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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애의 <아버지의 손> <그릇을 고르며> 한국수필 2014년

느림보 이방주 2014. 3. 30. 22:38

아버지의 손

 

이 승 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오늘도 커다란 손이 포근하고 넉넉하게 맞이해준다. 얼마 전 닥종이 인형을 배우면서 아버지의 손을 만들어 보았다. 오래전에 우리 곁을 떠나신 아버지의 생전의 모습이 그리워 만들고 싶었으나 재능이 이르지 못하여 아버지의 삶을 상징하는 손만 만든 것이다. 손의 모양은 우리 가족뿐 아니라 이웃과 상생의 삶을 사셨던 모습을 기리기 위해 다섯 손가락을 약간 옹그려 편 자세로 하늘을 향하게 만들었다. 처음 만들었는데도 생전의 아버지의 손을 꼭 닮아서 현관 진열대에 얹어놓았다. 현관을 드나들 때마다 생전에 아버지를 생각하며 가만히 볼에 대거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피가 통해 따뜻한 온기가 전해질 것만 같다.

쉴 틈도 없이 움직이 아버지의 손의 위력은 대단했다. 때로는 힘없이 죽어가는 사람이나 짐승을 살리는 부활의 손이었고, 때로는 세상의 중심에서 삶을 개척하는 끊임없이 일을 지향하는 손이었다. 그런 노고로 손가락은 뭉툭하게 닳고 갈라져 흰 반창고를 훈장처럼 달고 사셨던 아버지의 손이었다. 쉬지 않고 일하는 아버지의 손 덕택에 우리 가족은 행복하고 따뜻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아버지의 손은 하늘을 닮아 자비로웠으며, 자연을 본받아 순수하고 순리를 어기지 않았다. 아버지의 손은 간혹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어느 날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술집에 가셨는데, 네댓 살 된 그 집 손자가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모습을 보셨다.

아버지는 한창 재롱을 떨 아이가 안쓰러워 어느 곳에 문제가 있는지 살펴보셨다. 아이 부모는 낯선 남자가 자신의 아이를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 언짢았는지 당신이 누군데 남의 아이를 함부로 만지느냐?’며 기분 나쁜 기색을 보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의사였음을 밝히고 아이가 어떻게 다쳤는지 연유를 물었다. 아이는 첫돌이 지났을 때 형들과 놀다가 높은 데서 떨어졌다고 하였다.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낫지 않고 앉은뱅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 아이가 척추를 다쳤음을 알리고 정성을 다해 지압을 해주셨다. 한 시간여 애쓴 덕에 아이는 태연히 앉아 재롱을 떨었지만, 아버지는 버둥대며 우는 아이와 씨름하느라 땀을 비 오듯 흘려 온몸이 흠뻑 젖었고 온 힘을 기울인 탓에 맥이 다 빠져 버려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아이의 놀라운 기적을 본 가족은 아버지를 붙들고 사정을 하였다.

아이고 선상님! 세상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앉은 걸 보니 기적이여유. 우리 아이가 걸을 수 있게 해 줘유.”

너무도 간곡히 청하는 바람에 아버지는 당신 일은 제쳐놓고 십리 길을 마다치 않고 드나들며 치료해주셨다. 그 바람에 어머니의 일은 몇 배나 늘어나 온종일 쉴 틈이 없었다. 아버지의 지극한 정성이 담긴 손길이 몇 번 거친 후에는 어린아이가 아버지께 다가와 허리를 톡톡 치며 만져달라고 할 정도였다. 그 어린아이가 어찌 아버지 손의 신통력을 알았겠는가. 아마도 손을 통해 전해오는 치료자의 따뜻한 정성과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한 달 후 아이에게는 놀랍게도 마음대로 걸을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또 한 번은 젊은 여인이 아이를 갖지 못하여 소박을 맞고 찾아왔다. 그녀는 울면서 아버지께 매달렸다.

선생님! 제 꼴 좀 보세요. 아이를 낳지 못해 소박맞은 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저도 사람 구실 한번 하고 싶어요.”

