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 7월호 독자와 함께 떠나는 수필문학 기행
장엄한 백두산, 신비스러운 天池
이방주
“산은 정복할 수 없다. 다만 산이 나를 용납할 뿐이다.”
어느 산악인이 한 말이다. 작은 동산이라도 산이 용납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다만 산이 나를 받아줄 뿐이다.
몇 해 전 8월 초 백두산 트레킹을 떠나는 백두산악회 80명을 태운 항공기는 인천을 출발한 지 1시간 50분 만에 길림성 장춘 공항에 일행을 풀어놓았다. 장춘에서 우리가 묵을 송강하호텔로 가는 길은 당시에는 터덜거리는 버스길이었다. 그런데도 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낯익어 백두산은 우리 것이라는 생각이 더 굳어졌다.
호텔에 도착하여 잠시 눈을 붙였는데 종업원들이 문을 두드려 잠을 깨운다. 짐을 챙기고 어둠이 가시는 것을 기다려 버스를 탔다. 백두산으로 향하는 것이다. 수없이 펼쳐지는 밀림에는 온통 하얀 자작나무 천지였다. 푸른 숲 사이로 껍질은 벗은 자작나무들이 미끈한 아랫도리를 드러내 보인다. 백두산 자작나무의 살결은 유난히 희고 고왔다.
백두산 등정의 셔틀버스로 갈아타고 숲 사이를 돌고 돌아 아스라한 다리를 건너 평원을 달리던 차가 조금씩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침엽수가 듬성듬성 섞이더니 이내 비자나무나 전나무, 편백나무 같은 상록 침엽수가 하늘을 찌른다. 경사가 더 급해지자 이제는 침엽수도 자작나무도 사라지고 끝없는 초원이다. 너른 초원에는 키 큰 개당귀가 보랏빛 대궁에 하얀 꽃을 우산처럼 받쳐 들고 있다. 오를수록 온 산이 꽃의 축제를 이루었다.
버스가 산행기점인 서파 5호경계비 아래 주차장에 도착하자 ‘후드득’ 빗방울이 몇 방울 떨어진다.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평원에 산안개가 솜털을 불어 내품듯이 흐느적거리며 기어오른다. 조반을 도시락으로 가름하고 북한과 중국의 경계인 5호 경계비 부근으로 오르는 계단에 올랐다. 다리가 팍팍하고 숨이 찬다. 시작을 빨리하면 종주를 망칠 것 같아 앞서 가는 아내를 채근하여 천천히 걸었다. 지난밤에 폭우가 내렸는지 화산모래가 돌계단까지 넘쳤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 눈을 번쩍 뜨니 아! 드디어 천지다. 그러나 처음 만나는 천지는 구름 속에 숨어 있었다. 천지라는 커다란 함지에는 물이 담겼는지 안개가 담겼는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이불솜 같은 환상을 가득 담고 있었다. 이내 바람도 없이 구름이 하늘로 솟구쳐 파란 수면이 드러났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세수하고 나오는 아가씨처럼 청초하면서도 거대한 얼굴을 내밀었다. 수면은 잔잔하다. 너른 수면에 햇살이 비친다. 그러나 비치는 햇살이 곳곳마다 다른지 수면은 옥과 비취를 섞어놓은 것처럼 얼룽얼룽 물빛이 다르다. 사람들이 흔히 민족의 성산이라고 하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만세라도 소리쳐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안내원의 주의가 생각나 그만 두었다.
저 멀리 한가운데서 갑자기 흰 물결을 일으키며 황룡이라도 한쌍 솟구쳐 오를 것만 같다. 아니면 금방이라도 '우르릉' 소리를 지르며 물이 솟아올라 갈라지고 화산탄이 하늘을 향하여 분출할 것만 같다. 발밑은 온통 검거나 붉은 화산재, 화산탄, 화산 모래가 부서진다. 태풍 전야처럼 정적이 감돈다. 아직도 반경 50km 이내는 가끔 진도 2~3 정도의 약한 지진이 일어난다고 한다. 처음 대하는 천지는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천지의 물가는 푸른 초원이다. 둥그런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길이 보이는 초원에는 멀리 보아도 하얗게 꽃이 피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절벽 아래 바로 수심이 깊은 물이다. 봉우리에서 내려 뛰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푸른 물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다.
정적 속에서 멀리 최고봉인 병사봉(장군봉)이 보인다. 그 아래 북한의 경계 초소도 보인다. 이곳 경계로부터 멀리 6호 경계비가 있다는 천문봉까지 천지를 가로질러 중국과 북한이 경계로 삼았다고 한다. 고구려 역사에서는 백두산은 당연히 몽땅 우리 땅이었다. 더 아쉬운 것은 우리 땅이라고 하는 정상을 가지 못하고 중국에서 바라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아쉽고 아픈 역사는 나뿐만이 아니고 민족 모두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들도 그냥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만 있을 뿐이다.
