라기에게 알게 모르게 빛을 주어 씨를 영글게 해주었다. 해바라기는 하늘의 해만 바라보다 자신의 근본인 땅을 보지 못했다. 이제 해바라기의 반전이 시작된다. 해가 아닌 땅을 바라본다. 나를 있게 한 근원, 나의 뿌리가 땅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잘못된 인식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의 변화를 시도 하였다.
- <해를 등진 해바라기>

 

‘아침 이슬을 배부르게 먹고 후식으로 새소리를 마신다.’는 생각은 그냥 지나가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핏줄에 피가 흐르듯 나무속에 수액이 흐른다는 인디안 추장 시애틀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사람이나 고구마를 같은 생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작품 <땅>에서는 생태여성주의를 넘어서 생태모성주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다. 분명 땅은 어머니이다.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 중에 이 말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땅이 어머니이므로 우리는 땅의 자식이고 한 어머니의 자매이다. <해를 등진 해바라기>에서 자연 생태계의 원리를 말하였다. 해바라기와 해의 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결국은 인간세계의 상생과 생존의 원리를 비쳤다고 할 수 있다.

여성주의자들은 기득권자인 남성들이 여성을 타자로 생각하여 박해하고 착취한다고 생각한다.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것은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생각한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산밭에 핀 도라지꽃》에는 가족에 관한 화소도 많다. 작가는 가족관계에서 여성 가족을 대하는 모습은 어떤지 살펴보는 일도 재미있는 일이다.

 

까치들의 설날이다. 꼬치전 구울 재료를 꼬치에 꿰고 계란을 풀고 전 부칠 재료 준비를 마친 후 아내와 둘이 앉아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을 두르고 계란 옷을 입혀 육전, 깻잎전, 버섯전, 동태포전, 꼬치전, 배추 파전을 차례로 부쳤다. 아내와 함께하니 즐거웠다. 타지 않게 정성을 기울여 노릇노릇 보기도 좋게 맛있게 부쳤다. 부쳐놓은 전이 소쿠리에 가득하다. 예쁘게 잘 정리되어 먹기조차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전 부치기를 마무리했다.
- <전도사>

 

설날 차례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대부분은 명절 후유증을 앓는다고 한다. 심지어 그 후유증이 심해서 이혼의 지경이나 대소가가 반목하고 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고 하니 한심한 노릇이다. 강흥구 수필가는 결미에서 ‘서로가 만나 즐겁게 즐기라고 만들어진 명절에 가정불화를 불러오는 일이 발생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처구니없는 일’이라고 탄식한다. 이것은 바로 전통적으로 남성이 차지하고 있는 가부장의 독선 때문이라고 작가는 파악하고 있다. 작품 <전도사>는 차례를 준비하는 주체가 주부인지 주인인지 구별이 안갈 정도로 주체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제수들로부터 전을 잘 부치는 도사라는 의미로 ‘전도사’라는 해학적인 별명이 붙여져 행복해 한다. 이 작품에서 대가족의 여성 일원인 제수들에게 존경 받는다. ‘제수씨가 놀리듯 전도사라 부르고’ ‘설날 아침 온 우리집은 큰 웃음소리로 시작’된다. 그리고 제수들로부터 ‘우리 집안은 전도사님이 잘해주셔서 스트레스 해소하고 간다.’며 칭찬을 듣는다. 때로 여권 운동가들은 아직도 여권이 남성과 동등하지 못하다고 더 이상의 수평적 관계를 요구한다. 이른바 법적 평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적 평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집안처럼 가족들 모두가 심정적으로 수평적인 사고를 갖는 것이 먼저이다. 그런 의미를 구현하는 작품이 《산밭에 핀 도라지꽃》 전반에 감추어져 있다.

 

□ 자연의 섭리와 삶의 원리

 

자연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자연과 인간을 포함하는 생태계 전반을 일컫는 넓은 의미의 자연이다. 《산밭에 핀 도라지꽃》 에 제시된 강흥구 수필가의 자연관은 자신을 포한함 모든 인간을 포괄적으로 수용한 넓은 의미의 자연이다. 좁은 의미의 자연은 인간이 거스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의 자연은 거스를 수 없다. 이와 같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것을 곧 섭리라 한다. 섭리는 자연의 순환적 질서, 우주의 운행 법칙, 하늘과 땅의 기운, 인생의 원리를 모두 포괄한다. 강흥구 수필가는 자연과 우주의 원리에 감응하는 생로병사, 자연의 역사 같은 심오한 원리를 《산밭에 핀 도라지꽃》 에 담아내었다.

