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적 상상으로 형상화한 삶의 근원적 가치
-목성균의 수필전집 『누비처네』를 중심으로-
이방주
Ⅰ. 들어가기
한국 수필문단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목성균은 타 문학 양식으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문학적 긴장감을 수필문학 작품에 수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일상에서 찾은 소재의 의미를 솔직하게 피력함으로써 부가가치를 찾아내고 있다.
수필을 잘 쓰고 못 쓰고 간에 수필에 어떤 의미는 부여해야 할 것 아니냐, 내 딴에는 그리 생각하고 수필을 썼다. 의미 부여란 다름 아닌 내 삶의 간과看過할 수 없는 작은 부가가치들에 대한 설명이지만, 그 또한 맘대로 되는 건 아니었다. 솔직하면 창피하고, 감추면 의미가 없다.
『명태에 관한 추억』서문에서
이 글은 『명태에 관한 추억』의 서문이다. 작가는 여기서‘삶의 간과할 수 없는 작은 부가가치’를 찾는 것을 수필문학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또한 타 문학 양식과 달리 수필 창작 과정에서 갖는 딜레마를 ‘솔직하면 창피하고 감추면 의미가 없다’고 간단명료하게 고백하였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솔직할 수밖에 없었고, 사실을 감추지 않고 토로함으로써 독자를 감동시켰다. 솔직함으로써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창피함에서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에 수용된 이야기는 이미 작가 개인의 삶의 체험이라는 사실에서 벗어나 독자 모두의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 수필만이 가지는 문학적 긴장감 형성에 성공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수필을 비전문적인 문학이라고 한다. 그래서 수필을 문학의 양식에서 제외시키는 문학연구가도 있다. 심지어 수필가조차도 스스로 수필은 시나 소설에 비해 문학성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진정 수필다운 수필이 아니라‘시적 수필’이란 평을 받으면서 우쭐하는 수필가도 있다. 이런 웃지 못 할 현상은 수필문학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수필가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시로 출발했지만 결국 수필로 완성될 것이다. 문학의 태동기에 인간은 자신의 고통을 신에게 하소연했다. 시는 신에게 드리는 소망의 말씀이다. 세계는 인간의 욕구를 받아주기도 하지만 거부하기도 한다. 자아의 욕구가 세계와 부딪치는 것이 바로 갈등이다. 인간은 갈등을 스스로 해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그래서 체념해 버릴 수 있겠지만, 신에게 기도함으로써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기도의 말씀이 바로 시로 나타났다. 그래서 문학은 시로부터 출발했다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속삭임이다.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인간을 향하여 보내는 삶의 철학을 담은 메시지이다. 수필은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하여 인간을 철학적으로 감동시키는 사색적 언어예술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제재로 삼은 체험의 진실성이 감동을 준다. 이야기는 진실해야 하고, 진실을 진실하게 형상화해야 다른 사람을 감동시킨다. 그래서 수필로 수렴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가급적 거짓말은 안 하기로 했다. 이제 나를 거짓 포장해서 부당이득을 얻을 필요도 이유도 없거니와 얻어질 리도 만무하다. 그래도 가끔은 그 작은 삶의 부가가치를 부풀리고 치장하고 싶은 딱한 인지상정, 수필 쓰기란 그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자제력을 수련하는 일 같아 보였다.
『명태에 관한 추억』서문에서
목성균 수필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실한 정情과 자연에서 발견하는 삶의 원리와 거기에서 느끼는 정情을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하여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제고하였다.
수필에서도 흔히 허구의 수용이란 말을 한다. 목성균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렇다고 담백하게 써야한다고 고집하지는 않는다. 수필도 문학이므로 재미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지나친 글재주는 지양하지만 ‘도나 개나 쓰는 수필’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그래서 수필적 허구, 다시 말하면 붓 가는 대로만 쓰는 것이 아닌 상상을 가미한 수필을 쓴다. 수필은 사실을 기록하는 글이기에 문학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부 문인들은 상상에 의한 허구가 문학적 긴장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목성균의 작품에서 우리는 문학적 미감을 위해서 이야기의 배경에 살짝 깔려 있는 구성의 허구를 발견하는 묘미를 느낄 것이다.
이 글은 목성균 수필전집 『누비처네』에 담긴 101편을 대상으로 했다. 『누비처네』는 작가가 생전에 출간했던 『명태에 관한 추억』(하서출판사 2003)에 실린 51편과 그의 유고집『생명』(2004 수필과 비평사)에 실린 50편이 전집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식과 형상이다. 대상을 감각하고 인식하는 관점, 독창적으로 인식한 내용을 형상화하여 전달하는 것이 장르를 불문하고 문학적 감동의 열쇠가 된다. 목성균 수필은 정情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그가 대상에서 정의 미감美感은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우선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았다.
수필문학이 사실과 체험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고 작가도 사실의 진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문학적 대상이 된 사실은 무엇이고, 그러한 사실에서 어떤 부가가치를 발견하여 의미화 했는지 살펴보겠다. 말하자면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 있는 삶, 곧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작가가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그의 작품에서 찾아보는 일도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 글에서 그러한 점에도 유념하겠다.
수필에서 문학적 상상은 수필문학의 문학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소재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사색의 방향은 어떠한지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또 작가가 인식한 대상을 형상화하는데 어떤 문학적 표현 방법이나 장치가 사용되어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그의 인식과 형상이 독자에게 감동을 주는 요소를 알아보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작업이다. 또한 수필문학의 본질 구현을 위하여 무엇으로 기여하고 있는지 알아보겠다.
이러한 일련의 궁구가 작가의 작품성을 훼손하거나 한국 수필문학 발전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겠다.
Ⅱ. 추억과 정한情恨의 세계
1. 고향과 자기 정체성
한국문학에서 자연의 의미는 무시할 수 없다. 한국인은 자연의 품에서 자연의 섭리를 배우고 자연을 호흡하고 자연을 완상하고 자연에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자연을 이용후생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보다 조화와 귀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자연관을 형성했다.
수필가에게 자연은 어떤 문학적 의미를 지닐까? 수필가 목성균의 뼈와 살이 된 자연은 고향과 백두대간이다. 그의 고향은 백두대간으로 빙 둘러싸인 괴산 연풍이고, 그가 산림공무원으로 근무한 강릉영림서도 역시 백두대간이다. 작가는 괴산 연풍에서 유소년 시절을 보냈고 강릉 영림서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장년을 보내 삶의 대부분을 백두대간에서 보낸 셈이다.
산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산은 때로 인간과 조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비호의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산은 죽마고우가 될 수도 있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산은 성스럽고 장엄하기도 하여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아가 의지해야 하는 회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목성균에게 산은 그냥 삶의 공간이 아니라, 문학적 정서와 가치를 불어넣은 영혼의 터전이었다. 그가 유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낸 고향 연풍은 그에게 정한情恨이라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하는 바탕이 되었다. 그리고 그가 한때 산림공무원으로 근무했던 백두대간은 아름다운 인간적 정한으로 성장하는 영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산그늘 진 갈매실 냇가의 자갈밭은 그 시절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개성대로 솔직하던 고향친구들이 은밀하게 모여서 주량을 늘여 가고, 끽연 폼의 멋을 창출하고, 여울낚시의 기량을 숙달시키고, 매운탕 끓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음모하고 실행했다.
「그리운 시절」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추억하고 있다. ‘갈매실 자갈밭’은 그의 삶의 터전이 자갈밭이었음을 말하지만, 그 자갈밭은 그냥 자갈밭이 아니라, 주량과 끽연의 폼을 익숙하게 성장시켜 주는 자갈밭이었다. 물론 그들의 영혼은 매운탕이 익어가듯 여울낚시의 기량이 높아가듯 성장했을 것이다. 작가가 추억하는 고향의 산천은 이렇게 인간을 함께 어울려 성장하게 해주는 성스러운 통과의례적 공간이다.
깊은 두메에 전깃불이 들어온 것은 일대 변혁이었다. 제물로 바칠 돼지 멱따는 소리와 풍물소리가 골짜기를 울리던 점등식 날, 마침내 휘황찬란한 전깃불이 켜진 방안에서 졸지에 처신이 궁색해진 등잔을, 사람들은 흐릿한 불빛 아래서 불편하게 산 것이 네놈 때문이란 듯 가차 없이 방 밖으로 내쳤다. 손바닥 뒤집듯 할 수 있는 얕은 인간의 마음인 걸 어쩌랴. 이 등잔도 우리 식구 중 누군가가 그렇게 내다버렸을 것이다.
「사기등잔」
이제는 흰옷 입은 노인들의 권위 있는 행렬도 볼 수 없고 가을 달밤에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가난하면서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줄도 모르고 성의껏 살던 삶이 사라져 버린 우리 땅의 여분을 차지하고 억새만 홀로 피어서 어쩌자고 저리도 고결스러운지……
「억새의 이미지」
세월은 자연을 그냥 두지 않는다. 문명의 불이 사기등잔을 몰아내고 아늑한 골짜기를 밝히자 노인들의 권위도 사라지고 가난 참을 줄도 모르게 된다. 인간은 오히려 밝은 문명의 불에 쫓겨나도 억새만 홀로 피어 과거의 고결한 이미지를 그리워하고 있다. 여기서 사기등잔은 현대 문명의 일회성이나 비정함을 은근히 비판하면서 인정에 대한 그리움을 상징하고 있다. 정으로 작가를 성장시킨 고향에는 노인의 권위도 땅의 권위도 다 사라지고 정을 놓친 한만 남아 있음을 절절히 표현하였다. 고향은 그의 정체성을 확립해 준 곳이기에 한으로 남아 있는 정한情恨의 세계이다.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이다. 고개는 지역과 지역의 공간 분할을 하기도 하지만 유통과 통로로서의 연속성을 지니기도 한다. ‘아리랑 고개’, ‘바위고개 언덕’처럼 우리 문학에서 고개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성장하면 출가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여성들에게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분수령으로 남아 정과 한의 눈물을 의미한다.
