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6.23. 대구;아젤리아호텔. <한국수필> 창간 50주년 기념 심포지엄 발제 논문
한국수필의 현황과 전망
오양호(인천대학교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2019년 12월 현재 한국문인협회에 가입된 문인은 14,641명이고 그 가운데 수필분과에 가입된 수필가는 3,634명이다. 이 숫자는 시 장르 7,833명 다음으로 많다. 그리고 수필전문 잡지는 약 30여종 쯤 되는 듯하다. 이런 잡지에는 아직 한국수필가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수필가도 수두룩하다. 이렇게 계산하면 한국의 수필가 수는 어림잡아 5천명은 될 것이다. 한국수필가협회나 한국문협 수필분과에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아도 수필을 쓰고, 수필집을 출판하는 사람은 다 수필가인 까닭이다.
이런 현상을 좋게 말하면 수필장르가 아주 활성화되어 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는 주목받는 장르라 하겠고, 좀 비틀어 말한다면 수필은 대중예술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수필가 수가 너무 많아 희소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별한 예술적 자질을 가졌고, 그것을 빛내는 장인은 그 수가 적다. 우리 주변에는 수필쓰기를 여가 선용으로 활용하는 사람이 없지 않다. 이렇다면 수필은 비전문적인 글쓰기라는 말도 된다. 그러나 수필이 이런 것만 아니다. 다음과 같은 글을 두고 ‘수필은 비전문적인 글이다.’라 한다면 그는 언어예술의 감식능력이 백치다.
나의 소년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져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주 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가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애 멍하니 기다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 준다.
<길> 전문
<길>을 시로 낭송하는 시인이 있다. 그러나 <길>은 김기림의 수필집 <<바다와 육체>>에 수록되어 있는 수필이다.
1. 비허구산문, 범칭 ‘수필’의 정의
1) ‘隨筆’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일신수필·馹迅隨筆’이라는 용어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이 용어는 전래하는 우리문학의 한 갈래라 하겠다. 이 용어가 193,40연대, 그러니까 수필문단이 오늘날처럼 활발하지 않던 때에도 비허구산문을 지칭하는 장르 명이었다. 그런데 비허구산문을 대표하는 용어로 자리 잡은 시간은 1950년대 말경 수필 장르가 활성화 되면서부터이다. 좀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천득의 <隨筆>부터라 하겠다. 피천득의 <수필>은 ‘대학교수 명문장가 17인 집필 대학교수 수필집<書齋餘滴>’(경문사.1958)이라는 책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치솟는 수필집 제일 앞자리에 실렸다. 그게 명문장가 17인 교수를 대표하는듯한 편집구성인데 거기에 피천득 특유의 그 미문체 단문이 독자를 매료시켰기 때문이다.
정황이 이렇지만 피천득이 ‘수필은 난이요 학이오.’할 때 그것은 수필에 대한 주관적 정의로 객관성이 없다. 그가 말하는 ‘수필’은 수필의 정의를 객관적으로 논증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비유법에 기대어 진술한 ‘작품’이다. 하지만 그 비유를 통한 수필론이 수필이란 글의 특성을 너무나 잘 지적하여 ‘수필’하면 누구나 피천득의 ‘수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것은 그 후 많은 수필가들이 그의 <수필>을 수필의 전범으로 삼아 그의 수필론 대로 글을 쓰는 데서 증명된다.
2) ‘교술·敎述’이다.: 趙東一은 <가사의 장르 규정>에서 일찍이 조윤제가 ‘형식은 시가·詩歌이고 내용은 文筆이어서 시가문필의 양면성을 동시에 구유한 형태문학·形態文學이다.’라고 한 가사·歌辭를 교술로 규정했다. 가사를 수필이라 한 선학의 논리를 이으면서 논지를 심화시켰다. 곧 <상춘곡>, <사미인곡>, <일동장유가> 같은 가사를, ‘있었던 일을’. ‘확장적 문체로, 일회적으로·평면적으로 서술해’, ‘알려주어서 주장하는’ 글이 수필이란 것이다. 이때 ‘敎’는 알려주며 주장한다는 뜻이고 ‘述’은 어떤 사실이나 경험을 서술한다는 뜻이다. 지금 이런 교술을 대표하는 글은 신문칼럼이다. 조동일의 이런 수필 장르이론은 고전문학에서는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현대문학장에서는 겨우 입론을 시도하는 처지다.
3)‘어름문학’이다.: 김수업은 『배달문학의 갈래와 흐름』(현암사.1992)에서 수필을 ‘어름문학’이라 했다. 그는 ‘배달문학의 갈래’ 가운데 넷째갈래를 어름문학으로 분류한다. 이 때 ‘어름’이란 ‘실용과 예술의 사이, 일상어와 비유적 기능의 사이라는 의미이고 실용성을 발휘하면서 동시에 예술로서 비유적 기능을 발휘하여 문학이 되기도 하는 양면성을 지닌 중간문학’이라는 의미다. 일기, 편지, 제문, 기행, 행장 등이 이런 문학에 해당한다. 어름문학은 사대부들이 오랫동안 익숙하게 써 오던 한문 생활에서 직접 영향을 받았다. 이 문학은 배달문학으로서의 갈래로 분명하게 인식된 것은 아니지만 삶의 소중한 경험들은 모두 글로 적어 남기는 것이 가치 있다고 여기던 사대부들의 문화전통에 따른 글쓰기란 점에서 그것은 우리고유문학의 한 갈래가 된다는 것이다. 현재 수필 가운데 기행문, 일기체 신변잡기가 여기에 속한다 하겠다.
