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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옥의 작품 <손>, <안경> 한국수필 2018년 3월호

느림보 이방주 2018. 3. 28. 10:30

한국수필 20183월호 


신인상 심사평


 대상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수필적으로 구성하는 안목

   

 이방주

 

김정옥의 」 「안경을 신인상 당선작으로 한다. 이 두 작품 모두가 만족스럽지 못한 신체의 일부에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다. 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곱지 않게 변해 가는 손의 모습을, 안경은 젊은 시절부터 안경을 써야 할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았던 불만을 글감으로 삼았다.

은 전반부에서 예쁜 손이 너무 늙어 보인다는 자모의 말에 충격을 받아 인위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속일 수 없음을 깨닫고 손에 대한 인식을 외형적인 미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찾는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손의 내면적 아름다움을 추구함이 어머니의 손에 이르자 곧 자신의 어리석은 탐욕을 뉘우친다. 결국 남의 위해 봉사하고 사랑을 주는 손이 가장 아름다운 손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에 대한 작가의 인식은 외형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작가 자신의 손에서 남의 손, 사회의 손으로 변화하고 확산되면서 일반화한다. 이러한 전개는 제재의 의미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한 구성법이라 하겠다.

안경은 안경을 써야하는 일반적인 불편함, 여성의 미를 훼손하는 것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는 표면적 인식에서 안경도 신체의 일부라는 생각에 이르러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안경을 쓴 사람이나 쓰지 않은 사람이나 마음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본다는 철학적 인식으로 확산된다. 작가는 안목, 식견, 지혜, 통찰력을 가진 혜안이라는 철학적 안경을 소망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작가는 」 「안경두 작품을 통하여 대상의 존재를 철학적으로 인식하고 수필적으로 구성하는 안목을 드러냈다. 이런 안목으로 수필의 구성법을 공부하여 더욱 좋은 작품을 쓸 수 있기를 바란다.

 

   


 

김정옥

 

버석버석하다. 서걱서걱하다. 아니 버석버석할 때도 있고 서걱서걱할 때도 있다. 반들반들 윤기는 바라지도 않는다. 촉촉한 습기라도 있으면 좋겠다. 촉촉한 습기도 욕심일지 모르겠다. 세월이 내 안의 물기를 날려 보낸 것일까? 어디로 잦아들었는지 손까지 오기 전에 다 말랐나보다.

양손을 비벼본다. 여전히 버석버석하다. 버석버석 바싹 마른 가랑잎 밟을 때 나는 소리는 운치 있기나 하지. 쭈글쭈글한 주름살 비집고 나오는 메마른 소리는 애달프기까지 하다. 가뜩이나 못생긴 손에 주름이 먼저 왔다. 세월을 어찌 알았는지 기이하다. 주름만 있어도 차라리 괜찮겠다. 게다가 시퍼런 힘줄까지 가세했다. 얼기설기 불뚝 튀어나와 미운 손이 더 미워 보인다. 가리고 싶고 숨기고 싶은 손이다. 아무리 나이를 속이려 해도 속일 수 없는 부위가 손과 목이라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다.

10년 전인가? 유백색 목련이 고귀한 자태를 뽐내던 따뜻한 4월 봄이었다. 학생 상담주간이었다. 젊은 학부모에게 나이 들어 보이기 싫었다. 나이 들어서 학부모 만나는 것을 꺼려 학년 담임 배정할 때 1학년 담임을 기피하였다. 아무래도 1학년 담임은 학부모에게 제일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2학년 담임을 선호했었다. 학생상담주간은 만나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하는 시기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던가. 가장 화사하고 나름 제일 젊어 보이는 차림으로 한껏 치장을 하고 출근했다.