지름티 고개는 이제 구름이나 넘어가는 본래의 산등성이로 돌아갔지만, 한으로 삭은 어머니의 가슴에는 부부 사이를 이쪽과 저쪽으로 가르는 분수령으로 엄연히 자리 잡고 있다.
「고개」
‘이화령’, ‘새재’, ‘소조령’등 커다란 고개를 넘어 문경이나 충주로 통하고, 괴산에서 모래재를 넘어 대처인 청주로 통하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 비교적 작은 고개인‘지름티 고개’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지름티 고개가 바로 삶의 영역인 ‘윗버들미’에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고개는 아버지의 독선 때문에 어머니의 평생의 한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에게는 ‘희로애락을 짊어지고 숨차게 넘나들던’ 삶의 고개라고 말했다. 그렇다. 고개 하나를 넘으면 삶의 고개를 하나 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고개는 사라졌다. 문명이 고개를 이 땅에서 쫓아낸 것이다. 작가는 없어진 고개를 생각하면서 불편한 삶에 대한 향수를 갖는다. 그것은 땀 흘림 없이 대처로 통하여 유대가 이루어지는 현실 때문이라고 안타까워한다. 쉽게 이루어진 유대는 쉽게 사라진다는 사실은 이미 입증된 사실이다. 이 시대에 불편한 삶을 그리워하고 손쉽게 이루어지는 삶의 편리를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지면서도 작가의 글에 쉽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사고가 인지상정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집은 ‘우지직’하는 힘없는 비명을 남기고 폭삭 허물어지고 말았다. 허무했다. 미루나무 꼭대기에 얼기설기 틀어 놓은 까치둥지도 태풍 앞에 온전히 버티어 내거늘, 우리 가문을 면면이 이어온 삶의 응력應力이 그 뿐인가. 포클레인 삽날 앞에 숨결 같은 뽀얀 먼지를 풍기며 거짓말처럼 허물어졌다. 나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래도 포클레인이 끙끙거리고 힘을 들인 연후에야 문명의 이기 앞에는 역부족이라는, 설득력 있는 모습으로 무너질 줄 알았다. 그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무너질 줄은 몰랐다. 허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집은 삶이 담겨 있을 때에 탄탄히 버티어 내는 힘을 지니는 것일까? 나는 집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임종하듯 서럽게 지켜보았다
「고향집을 허물며」
문명에 의해서 고개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공간이었던, 그리고 거스를 수 없는 부권父權을 지탱하던 집도 무너졌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집 속의 존재이다. 원초적인 집이라고 할 수 있는 자궁으로부터 결별되어 나오는 순간, 집이라는 또 하나의 자궁을 확보하게 된다.
집은 유동의 삶을 정착하게 하고, 공포로부터 보호하는 의미를 지닌다. 집은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낳는 은밀한 공간이기도 한다. 이러한 안식과 위안의 공간이 바로 집이다. 그래서 고향에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삼간이라도 존재해야 고향이다. 집이 없는 고향은 의미를 상실한다.
작가는 허물어지는 집을 임종하듯 서럽게 지켜보고 있다. 집을 무너뜨리는 것은 포클레인이라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문명 이데올로기이다. 작가가 문명의 이데올로기로부터 배반당하듯 우리는 모두 현대라는 폭력에 배반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의미 발견에 손뼉을 치는 것이다.
2. 정한情恨과 관계의 미학美學
목성균 수필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필에 의미 있는 인생이 진하게 담겨 있지 않으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로 끝나버린다. 이야기에 삶의 진솔한 의미와 부가가치가 있어야 수필문학으로서 자격을 획득한다. 수필도 문학이므로 화자가 삶의 세계에 살아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세계가 받아주지 않는데 대한 고통이 있어야 한다. 바로 삶의 갈등이다. 문학을 하나의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수필에도 드러나야 비로소 문학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화자의 문제 해결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실성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그것이 곧 미적 감동이다.
‘인간人間’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는 언어이다. 수필문학이 다른 문학 양식과 다른 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아름답게 형상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가 정서를 토로하거나 사물에 대한 정서적 정의라고 한다면, 수필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정과 한을 아름답게 형상화하여 표현한다. 소설이 허구적 서사를 통하여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면, 수필은 정서가 가미된 사실적인 서사를 통하여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목성균 수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문학적 감동은 무엇일까? 목성균의 자아를 둘러싸고 있는 삶의 세계 가운데 화자의 욕구와 충돌하는 삶의 환경은 주로 주변 인물들이다. 인물들은 화자의 욕구를 가로막기도 하지만 동조하기도 하고 모른 체하기도 한다. 화자는 세계와의 관계를 놓치지 않고 낚아 올린다. 여기에 목성균 수필의 문학적 부가가치가 존재한다. 물론 그 이야기들은 거짓 없이 솔직하고 진솔하다. 그래서 일반화되고 확대된다.
목성균 수필의 부가가치는 인물의 정한과 권위라고 할 수 있다. 잃어버린 추억에 대한 한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라는 인간적 정에 매어 있다. 증조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권위에 억눌리는듯하면서도 수용하고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도 품고 있다. 이러한 정한과 권위에 대하여 남의 일 대하듯이 객관화한다.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외면하는 척하면서 담담하게 이끌어 간다.
대고모 댁 안방을 기웃거려 보았다. 내일이면 대례청에 설 사돈 색시가 역시 까만 치마에 하얀 적삼을 입고 일가의 안노인들에 둘러싸여서 아랫목에 조신하게 앉아 있었다. 언뜻 눈이 마주쳤다. 마음에 한 점 동요도 스침이 없는 아주 조용한 표정으로 나를 잠깐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돌아서서 울 넘어 산기슭에 조용히 피어 있는 조팝나무 꽃을 보았다.
지금도 조팝나무 꽃을 보면 대고모 댁 사돈색시를 좋아해도 되는 건지 안 되는 건지 궁금하다. 궁금한 걸 가슴 속 깊이 묻어 두고 있는 것도 다치고 싶지 않은 비밀처럼 은근해서 좋다.
「조팝나무꽃 필 무렵」
화자의 마음을 움직였던 대고모 댁 사돈 색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듯 드러냈다. 인간은 자신을 얽매는 규범을 수없이 만들어 놓고 헤어나지 못해 안달을 한다. 스스로 만든 규범의 사슬을 스스로 없애버리면 저절로 사슬에서 벗어나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음에도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어이없는 규범을 화자는 괴로워하면서도 다 인정하고 순응한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다치고 싶지 않은 비밀처럼 은근해서 좋다’고 긍정한다.
고통을 참으면서 현실을 어쩔 수 없다고 긍정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체념이라고 한다. 공무도하가에서 임을 사별한 상황에서‘가신임을 어이할꼬’하고 한탄하거나 처용가에서 ‘본래는 내 것이지만 빼앗긴 걸 어찌한단 말인가’하며 한탄하는 것이 그것이다. 화자가 이렇게 자신의 욕구를 접고 현실에 수긍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현실적 삶에 대한 정으로부터 연유된다. 그래서 그러한 정情은 훗날 잃어버린 것, 묻혀버린 것, 문명에 의해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의 한恨으로 작품 속에 녹아난다.
목성균의 인물에 대한 정, 가족에 대한 정은 아버지를 아름다운 권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버지는 두 번 다시 그 소리를 지르지 않으셨다. 그걸 아버지는 치사恥事로 여기신 것일까. 사공은 분명히 따뜻한 방안에서 방문의 쪽유리를 통해서 건너편 나루터에 우리 부자가 하얗게 서 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도선의 효율성과 사공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나루터에 선객이 더 모일 때를 기다렸기 쉽다. 그게 사공의 도선 방침일지는 모르지만 엄동설한에 서 있는 사람에 대한 옳은 처사는 아니다. 이 점이 아버지는 못마땅하셨으리라. 힘겨운 시대를 견뎌 내신 아버지의 완강함과 사공의 존재가치 간의 이념적 대치였다.
「세한도」
사공과 대치하는 아버지의 자존심을 쓸데없는 일이라고 원망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 ‘치사’를 피하려고 자신을 엄동설한의 강가에 세워둔 아버지의 옹색한 자존심을 원망하지 않고 사공의 처사를 비판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동조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 대치를 내면으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내가 아버지께 받아 본 단 한번뿐인 성의 있는 관심이었다. 늘 밤길의 먼 불빛처럼 아득해 보이던 아버지가 마음을 내 눈앞에 펴 보이신 것이다. 그날 밤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장롱 맨 아래 간직해 둔 사주단자보다도 더 소중하다. 겨울밤의 냉기를 몰고 불쑥 방으로 들어오셔서 소년의 두 뺨을 따뜻하게 달구어 주신 투박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어 준 등잔, 그 등잔의 고마움을 나는 전깃불에 반해서 헛간에 내다버리고 까맣게 잊어버렸다.
「사기등잔」
사기등잔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희미하게 느끼고 있다. 아버지의 사랑을 ‘단 한번뿐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자식에 대한 사랑을 단 한번만 들킨 것이라 풀이된다. 이러한 사랑은 「누비처네」에서 더 확연하게 승화된다.