4) ‘에세이’다.: 에세이는 수입품이다. 프랑스어 에세·essai는 시험, 시도의 의미와 함께 ‘계량하다’, ‘음미하다’의 뜻을 가진 라틴어 엑세게레exigere가 어원이다. 영어 에세이·essay는 불어 essai가 어원이다. 미국에서는 essay라는 말에 article의 의미가 포함되어 가벼운 논문을 essay라 한다. 대학원생의 기말 리포트를 에세이라 부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필과 에세이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는 문인이 많다. 이런 사실은 수필집을 에세이집이라고 말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에세이라는 신종 문학을 수입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재래종 수필에 접을 붙인 셈이다. 그래서 수필이라는 나무에 유사한 두 종류의 식물이 함께 자라는 형태가 되었다.
우리의 근대 수필론에서 이런 논리를 처음 개진한 문인이 韓世光(韓黑鷗)이다. 그는《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1934.7.2.일~7.5일자) <수필문학론-ESSAY연구>에서 서양의 에세이가 동양에서 수필이라 했다. 이런 관점은 글의 제목이 ‘수필문학론’과 ‘ESSAY연구’를 등치시킨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Essay를 東洋에서는 대체로 隨筆이라고 評한다. 수상문이니 감상문이니 하는 모든 산문형식이 다 에쎄이 부문에 속한다. 종합적 명칭으로 ‘隨筆’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적합한 듯하다..
한세광이 말하는 동양은 일본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문학에서는 Essay와 수필은 갈래가 다르다. 에세이와 수필을 동일 개념으로 인식하는 것은 일본의 영향이다. 일본은 무엇이든지 서양에서 가져왔다고 해야 가치가 돋보인다고 여긴다. 한세광은 미국에서 공부했고, 또 우리는 일본과 합방한 처지였기에 그가 에세이를 수필이라 한 것은 결과적으로 일본 지식인의 서구 우월주의사고방식에 동의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시각은 강한인의 <에세이(수필)와 문학-수필문학 발달을 위하야>, 김관의 <수필과 비평>(1937)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40년대에 와서는 모든 비허구산문을 ‘수필’이라 했다. 李殷相의 수필집 《路傍草》(1937), 조선일보사의 《隨筆紀行集》(1938)과 《朝鮮文學讀本》(1938), 朴勝極의 隨想·紀行 《多餘集》(1938), 金東煥 편 紀行 《半島山河》 (1941), 李泰俊의 수필집 《無序錄》(1941), 李殷相의 수필집 《野花集》(1942), 朴鍾和의 수필집 《靑苔集》(1942)이 그런 예다.
1950년대 나타난 수필론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수필론은 김춘수의 <에세이와 현대정신>이다. 이 글은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 휴전을 한 바로 그 해에 발표된 희귀한 자료이다. 아무도 문학을, 그것도 수필을 말하지 않을 때 시인 김춘수는 수필과 미셀러니의 개념을 말하면서는 에세이의 성격을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검토해볼 만한 문제가 있다. 1950년대 초기는 미셀러니가 흔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에세이(Essay)를 보통은 隨筆이라고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엄격하게 따지면, 흔히 말하는 수필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수필이라고 하는 한문자가 의미하는 바는, 인생의 機微, 즉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붓 가는 대로 적어본다, 하는 정도지만, 에세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더 폭이 넓기 때문이다. 에세이는 前記한 바 수필이 가지는 내용을 그의 일면으로서 가지지만, 다른 또 일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小論이니, 小考니 하는 말은, 철학적인, 또는 사상적인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지 않고, 단편적으로 적어본다, 즉 어떤 문제적인 것을 한 학설을 체계선 논리로써 전개할 때보다는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적어본다, 하는 의미를 가졌다. 그리고 에세이는 이 후자의 의미를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자의 의미에만 국한 시킬적에는 따로 미셀러니(Miscellany)란 말을 쓴다.(이하 나는 에세이를 후자의 의미에서 쓰겠다.)
에세이는 소론, 소고, 가벼운 논문이고, 수필은 ‘인생의 기미, 즉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붓 가는대로’ 적은 미셀러니라는 것이다. ‘수필=미셀러니’는 문제가 된다. 그렇지만 에세이를 ‘어떤 문제적인 것을 체계선 논리로써 전개할 때보다는 조금 가벼운 기분으로 적어본다’는 것은 앞선 논리를 잇는 다른 연구자의 에세이 견해와 같다. 김춘수에 의해 수필과 에세이가 1950년대 초기, 잡다한 신변사를 다룬 미셀러니와 대비되면서 수필의 개념이 재정리된 셈이다.
5) ‘산문’이다: 수필을 ‘산문’이라고 주장하는 예는 없다. 수필을 비허구산문인 것은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산문’은 장르명이 될 수 없다. ‘운문’의 반대 개념인 까닭이다. 그런데 수필을 산문이라고 부른 글이 일찍부터 있다. 한국근대문학에서 ‘산문’이라는 용어가 장르적 성격을 말하면서 최초로 등장한 예가 모윤숙의 ‘산문집·散文集’《렌의 哀歌》이다.