학부모를 만났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서로 어색한 인사를 하고 학생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아마 자모도 담임에게 좋은 말로 분위기를 바꾸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선생님 참 고우세요. 그런데 손이 늙으셨네요?” 눈치 없는 자모의 말 때문에 기분이 확 잡쳤다.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어정쩡하게 얼버무렸지만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 내 손의 수모이다. 그때 내 나이 50대 중반이었다. 그 후로 웬만하면 내 손을 감추고 다른 사람의 손을 먼저 살폈다.

갑자기 손에 공을 들이고 싶었다. 아파트 주변에 네일숍nail shop을 찾아 다녔다. 입간판에 그려진 손이 눈에 확 띄었다. 곱디고운 손에 윤기가 잘잘 흐른다. 손톱엔 코스모스도 피고 장미도 피었다. 반짝반짝 별도 한 무리 나타났다. 기하학 무늬는 차라리 수수하다. 온갖 디자인으로 멋진 손들의 향연이다.

생전 처음 들어간 네일숍. 젊은 아가씨들의 전유물인 듯한 공간에 들어서니 쑥스럽고 멋쩍었다. 서비스가 몸에 밴 실장님이 아주 상냥하고 친절했다. 내 손에 온 정성을 들였다. 손 마사지를 하고 손톱을 다듬으며 한 시간 남짓 귀부인 못지않게 호강했다. 마지막으로 매니큐어에 빨간 장미가 오르며, 내 손이 재탄생되었다. 내 손 같지 않아 낯설었다. 다시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갈 정도로 기분이 좋다. 그 후로 한동안 기분 좋은 네일숍 방문은 계속됐다. 친구 만나면 내 손을 먼저 보여주는 용기도 서슴지 않았다.

내 손의 호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옷을 입다가 슬쩍 걸렸을 뿐인데 공들인 손톱이 부러진 것이다. 이런 낭패가 있나!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그동안 단골이 된 네일숍 실장 말이 손톱이 건조해서 그런 것이라고 한다. 보습제, 오일, 손톱 강화제 등 몇 가지를 덧발라 투자를 했다. 여전히 손톱 상태가 나아지지 않고 부러지는 것이 속상해 결국 멈추고 말았다. 손을 통해 나이를 거슬러 보려던 나의 욕심이 지나쳤다. 손의 메마름이 손톱까지 견디지 못하게 했나보다. 미련하고 아둔함이 화를 불렀다.

불현듯 어머니 손이 생각난다. 팔십 평생 손에 물마를 날 없어 거칠기 이를 데 없었던 어머니의 손, 휘휘 돌아가던 금가락지를 마디가 굵어 뺄 수 없어 애를 태웠던 손, 자식들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하신 거룩한 손. 그 손을 누가 밉다고 할 수 있더란 말인가. 손끝이 야물어 무엇이든 어머니 손을 거치면 마술을 부린 듯한 손. 별스럽지 않은 재료로 맛깔스런 음식을 해내시는 손맛. 내가 어머니의 솜씨와 손맛은 닮지 않고 겉모습만 닮은 것이 참말 안타깝다.

손에 오장육부가 몰려있다고 한다. 마디마디 혈자리를 눌러 통증을 가라앉히기도 한다. 오죽하면 갑자기 위급한 상황이 되면 손을 따서 피를 통하게 하지 않는가. 손 안에 거미줄같이 퍼져 있는 손금으로 운명을 점치듯이 이 안에 내 인생의 모든 것이 있는 줄 생각지도 않고 겉모습만 보고 밉다고 감추었던 어리석음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했는데 그것을 모르고 거스르려고 하는 것도 내 탐욕이다. 세월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손의 모습을 탓하지 말자. 양손이 합쳐서 박수칠 수 있는 일이 많기를 소망하자. 따뜻한 마음 오래 간직할 수 있도록 두 손으로 기도하자. 아직은 손이 말썽피우지 않고 자기 맡은 일 훌륭하게 해내고 있음에 감사하자.