추신은 추석에 올 때 시골서는 귀한 물건이니 어린애의 누빈 처네 포대기를 사오라는 당부 말씀이었다. 소액환은 누비처네 값이었다. 그러면 네 식구가 좋아할 거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족을 생략하신 것일 뿐 그 말이 그 말이다. 아버지는 객지의 자식이 제 새끼를 보러 오지 못하는 실정을 아시고 궁여지책을 쓰신 것이다.
「누비처네」
화자에 대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여기서 절정에 이른다. 꾸중하는듯하지만 객지에서 힘들게 사업하는 자식에게 가족 몰래 소액환을 보낼 정도로 연민과 사랑을 준다. 자식에 대한 이해와 포용은 소액환으로 수렴되고 있다.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연민을 느꼈을 것이라고 이 글의 창작 동기에서 설명하고 있다. 연민은 어디에서 올까? 그것은 곧 사랑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목성균은 인간관계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찾아내어 아름답게 형상화하였다. 작가와 아버지, 작가와 증조부, 작가와 어머니, 그리고 작가와 아내의 관계가 그들 사이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정으로 형성되는 아름다운 관계로 작품 속에 소화되었다.
아버지가 자식에 대하여 연민을 가지고 있다면 자식도 아버지에게 연민을 품고 있다. 이것이 바로 정에 의한 관계의 미학이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명탯국을 끓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면서 “웬 명태냐?”고 하셨다. 아내가 “애비가 사 왔어요.” 하자 아버지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우리 집에 나 말고 명태 사 들고 올 사람이 또 있구나!” 하시는 것이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야전 지휘관이 지원군이라도 보충 받은 것처럼 사기가 진작된 아버지의 그 말씀이 왜 그리 눈물겹던지, 그 날 아침 햇살 가득 찬 안방에서 아버지와 겸상을 한 담백하고 시원한 명탯국 맛을 생각하면 지금도 잦히는 밥솥처럼 마음이 자작자작 눋는 것이다.
「명태에 관한 추억」
아들은 아버지의 지원군이 되었지만, 아들의 지원을 받는 아버지의 권위는 한순간에 무너진다. 아버지의 무너지는 권위에 대한 아들의 연민이 이 글에 스며 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멀게 느껴지지만 아주 가까이에 존재한다. 아니, 자식의 내면에 아버지는 이미 들어와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다. 이것이 바로 한국인의 부자지정이다. 한국인의 부자지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존경과 연민의 관계로 정의 끈이 이어져 있다. 나이가 들고 자식이 성장하면 어쩔 수 없이 집안에서의 권위가 잦아들겠지만, 그래서 대를 잇는 자식이 아버지의 권위를 이어가야 하지만, 그에 대한 아픔을 해결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러한 연민의 마음을 ‘잦히는 밥솥처럼 마음이 자작자작 눋는다.’고 토로하고 있다.
아버지는 권위와 사랑의 끈으로 이어진다면, 어머니는 연민과 사랑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 한국인에게 고개는 이별과 기다림의 장소이다. 한국문학에 나타나는 고개는 매우 친밀한 배경이다. 산이면서 이쪽과 저쪽을 다른 고장으로 가르면서 동시에 이어주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고개를 넘어 사람이 오고 고개를 넘어 사람이 간다. 고개를 넘어 문명이 들어오고 고개를 넘어 이쪽의 문화가 넘어가기도 한다.
베 매는 길쌈 마당의 동네 여인네들을 박장대소케 한 신행 날 고개에서 있었던 일이 어머니의 한이다. 어머니의 삶을 등한히 하고 시앗을 두었느니 안 두었느니 소문을 무성하게 풍기면서 고개를 넘나드신 아버지의 독선 때문이다. 혼행을 멈춘 고개에서 어린 신랑이 보여준 대견스러운 낭만은 당연히 어머니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평생의 한이 되고 말았다.
「고개」
이 글에서 고개를 어머니의 한으로 정의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사람 사는 한평생은 고개 하나를 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머니에게 고개는 한평생 넘는 한恨의 고개이다. 아버지와 혼행할 때 넘어온 고개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어머니에게 한이 되고 만 것이다.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지름티 고개’는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독선과 풍문’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의 독선과 아버지에 대한 확인할 수 없는 풍문이 어머니에게 한만 남긴 것이다.
작가는 아내와 어떤 정의 끈을 잇고 있을까? 아내에게 느끼는 정은 연민, 사랑, 존경이다. 겉으로 표현할 줄은 모르지만 한국인 남성들은 누구나 자신의 아내를 연민으로 바라볼 줄 알고, 모든 가족에 앞서 사랑할 줄 알며, 은근히 존경할 줄도 안다.
저녁상을 들여놓고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바람벽에 기대 서 있는 네 아내 꼴 보기 싫으니, 데려가든지 형편이 안 되면 집으로 내려오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부엌궁둥이에 돌아가서 별을 보고 서 있을 갓난아기 업은 아내와 그 아기의 별 같은 눈망울 때문에 객지에서 나는 허둥지둥 힘겨울 분발을 했다.
「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 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누비처네」
아직 겨울잠에 들지 못한 다람쥐한 마리가 숲의 적요를 흔들며 바쁘게 어디론지 사라지자 더 깊어진 숲의 적요에 나는 문득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아내는 익숙지 않은 짓을 당하자 숫처녀처럼 흠칫하며 "누가 봐요."했으나 손을 빼지는 않고 대신 걸음걸이만 다소곳해졌다.
「불영사에서」
아내는 하얀 손으로 열심히 그 털실로 목도리를 짰다. 아내는 아주머니들이 황태덕장 일을 나갈 때 시작해서 아주머니들이 손이 빨갛게 어는 온종일 목도리를 짰다. 그리고 긴긴 겨울밤 내내 목도리를 짰다.…(중략)… 그리고 명태 한 코를 들고 들리는 동네아낙네 목에 그 목도리를 감아 주었다. "새댁, 고마워. 목도리를 목에 감으면 온 몸이 다 따스해. 세상없이 추운 날도 추운 줄을 몰라-."
「목도리」
위에서 제시한 작품 중에서「부엌궁둥이에 등을 기대고」는 아내에 대한 연민의 정이,「누비처네」에서는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불영사에서」에서도 여자인 아내에 대한 사랑이, 「목도리」에는 아내에 대한 존경의 끈으로 관계 지어 있다. 아내에 대한 사랑은 「누비처네」와 「불영사에서」에서 각각 다른 정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누비처네」는 자식을 업고 가는 아내에게 느끼는 정을 표현했고, 「불영사에서」에는 적요 속에서 숫처녀처럼 흠칫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가족에 대한 끈끈한 정은 할머니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가 있다. 아내에 대한 정이 양방향이라면 할머니의 정은 일방적이 아닌가 한다.
삼베 치마적삼이 소나기에 흠씬 젖어서 몸에 착 달라붙었다. 할머니의 몸은 한줌밖에 안 되었다. ‘세상에!’ 할머니의 체신이 그밖에 안 되는 줄을 나는 처음 알았다. 할머니의 저 몸 어디에서 끝없는 노동력이 누에 실 게워 내듯 줄줄이 이어져 나오는 것일까. 지칠 줄 모르는 할머니의 노동력은 사랑이었다.
「소나기」
할머니가 허물어지듯 길옆 보리밭둑에 주저앉더니 빈 그네 터를 건너다보며 서럽게 우셨다. 나는 파도치는 누런 보리밭을 보면서 할머니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렸다. 현란한 새소리, 눈부신 녹음, 멀미나는 보리밭의 누런 물결에 안겨서 어깨를 들썩거리도록 우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단오 무렵이면 눈에 밟힌다. 개장국 뚝배기가 왜 할머니를 그처럼 서럽게 했을까.
「할머니의 세월」
「소나기」에서는 여윈 할머니의 몸에서 자손을 위한 희생적 내리 사랑을 발견한다.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시큰하도록 할머니의 정을 표현했다. 이 글에서 작가는 할머니의 노동은 경제수단으로 논할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규정하였다. 또 「할머니의 세월」에서 청상靑孀과 가난에 대한 할머니의 한이 표현되었다.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이십대에 혼자되어 청상으로 살아오신 할머니의 한을 절절히 표현하고 있다. 작가의 눈에 할머니의 한이 인식되었다면 작가는 그만큼 할머니를 포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도 한이 정을 이어주는 끈이 되어 있다. 이러한 한을 아름답게 표현함으로써 관계의 미학으로 형상화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그리고 할머니로 연결되는 정의 끈은 관계의 미학으로 형상화되었는데 조금씩 그 성격을 달리한다. 아버지는 권위와 연민, 어머니는 한과 사랑 그리고 연민, 할머니 역시 한과 사랑 그리고 할머니 삶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언어로 형상화되었다고 본다.
인간에 대한 관계의 끈은 가족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는 정으로 이어지는 자연이라는 삶의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살면서 끈끈한 정의 정체성을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그 날 산정 소년에게 내 산림 경찰관의 작업모를 씌워 주고, 산불조심 완장을 채워 주고, 호각을 목에 걸어 주었다. 그리고 아저씨 대신 산림 경찰관 노릇을 잘하고 있으면 뽀얗게 바람꽃 이는 이른 봄에 꼭 오마고 약속을 했다. 그제야 소년은 길을 비켜 주었다.