산문이 ‘수필’의 의미로 쓰인 다른 예는 정지용의《문학독본》(박문출판사.1948)이다. 정지용은 서문, <몇 마디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들이 詩人詩人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었다. 나도 散文을 쓰면 쓴다.-- 李泰俊만치 쓰면 쓴다는 辨明으로 散文 쓰기 練習으로 試驗한 것이 책으로 한 卷은 된다. 대개 愁誰語라는 이름 아래 新聞雜誌에 發表되었던 것들이다.
‘수수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이런저런 산문이 수필이라 했다. 정지용은 그 뒤 평론집을 내면서 책이름을《散文》(동지사,1949)이라 달았다. 그런데 《산문》은 수필집이 아니라 평론집이다. 정지용의 수필집은 《문학독본》이다. 《문학독본》에는 수필만 있고, 정작 《산문》에는 몇 편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책 이름이 수필을 연상시키는 산문지만 <시와 언어> 항으로 묶인 문학평론과 여러 편의 시사평론, 그러니까 에세이, 혹은 교술이 중심이다. <민족해방과 공식주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싸움>, <동경 대지진 여화>,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와 같은 해방공간의 시대상과 관련된 글이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번역시가 12편이다. 이렇게 실재 책 내용은 《산문》이란 책 이름과는 많이 다르다. 이런 점에서 수필=산문은 성립되지 않는다. 모윤숙의 산문집 《렌의 哀歌》가 산문시로 평가되고, 정지용의 《산문》은 평론집인 까닭이다.
2. 한국 수필의 현황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지금 한국문단은 넘쳐나는 문인으로 날마다 잔치판이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요새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지만 이 역병이 돌기 전에는 시인들은 날마다 시 낭송을 하고, 수필가는 다투듯이 수필집을 냈다. 시인과 수필가 가운데는 자신의 작품집을 상시로 가지고 다니면서 문우를 만나면 기증한다. ‘내 네 번째 시집입이다. 내 세 번째 수필집입니다.’는 투로 그간의 문필활동을 자랑한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좋은 일이다. 시집이 많아, 혹은 수필집이 많아 나쁠 일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수필문단사에 있었다. 그것은 1920년대 중반 조선문단에 하나의 소동이 된 노자영 수필집 불매운동이다.
군의 말과 가티 實物 四培 以上의 광고를 하엿는가. 그래가지고 돈을 벌려 하엿는가. 文藝를 거짓말 광고를 하야 팔려하엿는가. 이 무슨 돈만 아는 수전노의 할 짓이랴. 野卑를 極한 도적의 할 짓인가
노자영 군을 文士로 보았으나 이제 文士로 보지 않고 蚊士로 본다.
시내에 남녀 학생 중에 옥편은 한 권 없을 망정 노자영군의 작품 한권씩은 거의 다 있다하니 이 얼마나 위험한 좋지 못한 징조이냐. 노자영은 작금의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며 각급 학교 선생님은 노자영의 작품을 읽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각 신문에서 노자영의 책 광고를 내려야 할 것이다.
춘성은 문필의 재조보다도 오히려 출판에 대한 천재가 있다고 할만하고 거기에 열성이 있다. 그의 자비출판이니 靑鳥社도 잘했거니와 조선일보사 출판부의 융성은 오직 춘성의 노력이라 할 수 있고, 조선출판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조중곤은 노자영의 글쓰기는 문예행위가 아니라 사기라는 것이고, 김을한은 노자영이 미풍양속을 해치는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며 열을 올린다. 그러나 방인근은 노자영이 조선출판계에 큰 공적, 돈을 벌어 사업을 번창하게 만든 천재라며 치켜세우고 있다. 이럴 때 염상섭이 결정타를 날렸다. 곧 노자영의 시 <잠!>이 베를렌느 시를 표절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비판했고, 그것이 드디어 노자영을 <백조> 동인들로부터 퇴출당하게 만들었다.
이런 소동에 가까운 사건은 노자영의 《사랑의 불》 때문이다. 이 수필집은 수필의 저변확대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꾸로 ‘수필은 저급한 글’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본격문학의 반열에서 외면당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정은 이렇다.
1923년 2월에(大正 12년)에 출판된 『사랑의 불』은 노자영을 동아일보 기자에서 출판사 청조사·靑鳥社 경영자로 만들고, 그 인세로 日本大 예과에 유학을 가게 만든 초대박 베스트셀러 서간문집이다. 초판은 ‘著作 兼 發行者 米國人 吳殷瑞’이고, 발매소는 한성도서주식회사이다. 이 책은 ‘일 만부’ 이상 팔렸다고 한다. 그런 초대박이 1920년대 중반에 어떻게 해서 일어났을까. ‘머리 말’을 한 번 보자. 김을한은 이 서간집을 두고 ‘어찌 사랑 얘기가 그리 많으냐’ 고 개탄했는데 과연 그럴만하다.
사랑은人生의 이외다. 그리고人生의「오아씨스」외다. 뉘가사랑을咀呪하고, 뉘가사랑을 실타하리가잇겟슴니? 만약사랑을 모르고, 사랑을등진사람이잇다고하면, 그사람처럼, 불상한사람은, 世上에다시업슬것이외다.·······
책 소개 광고도 상상을 초월한다. 당시의 노자영이 앞장 선 조선의 수필이 어떤 지경에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ㅇㅇ作. 연애서간 <사랑의 불>. 이 책은, 청춘남녀 사이에, 는 사랑의 편지를 모흔 것이니, 출판 후, 一萬部 以上을 팔기는, 근래 조선에, 처음 출판물이 외다.