여자의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아버지는 치료해줄 것을 약속하고 말았다. 그녀의 불임 원인은 난관에 수종이 생겨 배란장애가 온 것뿐 아니라 과도한 스트레스로 이곳저곳 탈이나 있었다. 아버지는 한방과 양방, 지압을 동원해 치료에 주력하였다. 몇 번을 오가던 그녀는 점차 몸이 좋아지자 아예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제일 곤란한 분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리며 곤욕을 치렀다. 혹시 작은 부인 들인 것은 아니냐는 추측도 나돌았다. 우리 남매는 손님에게 방을 빼앗겨 옹색하게 살아야만 하였다. 아버지는 그녀를 치료하는 동안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으셨고, 하느님께 간곡하게 기도를 올리셨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몸속에 있던 수종이 없어지고 탈이 났던 몸도 좋아졌다. 그녀는 건강을 되찾아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성스러운 몸으로 바뀌었다. 그 후 그녀는 재혼하여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이렇듯 아버지의 손은 좌절과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랑의 전령이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 직무에 충실했던 손은 한순간도 나태하지 않았다. 궂은일, 힘든 일을 마다치 않았지만, 검은 유혹을 단호히 거절할 줄은 알았다. 그 손에 의지한 우리 가족은 정직함과 사랑을 배웠다.

어릴 적 배앓이를 하면 어머니께서 배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문지르며 내 손은 약손하시며 당신의 기를 불어넣어 주셨다. 단순한 행동이지만 병을 낳게 하는 놀라운 신통력을 발휘하였다. 그 이유는 상대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사랑을 손에 담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손은 신체의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인간의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진실한 영혼을 가진 사람의 손은 푸근하고 따뜻하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으면 저절로 가슴이 설레고 편안해진다. 아버지도 이러한 마음을 듬뿍 담아 상대에게 주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께서 생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은 것도 손이었다. 교회행사로 행차하시던 아버지 앞에 돼지들이 울타리를 부수고 뛰쳐나와 소란을 피워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아버지는 행차를 포기하고 한나절 내내 너덜너덜해진 울타리를 꼼꼼하게 고치고 구멍 난 지붕을 수리하셨다. 그러다 실수로 발을 헛디뎌 지붕에서 떨어지셨고 아버지는 손쓸 틈도 없이 홀연히 하늘나라로 떠나버리셨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온 힘을 다한 손은 소·돼지·닭의 보금자리를 따뜻하게 마련해주고 거룩한 죽음을 맞았다.

생의 마지막까지 충실했던 아버지의 손을 기억하며 내 손을 바라본다. 여자의 손치고는 크고 억세게 생겨 볼품은 없지만, 아버지의 아름다운 손을 많이 닮았다. 여기저기 다치고 상처가 나도 불평 없이 일하고 가족과 이웃을 도울 줄 아는 손이다. 이 손에는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아버지의 정신이 흐른다. 아버지가 일으킨 수많은 손의 행적을 기억하며 오늘도 내가 맡은 일에 성실하게 나아간다.

손은 인생을 대변한다. 울퉁불퉁 거친 굵은 곡선을 따라 커다랗게 펼쳐진 손을 본다. 손은 생명의 힘이다. 음식을 만들고, 건강을 예견하고, 정을 나눈다. 또한 의사소통의 도구요, 사물을 재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마음의 손이 없다면 이 세상은 마비되고 말리라. 돌아가신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오히려 불의라고 말했다. 명석한 머리. 튼튼한 다리. 영롱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손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생각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손은 우리에게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생명의 도구가 될 수 있고, 죽음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릇을 고르며

 

이 승 애

 

미국에서 지인이 오시는 날이다. 멀리서 오는 손님에게 무엇을 대접할까 고민하다 샤브샤브와 월남쌈을 대접하기로 하였다. 서둘러 시장을 보고 청소를 한 후 음식에 맞는 그릇을 고르기 위해 수납장에 넣어 두었던 그릇들을 꺼냈다. 그래도 좀 귀티가 난다 싶어 아껴 두었던 그릇들인데 막상 꺼내놓고 보니 예상과는 달리 제각각 형태도 다르고 짝도 맞지 않아 품위를 지키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시간이 촉박하여 어디 가서 빌려 올 수도 없고, 사올 수도 없는 형편이라 구석구석 뒤지며 다른 그릇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십 여분 씨름한 끝에 원하던 그릇을 찾아내었지만, 한쪽 귀퉁이가 깨져 품위 있는 상차림을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깨진 접시가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내 마음의 그릇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오십 여년 황급히 달려온 인생 마차엔 금이 가고 깨진 그릇이 말없이 수납장을 지키듯 내 안에도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진 삶의 그릇이 나뒹굴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손상이 컸던 사건은 내 나이 열여덟에 갑작스러운 사고로 하늘나라에 가신 아버지와 오십도 채우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른 언니의 죽음이다. 그 때문에 내 인생 그릇은 볼품없이 금이 가고 깨져 무엇 하나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었다. 조각난 그릇을 새것으로 바꾸듯 깨져버린 삶의 그릇을 바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가 아니던가. 숱한 시간을 아파하다 조용히 한편에 밀어놓기로 하였다. 그럭저럭 살다 보니 세월에 따라 그릇의 형태도 달라지고 새로운 그릇들이 만들어졌다.