 

어둠의 막이 걷히면 밝은 아침이 찾아온다. 뜨거워지기 전에 밭에 나가 일을 시작한다. 퇴비를 뿌리고 관리기로 로터리 치고 이랑을 설치한다. 이랑 위에 비닐을 피복하고 씨앗을 파종한다. 빗물과 햇빛의 조화로움을 받고 각종 곡식과 채소들이 밭을 가득 채운다. 만선이다.
암막이 쳐진다. 천지사방이 깜깜하다. 나만의 글밭으로 들어가 노트를 펼쳐들고 그 위에 볼펜으로 이것저것 심고 가꾼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글밭은 예쁜 글들로 가득 찬다.
- <농부의 사계>
시계는 3시에 멈춰져 있다. 어둠까지 가기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한참 낮잠을 즐기고 다시 일터로 나갈 시간이다. 또다시 열심히 땀 흘리며 남은 시간을 즐기며 노력해야 하겠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계바늘을 따라 돌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돌면 도는 대로 내버려두고 나만의 길을 찾아가야 하겠다.
건전지를 갈아 넣어주니 시계가 힘차게 돌아간다. 멈추었던 시계는 나에게 나의 인생의 시간이 3시쯤 되었으니 더욱 열심히 살아가라는 경각심을 불어넣어 주려고 멈추었던 것 같다. 뜨겁고 열정적이었던 시간이 지난 3시. 서산으로 기울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았다. 가장 아름답게, 가장 멋지게 남은 시간을 보내기를 다짐해 본다.
- <멈춰진 시계>
내가 잠든 사이 나는 나를 빠져나와 이곳저곳으로 나다닌다. 여행도 다니고 오랜 친구도 만난다. 먼저 떠나가신 조상님들도 가끔 만나 가족의 끈이었음을 확인한다. 정처 없이 날아다니며 세상 간섭을 다하고 다니기도 한다. 때로는 무서움에 떨기도 하고 슬픔에 젖어 흐느끼기도 한다. 육체와 떨어져 있기에 홀가분하게 어디든 마음껏 다니며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하고 다닌다. 그러다 밤새 바다 속에 잠겨있던 태양이 바닷물을 탈탈 털어내며 솟구쳐 오를 무렵이면 나는 다시 내안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일어난다.
- <내 안에 존재하는 나>
천태산의 정기를 머금은 영국사. 영국사를 지켜주는 은행나무. 불자들의 이야기가 기록되어있듯 나의 이야기도 기록되어 뿌리까지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다라니경처럼 차곡차곡 길게 뻗은 뿌리만큼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주려고 하나하나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진다.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무언으로 일러주는 깨우침 가슴속에 새겨 담고 영국사를 내려선다.
- <은행잎에 기록된 사연>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인간은 비본래적 존재에서 본래적 존재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비본래적 존재란 생로병사의 순환원리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단적으로 말해 언젠가 자신은 죽을 것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망각하고 악착 같이 재물을 모으고, 명예를 탐하며,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등 세속적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에 반해 본래적 존재란 삶의 유한성을 깨닫고 세계의 역사와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찰하고 진리를 찾고 참된 가치를 추구하며 삶의 의미를 찾아 목표와 방향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을 의미한다.

<농부의 사계>에서 농부로서의 삶과 작가로서의 삶을 빗대어 자신의 삶의 의미와 방향을 돌아보는 모습이 드러나 있다. <멈춰진 시계>에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견주어 자아를 성찰하고 반성하면서 삶의 과정을 통찰하여 내일을 설계하는 모습이 숨어 있다. 탐욕도 쾌락의 추구도 없다. 그대로 섭리에 순응하며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나>는 우리 민족의 죽음에 대한 의식이 은근히 숨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곧 ‘죽음이란 영과 육의 분리’라는 의식이다. 생시에는 영과 육이 하나이지만 잠잘 때 때로 ‘내 안에 존재하는 나’는 나를 떠난다. 이른 바 ‘꿈’이라고 한다. 꿈에 나를 떠난 다른 ‘나’는 자유롭게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삶의 끈이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언젠가 나를 버리고 떠나는 날’ 나의 인생은 끝날 것이라고 담담하게 토로한다. 이렇게 삶은 결국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의식을 뚜렷하게 지니고 달관한 삶을 살면서 가장 가치 있는 살림과 살이를 추구하고 있다. 사르트르가 말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가치 있는 선택’이며 하이데거가 말하는 본래적 자아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은행잎에 기록된 사연>에서 영국사 은행나무가 영국사 역사를 기록하였듯이 작가를 비롯한 은행나무 곁을 지나는 모든 사람들의 사연도 이해하고 고통을 지켜주며 그의 삶을 기록할 것이라고 믿는다.