청조사 판(제4판) 《사랑의 불》판권 앞 페이지에 실린 《사랑의 불》 ‘안내문’이다. 이런 책 광고에는 ‘조선일류문사 제 선생의 창작품 안내’라고 하면서 39권이나 되는 다른 저자의 책 광고도 나와 있다. 그런데 『사랑의 불』 저자명이 여기서는 ‘ㅇㅇ작’으로 되어 있다. 제4판 간기에는 저자가 ‘오은서’인데 안내문의 저자는 ‘미국인 오은서’가 아니다. 왜 ‘오은서 작’을 ‘ㅇㅇ작’으로 소개했을까. 이것은 그런 저자가 실재로는 없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출판사가 오은서라는 가공의 작자를 내세워 간행한 기획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런 성격은 다음과 같은 광고로 유추가 가능하다. 다룰 가치가 없지만 당시 수필문단의 상황을 타산지석으로 삼기위해 일별할 필요가 있다.
춘성 노자영 작. 백두산기· 간도기행· 西國感想· 詩 及 小說. 『永遠의 無情』
조선문단에 혜성 갓치 출현한 본서는 出版未久에 3판이 나오게 된 것은 이 책에 가치를 말하는 것이 다. 白衣人의 머리에 나리는 영원한 이 무정에 호소!
아 하날을 향하여 울어러나볼가?
白衣民의 운명을 저주하는 동시에‘덧업는 청춘을 호소한 近來稀有의 大文字이다.
총칼이 날니는 국경일대와 백의민이 우는 북간도와 두만강을 헤매며 작자는 얼마나 호소햇든가?
櫻花碧波가 구비처 흘러가는 南部 日本을 지나 작자는 얼마나 찬미햇든가.
作者의 말! 나의 쓴 책 중에서 가장 자신잇는 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는 사랑보다도 눈물보다도 영원 한 인생의 허무와 백의민의 녹는 설움을 가장 쓰고저 하엿다.
‘비허구 산문, 범칭 수필’이 어느 지경에 가 있었고,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수필이 얼마나 저속화되어 있었던가를 단적으로 알리는 정보이다. 이 책이 나온 해가 1923년, 3·1운동 직후다. 3·1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절망감을 민족허무주의로 몰고 가는 형편 무인지경의 문학현장이다. 이렇게 역사의식을 소거시키면서도 그걸 자랑할 글이라고 설치는 행위는 도저히 문인의 반열에 세울 수 없다.
노자영을 수전노라 하고, 혹은 풍속사범으로 사회에 고발하고, 학교 선생님은 학생들이 노자영의 글을 못 읽게 감독해야 하며 신문사는 노자영의 책 광고를 당장 내려야 한다며 펄펄 뛰는 이유가 위와 같은 사실에 근거한다. 노자영을 부러워하고, 그를 출판의 천재라며 치켜세운 것은 노자영 뺨치는 통속작가 ‘방인근’ 뿐이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1930년대 중반에 다시 나타났다.
1933년 10월, 『조선문학』이 <수필문학에 관하여>라는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린 문예좌담회가 그것이다. 이 좌담회가 수필을 주제로 삼은 것은 노자영의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서 자리를 잡는데 기여는 했으나 문예적 가치를 저하시킨 것에 대한 성토, 반성, 반발 때문이다. 소동에 가까운 <<사랑의 불>> 사건이후 조선 수필문단은 근 10년의 자정기를 거치면서 많이 달라졌으나 수필이 다시 문제적 글쓰기로 문단을 압박했다.
그 시간에 조선문단에 3인의 신예 작가가 등장하였다. 바로 박태원, 이상, 김유정이다. 그런데 이 신예 소설가들이 수필을 썼고, 그 수필이 인기를 누리는가 하면 박태원은 수필 같은 소설까지 썼다. 그래서 마침내 소설이 수필을 닮는다는 말이 문단에 문제가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 평론가로서도 한 몫을 단단히 하는 임화는 그 문제의 《조선문학》좌담회에서 ‘박태원씨 소설은 수필하고 촌수가 멀지 안트군’이라는 말에 그런 사정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수필문학에 관하여>라는 좌담회에 초청받은 유진오와 조용만은 수필은 아예 문제꺼리가 안 된다며 참석을 거절했고, 극작가 서항석과 소설가 이무영은 ‘수필’은 문학작품이 아니라며 무차별적 공격을 퍼부었다. 이 두 사람은 지금의 조선 수필은 ‘나리즘의 요구에 의해 생산된 몹시 저급한 잡문’으로 규정했다. 서항석, 이무영의 수필 매도는 수필을 쓴다면서 그 수필이 체험을 서정체 산문으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혹은 인간과 자연과 만나는 희열을 지식과 감흥, 지성과 감성의 조화로운 융합과도 거리가 있다고 혹평했다. 이지적 요소로 독자의 지적 쾌락을 자극하는 품격에 미치지 못하는 저급한 글이라는 주장이다. 김을한이 노자영의 《사랑의 불》이 세상 사람에게 해독을 끼쳤으니 그 글을 쓴 손목을 잘라야 한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에는 장르 이기주의 냄새가 풍긴다.
