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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숙 <병풍 속의 여행> 수필과비평 2018년 2월호(196호)

느림보 이방주 2018. 2. 10. 22:21

<심사평>

대상에 대한 독특한 인식이 작가의 모습


유인실 유한근 허상문


수상작으로 선정된 최운숙의 <병풍 속 여행>이 주목되는 이유는 기존의 사군자를 모티프로 쓴 수필과는 변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문우로부터 전해들은 '사군자 전시회' 관람에서 여덟 폭 병풍에 그려진 사군자를 보고, 작가의 상상력과 사유를 통해서 사군자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특히 대나무 그림에 대한 인식에서는 유년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 뒤뜰의 대나무 밭에 대한 공포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대나무에 대한 감성적 표현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별했다. 그리고 난초에 대해서는 그 사물에 작가의 마음을 유혹과 진정한 사랑이라는 정서로 끌어내고 있는 점, 매화 향에 대해서 은둔의 선비와 깊은 향기를 느끼고 있는 점, 국화 향기를 하심下心의 후각적 이미지로 인식하고 있는 점이 주목되었다. 그리고 사군자를 "그들의 생존전략이 바로 군자의 모습"으로 인식하며 마무리하고 있는 점이, 이제는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해도 좋겠다는 판단이 들어 신인상 수상작으로 뽑는다.



병풍 속 여행

 

최운숙

 

언제부터인가 자연에 관심이 가고 오래된 것에 애착이 생기며 소소한 것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나이가 더해감에 찾아오는 변화인가 보다. 사군자 전시회가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가지 않을 수 없다. 청곡 오근석 화가의 개인전이다. 그분에 대해서 아는 건 없다. 함께 수필 창작 공부를 하는 문우로부터 전해 듣고부랴부랴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다.

전시실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사군자를 그린 여덟 쪽 병풍이다. 그 도도함이 나를 한참 동안 붙잡아 두었다. 그러나 정작 내 시선을 잡는 건 따로 있었다. 대나무다. 어릴 적 우리 집 뒤뜰을 차지했던 울창한 대나무밭, 바람이 불면 서걱거리던 소리가 유난히도 무섭게 들렸었다.삵도 살았던 듯 했다. 겨울이면 닭장의 닭을 물어가기도 했으니까. 아버진 무슨 까닭인지 그 사실을 모른 체하셨고 나는 대나무밭에 가는 걸 꺼려했다. 대나무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바람과 함께 울어대는 무서움이기도 했다. 태풍이라도 오는 날엔 쉬이익쉬이익거칠게 울어댔다. 그 무서움이란.

이젠 추억으로만 남아있는 대나무 소리다. 내가 화가의 작품 속으로 빠져들자 잊었던 그 소리가 나를 깨운다. 대나무는 고결함과 청결함이 군자와 같다 하여 사군자의 반열에 올랐다. 강직한 선비의 흔들리지 않는 눈초리와도 같고 선비의 도포처럼 우직하기도 하다.

화가는 대나무의 매듭을 세월을 살아내는 강인한 의지로 보았나 보다. 마디와 마디를 잇는 매듭에 붓끝의 힘이 옹골차게 모여 있다. 파르르한 그 몸짓에 묵향이 가득하다. 나는 꿈속인 듯 그 향에 갇히고 만다. 나의 오래된 무섬도 그 향에 묻히길 바래본다.

이제 나는 느릿느릿 옆걸음을 걸어 난초를 향한다. 난초를 무심한 듯 바라본다. 한때 난초에 푹 빠져 다른 건 안중에도 없었던 적이 있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춘란 애호가이신 어르신께 야생란을 받아들고 얼마나 기뻐했던지, 애지중지 난만을 바라보았던 아스라한 기억이 되살아난다. 불처럼 짝사랑했던 기억, 짝사랑은 짝사랑일 뿐이었다. 시름시름 앓다가 팔다리 잘려나간 난초를 본 후에야 후회했던 마음이다. 사랑은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그 사람이 행복해야 그것이 진정 사랑이다.

비들비들 말라가는 몇 촉을 들고 난 전문농원에 부탁했다. 이미 늦은 건 아닌지 애태웠던 그 때가 작년이었으니까 지금쯤 건강해졌을까, 지금쯤 행복할까?