생로병사의 일을 철학적 숙고에서 느끼기보다는 삶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깨닫고 수긍하는 모습이다. 수필은 일상의 사사(些事)를 소재로 한다지만 그 하찮은 일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가치를 찾고 의미를 깨닫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강흥구 수필가의 달관한 삶이 드러난 글에서 확장되는 수필문학의 영역을 확인할 수 있다.

 

□ 자연 사랑으로 싹틔우는 인간애

 

김형석 교수는 인류 사회에 수많은 사상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지만 영원히 사라지거나 변하지 않을 사상은 휴머니즘(humanism)이라고 말했다.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일본에서는 휴머니즘을 인본주의라고 번역한다고 하는데 이러면 이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장 소중하다는 의미로 오해 받을 수 있다. 인간이 소중한 것은 자연 속에 있기 때문에 소중하고 자연과 함께 할 때 그 사랑이 진실해진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자연이 속박 당하거나 차별받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인간도 인종이나 지식 빈부에 따라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강흥구 수필가의 작품에 담긴 사상은 인간만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 사랑으로부터 깨닫고 배워 싹틔우는 인간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은 가족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루만지고 보살펴주다 보면 어느새 익어가는 냄새가 바람타고 풍겨온다. 그동안 길러주느라 고생했으니 수확의 즐거움을 맛보라고 탱글탱글 알차게 영근다. 익어가는 모습은 색깔로 가늠할 수 있었다. 옥수수는 수염을 검게 나타내고 참깨는 누렇게 입을 벌려 나타낸다. 땅콩은 잎에 주근깨를 그려내면 익은 것이고 고구마는 두둑을 볼록하게 밀어 올리면 캐라는 신호다. 고추는 파란 고추가 새색시 볼처럼 빨갛게 붉어지면 익었다는 신호다. 그런 식으로 저마다의 방을 비워줄 준비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 <빈방>
피아노가 있던 방이 왠지 휑하다. 딸이 출가했을 때처럼 서운함이 느껴진다. 방바닥엔 피아노 바큇자국만 남아있다. 추수를 마친 가을 들판이다. 낱알만 떨어져 외로이 지키고 있다. 왠지 서글픈 마음이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이곳엔 또다시 파란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희망의 새싹들이 허전한 들판을 가득 메울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책상과 의자를 배치하고 앉아서 차 한 잔을 마신다. 어디선가 딸아이가 아닌 손녀딸이 들려주는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는 듯하다.
- <피아노>
당숙모께서는 어려운 일은 남의 손을 빌어서 해결해야 하기에 항상 외롭다고 하신다. 우리가 둘이 와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다고 하셨다. 나는 항상 혼자라 외로운데 부럽고 샘도 난다고 하셨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그냥 순간순간이 힘들고 고달프다고만 느끼며 일해 왔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외로움을 타고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린 행복하고 복에 겨운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운 것인가를 느끼며 그곳에서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 <외로움>

 

<빈방>은 자녀들이 성장하여 사회로 진출한 다음 자녀들의 빈방에서 상념에 젖는 글이다. 자녀들이 비운 빈방은 농작물을 다 거두어들인 다음의 빈 밭으로 환치하여 자녀 사랑의 정을 표현하였다. 사랑은 결국 자녀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게 마련이다. <피아노>도 마찬가지이다. 딸이 둥지를 떠나고 빈방에 피아노만 남았었는데 피아노마저 내보내고 빈방에 서서 딸을 그리워하는 모습이다. 역시 딸도 피아노도 없는 빈방을 곡식을 다 거두어들이고 난 뒤의 텅 빈 가을 들판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역시 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외로움>은 홀몸이 된 고향 친척의 외로움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내용이다. 여기도 일가친척에 대한 측은지심이 드러나 있다. 자연에 대한 사랑은 자녀 사랑으로 자녀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확산되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자연 사랑으로부터 싹트는 인간애를 작품에 담았다.