「약속」
덜 익은 산 복숭아처럼 솜털만 보송보송하던 쇠똥 줍던 순임을 본 후 처음이었다. 우리는 열여덟이던가 열아홉이던가 이미 과년해 있었다. 처음 본 것이라기보다 순임을 여자로 느낀 게 그 때 처음이었는지 모른다. 꽃이 피는 게 순식간이듯 여자가 꽃처럼 피는 것도 순식간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순임이 곁을 지나가면서 다래끼를 들여다보았다. 다래끼 안에는 들깻잎이 반쯤 담겨 있었다. 들국화 꽃을 다래끼 안에 넣어 주었다. 그 때 나는 분명히 순임의 냄새를 맡았다. 알싸한 들깻잎 냄새에 섞여있는 여자의 냄새.
「꽃냄새」
「약속」은 산골 소년과의 정이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산골에서 소년의 집에 기숙하면서 정이 든 소년과 헤어지면서 그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혈육이든 아니든 정의 끈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한 인지상정에 독자는 감동한다. 「꽃냄새」는 함께 자란 순임에게서 여자의 냄새를 느끼는 충격을 표현하였다. 마치 일종의 성장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의 깨달음을 보는 듯하다. 순임은 ‘쇠똥 줍던’ 아이에서 ‘꽃처럼 피어난 여자’로 성장하는 동안 작가도 성性을 인식할 만큼 성장하는 과정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서로 관계를 통해서 삶의 행복을 영위한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과 아이, 어린 시절과도 추억이라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수필적 삶의 아름다움이다. 목성균 수필에는 이와 같이 정한과 관계의 미학으로 수필문학의 미적 가치를 높이고 있다.
3. 삶에 대한 정의
수필의 화자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사실을 진솔하게 진술함으로써 가장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을 제시한다. 수필작품에 삶에 대한 정의, 삶에 대한 가치가 제시되지 않으면 수필문학으로서 위상은 인정받기 어렵다.
인간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제시하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 목성균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제시되고 있을까?
나는 사람 사는 것이 다랑논 부치는 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다랑논을 보면 삶이 행복하다 불행하다 말하는 게 얼마나 건방진 수작인가 싶다. 다랑논은 삶의 원칙 같다. 다랑논의 경작은 삶에 대한 애착의 일변도 같다.
「다랑논」
‘삶이란 가증스러운 이중인격의 출중한 연출이다’라는 삶의 괴리乖離로 시계의 노예가 되어 살았다. 지금은 시계를 안 찬다. 필요가 없다. 자유의 반을 얻은 줄 알았는데 아니다. 자유의 반을 잃은 데 불과하다. 시간에 도외시 당한 삶은 형기를 채우는 수형자처럼 부자유하다.
「기둥시계」
어째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 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누적에 의해서 결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 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 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처네 포대기를 보면서 생각했다.
「누비처네」
작품「다랑논」을 보면 작가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의 모습이 단적으로 들어난다. 그는 삶이 다랑논 부치는 일 같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지향하는 삶은 ‘비굴하거나 유감스러운 기색도 없이’담담한 삶이어야 한다. 다랑논은 수확이 좋거나 못하거나 간에 그냥 있는 그대로의 꾸밈없는 삶을 지향한다. 다랑논에 가면 사람의 인기척처럼 다랑논의 가르침을 받는다. ‘착하고 부지런히 사는 끝은 있는 법이여’하는 다랑논의 간곡한 말은 곧 작가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다짐일 것이다.
「기둥시계」에서 작가는 삶이란 가증한 이중인격의 연출이라고 했다. 시계로부터 벗어나는 삶은 시계로부터 도외시 당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다. 메커니즘mechanism 사회에서 시계는 훌륭한 규제 장치이다. 직장에서 은퇴하여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자유로운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이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산림공무원이라는 힘든 직장에서 퇴직하여 꿈꾸었던 시간으로부터 자유를 성취하면서도 시계로부터 도외시되는 것은 형기를 채우는 수형자의 생활이라 규정한다. 이것은 곧 다랑논으로부터‘착하고 부지런히 사는 법’을 전수 받은 효과일 것이다. 착하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고 그것이 곳 실존적 가치를 지닌 삶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하는 일 없이 자유로운 것은 자유가 아니라 형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형기를 채우는 수형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문학에 심취하여 착하고 부지런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그 결과 짧은 문학 활동을 통해서도 굵은 문학적 삶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누비처네」에서 작가는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아주 명료하게 피력했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로 연출되는 삶의 누적을 아름답게 표현했다. 부부는 사회에서‘우리’를 이루는 기본 단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기본 단위에서 아주 쉽게 연출할 수 있는 약간의 용기와 성의를 알면서도 실현하지 못하고 밀고 당기면서 갈등을 창출한다. 상대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존중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별로 화려할 것도 없는 삶을 살아온 작가, 가난 속에서 배움 다운 배움의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도 욕심도 없이 성과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을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가치기준은 작가 혼자만이 지향하는 세계는 아니다.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보편적인 가치 기준이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하는 보편적인 삶의 가치이다.
4.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
시나 소설은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으면서 현실에 대한 갈등을 호소하거나 그 해결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수필문학도 역사와 시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면 문학적 가치는 사라진다. 일제강점기 혹독한 탄압이 더할 수 없던 1938년 두메에서 태어난 작가는 시련기를 살아왔다. 광복 이후 민족의 이념이나 전쟁의 상처를 치유해야 하는 시기에 역사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 없다. 그의 작품에는 이 시기의 고민이 녹아 있다.
내가 조선낫을 좋아하는 것은 물론 감정적인 편견이다. 조선낫과 왜낫이 우리 헛간 시렁 위에 뒤섞여 있는 걸 내선일체의 모습으로 볼게 아니라 왜낫의 귀화歸化 모습으로 보는 게 올바른 투시법透視法인지 모른다. ---(중략)--- 나는 경박하고, 냉혹하고, 이지적인 날을 세운 연장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베는데 쓰이는 것 자체가 싫다. 국모를 시해한 닛본도의 가차 없는 날에 대한 증오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선낫과 왜낫」
내판역은 소위 미호평야라고 일컫는 넓은 안너덜이 들판 한 녘에 서 있다. 어수룩한 안너덜이 사람들이 기차를 태워 달라고 관청 앞에 가서 데모를 했을 리도 없고, 또 데모를 했다고 해서 일본사람들이 이익 없이 역을 세웠을 리도 만무하다.
「간이역」
작가는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광복 직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겪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체험한 것만큼 시대의 아픔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소작 쟁의를 빌미로 이루어진 독립운동도 알고, 일제에 대한 미움도 느낄 만큼 느꼈을 것이다. 그 미움이 조선낫과 왜낫의 대조를 통해서 섬뜩하게 표현되었다. 국민성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여 시대 의식을 표현하였다.
「간이역」은 일제 강점기의 수탈을 목적으로 개설한 경부선 철로와 역, 보통학교 등에 대한 그의 의식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러한 역사관은 작가의 내면 의식을 작품으로 표출한 것이지만 누구나 공감하게 된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로 확대된다. 작가는 이렇게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보통사람이었다.
시대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 사고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드러난다.
이념의 재갈을 물고 시린 발을 털며 눈 쌓인 이 산등성이를 줄줄이 이어 남하했을 동란기의 젊은 빨치산들을 생각해 본다. 지금 저 산맥 어디쯤 이념의 최면에 걸려 아까운 젊음을 초개와 같이 버린 고혼들이 바람소리처럼 울며 떠돌까.
「속리산기」
메뚜기는 그렇다 치고, 왜 인간도 그렇게 죽어가야 하느냐가 나의 의문이었다. 조물주는 인간의 생명을 어찌 그리 질기게 만들었을까. 빨치산용으로 쓰라고 그리 만들어 놓으신 것인가. 저 까마득한 높이와 깊이를 산짐승처럼 넘나들다가 죽은 당신들이 국민에게 남겨준 것인 무엇인지 나는 그걸 몰라서 답답하다. 150마일 휴전선이 현재까지 확고하게 보전되고 있는 것이 당신들이 남긴 업적인가.
「봄빛을 따라서」
이승복 소년의 일가가 무참히 살해된 다음해 나는 영림서 직원이 되어 공무 수행 차 이 골짜기에 왔었다. …(중략)… 그 자리에서 끔찍한 분단국가의 비극이 연출되었다. 차라리 승냥이가 덤벼들었다면 믿어질지언정 인간이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잠시 차를 세우고 까마득한 계방산을 올려다보았다. 저무는 산 높이가 분단의 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바람 부는 대로」
이 작품에 나타난 시대 의식을 살펴보면 빨치산이나 소년병 같은 사람에게는 인간적인 연민이나 정을 느끼면서도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분단국가라는 비극적 역사에 대한 한탄과 함께 저무는 산의 높이만큼 높은 분단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메뚜기의 죽음, 빨치산이 가지고 있는 이념의 허구성, 휴전 이후의 이승복 사건에서 느끼는 것은 이념이 인간을 인간 이전의 존재로 볼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을 발견할 수 있다.
