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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명희의 <엄마의 문> 수필과 비평 2016년 1월호

느림보 이방주 2016. 1. 22. 22:26

엄마의 문

권명희

 

굉음과 함께 온 집이 흔들린다. 오전 내내 시끄럽던 소리가 멎자 드디어 벽이 뻥 뚫렸다. 창살로 답답하던 원룸 일층에 출입문이 생겼다. 그곳에 잠시 피신했던 엄마가 보더니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며 좋아하신다.

날은 어둑어둑해지는데 죽령 고개 외진 곳에서 젊은 엄마가 버스를 기다린다. 사람은 한 사람인데 장정도 들기 힘겨울 만큼 커다란 보따리 세 개가 길바닥에 줄지어 있다. 가을해가 정수리 위를 내리쪼일 즈음 야속하게도 버스는 서려다가 무정하게 그냥 가버렸다. 한 사람의 요금으로 세 개의 보따리가 부담이었을까? 이제 마지막 버스를 타야만 한다. 고랭지 무를 시장에 들고 가서 팔아야 하고 아직 젖먹이 막내 젖을 물려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라 이제는 꼭 타야만 한다. 멀리서 버스가 보인다. 젊은 엄마는 두 손을 쫙 벌리고 도로 한복판을 막아선다. 차는 설 수밖에 없고 문을 열고 기사가 욕을 마구 퍼 붓는다. 그게 뭐 대수랴! 차만 탔으면 되는 게지. 보따리 세 개를 싣는 동안 차는 어쩔 수 없이 기다려 주었다.

수도 없이 들어온 이야기지만 들을 때마다 처음 듣는 것처럼 가슴이 저릿하다. 막내가 젖을 먹을 때라면 엄마 나이 몇이었을까? 계산해 보고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란다. 그 젊은 나이에 그렇게 여자를 포기하고 살았더란 말인가. 조롱조롱 육남매를 밥이라도 굶기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생업에 뛰어들었다. 고울 리 없는 모습이 아버지를 고운 이에게 넘겨줘야만 했다. 육남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서는 박차고 집을 떠날 수 없었던 엄마는 외롭고 추운 삶을 살아냈다. 삼십년 전 내가 시집가던 해 아버지도 새 살림을 차렸다. 시댁에서 머지않은 곳에서 시집살이하는 나보다 더 깨를 볶고 살았다. 큰언니쯤 되는 젊은 여자와 살다보니 아버지 모습은 큰오빠 같아졌다. 집에서 냉기를 품어내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강산이 세 번 바뀌고 나니 엄마 몸은 구멍 숭숭 뚫린 고목이 되어 쓰러지고 말았다. 홀로 버티고 살던 강한 의지를 그만 내려놓고야 말았다. 그리고 애기가 되었다. 악착도 분노도 사라진 엄마는 해피 할머니가 되었다. 해피 할머니가 된 엄마는 더 이상 아픔을 짊어지고 살지 않아도 된다. 아픈 기억을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버리고 뭐든지 모르겠다고 한다. 여기가 어딘지, 어디서 살았는지, 그저 자식들만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

아픈 기억을 지워버린 모습을 보며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더 이상 홀로 살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대책 회의를 하였다. 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남매는 집을 처분하기로 하였다. 손때 묻은 가재도구들이 쓰레기장에 쌓여갔다. 그곳에 우리의 어린 시절이 그대로 버려졌다. 아버지는 매우 밝은 표정으로 우리들의 어린 시절을 마구 내다 버렸다. 짐 하나 덜어내는 마음으로 홀가분하게 노후자금을 챙겨 떠나버렸다.