 

□ 상관물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수필적 상상의 전략

 

상관성이란 두 가지 사물이나 사건 사이에 서로 관계되는 본질이나 성격을 의미하는 말이다. 수필에서 작가가 자신의 감정이나 사상을 직접 표현하면 주관적 정서의 일방적 토로가 되기 쉽다. 수필은 대상에 대한 주관적이고 독창적인 인식을 중시하지만 그것이 보편화되지 않으면 독자에게 울림을 주기 어렵다. 개인적 정서를 객관화하는 창작의 기법으로 사물과 정서의 상관성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것을 흔히 객관적 상관물이라 말하는데 시에서 주로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객관적 상관물과는 의미가 약간 다르다. 수필 쓰기는 상관물에서 철학적 의미의 상관성을 활용하여 자신의 사상을 빗대어 드러내는 것이 효과적이다.

상관성을 찾아 삶의 의미를 표현하는 방식은 우리 전통수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규보의 <이옥설(理屋設)>은 집을 수리하는 일을 상관물로 삶의 과정에서 자신의 행동을 바로잡거나 정치 현실에서 잘못된 것을 고치는 원리와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슬견설(虱犬設)>은 이와 개는 크기는 달라도 생명의 소중함은 마찬가지라는 상관성을, 이곡의 <차마설(借馬設)>은 말을 빌려 타는 일의 상관성에서 소유의 허망함을 표현하였다. 연암 박지원의 수필이나 윤오영의 수필도 작품성의 여부에 관계없이 상관물에 빗대어 사상과 감정을 표현해내는 방법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산밭에 핀 도라지꽃》에서도 이러한 전통의 맥을 발견할 수 있어 강흥구 수필가가 우리 선대의 수필가들이 개발하고 즐겨 써온 전통수필의 구성법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의 등단 작품이기도 한 <떨켜>를 예로 들어 본다.

 

나뭇잎은 가을이 되면 떨켜가 형성되어 낙엽이 되어 여기저기로 날아가 흩어진다. 몸체인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나뭇잎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낙엽 되어 쓸쓸이 떨어져나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모두에게서 잊혀져간다. 그러나 떨켜가 형성되지 못한 나뭇잎은 겨울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려 있다. 안쓰럽다. 우리 인생도 같은 이치인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희로애락을 맛보며 살아오다 어느날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만다. 떨켜가 형성되어 세상에서 떨어져나가 낙엽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떨켜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한 그루의 나무로 버티고 있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이 작품에서 나뭇잎에 떨켜가 형성되어 나무로부터 떨어져 흩어지는 모습에 빗대어 인생에 생로병사 이치를 말하였다. ‘사람은 살다가 어차피 죽는다.’라고 하면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나뭇잎에 떨켜가 형성되어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듯 우리네 인생도 언젠가는 떨어져 흩날릴 것이다.’라고 말하면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 작품 이외에도 <인생을 담은 책> <인생 운전사> <무대> <액자 속의 풍경화> <자연 약국> <춘화> 등 일일이 다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작품에서 이러한 기법을 활용하였다.

사실과 체험의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필은 허구적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문학양식과 구성법이 다르다. 그래서 수필에서도 허구를 차용하여 영역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수필적 상상이라는 수필만의 특성을 간과한 데서 오는 짧은 생각이다. 대체로 수필 창작은 보편적인 인식을 토대로 한 차원 높은 세계로 깊은 삶의 철학을 내포시키는 형태로 형상화하기 마련이다. 형상화 과정에서 수필가의 상상력이 작동하게 된다. 이 때의 상상력은 허구적 서사를 배제해야 한다는 제한이 있기에 수필적 상상이라고 이름 지을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상관성의 활용도 이러한 발상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수필적 상상은 문학적 상상력 원리를 제기한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의 상상력 이론을 토대로 최근에 정리되었다. 안성수 교수는 상상력의 체계를 수필 쓰기에 적용하여 물질적 상상력, 역동적 상상력, 원형적 상상력의 단계로 생성 발전한다고 했다. 물질적 상상력은 만물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물질의 기본적인 이미지, 역동적 상상력은 자주성을 지닌 존재생성의 동력으로, 원형적 상상력은 삶의 궁극적인 세계로 시공을 초월하여 기본적이고 본편적인 원초적 이미지를 찾아가는 상상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산밭에 핀 도라지꽃》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데 이것은 작품 속에서 수필적 상상력의 단계와 체계에 맞게 상상력의 발동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에서 찾아본다.