내 고향 윗버들미의 전통사회의 동구는 모 정치인이 쉬라고 하는 60-70대에 의해서 여기까지 겨우겨우 지켜왔으나 그것은 역부족, 조만간 그 정치인의 말대로 전열은 괴멸되고 새로운 전통사회가 30-40대에 의해서 재편성될지 모른다. 제발 편견과 오류에 의해서 보편타당한 향수가 영영 사라지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동구」
숲의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우수한 숲의 모습은 75%를 참나무가 차지하고 나머지 25%만 소나무가 차지하는 혼효림일 때다. …(중략)… 참나무에 의해서 소나무는 기품이 뛰어나 보이고, 소나무의 뛰어난 기품에 의해서 참나무의 필요성이 인식된다.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숲들은 다 소나무와 참나무가 그렇게 이룬 혼효림이다. 그 돈독한 숲의 사회상이 인간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혼효림」
이 시대의 부패 속에서 살며 내가 언제 내 삶을 청결히 보전해 보겠다는 의지를 가져 본 적이 있었던가. 파리와 다를 바 없이 부패를 탐닉하며 살았다.
「파리 목숨」
「동구」에서는 해체되는 고향 농촌에 대한 안타까움이,「혼효림」에서는 인간의 사회학적 구조를, 「파리 목숨」에서는 현대사회의 부패상을 드러내었다. 1970년대 이른바 산업화에 의해서 농촌공동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연풍면 지역에 7개교이던 초등학교가 1개교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농촌 공동체의 해체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의 모습을 혼효림에 빗대어 표현하였다. 아무리 우수한 집단이라도 그 가운데서 우수한 인물과 보통 인물의 비율을 1:3 정도가 되는 이상적 구조를 제시하였다. 현실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구조를 소나무와 참나무의 혼효림의 비율로 표현한 착상이 기발하다.
파리 목숨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것은 시대적 부패 속에서 작가 자신도 부패를 탐닉하며 살아 왔으니 파리와 다를 바 없다는 기막힌 반어적 표현이다. 사실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은 부패도 반성한다. 정말 부패 속에서 그것을 탐닉하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부패도 지각하지 못하고 오히려 무용담처럼 자랑하게 마련이다. 「파리 목숨」은 반성할 줄 모르는 채 부패할 대로 부패한 현대 사회상을 반어적으로 비판하면서 시대에 대한 절망을 토로하였다.
Ⅲ.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감동적 기억의 재생
문학 작품의 창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대한 작가의 관점과 시선을 의미한다. 수필에서 작가의 세계관은 독창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독창적 인식도 전달 방법에 따라서 문학적 감동을 달리한다. 가능한 한 선명하고 인상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형상이라고 한다. 가장 인상적으로 표현하여 독자의 내면에 인상적으로 재생되고 재구성된다. 이 때 문학적 감동의 효과도 배가 된다.
목성균의 문학적 형상의 대표적인 방법은 묘사와 비유를 들 수 있다. 그런데 묘사와 비유를 따로 떼어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일인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왜냐하면 인상적인 묘사는 비유를 통해야 상대의 내면에 감각을 뚜렷하게 재생하게 마련이다. 작가가 언어로 표현한 이미지는 독자의 기억을 통해서 감각으로 재생된다. 그러므로 작가는 자신의 의도에 가장 가깝게 재생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동원하는 표현의 방법이 여러 가지 있지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유이다. 그래서 묘사와 비유를 따로 떼어서 설명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목성균은 비유 없이도 효과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많고, 그 비유는 읽는 사람에게 충분히 인상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목성균의 묘사하는 방법적 특성과 비유의 보조관념들을 살펴보면서 작품에 숨어 있는 그의 문학적 개성을 찾아내고자 한다.
목성균의 형상화 방법 가운데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해학이다. 그의 해학에는 우리 농사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농민들의 해학 속에 웃음이 묻어나면서도 숨어 있는 진솔한 성 묘사도 수필문학의 영역을 한결 넓혀 주었다.
1. 상상적 묘사를 통한 기억의 형상화
물을 가득 잡아 놓아서 거울 같이 맑은 다랑논에 녹음이 우거진 쇠재가 거꾸로 잠겨 있었다. 뻐꾸기, 꾀꼬리, 산비둘기의 노랫소리가 다랑논에 비친 산 그림자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송홧가루가 날아 와서 논둑 가장자리를 따라 노랗게 퍼져 있었다. 조용히 모내기를 기다리는 다랑논이 마치 날 받은 색시처럼 다 받아드릴 듯 안존한 자세여서 내 마음이 조용히 잠기는 것이었다.
「다랑논」
밤의 어렴풋한 산맥은 참 신비했다. 낮에 중중히 줄서 가던 산봉우리들이 모두 제자리에 앉아서 잠이 들었다. 꼭 방화선 보수작업 일꾼들 곤히 잠든 어깨처럼 순박하고 꿋꿋한 산등성이들의 선들. 아득한 골짜기에 서린 밤안개가 이불처럼 산맥의 발치를 덮고 있었다. …(중략)… 별은 손만 뻗으면 한 움큼이라도 움킬 수 있을 듯 머리 바로 위에 뿌려져 있었다.
「약속」
건너편 강 언덕 위에 뱃사공의 오두막집이 납작하게 엎드려 있었다. 노랗게 식은 햇살에 동그마니 드러난 외딴집, 지붕 위로 하얀 연기가 저녁 강바닥에 산란하게 흩어지고 있었다. 그 오두막집 삽짝 앞에 능수버드나무가 맨 몸뚱이로 비스듬히 서 있었다. 둥치에 비해서 가지가 부실한 것으로 보아 고목인 듯싶었다. 나루터의 세월이 느껴졌다.
「세한도」
두 여승은 앳된 소녀였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 처녀성이 눈부신 아름다운 용모였다. 배코 친 파란 머리와 헐렁한 잿빛 승복이 속인의 마음을 공연히 안타깝게 하는데, 정작 두 여승은 여느 소녀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밝게 웃고 새처럼 맑은 목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불영사에서」
「다랑논」은 늦은 봄 농촌의 정경을 수채화처럼 표현했다. 산새들의 울음소리까지 영상에서 울려나올 듯이 그려 놓아서 수필을 읽는 사람들에게 눈으로는 산촌을 풍경을 보면서 귀로는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려주기나 하듯이 뚜렷하게 묘사하였다. 「약속」은 백두대간의 깊은 준령들을 은은하고 평화롭게 그려내었다. 자연에 대한 친화의 정서 때문에 머나먼 별도 가깝게 생각되고 밤안개를 이불로 여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세한도」에서는 인간의 모습을 자연의 배경에 빗대어 그려냈다. ‘납작하게 엎드린 오두막집’, ‘강바닥에 흩어지는 연기’, ‘부실한 고목’이 강 건너 사공의 집을 묘사한 것 같지만 실은 오롯한 아버지의 자존심을 그려낸 것이다. 그것은 나루터에서 느끼는 ‘세월’에서 생각해 낼 수 있다.
「불영사에서」는 여승의 모습을 세속적으로 그려냈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그레한 볼, 도톰한 붉은 입술, 크고 선연한 흰자위와 까만 눈동자, 가늘고 긴 목덜미의 뽀얀 살빛’의 처녀로 그려놓은 여승의 모습은 속세를 떠난 수행자의 모습은 분명 아니다. 세속의 눈으로 본 세속의 보통 처녀이다. 그래서 깎은 머리가 안쓰럽다. 이것은 속인이 속인의 눈으로 본 여승의 모습이다. 독자도 속인이기에 공연히 가슴 설레게 된다. 여승도 가까이에서 만나보면 인간임에 틀림없다. 인간다운 인간만이 여승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문학에서 대상에 대한 묘사가 미감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이라는 것을 목성균의 작품에서 절절히 느끼게 된다. 묘사는 분명 상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만 그려 낸다면 그것은 설명문이나 보고서에 그고 말 것이다. 그가 영적인 눈을 통해서 바라본 세계를 문학적 상상이라는 붓으로 그려냈기에 독자는 감동한다. 인상적인 형상이 그가 대상으로 한 사실에 문학적 진실성을 더하게 된다. 그래서 독자의 공감과 감동을 배가하는 것이다.
2. 비유로 그려내는 인간사랑
비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가장 인상적인 다른 대상에 빗대어 구체화하는 표현 기술이다. 비유를 하는 목적은 앞서 밝힌 것과 같이 기억의 재생이다. 빗대는 대상, 이른바 보조관념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나와서 원관념을 거들어 주는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보조관념들은 원관념에 비해 구체어이다. 추상적인 대상을 구체적인 단어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서 뚜렷하게 형상화된다. 물론 관계되는 두 사물 사이에 상상이든 유추든 간에 공통점으로 연결하여 이미지로 남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작가와 독자가 경험을 재생함으로써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작가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비유적으로 표현했든 독자는 자신의 기억을 통하여 경험을 재생한다. 이것이 일치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반드시 일치할 필요는 없다. 공감과 감동만 있으면 된다.
비유의 방법은 두 관념을 직접 연결하기도 하고 은근히 공통점을 드러내어 일치시키기도 한다. 두 방법 다 감각을 재생하는데 목적이 있지만 그 효과는 사뭇 다르다. 사람들은 흔히 문학적 낯설게 하기 수법의 하나인 은유를 효과적이고 고급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손바닥만큼씩 한 다랑논 논배미에서 마치 공양을 마친 바리때처럼 마음 한 점까지 다한 간절함을 느껴졌다. 결코 농부의 마음에 차는 거둠을 못한 게 분명한 논바닥에 하등의 아쉬움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소박하고 알뜰한 수확의 자리. 포기를 벌지 못한 안타까운 벼 그루터기의 오열伍列 상태가 눈물겹도록 질서 정연했다. 무엇이 그리 고마웠을까. 얼마나 따뜻하고 간절한 마음이었을까. 못줄을 띄우고 눈금에 벗어나지 않게 한 포기 씩 꼭꼭 모를 꽂고 성의껏 가꾸고 거둔 자리가 오두막집 잦힌 밥솥 아궁이처럼 아늑했다.