사정이 이러했으나 명문 도호쿠대東北帝大 영문과를 졸업하고 막 돌아온, 조선일보의 학예부 기자 김기림이 수필을 옹호하고 나오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기림은 《신동아》(1933. 9)에 발표한 <수필을 위하여>에서 ‘김진섭씨와 가튼 이는 외국문학의 냄새가 나는 매우 철학적인 수필을 쓰며, 이은상씨는 동양류의 고전미가 풍부한 점에 그 특성이 있고, 모윤숙씨는 또한 매우 시적인 아름다운 수필을 쓴다’고 했다. 수필을 전혀 다른 본격문학의 시각에서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시인 김광섭이 김기림을 두둔하면서 보수파 문인들이 ‘수필은 아직 문학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품격이 못돼!’라며 ‘수필은 아직 장르 인준도 못 받았다.’는 공격을 방어했다. 또 그때 박태원의 수필체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이상의 <서망율도>(1936), <권태>(1937) 등이 나타나면서 수필은 문학의 장르적 성격을 굳혔다.
이런 논쟁 속에 이은상, 김진섭, 이양하, 김동석 같은 전업 수필가가 등장하면서 수필은 부동의 장르로 성장했다. 그리고 한 참 뒤 피천득이라는 작은 것을 아끼는 문인, 키 작은 거인을 만나면서 오늘날과 같은 수필의 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3. 오늘의 한국수필
현재 한국의 수필가를 대충 4천명으로 잡고, 수필 전문잡지를 30종으로 계산할 때 이런 수필가와 수필잡지가 일 년 동안 생산하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일 년에 출판되는 수필집이 몇 권일까. 계산하기 어려울 만큼 많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수필문학장에서 개인 수필집이 처음 상제된 것이 1925년에 출판된 최남선의 지리산 답파기 <심춘순례>(백운사)이고 그 이후 1960년까지 출판된 개인 수필집은 40여권 정도이다. 이 숫자는 현재 한 달 동안 출판되는 수필집 수에도 못 미칠 것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문인 수, 경제사정, 출판사정이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수필집이 너무 많이 출판된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60년까지 개인 수필집을 제일 많이 낸 문인은 이은상의 7권이 최다이다. 전업 수필가 김진섭, 이양하도 수필작품만 묶은 수필집은 두 권 뿐이다. 피천득도 48세에 출세작 <수필>(1958)을 쓴 뒤 66세에 첫 수필집 <<수필>>(범우사.1976)을 출판 하고 그 뒤 출판한 수필집은 <<금아문선>>(일조각.1980), <<인연>>(샘터.1996) 두 권 정도이다. 제1회 수필문학대상을 받은 <<산호와 진주>>에는 시도 많다. 이런 사실에 비하면 요새 수필가들은 수필집을 너무 쉽게 내는 듯하다.
특히 요새 수필가들은 거의 서정수필을 쓴다. 여행 후일담, 계절의 변화, 우정, 못다 한 효도, 이별, 만남 등 삶을 영위하면서 체험하는 온갖 신변사가 글감이다. 곧 모든 테마가 실재다. 다소 과장되는 면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시나 소설처럼 픽션이 개재될 수 없다. 따라서 글의 양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묽은 글이 많다. 건더기가 없다. 그래서 글맛이 떨어진다.
만약 수필의 반인 에세이를 쓴다면 이것을 극복할 수 있다. 에세이는 심리적 체험이 글감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양주동의 에세이에서 본다. 양주동의 『문·주 반생기』를 펴들고 몇 쪽을 읽지 않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지적 사유가 번쩍이는 문장을 만난다.
나는 그 ‘삼인칭’이란 난해어의 해석에 무릇 며칠 동안의 심사·숙고를 거듭하였으나, 해답이 종시 나오지 않았다. ...(중략)... 마침내 겨울날 눈길 二十리를 걸어 읍내에 들어가 일인 보통학교장을 찾아 그 말뜻을 물어 보았으나, 교장씨 역시 모르겠노라고 두 손을 젓는다. 나는 그때 C선생이 몹시 그리웠으나, 선생은 당시 入獄 중. 낙망하여 나오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젊음 신임 일인 교원에게 시험삼아 물었더니, 그가 아주 싱글벙글하면서 순순히 말뜻을 가르쳐 주지 않는가! 가로되
‘내’가 아닌, ‘네’가 아닌 ‘그’를 第三人稱이라 하느니라.
아 아, 이렇게 쉬운 말일 줄은! 그때의 나의 미칠 듯한 기쁨이란! 나는 글자대로 그 젊은 ‘선생’에게 고두 사례를 하고 물러나왔다. 그러나 나오면서 생각하니, 거진 나와 年輩인, 항차 日人인 그에게 一代의 韓人 ‘鬼才’가 이렇게 무식을 드러낸 것이 한편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 분하기도 하여, 섬돌을 내려오다가 문득 되들어가 ‘선생’에게 짐짓 물었다.
--선생이여, 그러면 ‘말똥’은 무슨 ‘칭’이니까?
선생이 머리를 긁으며 고개를 오랫동안 기웃거렸다.
--글세 ‘말똥’도 ‘인칭’일가?
나는 그날 왕복 四十리의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하도 기뻐서 저녁도 안 먹은 채 밤이 깊도록 책상을 마주앉아 ‘메모’로 적어놓은 ‘삼인칭’의 뜻을 ‘독서’하였다.