돌기둥처럼 솟구친 망천우(2,457m)를 우회하여 청석봉으로 향했다. 길은 험하지 않다. 생각과는 달리 그냥 육산이다. 길가는 온통 고산지대의 야생화가 갖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청초하다. 청석봉 오르기 전에 한 등성이에 오르니 천지를 온통 검은 구름이 휩싸고 돌아 수면은 보일 듯 말듯하다. 숨 가쁘게 오르막길을 오르면 비단길 같은 능선이 나오고, 그러다가는 자갈돌 굴러내려 가슴조이는 내리막길이 있는 것은 어느 산이나 다 마찬가지다. 오르막길에서 육신이 고달프지만 내리막길에서는 심신이 다 고달프다. 꼭 우리 살아가는 모습 같지 않은가. 우리가 내일을 믿고 오늘을 살듯이 백두산을 우리 산이라고 믿는다면 산은 나를 용납해 줄 것이다. 믿음으로 바라보니 두려움이 모두 가신다.
청석봉(2,662m)을 지나 백운봉(2,691)에 오르기까지는 아슬아슬한 내리막길과 숨가쁜 오르막길이 반복된다. 능선에서 끝없이 펼쳐진 풀밭을 내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아름다운 천지를 바라보면 어느덧 팍팍하던 장딴지도 부드럽게 본래로 돌아온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할 필요도 없다. 아스라한 세상을 내려다보면 시간은 다 헛된 것으로만 생각된다. 그냥 장엄함에 짓눌려 피로도 목마름도 배고픔도 다 잊는다.
백운봉에서 비가 내렸다. 우리가 점심을 먹으려고 자리를 펴자 8월의 바람에도 손이 시리다. 찬바람이 안개를 휘몰아 오자 안개는 어느덧 빗방울이 된다. 빗방울이 모자 위로 머리를 때린다. 얼음 막대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 차가운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이다. 바람에 날리는 판초를 아내에게 입혀주고 나도 입었다. 면장갑을 끼어도 손이 시리다. 몇 방울 후드득 판초를 두드리던 빗방울이 바람에 몰려 안개를 타고 저쪽 등성이로 쫓겨 간다. 조화인지 변덕인지 어느새 수면에는 햇살이 비친다. 점심을 먹고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아래 바로 천지의 푸른 물이다. 북으로 바라보면 장엄한 평원이고, 남으로 바라보면 푸른 수면이 햇살에 반짝인다. 장엄한 백두산, 신비의 천지 그대로이다. 나는 말을 잃었다. 아내도 넋을 놓고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고개를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는 평원을 바라보니 멀고 아득하기만 하다. 태초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용암이 지글거리며 흘러 산 아래로 내려갔을 것을 생각하니 신비롭기만 하다.
태초의 평원인 듯 푸른 콩으로 쑤어낸 푸른 두붓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초원을 천천히 걸어 하산 길에 들어섰다. 초원의 언덕을 한 시간 반쯤 걸어 멀리 버스가 보이는 날망에 서서 옥벽폭포와 장엄한 장백 폭포를 바라보았다. 옥벽 폭포는 장백폭포에 비해 작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장백폭포는 천지의 물이 달문을 통하여 흘러들어 68m 높이를 하얀 물안개를 일으키며 곤두박질치고 있다.
내리막길은 경사가 급하고 위험하다. 너덜은 아니지만 주먹 크기에서부터 아기 머리만한 수많은 자갈이 구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돌이라도 구르면 아래 내려가는 사람의 머리에 박힐 것만 같다. 미끄럽다. 이런 위험한 비탈길에서 비를 만났다. 엄청난 소나기였다. 판초 위로도 머리를 때리는 듯한 폭우다. 장백폭포 아래서는 쏟아지는 물소리와 천둥 번개 소리 사람들의 탄성으로 온통 협곡이 시끄럽다.
거짓말처럼 갠 하늘,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로 깨끗하게 씻긴 포장도로를 돌고 돌아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이도백하시의 호텔에 들었다. 백두산 관광 산업은 연변의 우리 동포들이 주관하여 일으켰다고 안내원 청년이 일러주었다. 연변은 우리민족의 자치에 의하여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소수 민족의 설움은 어찌할 수 없다고 울분을 토로했다.
동포가 경영하는 식당에서 삼겹살을 안주로 소주에 취하니 장엄한 백두산, 신비스러운 천지를 되짚어 보니 모두가 울분이고 눈물이 되는 기분이다.
(한국수필 2018년 7월호 청탁원고, 2018년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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