「다랑논」
동향집의 부엌궁둥이는 다산多産한 아내의 돌아앉은 궁둥이만치나 편하고, 은근하고, 따뜻한 곳이다. 그러나 동향집 사람들은 부엌궁둥이의 그걸 모르고 살았다. 퇴함하듯 삶에 쫓기는 사람들이 어찌 부엌궁둥이로 돌아가서 은연隱然하게 서 있을 여유가 있었으랴.
「부엌궁둥이」
방안에 두고 쓰는 그릇이라고 백토로 빚어서 잿물을 발라 구워 낸 공정工程이 정답고 애잔하다. 몸체의 뽀얀 살결과 동그스름한 크기가 아직 발육이 덜 된 누이의 유방 같은데, 등잔 꼭지는 여러 자식이 빨아 댄 노모老母의 젖꼭지 같이 새까맣다.
「사기등잔」
목성균의 작품에서는 주로 직유의 방법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면서 반드시 두 대상 사이의 유추적 공통점을 명시한다. 「다랑논」에서 보면 다랑논 논배미를 ‘공양을 마친 바리때’에 직접 빗대고 있다. 그리고 바리때에 담긴 음식 한 점까지 다한 것과 같은 간절함을 찾아내고 있다. 다랑논에서 구도자의 밥그릇과 같은 간절함을 발견한 것은 보통 혜안이 아니다. 다랑논을 사랑하고 그 소중함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바리때에 숨어 있는 구도하는 자세와 동일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문학을 구도하는 마음으로 임하는 작가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다랑논의 모를 심고 가꾸고 거둔 자리를 오두막집 잦힌 밥솥의 아궁이로 표현했다. 밥솥의 아궁이도 진솔한 인간의 삶이 숨겨진 소재이다.
이러한 목성균의 인간사랑은 곳곳의 비유에서 수없이 나타난다. 부엌 궁둥이를 ‘다산한 아내의 돌아앉은 궁둥이’로 표현한 것도 절창이다. 다산한 아내의 궁둥이는 어떨까? 푹 퍼져 성적 매력은 없겠지만 더 소중한 인간적 푸근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삶에 쫓기는 사람들을 ‘퇴함하듯’이라고 말했다. 비유를 기억의 재생이라고 한다면 해군에서 군복무를 한 작가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무엇에 쫓기는가? 퇴함하는 장병들은 무엇에 쫓기듯 함에서 내려올까?
「사기등잔」에서 작가는 사기등잔의 모양을 ‘발육이 덜된 누이의 유방’이라고 했다. 발육이 덜된 누이의 유방을 본 기억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것을 문학적 상상이라 하면 반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수필을 사실의 문학이라고 한다 해서 이러한 표현을 허구라고 배제한다면 상상이라는 문학적 기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등잔 꼭지는 노모의 젖꼭지 같다고 했다. 사기등잔의 모양을 발육이 덜된 유방, 등잔 꼭지를 노모의 젖꼭지에 비유한 것을 보면서 사기 등잔을 본 사람들은 손뼉을 칠 것이다. 발육이 덜된 유방에 노모의 젖꼭지를 달고 있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은 다소 해학적이다. 그 두 소재는 모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이 담긴 속성까지도 닮아 있다.
그런데 목성균의 비유법에서 공통점으로 발견되는 것은 그의 보조 관념들이 표현 대상에 관계없이 인간의 속성을 토대로 표현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에 동원된 인간들은 대개 그의 주변에 있는 추억의 인물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모습을 담고 있는 사람들이고, 가장 기본적인 정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목성균 수필의 비유법에서 또 하나 발견되는 특징은 현대 문명 또는 도시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다. 다음의 그의 작품 「새벽의 거리」에서 발견되는 비유의 대상들이다.
도시의 경운기 : 진주군의 전차
새벽도시 : 기상나팔을 불기 직전의 병영
가로등 : 초병, 호박꽃 같은 불빛, 야망의 거리의 휴지
네온사인 : 구미호九尾狐의 요염한 눈빛, 배를 채운 포식자
작가자신 : 굴비같이 부실한 사람
「새벽의 거리」에서
여기에서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진주군의 전차’,‘병영’,‘거리의 휴지’, ‘포식자’로 표현하였다. 이로써 그의 도시 생활이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진부의 영림서에 근무하면서 논두렁길을 걸어 퇴근하던 시절이 훨씬 더 행복했다고 볼 수 있다. 퇴근하면서 군고구마를 사고 산골소년에게 호루라기를 걸어주면서 정을 주고받던 시절, 아니면 고향에서 친구들과 천렵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래서 도시 아파트에 사는 자신을 ‘굴비같이 부실한 사람’으로 규정했는지도 모른다.
3. 위트와 해학으로 이루어낸 성性 묘사 전략
수필을 흔히 위트와 해학의 문학이라고 한다. 해학은 수필문학에서만 필요조건이 아니라 한국문학의 특성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적으로 가치를 지니고 품위 있는 해학이 되려면 자연스럽고 진실해야 한다. 해학을 위한 해학이나 억지로 얽어 놓은 언어유희는 작품의 질을 떨어뜨린다. 또한 지나친 성에 관한 묘사는 해학이라기보다 작품의 품위를 떨어뜨린다. 수필이 지나친 도덕률에 고착되면 고루한 넋두리로 치부되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저속한 표현도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목성균의 작품에 드러난 해학은 자연스럽게 웃음을 자아내는 해학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난 성 묘사도 자연스러운 인간사를 진솔하게 표현한 예술이다.
우리는 주호가 밤중에 색시를 겁탈하러 주방의 환기창을 타넘어 가는 것을 음모하고 실행했다. 성장은 무모한 만큼 미숙해서 우리들의 음모는 주호를 아직 국물이 덜 식은 국수가락 삶는 솥에 빠뜨리고 말았다. 뜨거워 죽는다고 비명을 지르는 주호를 주인이 달려 나와서 닭장에 든 살쾡이 때려잡듯 자장 볶는 무쇠냄비로 때려잡았다
「그리운 시절」
작은 산읍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다. 서사 내용 자체가 재미있고 즐거운 하나의 사건이다. 따지고 보면 형사범으로 처벌을 받을 만한 사건이 산읍에서 흥미로운 사건으로 용서되는 것은 동기가 순수하기 때문이다. 환기창을 넘어 들어가다가 국수 삶는 솥에 빠지는 사건이나, 뜨겁다고 지르는 비명이나, 무쇠 냄비로 때려잡는 것이나 당하는 사람은 낭패지만 구경하는 사람은 배를 잡고 웃을 일이다. 그 표현을 신나고 재미있어 해도 눈을 흘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한 해학적 표현은 작품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뭍의 발기가 결연한 의지로 바다 깊이 삽입되어 있는 곳이 곶〔串〕이다. 바다는 궁합이 안 맞는 여편네처럼 곶 끝에서 응얼거린다. 곶은 개의치 않고 정정당당하게 바다의 한 녘을 굳건히 장악하고 있다. 아! 수컷다운 기상. 나는 비 오는 곶 끝에 서서 사내의 사기를 진작시켜 본다.
「장마전선을 넘어」
‘곶’을 묘사한 글이다. ‘뭍의 발기’로 시작해서 ‘사내의 사기’로 끝을 내는 문단이다. 이런 묘사는 성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어디를 찾아봐도 천박함을 보이지 않는다. 수필에서 성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니다. 소설과 같이 허구라는 보호막이 있을 때 성의 묘사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가 있다. 그러나 수필은 사실과 체험을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성적인 묘사 자체가 금기시 될 수가 있다.
인간사에서 가장 절실한 것 중의 하나가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생식을 전제로 한다면 동물의 그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성의 개방 풍조에 휩싸여 있다. 성의 자유는 당당하고 공공연하게 우리 사회로 휘몰아치고 있다. 그러기에 모든 예술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면 수필도 예외일 수 없다. 그런데 수필이 사실과 체험의 문학이라 해서 성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성의 문제를 작품에 수용하되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해야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는 것이다.
아내의 잠든 얼굴에 기어 다니는 저 파리를 보면 그 걸 알 수 있다. 재빠르게 이목구비를 넘어 다니는 움직임에 이 여자가 틈만 나면 우리 생명을 백안시白眼視하며 가차 없이 파리채를 휘두르던 살육자라는 섭섭한 감정은 아예 품고 있지 않아 보였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성의 있는 애무를 하듯 온 얼굴을 기어 다닌다. 아내는 그 것도 모르고 깊이 잠들어 있다.
「파리 목숨」
첫눈이 내린 후 대관령에는 겨우내 간헐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흰 깃발의 행렬' 같이 눈이 내렸다. 눈이 내릴 뿐 아니라 바람이 눈을 몰아다 바람받이에 쌓아서 설구雪丘를 만들어 놓았다. 설구의 곡선은 마치 여인의 둔부 같이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햇살이 비추면 설백의 탄력 있는 피부가 젊은 성욕을 충동질했다
「목도리」
「파리 목숨」은 아내의 잠든 얼굴에 기어 다니는 파리를 애무를 하듯 온몸을 기어 다닌다고 표현했다. 그러면 작가는 파리에게 엷은 질투라도 느낀 것일까? 여기에 짧은 기지와 해학이 있다. 「목도리」에는 눈 쌓인 골짜기의 모습을 여인의 하얀 둔부에 빗대어 묘사했다. 성욕을 충동질하는 하얀 탄력 있는 피부를 거리낌 없이 말해 버렸다. 남자라면 흰 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 산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솔직한 고백이 읽는 이들의 마음을 공감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작품 「배필配匹」에서 성의 표현은 좀 더 적극적이다. 배필에서 발견되는 적극적인 성의 표현은 은근하고도 몽환적이다.