 

아끼고 사랑하던 가족을 떠나 우주로 돌아간 그는 지구에서 있었던 어떤 기억조차도 남김없이 버리고 다음을 준비한다. 그가 떠난 자리엔 남겨진 자들의 슬픔만이 자리하고 있다. 침통해하며 조문객을 맞이한다. 애잔하다.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몸부림친다. 다시는 만나볼 수 없기에 슬퍼한다. 그가 있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뿐인데 우리는 슬퍼한다. 슬픔은 남은 자들의 몫인가 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떠난 사람을 마음속에 접어두고 바쁜 일상에 시달린다. 그러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이면 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며 그리워한다. 흘러간 빗물도 돌아오게 마련이다. 강물이 되고 바다로 흘러들어 다시 하늘에 올라가 빗물이 된다. 그것이 우주의 순환원리이다.
- <순환>

 

인생의 순환을 원형적 상상으로 그려낸 부분이다. 물론 이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읽으면 상상력의 발동 단계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물질적 상상, 역동적 상상의 단계를 거쳐 원형적 상상에 이르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다. 예시된 부분에서는 인생의 순환과 빗물의 순환이 두 축으로 나란히 순환되는 모습까지 담고 있어서 수필만이 이룰 수 있는 수필적 상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처럼 상관물에 빗대어 작가의 정서와 사상이 표현되는 과정에서도 수필적 상상이 단계적으로 적용되는 전략적 구성을 엿볼 수 있다.

 

□ 휘갑치기

 

강흥구 수필가는 퇴직 후에 고향으로 귀농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수필을 쓰는 농부 수필가이다. 그는 농한기에는 도시에서 문학 활동을 하고, 농번기에는 산밭이 있는 언덕 위에 하얀집을 짓고 산밭에 산다. 농사를 지어 이윤을 남기기보다 농사를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며 고향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의 영역을 찾아간 것이다. 농사는 나눔의 사업이고 생명의 에너지원을 생산해내는 일차적 생산 활동이다. 도라지꽃이 피어나는 산밭은 바로 그의 삶의 공간이고 그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실존적 존재의 정원이다. 산밭에서 도라지꽃이 다른 들풀이나 들꽃과 어울려 피어나듯이 그는 자연 속에서 또는 고향 마을에서 어울려 피어난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이웃과 문우를 사랑한다. 그것은 도라지꽃이 도라지꽃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타리꽃도 패랭이꽃도 개망초꽃도 사랑하며 같이 피어나는 것과 같다. 도라지꽃에게 흐드러진 개망초꽃이 형제이듯이 그에게는 모든 사람이 형제이고 모든 자연이 형제이다.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란 말이다.

강흥구 수필가의 생태주의 사고와 여성 존중의 사상이 작품 속에 온전히 배어 있다. 그것은 꾸밈이 아니고 진솔하고 솔직하게 객관화된 고백이다. 수필이 고백의 문학이라면 그의 고백은 개인적인 고백이 아니라 보편화된 정서를 담은 원형적 고백이다. 그의 작품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 것은 그냥 붓을 따라 쓴 수필이 아니라 형상의 방법을 알고, 수필적 상상을 바탕으로 한 전략적 구성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등단 전에도 작품집을 냈지만 등단 이후 첫 수필집인 《산밭에 핀 도라지꽃》이 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꾸밈도 감춤도 없이 고백하였으므로 많은 독자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불러올 것이라 믿는다. 애시당초 부귀를 탐하거나 영화를 추구하지도 않았으므로 문학을 통하여 영달을 꿈꾸지도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존재의 정원인 산밭에는 더 많은 도라지꽃이 풀꽃과 더불어 피어나며 새와 벌나비가 날아들어 춤추고 노래 부르는 낙원을 이룰 것이다. 언덕 위의 하얀집에서 지어내는 글발이 깊은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독자의 고통과 아픔을 해결하는 치유의 문학이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