공기 좋고 잘 보살펴 주는 곳으로 엄마를 모셔놓고 우리는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다. 하루 버는 알량한 돈이 엄마를 그곳에 모시는 이유라고 생각했다. 이런 복지 제도를 만들어 놓은 정부에 감사하는 마음도 들었다. 병든 부모를 돌봐주는 제도가 생겨 노력 한번 하지 않은 채 시설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가끔 엄마를 만나러 가면 똑같은 머리와 복장을 하고 개성도 감정도 없는 얼굴에서 슬픔을 느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조차 잃어버린 모습으로 물끄러미 자식 얼굴만 바라볼 뿐이었다. 애써 유쾌한 척 이렇게 깨끗한 곳에 있으니 좋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그저 쓸쓸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런 엄마를 떼어 놓고 돌아서는 마음은 빚을 잔뜩 지고 갚지 않는 마음이었다. 어린 자식들 두고 발걸음을 떼지 못한 엄마를 우리는 너무도 쉽게 떼어 놓고 두발 뻗고 사는 마음에 부끄러움이 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휴가 떠나던 어느 날 엄마를 집으로 모시고 왔다. 일층에 침대와 텔레비전을 들여놓고 차마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오던 엄마의 소품들을 진열해 놓았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팔순 사진도 올려놓았다. 그간 외박을 허락받아 집을 다녀가곤 하였는데 또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만 알고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불안한 눈빛으로 며칠 생활 하던 중 나는 이제 그곳에 안 갈란다.” 마치 엄마가 우리를 두고 떠날까봐 조바심하던 어린 나처럼 간절하게 말했다. 그 알량한 돈의 유혹에 그간 외로워했을 것을 생각하니 늘 하던 죽령 너머 이야기가 생각났다.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오다가 원룸 베란다 창살을 잡고 웃는 엄마를 보게 되었다. 마치 죄수가 바깥세상의 자유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다시 갇혀 있는 모습이었다. 자유롭게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창을 향해 세상을 느끼려는 것이다. 몇 번을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지 못하더니 이젠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그렇게 창으로 내다보는 것이다.

나설 때는 후하게 열어주던 현관문은 들어오려면 기어이 네 자리 숫자를 대란다. 아버지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비밀번호를 누르지 못하고 허둥대듯이 요지부동 잠겨있는 문 앞에서 떨고 있는 것이다. 생각다 못해 원룸 베란다로 문은 내기로 하고 공사에 들어갔다.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고 언제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출입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은 테라스도 만들었다.

오늘도 깊은 밤 센서 소리가 몇 번이나 감지되었다. 모두들 잠든 밤에도 깨어나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찾은 것이다. 자유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는 엄마를 보며 조금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불안해하며 표정 없던 모습에 웃음을 되찾았다. 남편 떠난 황량한 집안에서 여섯 남매를 지켜 주었듯이 나도 세상의 무심함에서 말벗이 되어주며 채무 변제에 힘쓰며 살아야지. 최소한 두발로 화장실 다닐 수 있고 자식과 함께 지내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느낄 수 있는 그 날까지 만이라도…….




당선소감

  권명희

 

새해에 동해바다로 세 가족이 해맞이하러 갔습니다. 붉은 해가 떠오르며 장관을 이루기에 장난기가 발동하여 손 마이크를 만들어 올해의 소망 한 말씀하라며 한마디 씩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한분이 저에게도 올해 소망이 무엇이냐며 묻습니다. 저는 불쑥 올해는 꼭 등단하고 싶어요.” 라고 말해 놓고 쑥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마음을 들킨 기분이었지요.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에 신인상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간절하게 바라면 이루어 지나봅니다. 기쁜 마음에 엄마를 보며 춤을 췄습니다. 엄마가 저보다 더욱 기뻐합니다.

언젠가 제 글을 보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환갑이 다 된 딸이 엄마를 모시고 사는 행복을 누린다는 말씀에 다시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모두 남편의 배려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냉장고에서 우유 한잔 꺼내 먹으면서도 할머니 이거 천원에 살게요.” 하며 용돈을 주는 아들의 장난에 살맛이 납니다. 집에 올 때 할머니 간식을 꼭 챙겨오는 며느리들의 마음이 사랑스럽습니다.

이제 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바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낀 마음을 한사람의 마음에라도 다가설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마음 먹는 이 소망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채택해주신 심사위원님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