(가) 산모가 핼쑥한 얼굴로 누워 있다가 부스스 일어나서 나를 맞이했다. 방안 가득한 비릿한 냄새, 아기 냄새인지 아기 엄마 냄새인지 모르지만 내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나) 나는 중대장 사모님을 뉘어 놓고 주사를 놓았다. 왜 그리 떨렸을까. 핏기 없는 하얀 산모의 팔뚝에서 떨리는 손으로 혈관을 찾아 주삿바늘을 꼽는 일이, 숙달된 위생병의 평소 솜씨와 달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병사의 팔뚝에 주삿바늘을 꼽는 것과 다른 일이었다.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 그랬을까.
(다) 나는 밥을 먹고 중대장 사모님은 미역국을 먹고, 우리는 오누이처럼 겸상을 해서 먹었다.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에서 산모가 해준 밥을 마주앉아 먹는 황홀한 영광 때문인지 밥맛도 몰랐다.
(라) 손을 잡힌 채 바라본 중대장 사모님의 맑고 투명한 얼굴이 처연하리만치 고왔다. 나는 산모의 얼굴이 배필의 얼굴이다라고 생각한다.
「배필配匹」
작품 「배필配匹」에서 발췌한 글이다. (가)에서 ‘방안 가득한 비릿한 냄새’를 단순한 아기 냄새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내 정신을 몽롱하게’했다는 솔직한 고백으로 금방 알 수 있다. 수필문학에서 성을 표현해야하는 딜레마를 작가는 이렇게 솔직하지만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이것은 그의 성 묘사 전략이 적중한 것이라고 평가한다면 그것은 그의 문학성에 대한 폄훼가 된다. 그것은 그의 인품이 진솔하고 순수한 데서 나온 자연스런 표현이다.
(나)에서 중대장 사모님의 팔뚝에 주사를 놓는 것으로 그의 성적 표현은 절정을 이룬다. 병사의 팔뚝에 능숙하게 주삿바늘을 찌르던 위생병이 떨고 있는 것으로 주사의 다른 의미를 상상하게 한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은 독자를 위해서 작가는 ‘팔이 너무 투명하고 맑아서’라고 덧붙였다. 은근하고 솔직한 표현이다.
(다)에서 ‘비릿한 냄새’ 가득한 산모의 방안에서 ‘오누이’처럼 밥을 먹는 황홀한 광경을 연출했다. 이 이야기가 ‘뭐 어때서’라고 말하지 말자. 아기의 방이 아니라 ‘산모의 방’이니 그 비릿한 냄새는 이미 아기의 냄새가 아니라 산모의 냄새이다. 곧 성의 냄새라고 할 수 있다. 군대의 밥을 먹어야 하는 병사가 사가의 밥을 먹으면서 밥맛을 몰랐던 것은 다만 황홀함 때문이었을까?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성을 체험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간접적인 표현은 독자를 황홀지경으로 휩쓸고 들어간다.
(라)에서 손을 잡히고 바라본 여인의 얼굴을 ‘처연하리만치 곱다’고 표현하여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성의 절정은 곧 ‘배필의 얼굴’로 일반화된다. 다시 말하면 중대장의 배필에서 자신이 곧 만나게 될 배필의 얼굴로 일대 전환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곧 자신의 배필로 치환되고 모든 사람들의 ‘배필’로 일반화된다. 이렇게 이 세상의 배필은 어떤 여인이든지 떨리도록 아름다운 것이란 의미로 승화시키면서 그의 성적 내면의 묘사는 수필문학의 예술성을 획득하게 된다.
Ⅳ. 수필문학의 본질 구현
1. 사실과 체험의 의미화
수필은 형식이 없는 문학이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구성이 없어도 된다는 말처럼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짧은 글이지만 수필문학을 구성하는 요소가 있고 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엮어서 주제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수필문학에도 제재가 되는 사실과 체험이 있고, 그 사실과 체험을 의미화 하는데 밑바탕이 되는 작가의 사상과 가치관이 필요하다. 또한 제재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 표현도 구성의 필수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목성균 수필에서 사실과 체험을 어떻게 의미화해서 형상화하는지 그 과정을 작품 「아버지의 도장」의 문단 분석으로 알아본다.
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가 아버지의 인감도장을 건네주다
② 아버지의 도장은 닳고 낡아 아버지의 생애가 보이다
③ 3․1운동 기념식장에서 만세삼창을 하던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33인의 한 분 같은 아버지가 떠오르다.
④ 소백산맥 산골짜기 작고 소박한 사회에서 아버지의 존재 가치를 지켜준 도장이라 생각하다
⑤ 아버지의 도장은 글씨를 잘 쓰는 절친한 친구 안주사 어른이 아버지가 면장이 되신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새겨 주다.
⑥ 아버지의 도장은 당시로서는 귀한 물소뿔로 만들어 안주사의 우정이 담긴 소중한 것이다.
⑦ 안주사 어른은 의식을 거행하듯 정종을 마시고나서 아버지의 도장을 한밤에 새겼을 것이다.
⑧ 아버지는 면장, 농협조합장, 노인회장 등을 하면서 도장을 찍어 훌륭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그래서 자식으로서 자부심을 갖게 해준 것이 도장의 덕이다.
⑨ 아버지의 도장은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에 두루 찍었을 것이다.
⑩ 도장 찍는 일은 뒷감당하는 일이니 아버지의 도장은 산읍에서 살아온 아버지 생애의 편린들과 맞추어져 있다.
⑪ 아버지의 도장은 산읍의 역사와 아버지 생애의 비갈碑碣로 잘 간수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이다.
「아버지의 도장」
이 작품의 문단에서 ① ③ ⑤ ⑥ ⑦ ⑧ ⑨ 는 아버지의 도장이라는 사실과 체험을 중심으로 기술되었다. 그리고 ⑩ ⑪은 도장이라는 소재에 대한 사실 또는 체험에 대한 의미 부여이다. ②와 ④은 ①과 ③에 대한 의미화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중간의 ②와 ④를 제외하면 전반부 ①~⑨는 사실의 체험, 후반부 ⑩ ⑪는 제재에 대한 의미부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은 체험과 사실에 사색을 통한 의미화로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미화를 통하여 독자들의 보편적인 심의心意의 공감을 얻는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로부터 건네받은 아버지의 인감도장에 대한 의미를 ‘아버지 생애의 편린’또는 ‘아버지의 비갈碑碣’처럼 잘 보관해야겠다는 다짐이다. 물론 이러한 의미를 형상화하기 위해서 묘사와 비유로 대표되는 여러 가지 표현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사실의 체험과 의미화가 자연스럽고 입체적으로 연계되고 있다.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를 우리말로 번역하여 쉽게‘수필’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수필문학의 원류라고 생각되는 이규보, 이곡, 박지원의 설說, 기記, 부賦와 같은 형식을 보면 에세이나 미셀러니와 많이 다르다. 사실이나 체험을 제재로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을 상상이나 논리를 통해서 의미화 하는 과정이다. 목성균의 수필은 체험과 사실에 사색을 통한 의미화로 독자들의 보편적 심의心意의 공감을 얻는 전통 수필의 구성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현대 수필의 독자성獨自性을 한층 더 탄탄하게 했다.
2. 사실과 수필적 상상
수필에서 허구의 수용에 대한 문제는 요즘 수필문학계를 우왕좌왕하게 만든다. 과연 허구를 수필에서 수용해야 될까? 목성균은 이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소재를 찾아 글을 쓰는 것조차 이미 허구라고 말한다. 대상을 보고 그 대상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작품화하는 것이 수필문학 창작의 기본 단계라고 생각한다.
목성균 수필에 드러나는 많은 사실들이 모두 사실의 체험일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누비처네』에 수록된 작품 101편의 대상이 된 체험과 사실은 대부분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데 장면의 상세한 묘사가 모두 사실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것을 문학적 상상이라고 말한다. 작품 「나의 수필」에 보면 이러한 수필쓰기에 대해서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여기서 앞에 말한 분명한 사실 외의 상상은,
첫째 사공 집 삽짝 앞에 서있는 늙은 버드나무입니다. 저녁연기 피어올라서 겨울 강바람에 산란히 흩어지는 납작한 강변의 오두막집, 그 집만으로도 꿋꿋한 아버지의 모습을 부각하는 배경 묘사가 될지 모르지만, 그보다 좀 더 감동적인 문학적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공집 삽짝 앞에 늙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세워 놓았습니다. 물론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늙은 소나무를 모방한 것입니다. 그래야 엄동설한의 저녁 강바람에 서있는 아버지의 꿋꿋함이 돋보일 것 같아서 문인화를 그려 넣은 것이지요.
「나의 수필」
여기서 고백한 것과 같이 상상을 허구라 하지 않고 ‘감동적인 문학적 장치’라고 설명하였다. 문학적 효과를 생각한 상상이다. 그래서 세워놓은 늙은 버드나무를 허구가 아니라고 하면서 ‘무리 없는 상상, 이마저도 허구라서 안 된다는 것은 수필을 문예문文藝文으로 설 자리를 박탈하는 것’이라는 견해를 확실히 말하였다. 그래서 절대 ‘거짓말(허구)안하기’를 글쓰기의 첫 번째 룰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독자들로부터 소설적이고 작위적이란 비판을 듣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목성균은 허구에 대한 견해를 같은 글에서 이렇게 확실하게 토로하였다.
