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수필창작 교실/등단 추천작품

강흥구의 <떨켜> 수필과 비평 2015년 11월호

느림보 이방주 2015. 11. 30. 22:44

떨켜

                                                 

강흥구

 

형형색색의 낙엽이 바람에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한때 푸르름을 자랑하던 나뭇잎들이었다. 하늘이 내린 본분을 다하고 황혼 속으로 사라진다. 나무는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방법으로 나뭇잎에 떨켜를 형성시켜 낙엽 되어 날아가게 한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이 정해진 길을 간다. 기억 속으로 묻히어 간다.

나무는 제 살길을 찾기 위해 나뭇잎을 떨어뜨린다. 추한 모습으로 보내지 않고 빨갛고 노란 옷으로 갈아 입혀 떠나보낸다. 아름답고 황홀한 다른 세상으로 보내져 새로운 길을 가게 한다. 한때 커다란 그늘을 제공해주던 나뭇잎들이 모두 사라진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후송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허겁지겁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달려갔다. 뇌경색이라고 했다. 곧바로 혈전용해제를 처방받았으나 의식이 없다. 세상이 무너질 때도 가슴이 이렇게 떨릴까? 모든 것을 병원에 맡기고 회복되실 날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것이 희망이다.

서울, 인천에 사는 동생네 식구들과 부산 작은아버지 가족까지 모두 모였다. 다들 걱정하며 어두컴컴한 병원 복도를 왔다 갔다 했다. 의식이 회복되시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의사선생님과 간호사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분에 약간 호전되어 일반 병실로 옮기셨다. 불행 중 다행이다. 얼마 동안 병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나빠지는 듯 했다.

병세는 악화되었다. 합병증으로 패혈증이 왔다 한다. 곧바로 중환자실로 옮기셨다. 이제부터는 가족이 병간호도 하지 못한다. 주어진 시간에 한정된 면회만이 허락된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고 누워만 계신다. 얼굴에는 산소공급용 호스가, 손과 발에도 온통 호스와 전선이 연결되어 있다. 기계 소리만 들린다. 미동도 없이 누워만 계신다. 살아있는 목숨이 아닌 것 같다. 수건에 물을 적셔 닦아주고 나온다.

의사 선생님이 가족들을 찾았다. 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쿵쾅 거린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역시 더 이상 치료가 불가하니 준비하라고 하신다. 오늘을 넘기기 힘드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아야 할 가족을 모두 부르라 하셨다. 급히 연락하여 모두가 모였다. 차례차례 얼굴을 보고 나와서 흐느끼며 울고 있다. 이제 보내 드려야 하기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의사선생님은 이상하다는 말씀만 하신다. 일단 모두 집으로 돌아가시게 한 후 연락하면 다시 오게 하란다. 집에 가서 있다가 연락하면 다시 오라고 막 돌려보냈는데 의사선생님이 또 찾는다. 빨리 연락하여 부르라 했다. 미쳐 집에 도착도 하기 전에 다시 돌아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아버지께서는 세상과의 이어진 끈을 놓지 못하시는 것 같다. 가족과 헤어짐에 미련이 남은 듯 했다.

나뭇잎은 가을이 되면 떨켜가 형성되어 낙엽이 되어 여기저기로 날아가 흩어진다. 몸체인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나뭇잎으로서의 생을 마감하고 낙엽이 되어 쓸쓸이 떨어져나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모두에게서 잊혀져간다. 그러나 떨켜가 형성되지 못한 나뭇잎은 겨울에도 떨어지지 못하고 매달려 있다. 안쓰럽다. 우리 인생도 같은 이치인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희로애락을 맛보며 살아오다 어느날 모두의 곁을 떠나고 만다. 떨켜가 형성되어 세상에서 떨어져나가 낙엽 되어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떨켜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언제까지 한 그루의 나무로 버티고 있기를 원했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그늘이셨던 아버지도 이제 떨켜를 형성하여 떨어져나갈 준비를 하신다. 가족을 위한 큰 그늘의 역할을 나에게 넘겨주기 위해 준비를 하신다. 나는 아직 넘겨받을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상태여서 당황스럽기만 하다.

떨켜가 형성되지 못해 떨어지지 않고 있던 아버지의 낙엽도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은 낙엽 되어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그 낙엽은 수많은 낙엽 속으로 날아갔고 이젠 찾을 수조차 없다. 다만 기억 속에 남아있을 뿐이다. 어느 곳으로 날아갔는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다. 온 가족에게 그늘을 제공해 주셨던 아버지나무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제는 내가 가족에게 그늘을 주어야 한다. 부족하기만한 내가 그늘을 지워야 한다. 가족이라는 나무는 변함없이 서 있고 낙엽만 날아갔을 뿐인데 그 자리가 이렇게 크게 작용할 줄은 몰랐었다. 그렇게 막중한 역할을 나에게 넘겨주고 아버지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누구에게든 가을은 찾아온다. 가을이 오기 전에 하고 싶은 일들을 해야 할 것이다. 후회하지 말고 미리 찾아 즐기고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누구나 맞이하는 가을이지만 어떻게 맞이하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내가 이 다음에 가족을 위한 큰 그늘을 만들지 못하고 낙엽 되어 떠나가면, 나의 아들 또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 막중한 임무가 넘어온 것이다.

가을이다. 창밖 나뭇가지에서 바람에 낙엽이 흩날린다. 언제까지나 푸르름을 자랑할 것 같던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우리 인생도 언제까지 청춘일 수는 없다. 언젠가는 낙엽이 되어 떨어질 것이다. 그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하더라도 결국은 떨어진다. 때가 되면 낙엽 되어 떠나야 한다. 세상의 미련을 버리고 낙엽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 이젠 나뭇잎이 아닌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나뭇잎이 섭리를 따르듯 우리네 인생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14.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