손이라고 다 똑같은 손이 아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를 돌보는 거칠어도 따뜻한 손, 평생 시장 바닥에서 모은 돈을 기부하는 손, 아프리카의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는 봉사하는 손이 있는가 하면, 남의 것을 탐내는 시커먼 손과 거물급 큰손도 있다. 하고많은 손 중에 거칠어도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손이 주변에 넘쳐나길 소망한다.



안경

 

김정옥

 

나는 사십여 년 동안 안경을 썼다. 안경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느낄 테지만 안경을 쓰면 굉장히 불편하다. 날이 더우면 안경 아래로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불편하고, 추운 날 마스크를 쓸 때는 입김이 서려 불편하다. 매섭게 추운 날 갑자기 식당에 들어갔을 때 뿌옇게 서린 김 때문에 앞이 안보여 인사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을 때의 민망함이란 뭐라 표현할 수조차 없다. 이런 저런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토록 쓰고 있는 것은 불편함보다 밝고 또렷하게 보이는 편함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안 좋은 기억은 초임지에서 뒷자리에 앉은 아이들과 제대로 눈을 못 맞춘 것이다. 뒤에서 장난치는 아이들을 제때에 잘 보살피지 못한 것이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미안하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한다고 오해 받은 때였다. 나중에 눈이 나빠서 먼저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쳤다고, 미안하다며 오해를 풀기까지는 예의 없는 사람으로 낙인 찍혔으니 무척이나 억울하다.

안경을 쓰면 본 얼굴보다 미워 보이나 보다. 가끔 드라마에서 예쁘지 않은 여자를 표현할 때나, 성적 매력이 없는 여자를 나타낼 때 안경을 쓴다. 안경은 여자의 얼굴을 많이 가리기 때문일까? 그러다가 변신을 할 때는 안경을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안경을 쓴 것은 예쁘지 않은 얼굴의 대표적인 예인가 보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범생과 학식이 뛰어나고 인품이 훌륭한 분들을 표현할 때도 안경을 쓴다. 두꺼운 안경알에 검은 뿔테 안경을 썼다. 공부 잘하고 책을 많이 보면 눈이 나빠진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안경이 주는 이중성이다.

요즘 노안 교정수술이 있다는데 수술해서 안경을 벗어 불편함도 없애고 이미지도 변신하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다. 하지만 막상 이 나이에 수술하는 것이 겁나서 시도를 못하니 이대로 살아야할 팔자인가 보다. 어차피 이제 안경은 나하고 삶이 다할 때까지 함께 해야 할 것 같다.

처음 안경 낀 날이 생각난다. “이제부터 온 세상이 밝아지겠네요?” 안경사가 웃으며 한 말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정말 뿌옇던 시야가 또렷했다. 환한 세상에 다시 태어 난 기분이었다. 이렇게 뚜렷하게 보이는 것을 어리석게도 미운 얼굴이 가뜩이나 더 미워 보일까봐 차일피일 미룬 것이 후회스러웠다.

안경은 내 신체의 일부다. 또 하나의 눈이다. 세상을 더 자세히,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하니 말이다. 잘 때, 샤워할 때, 화장할 때 이외에는 항상 나와 함께 한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 늘 있던 자리에 안경이 없으면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찾아다닌다. 찾아서 써야 안정이 된다. 그렇다고 가까운데도 안 보일 정도로 심한 약시弱視는 아니지만 안경은 나에게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다.

안경을 벗고 보면 얼굴의 주름이 잘 안 보이는데 안경을 쓰면 언제 이렇게 나이 들었나싶게 자글자글해 무척 속상하다. 그러나 잘 보인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인가! 몸이 천 냥이면 눈은 구백 냥이라는데 안경이 구백 냥 값을 톡톡히 해주니 오죽이나 고마운가?

사람들은 저마다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본다.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다. 자기만의 색깔로 보기도 하고 자기만의 모습으로 보기도 한다. 시력이 나빠서 끼는 안경이 아닌 각자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안경이다. 안경 낀 삶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살아간다. 그렇지만 자기만의 스타일의 틀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하고 갇혀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다.