‘내’가 일인칭, ‘네’가 이인칭, ‘나’와 ‘너’외엔 牛溲馬勃(쇠오줌·말똥)이 다 三人稱也라
조선의 ‘귀재’가 무식한 소치로 같은 또래 소학교 일본인 교사에게 고두사례를 한 것이 부끄럽고 분하여 ‘말똥’의 인칭이 무엇인가라는 괴상한 질문을 하여 그 선생이 답을 못하게 함으로써 겨우 체면을 차리고 돌아와 내린 영문법의 ‘삼인칭의 정의’는 기문 중의 기문이다. 소 오줌, 말똥을 끌어와 삼인칭을 설명하는 기법이 기상천외하다. 문장의 이런 기지·재치·익살은 다음과 같은 대문에서도 번쩍인다.
---선생님 이 사람의 눈이 왜 이렇게 쑥 나와 있습니까?
잠간 그가 낭패하고 한편 가벼운 분노조차 느꼈다. 눈치가 --젊은 신임 교수의 관록을 떠 보고자 짐짓 이런 괴문怪問을 발하여 골려 주려함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여기서 성낼 것이 아니라고 결정하였다. 그래서 미소조차 띄우면서,
--- 학생, 정말 그것이 알고 싶어 묻는가?
--- 예 정말.
--- 그럼, 가르쳐 주지. 눈이 왜 쑥 나왔느냐고? 어 어.... 이분은 시인이다. 범인과는 달라, 천지 만물을 볼 때에 늘 ‘경이심’을 가지고 보거든. 새가 날아가도, 꽃이 떨어져도, 심지어 말똥이 굴러가도, ‘어째 그런가?’ 그 대상들을 물끄러미 냅다 쏘아 응시하는 버릇이 있단 말야. 그러니 두 눈이 쑥 나와 있을 수밖에.
그런데 자네 눈은 움푹 들어가 있네 그려. 이제부터 자연을 더욱 경이시하는 공부를 하렷다!
바세도우씨 병으로 눈이 불거진 사람의 눈을 설명하는 것이 하도 엉뚱하여 혀를 내두르고, 코를 벌름거리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늘 사물, 대상을 ‘냅다 쏘아 응시’하기에 눈이 쑥 불거졌단다. 학생의 질문이 생뚱맞지만 그에 대한 교수의 답은 그 생뚱맞은 것을 넘어 사기꾼이 어벙벙한 촌노를 눙치는 수준이다. 애숭이 교수를 좀 골려보려던 학생들의 장난은 여기서 바로 꺾이고 만다.
약관의 교수는 ‘돌연한 툭 불거진 눈’의 질문에 ‘즉각적인 명답’으로 그 시험의 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 뿐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질문을 던진 학생을 한 대 쥐어박았다. ‘자네 눈은 움푹 들어가 있네’라는 말이 그렇다. 얼마나 사물을 그냥 멍하게 바라보기에 눈이 움푹 들어가 있나. 그런 동물적 행위를 걷어치우고 인간적 고민을 좀 하라는 의미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렇게『문·주반생기』는 기지가 수필집 도처에서 돌출하여 가독성을 자극한다.
우리의 전래하는 수필, 고문에도 이런 지적 사유가 독자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예를 하나 든다. 안동의 숨은 선비 김낙행·金樂行의 <<구사당집·九思堂集>> ‘권⸱8’에 나오는 <자경잠·自警箴>이라는 글이다
積貨盈囷者·적화영균자(는) 力工買之功也·역공매지공야(라) 露積粟者·노적속자(임은) 其不惰於農也·기불타어농야(니라) 何士之不學而·하사지붕학이(하여) 中空空·중공공(인가) (쌓인 물화가 곳간에 가득한 것은 힘써 물건을 만들거나 장사를 한 공적이다. 밖에 곡식을 가득 쌓아 놓은 것은 농사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서이다. 어째서 선비는 공부를 하지 않아 속이 텅텅 비어 있는가.)
물건을 만들고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일하는데 선비는 게으름을 피우면서 잘난 체해도 되느냐고 나무라고 있다. 공부를 하지 않아 속이 텅텅 비어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는 말이다. 게으른 선비에게 면학을 당부하며 꾸짖는다. 언외·言外에 깊은 뜻이 있다.
선비는 물건을 만들고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천하다고 여기지 말고, 부지런하게 일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본받아야 한다. 선비는 지체가 높아 놀고먹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착각을 시정하고,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선비가 하는 공부나 글 짖기는 파적거리가 아닌 노동이어야 하고, 공부해서 얻은 지식은 생산물이어야 한다. 만들어 파는 여러 물건이나 농작물이 널리 쓰이는 데 참여하여 선비로서 누린 혜택에 유용성이 큰 지식을 생산해 보답하여야 선비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 된다. 지식의 유용성은 양이 아닌 질로 판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고문·古文을 고려할 때 ‘수필=에세이’라는 등식은 넌센스이다. 아니 무식이 용기가 되는 한 표본이다.
그러나 필자는 근래에 다음과 같은 유식한 수필을 만났다.