나는 수필에서 양심에 가책을 받는 거짓말은 내 이야기 자체를 꾸미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세한도의 경우 엄동설한 저문 강변에 서있는 어느 부자의 모습에 감동한 나머지 그 모습을 숫제 훔쳐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왜곡한다면 이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렇지도 못한 주제에 그런 척하고 나를 미화하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수필가의 이름을 더럽히는 파렴치한 작태作態일 것입니다.
이 글에서 허구와 문학적 상상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하였다.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쓴다든지, 남의 경험을 빌어다 제재로 삼으려면 확실히 남의 경험임을 밝혀야 한다는 의미이다.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쓰는 것은 허구를 넘어서 ‘수필가의 이름을 더럽히는 파렴치한 작태作態’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다.
목성균은 허구와 상상의 한계와 구분은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하였고, 그의 작품에서 수필적 상상으로 작품성을 한층 높였을지언정 허구는 찾아볼 수 없다.
3.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소망
목성균의 작품에는 아름다운 인간에 대한 절절한 소망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뚜렷하게 규정하였다. 다음 작품을 보자.
팔각정에 차를 세우고 아주머니의 커피를 사 마셨다.
“차도 별로 안 다니는데 장사 돼요?”
의례적인 인사를 했더니
“햇살이 하도 좋아서 나와 보았어요.”
아주머니가 시구처럼 말한다. 얼마나 사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인가. 이 아주머니가 시인이다. 글자를 활용하는 재주가 없어서 표현을 못할 뿐이지 마음에는 시가 가득하다. 이 아주머니가 아직 차가운 관광지의 길목에 서 있는 것은 계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을 표현한 시적 퍼포먼스performance다. 어느 시가 이처럼 정다울까. 어느 시가 사람과 사람을 연결 해주는 절창을 이 아주머니 퍼포먼스 만치 구사할 수 있을까.
「봄비와 햇살 속으로 3」
장사가 안 되는 것을 걱정해 주니 오히려 ‘햇살이 좋아서’라고 대답하는 커피 행상아주머니에게서 따뜻한 인간미를 발견한다. 걱정해 주는 작가나 대답하는 아주머니나 따뜻한 정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아름다운 인간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H형께」에 보면 그의 진정 아름다운 삶에 대한 소망이 직접 드러나 있다.
H형
사람도 저 산등성이 같이 유순하게 늙어갈 수 없을까하는 나의 바램입니다.
H형
나는 지층깊이 묻혀서 강도 높은 결정체로 굳어져 귀한 다이아몬드보다 강변에 흔하게 굴러있는 조약돌을 더 좋아합니다.
H형
우리는 편견의 빛을 발하지 않는 조약돌이 됩시다.
조약돌은 까달아서 조약돌이 되었지만 다이아몬드는 강한 결정을 이루어 상대적인 물질을 깎습니다.
H형
다이아몬드가 인간의 순수성을 깎는 것은 다이아몬드의 속성입니다. 가급적 우리는 다이아몬드는 되지 맙시다.
나는 모서리가 없는 것이 좋습니다. 결정체가 아닌 게 좋습니다. 둥글게 마모되는 것이 좋습니다.
H형-.
나는 사람과 사람이 어울려 둥글게 달아서 조약돌이 되고 싶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면서 다른 사람을 깎지 않겠습니다. 불가능한 범부의 소망일지라도 그것이 나의 믿음입니다.
「H형께」
이 글은 그가 세상을 하직하기 1개월 전인 2004년 4월에 쓴 것으로 짐작된다. 유순한 ‘산등성이’, ‘굴러 있는 조약돌’, 이 되는 것이 범부의 소망이라고 말하였다. 그가 지향하는 삶의 세계는 이렇게 유순하게 늙어가는 것이고 남을 깎아내지 않으면서 둥글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다. 그의 이런 소망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작품만으로도 다음 수필가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Ⅴ. 휘갑치기
목성균은 한국 수필문학사에 분명한 한 획을 그었다. 한국문학에서 전통적으로 창작되는 수필은 서구의 에세이나 미셀러니와는 분명하게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에세이’나 ‘미셀러니’와 ‘수필’을 같은 의미로, 또는 수필은 에세이를 단순하게 번역한 용어쯤으로 생각하는 수필가들에게 뚜렷한 경종을 울렸다. 목성균 수필은 한국문학에서 전통적인 수필의 성격과 나아갈 바는 ‘바로 이것이다.’라는 범위를 작품으로서 분명하게 해주었다.
목성균 수필을 한 마디로 규정하면 정한情恨의 기억을 수필적 상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하여 삶의 근원적 부가가치를 발견했다고 하겠다. 그의 기억은 거짓 없이 체험한 사실들이고, 그 사실을 사색을 통하여 삶의 근원적 가치로 보편화하여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누비처네』에 실린 101편의 작품은 한국 수필의 적통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방황하는 이 시대의 수필가들에게 수필문학의 방향을 일러준 지남차가 되었다. 물론 수필은 수필가 각자가 생각하는 각자의 개성대로 활동을 하면 되겠지만 좋은 수필이 어떤 것인가는 알고 있어야 새로운 전통을 맥을 이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비처네』에 실린 101편의 작품 중에는 고향을 배경으로 한 글이 많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그의 고향인 윗버들미를 방문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병환중인 부친을 위하여 새로 지었다는 작고 소박한 생가는 깨끗하게 보존되어 마음 따뜻한 새 주인이 살고 있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파랗게 자라고 조롱박이 주렁주렁 달렸다. 길에서 마당으로 들어가는 골목에는 백일홍이 붉게 피었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수안보로 넘어가는 지름티고개, 장연으로 넘어가는 쇠재, 산읍인 연풍 소재지로 넘어가는 은고개는 생각보다 높았고 그의 작품처럼 인적이 끊어졌다. 유지봉, 포대봉도 녹음이 한창이다. 비 내리는 갈매실 냇가엔 천렵하는 사람들은 없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다 따뜻하고 친절했으며 특히 그와 친구라는 한 노인은 마치 작가처럼 재미있고 재기 넘치게 작가의 생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사람들이나 마을의 산야가 다 한편의 수필이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안타깝게 세상을 하직한 뒤에 비로소 작품성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진실한 삶이 진실한 작품을 낳게 했을지도 모른다. 진실한 삶이 수필문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타고난 문장력과 구성력으로 수필문학의 격변기에 그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많은 수필가들이 그의 작품을 읽고 작품성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니 실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수필을 공부하는 많은 문인들이 진정한 수필가 목성균의 작품을 읽고 전통 수필의 특성을 바로 알고 창작에 임했으면 좋겠다. 나아가 많은 대중이 목성균의 작품을 많이 읽고 수필의 문학적 우수성을 인식하고 더 많은 독자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창조문학 2014년 가을호 평론 신인상 수상작>
창조문학 2014 가을호(통권94호) 수필평론부문 심사평
이방주 님의 평론 <수필적 상상으로 형상화한 삶의 근원적 가치>를 창조문학 신인문학상 평론부문 당선작으로 하였다. 이방주 님의 평론은 -목성균의 수필집 <누비처네>를 중심으로 라는 부제를 붙인 것처럼 목성균 수필집 <누비처네>를 중심으로 그의 수필문학이 갖는 특성들을 추억과 정한의 세계, 문학적 형상화를 통한 감동적 기억의 재생, 수필문학의 본질 구현이란 방향에서 철저히 분석하고 해석한 수필 평론이다.
최근 수필문학의 활성화에 비해 전문 수필 평론가가 빈약하여 수필문학계가 혼미한 부분이 많은데 이방주 님은 이미 중견 수필가로 많은 창작 경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문학 수업과 교육 경험이 있어 앞으로 수필 문학의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는 일에도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심사위원 홍문표)
<당선소감 >
나에게 수필은 밥이다. 수필이 삶의 에너지이고 수필이 쾌락의 근원이다.
수필에 대한 열망은 불탔지만 느림보 걸음으로 남들은 불혹이라고 하는 나이에 실마리를 잡아 문단에 수필가의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열여섯 해나 지나서 환갑 진갑 다 넘기고 노안이 되어서야 수필의 길에 눈을 뜨게 되었다.
목성균 수필가는 세상의 강을 건너기 한두 달 전에 딱 한 번 만나고 부음을 들었다.
그의 수필은 한두 편 읽고 그만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만난 것이 『누비처네』이다.
『누비처네』에서 ‘이런 수필’이란 섬광이 번뜩 일어났다. 어둑한 눈으로 본 ‘이런 수필’을 보시고 ‘네로다’ 여겨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새 길을 열어준 창조문학에 감사드리며 이제 겨우 환갑을 넘어섰으니 삼십년은 수필평론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수필문학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정진을 다짐한다.
나에게 문학의 숟가락을 들려 준 가형家兄 仁海 시인과
수필의 참맛을 일러 주신 스승 宜齋 崔雲植교수님께 기쁜 소식을 전해 드리고 싶다.
수필가에 이어 평론가가 된 것을 함께 기뻐해 줄 아내 송병숙, 든든한 아들 용범, 착한 며느리 이미영, 예쁜 딸 기현, 나의 꿈 귀한 손자 규연에게도 사랑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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