그 후론 마음속 전쟁이었다. 내가 아무리 공을 들여도 난초가 바라는 건 자연의 자리일 것이다. 내 욕심의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다. 그러나 아직 내 곁에 남아 있는 몇 개의 난분은 어찌 그들의 세상을 만들어줘야 할지 반성하고 궁리한다. 들고 있자니 아프고 내려놓자니 아쉬운 욕심이다. 무 자르듯 잘라내기 어려운 게 사람의 마음인가 보다.

오늘 화가의 손끝에서 새치름하게 피어난 난초꽃이 나를 유혹한다. 유혹이란 사랑 같아서 참 떨쳐내기 어렵다. 오늘 이 난초 그림은 돌아서고 난 후에도 내내 마음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매화는 어떤가, 유난히도 꽃을 좋아해 봄도 오기 전 매화꽃을 보겠다고 낙산사로 달려갔던 그 아찔한 순간이 기억난다. 대웅전 앞에 환하게 웃고 있던 몇 송이의 꽃을 보는 순간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른 계절에 속없이 웃고 있는 모습이 철없이 달려온 내 모습 같아 돌아섰던 기억, 그럼에도 매화꽃은 내안에 사르르 자리 잡았다.

노인의 굽은 등 같은 고목에 핀 매화와 앳된 난초의 그림이 한쪽 벽을 지키고 있다.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화가는 그들에게 어떤 숙제를 주었을까, 그들의 소곤거리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작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나는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매화가 시작의 꽃이라면 국화는 마무리의 꽃이다. 꽃과 나무가 자연으로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계절에 비로소 국화는 차가운 서리를 안고 꽃을 피운다. 은둔의 선비처럼 그 향기는 깊다. 사람은 누구나 매화처럼 태어나 국화처럼 깊어지기를 바라지만 쉽지 않다. 마음을 열어서 그 안에 가득 찬 수많은 생각들과 집착을 벗어버리면 국화처럼 향기가 날지도 모르겠다. 깊어짐으로 완성 되듯이.

나이 들어 빛이 바래도 한지처럼 은은하게 빛날 수 있도록 마음 짓기를 늦추지 말아야 할 일이다. 화가는그의 육신을 붓에 담고 그의 마음을 먹에 담는다.청곡 오근석, 그분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왔다. 그의 작품 활동 40, 올해 진갑이라는 그분은 이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의 역사를 쓸 것이다. 혹 내게도 그를 만날 수 있는 행운이 올까?

매화는 이른 봄의 눈보라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며 난초는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내뿜는다. 국화는 어떤가, 늦은 가을 첫 추위를 이겨내며 꽃을 피운다. 대나무의 청정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군자는 그들의 생존하는 전략이 바로 군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군자와 같은 사람, 곧고 단단한 매듭처럼 올곧이 그림에 인생을 둔 오근석 화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적어도 그의 그림에는 욕심이 없었으며 그 비움의 자리에 혼이 담겨있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나는 그림을 잘 모른다. 단지 좋은 그림을 보면 편안해지기 때문에 좋다. 오늘처럼 피로에 쌓여 지쳐올 때 작은 그림 하나가 하고 내안으로 들어오면 그만이다. 더욱이 첫사랑처럼 찾아다녔던 기억들이 아니었던가, 액자 안에 갇혀 있던 매, , , 죽을 꺼내 그들과 새로운 인생 여행을 하는 상상을 해본다. 걸어서 병풍 속을 여행하는 그 짜릿하고 행복한 여행 말이다.

인생은 때때로 이렇게 행운이 오기도 한다. 또한 추억은 꿈과 희망이 되기도 한다.

오늘밤엔 그들이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



당선소감

 

최운숙

 

소설 같은 일이다. 어떤 길인지도 모르고 가벼한 옷차림으로 산책처럼 들어선 길이었다. 그 길에는 알록달록 꽃들이 피어 있는가 하면 묵직한 나무들이 질서 있게 서 있기도 하고, 작은 돌멩이들이 숨을 이어주기도 하고 있었다. 꿈속인가 하고 둘러보니 그 길 들머리에 내가 서 있었다. 오래전 꿈이 현실로 내 작은 손을 잡고 있었다.

아기가 세상에 나와 첫 걸음마를 배우듯 한걸음 한걸음 연습을 통해 좀 더 커지기도 하고, 조금씩 비워내기도 하는 숨 쉬는 글쓰기를 바래본다. 또한 그런 글이 내가 이곳에 설 수 있도록 하나하나 정성으로 지도해 주신 선생님께 작은 웃음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

지도해주신 이방주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문학의 길을 함께 걷는 문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