널이 알려진 천문학자인 갈릴레오는 ‘그러나’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에 속한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처럼 자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부닥치자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말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는 진리를 지켜야 할 과학자였다. 목숨을 건진 후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러나 지구는 계속 돈다.’고 슬며시 입장을 바꾸었다. 그 후 그는 ‘그러나’ 라는 세 음절로 생사기로에서 말의 수사학의 덕을 본 저명인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는 앞서 한 말이 아니라 뒤에 한 말이 본심임을 일러주는 접속사다. 변명과 회피와 면피의 ‘그러나’는 인간이 처음 만들어 낸 말이 아니다. 당연히 하늘이 창조하여 인간에게 물려준 것이다. 그 분도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껴 ‘그러나’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 작품은 접속사 ‘그러나’가 글감인데 이 글은 먼저 그것에 얽힌 한 고사를 소개함으로써 재미를 준다. 썩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들을 만하다. 그러나 이 글의 의미는 ‘그러나’를 통해 창조론을 끌어들이는 데까지 사유를 확장하고 있다. 하느님이 ‘그러나’를 만들어 인간에게 주었다는 것이 논리의 비약 같은데 비약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창조론 어쩌고 하는 말이 다 생략되고 없다. 나는 이 수필에서 필자의 유신론적 사유를 읽는다. ‘그러나’의 하느님 창조가 진화론을 은근히 부정하고 있다. 여행 후일담, 계절서껀 신변잡사가 장문의 미문체로 나타나는 수필과는 차이가 난다.
질의
현대 한국 문학에서 수필의 기여도와 창작의 자세
이방주(수필가)
오양호 교수님의 한국수필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주제 발표 잘 들었습니다.
우선 ‘비허구 산문, 범칭 ’수필‘의 정의’ 라는 소제목으로 다섯 개의 정의를 객관적인 입장으로 들어 설명하셔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고 각자 자신의 견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한국수필의 현황’을 서두에서 주로 수필가의 수와 그들이 발간하는 수필집의 양을 중심으로 밝혔고, 1920년대 이후로부터 수필이 부동의 장르로 자리 잡기까지의 흐름을 통시적으로 고찰해 주셨습니다. 다시 전장과 다소 겹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한국수필’이라는 소제목 아래 192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 몇 편의 수필을 든 다음 최근 신변사를 글감으로 서정 수필 위주로 쓰이고 있는 문제점을 밝혀 주셨습니다.
궁금한 점을 질문 드리겠습니다.
주제가 한국수필의 현황과 전망이기에 오늘날 문단에서 수필의 기여도와 전망을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저는 현대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을 치유하는데 수필이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필가로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현대 수필문학이 한국문단에 어떤 기여를 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시고 향후 더 큰 기여를 하고 이견 없는 부동의 장르가 되려면 수필가들이 어떤 자세로 창작에 임해야 하는지 교수님의 고견을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양호 교수의 발제에 대한 유감
발표에 앞서 오양호 교수의 발제 논문을 최원현 주간님으로부터 이메일로 받았었다. 질의 내용을 보내달라는 요구였다. 그래서 위와 같은 질의 원고를 작성하여 보냈다. 실제로 하고 싶은 말들을 매우 완곡하게 표현하였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발제한 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질의를 하고 기다려 답변을 들어보니 그 분은 나의 질의 원고를 읽어보지도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의 원고를 읽어보았다면 충분한 답변을 준비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 질문이었다. 매우 불쾌했다. 그래서 완곡하게 예의를 지켜 질문한 나를 마음 속으로 꾸짖었다.
불쾌한 이유는
첫째 발제자가 질의자의 원고를 읽어보지 않았다면 한국수필가협회에서 선정한 질의자를 매우 저렴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답변이 매우 일반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한국수필의 현황을 수필가들이 가족이나 일상에서 일어난 이야기만을 소재로 하여 상투적인 표현만 한다고 말하면서 수필이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과 현대인의 문제나 고통을 해결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질의는 묵살하였다. 최근의 수필가들이 소재를 일상에서만 선택한다는 말은 평론가들이 흔히 수필이 발전하지 않는 원인을 말할 때 하는 뻔한 말이다. 그러나 최근 발표되는 작품들은 새로운 소재찾기에 고심한 작품들이 많고 수필가들의 그런 노력을 엿보이는 작품들이 매우 많다는 것을 간과한 답변이었다.
셋째 전망과 자세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고 소재를 잘 선택하여 쓰면 된다는 초등학교 5학년에게 하는 답변으로 질의자의 질문 수준까지 폄훼하였다.
넷째 평론가들은 수필가들이 써놓은 작품에 대하여 뒤에 따라다니면서 점수만 꼬눌 줄 알지 방향제시를 할 줄 모른다는 내 생각이 맞았다. 오교수님도 그런 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일었다. 대체로 평론가들은 은근히 수필가를 가볍게 보고 묵살하기를 다반사로 한다는 평소의 생각도 여기서 확인했다. 이런 문제는 수필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나부터 내 글을 평하는 평론가에게 쓸데없이 비굴하지 않았나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반론을 제기하고 싶었으나 유혜자좌장께서 기회를 주지도 않을 테고 사회를 보는 최원현 주간께서 진행을 이유로 시간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멈추었다.
제기하고 싶은 반론 내지는 완곡하게 질의 내용을 작성하기 이전에 가졌던 나의 직설적 생각은 이렇다.