스물아홉에 세속을 떠나 수녀원에 들어갔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드릴 그릇 하나를 빚기 시작하였다. 무엇을 담아도 어울릴 그릇을 빚으리라 다짐하며 열심히 정진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의도와는 달리 일그러지고 깨지고 금이 갔다. 점점 약해져 가는 의지를 가까스로 잡고 금이 가고 깨진 마음의 그릇을 바로 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말았다. 이미 균형을 잃어버린 일상의 물레질은 헛돌기만 하였다. 그럴수록 나의 조급증은 더욱 커졌고 그 조급함은 심신을 허약하게 하였다. 결국 미완성의 그릇은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수녀원을 나오고 말았다.

빚다 만 그릇이 깨져 그 조각들이 나를 찔러댔다. 찔러대는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새로운 그릇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새것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발상의 시도였다. 지금은 그렇게 빚은 그릇이 삶의 디딤돌 역할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온전한 그릇으로 산다고는 할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번 그릇의 형태를 바꾸는 유약한 존재다. 굴곡진 삶을 사는 존재니 금이 가고 깨지고 모난 모서리에 때가 껴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땐 마음 한구석에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작은 종지 다발이 산만하게 놓여있기도 한다. 이기심으로 남을 배려하지 못하고 괜한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역정을 내느라 사랑 한 사발 담아내지 못한 흔적이다. 못된 성미로 울근불근하다 찌그러뜨린 양푼도 있고 허영과 욕심으로 채워진 얇은 그릇이 깨어질 듯 위태롭기도 하다. 형편없는 자신의 그릇에 절망하여 슬픔에 잠기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곤 한다.

얌전한 규수처럼 눈을 내리깔고 있는 자태 고운 그릇이 보인다. , 나에게도 있었다. 금이 가고 깨진 그릇만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성자처럼 남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였고 이웃의 아픔을 함께 나눌 줄도 알았다. 그 옆 맑고 투명한 유리그릇처럼 울퉁불퉁한 성깔을 연마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비록 위선과 거짓으로 만들어진 불투명한 그릇이 볼품없이 찌그러져 나뒹군다 해도 내게는 소중하고 아름다운 그릇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게 한다.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깨진 그릇이나마 호일로 감싸고 무를 얇게 썰어 장미 모양으로 꾸며 갖가지 채소를 담아내니 그럴듯하다. 멸치와 표고, 다시마를 넣어 육수를 만들고 청양고추와 풋고추를 다져 액젓과 곁들여 놓고 고기도 정갈하게 담는다. 드디어 기다리던 손님이 오셨다. 한국에서 먹는 샤브샤브와 월남쌈이 맛있다고 잘도 잡수신다.

맛있게 먹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작은 소망하나 얹어본다. 각박한 세상을 사느라 지친 사람들에게 맑고 깨끗한 물 한 사발 대접할 수 있는 자비의 여인이 되고 싶다. 삶에 허기진 이가 있다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영양밥 한 그릇 담아주는 밥그릇이 되어도 좋겠다. 이왕이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된장국도 담았다가 시원한 뭇국도 담았다가 달콤새콤한 비빔밥 한 그릇 담아내는 다용도 대형 그릇이면 좋겠다. 더 나아가 나와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마음껏 필요한 것을 담을 수 있는 빈 그릇이 될 수 있다면 더 좋겠다. 시기와 질투, 배신과 기만에도 깨어지지 않는 투박하고 견고한 질그릇이 될 수 있다면 더욱더 좋으련만. 아직 손보지 못하고 넣어둔 마음의 그릇을 꺼내 깨어진 부분을 고치고 보수하여 정갈한 그릇으로 만들어야겠다. 거기에 따뜻한 사랑을 담고, 친절과 온유를 담아 이웃에게 나눠주리라.

사람은 모두 다른 그릇을 갖고 살아간다. 그릇에 담기는 삶의 양상도 제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그릇의 본질을 이해하고 서로 소중하게 다룬다면 각자의 마음엔 아름다운 마음씨와 사랑이 담겨 고운 빛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그릇을 먼저 탓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로가 부딪쳐 금이 가고 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각양각색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 그 고유성으로 제각각의 역할을 하며 오색찬란한 생명을 담아내고 있다. 각기 다른 그릇이 모여 하나의 밥상을 이룰 때 세상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 되고 벗이 되고 이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