안경을 낀 채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렌즈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다. 렌즈에 의해 반사된 광선을 그 반대 방향으로 연장하여 얻은 가상의 상이다. 실제와 다른 것으로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나 물체의 참모습도 실제와 상관없이 다른 것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인 것이다. 우리는 이 허상을 보고 그것이 실상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니 이 세상의 모든 물체의 본 모습은 보지 못하고 평생 살아갈지도 모르겠다.

사람에게는 보려는 욕망과 보여 주려는 욕망이 있다. 보려는 욕망을 나는 안경이라는 창을 통해서 채웠다. 선글라스를 통해서 햇빛을 가려 나를 보호하고, 시력과 상관없는 액세서리로서 보여 주려는 욕망도 채웠다. 세상을 보는 창이자 진실을 가리는 장애물, 자신을 보호해 주는 방패가 되어 주는 안경으로 내 삶의 내면이 깊어졌다. 장애와 부족함의 상징으로만 여겼던 안경이 나를 한 단계 승격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자세히 보고 싶은 것과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텔레비전은 보고 싶지 않으면 채널을 돌리면 된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봐야할 것들이 많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안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볼 수 있는 안경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해본다.

혜안은 사물을 꿰뚫어 보는 안목과 식견, 모든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차별의 현상계를 보지 않는 지혜라고 한다. 안경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 느낄 수 없는 역사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한 걸음 앞서 시대를 예견하는 혜안을 갖고 싶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많은 불편함보다 더더욱 많은 편리함 때문에 오늘도 내일도 나와 함께 할 소중한 내 몸의 일부인 안경에게 한없이 감사한다. 안경 안 끼고 산 세월보다 안경 끼고 살아온 세월이 많아 이제 얼굴까지 변해 버려 애달프지만 그 모습이 이제 완전한 내가 되었으니 어쩔 도리가 없겠지. 허상을 끌어안고 살았어도 그 안에 나의 진실이 있음을 믿는다


<당선 소감> 

수필처럼 따뜻한 삶을 꿈꾸며

 

김정옥

 

올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생각하면 변변히 속옷도 못 입고 지낸 어린 시절이 더 추웠을 텐데 지나간 것은 잊고 지금이 더욱 춥다고 느낍니다.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든다는 옛 어른들 말처럼 해마다 조금씩 더 춥다고 느껴지겠지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겨울 하늘을 쳐다보며 가을보다 더 파랗게 느꼈습니다. 추위에 몸이 움츠러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에 보지 못했나 봅니다. 이제부터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42년의 교직을 떠나며 퇴직 후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하여 깊은 생각과 준비도 없어 우려했는데 그것은 기우였습니다. 하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했던 일, 근무하느라 못 배웠던 것을 한 가지씩 시작하다보니 시간이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그 중에서 나의 일상을,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또 생각한 것을 글로 쓰는 일이야 말로 나에게 큰 즐거움과 보람이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생각하게 하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삶을 활기차고 윤택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도 이제 막 알기 시작했습니다. 요즈음엔 무엇이든 자세히 보고, 오래 생각하고 이것이 글감이 될 수 있을까 궁리합니다. 무심히 지나쳤던 사물에도 말을 걸어 보며 사색에 잠깁니다.

수필처럼 살고 싶다는 말이 무엇인지 조금씩 깨달으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수필처럼 따뜻한 사람, 수필처럼 진솔한 사람, 수필처럼 겸손한 사람, 수필처럼 감동을 주는 사람, 수필처럼 철학이 있는 삶을 살려고 공들이겠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더욱 감사드리며 앞으로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일상의 이야기를 신변잡기를 넘어서서 수필이 되도록 다듬어 주시고 가르쳐주신 지도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당선의 기쁨을 청주교대 수필창작교실 문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