발제 논문에서 한국수필의 현황을 말하겠다는 소주제 아래에서 한국수필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수필에 대한 고찰은 현대수필의 발생과 역사이지 현황은 아니다. 현대 한국수필의 역사라면 적어도 2000년 이후의 수필을 논해야 한다. 2000년대 들어 수필은 양적으로 팽창하였을 뿐 아니라 작품 수준에서도 많은 향상을 가져왔고 많은 수필 전문지에서 수필의 질적 향상을 위해 선집 기획 출간, 이미 발표한 수필 중 좋은 작품이나 문제작을 다시 발표한다든지 하는 노력을 하여 질적 향상에 노력하고 있으며 실제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1998년에 등단한 나의 경우를 봐도 등단 당시의 수필과 지금의 수필은 하늘과 땅이다. 즉 <축읽는 아이>와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에 수록된 수필은 그 소재와 형상화 방법이 확연히 다르다. 현황을 말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날 한국수필문학상을 받는 김애양 수필가의 <고통의 자가발전소> 라든지 고재동 수필가의 <낮달에 들킨 마음>을 읽고 그에 대한 언급을 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아무에게나 상을 주지 않는 한국수필가협회가 선정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수필문학상은 한국수필의 현재와 미래의 방향을 시사하는 작품에 수여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고통의 자가발전소>(2018년 간)는 수필이 현대인의 정신적 고통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 수필문학이 나아갈 길이라고 본다. 60년대 수필을 보고 현황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웃기다 못해 참석자를 우롱하는 처사라고 본다. 나는 2017년에 <가림성 사랑나무>를 통하여 부흥백제의 매몰된 역사를 세상에 드러냈다. 또 2020년에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를 통하여 에코페미니즘의 사고로의 전환을 유도했고 아울러 수필에서 섹슈얼리즘의 수용 방법을 시도했다. 많은 수필가들이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것이 현황이다. 계간 <현대수필>이 추구하는 아포리즘 수필, 낯설게 하기나. <수필과비평> 이 기획하는 이달의 문제작 다시 읽기나, 수필과비평과 좋은 수필사가 추구하는 현대수필가 100인선 선집도 그렇고, 월간 <한국수필>이 기획하는 신인 작품 게재하기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최근 <선수필> <더수필>도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 여기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목성균 수필가의 수필 정도는 고찰해야 현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망은 발제 논문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도 불성실하고 한국수필가협회 자체를 무시한 것이다. 현대 수필은 다른 문학 양식에 비하여 현대인의 고민과 아픔을 바로 치유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문학 양식이다. 그래서 많은 대중이 수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문학의 정화(카타르시스) 기능을 언급했다. 이것이 곧 치유의 기능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독자의 아픔과 소망을 신에게 대신 전달하는 사제와 같은 존재라면 수필가는 독자의 아픔을 대신 또는 함께 울어주는 곡비哭婢와 같은 존재이다. 수필가가 독자의 아픔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현대문학에서 수필이라는 문학 양식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전망이다.
그러므로 미래 수필가들이 창작에 임하는 자세는
첫째 수필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창작에 임하는 것이다. 발제논문에서 이 문제는 비교적 성의 있게 제시해 놓았다고 본다. 그래도 수필의 개념에서 수필의 철학성을 논하지 않은 것은 미흡하다고 본다. 수필은 일상과 체험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다. 일상에서 떠나야 한다는 수필평론가들의 속임수에 속지 말고 일상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체험에 숨어있는 자아를 객관화하여 개인적 체험이나 개인적 정서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말아야 한다. 수필은 결국 일상이 소재이다. 그러나 해석은 독창적이고 철학적이어야 한다.
둘째 소재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수필는 시나 소설이 수용할 수 없는 소재를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시나 소설이 간접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소재도 수필은 직접 소화하고 수용하고 해석하여 바로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므로 소재 영역을 넓혀야 한다. 역사, 사회, 문화, 언어, 인간, 심리, 질병, 자연, 음식, 옷, 섹슈얼리즘 등 무궁문진하다. 그 어느 하나를 주제로 잡아 집중 탐구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탐구하고 의미를 찾고 가치와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수필을 창작해야 한다.
셋째 표현 방법을 확대해야 한다. 수필은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형상화도 무시할 수 없다. 소설처럼 허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수필의 특질을 살려 서사적 허구를 수용하지 않고도 표현 방법의 확장을 통하여 얼마든지 새로운 재미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나는 최근에 섹슈얼리즘을 수필다운 품격을 지니면서도 재미를 잃지 않도록 수필에 수용 표현하는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구체적 자아 성찰을 위하여 나와 또 다른 나와의 대화하는 문체를 통하여 내면 심리의 적나라한 표현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너무 낯설어 독자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어휘의 낯설게하기보다 비유와 상징 환유 반어 역설 등을 통한 수사법의 낯설게하기가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며 문학적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넷째 허구보다 수필적 상상의 전략적 표현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스통바슐라르의 <몽상의 시학>이나 <공간의 시학>에서 설명한 시적표현의 방법을 수필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대상에 대하여 물질적 상상- 역동적 상상- 원형적 상상이라는 상상의 단계를 활용하여 치곡 견색에 이르는 방법이다. 이런 과정에는 변증법적 설리가 소용되기도 한다.
이런 주체적 방법의 제시를 기대하고 질문하였으나 너무나 허망하고 참담했다.
수필평론가는 평가자이면서 동시에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는 지남차도 되어야 한다. 가치만 재지 말고 무엇이 가치있다, 이렇게 가치를 구현하라고 일러주어야 한다.
오양호 교수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 그러나 수필가로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는 미미한 평론가로서 유감의 독백을 여기에 풀어 놓는다. 부끄럽다. 무시 당한 것 같아 부끄럽고, 수필가라 부끄럽고 나도 수필평론가라는 이름이 부끄럽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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