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여행기 -제 2일차
2018년 1월 17일(수) 흐림
여정 : 관음사 → 4․3평화공원 → 절물휴양림
1. 관음사
한나산 관음사
제주시 아라동 한라산 동북쪽에 기슭에 있다.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숙종때 제주목사였던 이형상이 제주에 잡신이 많다고 하여 사당과 함께 절 5백동을 폐사시켰을 때 폐허가 되었다. 그 뒤 1912년 비구니 봉려관이 다시 창건하여 법정암이라고 했다. 봉려관은 원래 떠돌이 무당이었으나 1901년 비앙도로 가던 중 우연히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관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나게 되었다. 이에 감응하여 비구니가 되어 이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한 때 주민의 반대로 한라산으로 피신을 했는데, 1912년 승려 영봉과 지사 도월의 도움으로 법정암을 창건했다. 그 뒤로 신도가 늘어나자 절 이름을 관음사로 바꿨다. 조계종의 제 23교구 본사로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64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한라산 등산의 기점 지역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
관음사 http://www.jejugwaneumsa.or.kr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밤새 아내가 앓아서 걱정이다.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 아침을 지어 먹고 나는 밖으로 나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아내는 몸살기가 있다고 하여 따뜻하게 누워 몸을 덥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약 1시간 정도 걸었다. 마을은 중산간지역이라 안개가 아직 벗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쌀쌀하다. 그러나 춥지는 않다. 제주의 바람이다. 별장인지 일반 주택인지 크고 웅장한 저택이 많다. 그런 저택 옆에 잡초가 무성한 공지가 있다. 저택 앞에는 대개 고급 승용차가 있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산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왜 사는데 걱정이 없겠는가.
관음사 경내
들어오니 아내가 몸이 나아졌는지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10시는 되어서 배낭을 하나만 꾸려 나왔다. 먼저 갈 곳은 관음사이다. 네비에 관음사를 입력하고 출발했다. 이 네비는 전대로 제주 시내를 들렀다가 5.16도로를 통하여 또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 관음사는 오래된 사찰은 아니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개가 천년고찰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관음사는 100년 남짓 되었다. 그러나 역사에 비해 관음사는 웅장하고 신도들이 많았다. 일주문부터 다른 사찰과 많이 다르다. 일주문의 지붕을 황금색 기와로 이었다.
일주문에서 대웅전에 이르는 길 양쪽의 오여래 육보살이 갖가지 수인으로 대중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전국 각지의 시주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선남선녀들의 맑은 재물의 보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주문 쪽을 향하여 약간 돌아앉은 자세로 기도하는 모습이다. 대웅전도 황금색 기와이다. 대웅전이 크고 웅장하지는 않았지만 위엄이 있어 보인다. 법당에 들어가니 신도들이 빼곡하다. 낯선 중생을 위해 자리를 피해 준다. 비구니스님 한 분이 정진을 안내하고 있었다. 스님 앞에 가서 삼배만 올리고 얼른 나왔다.
오백나한은 제주 특유의 검은 돌에서 찾아 모신 오여래 육보살과 수많은 나한님들의 모습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불교가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주 우암산 관음사에 가면 천불전이 있다. 천불전에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다. 나는 이곳에 갈 때마다 감히 내가 부처가 되는 꿈을 꾼다. 천불전은 깨달음만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아닌가 한다. 나한님들은 비록 부처가 되지는 못했지만 표정을 보면 법열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곳을 나한전이라 했으면서 약사여래, 아미타여래 관음보살이 다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제주 사람들은 화산석에서 부처님을 찾아낸다. 육지 사람들이 석불을 만들어 모실 때는 화강암으로 부처님을 조각한다. 불심을 가진 사람만이 돌에서 부처님을 찾아낸다고 본다. 불심이 없는 예술가는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 돌에서 거룩한 부처님을 찾아 모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주변에서 거룩한 부처님을 찾아낸다. 육지 사람들은 화강암에서 부처님을 찾고, 제주 사람들은 검은 화산석에서 부처님을 찾아 모신다. 또 우리나라 부처님은 우리민족의 얼굴을 닮았고 캄보디아 부처님의 상호는 캄보디아 사람을 닮았다. 본래 부처님은 인도 사람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을 닮거나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얼굴로 부처님의 상호를 빚어낸다. 이것만 봐도 부처님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관음사 부처님들은 제주 사람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이상적인 신의 모습이다.
나한전에서 내려와 해원굴로 향했다. 해월굴은 관음사를 처음 세운 비구니인 해월당 봉려관스님이 정진하던 토굴이다.봉려관스님은 제주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무던히도 애쓰신 분이라 한다. 사찰의 흥망도 어떤 한 스님에 달렸는가 보다. 국가가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역사가 벼랑길로 향하는 것처럼 사찰도 그런 모양이다. 국가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면 국토의 구석구석 손이 안미치는 곳이 없듯이 사찰도 그렇게 중흥을 이루는 모양이다. 해월 스님의 토굴을 들어가 보았다. 촛불이 가득하다. 한평 남짓한 좁은 토굴에서 스님은 죄선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여기서 그 분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낮과 밤을 지냈을까 궁금하다. 나는 내 삶을 위해서 어떤 정진으로 살아 왔는지 새삼 나를 돌아보면서 관음사를 나온다.
해월당 안봉려관 스님
비구니(比丘尼). 성은 안씨(安氏). 제주도 사람으로서 원래는 무당이었으나, 1901년 비양도(飛揚島)로 가다가 풍랑에 휘말려 죽게 되었을 때 관세음보살 염불을 지성으로 하여 구제를 받았다. 그 뒤 이를 보답하고자 지성으로 염불하면서 두루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일으켰다.
1907년 해남대흥사(大興寺)로 출가하여 박청봉(朴晴峯)의 제자가 되었으며, 구족계(具足戒)도 받았다. 이듬해 제주도로 돌아가서 당시 사찰이 전무하던 이곳에 절을 짓고 불상을 모셨다. 사월초파일 경찬재(慶讚齋)를 하는데 주민들이 모의하여 절과 사찰을 불태우고 죽이려 하였으므로 한라산 백록담 부근으로 몸을 피하였다.
이때부터 한라산에서 지성으로 기도하여 감응을 얻고, 폐사되었던 관음사(觀音寺)를 1909년 창건하여 교화하였다. 그러나 그 뒤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관음사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제23교구 본사이다.
일주문
들머리 부처님
진입로에 오여래 육보살
죄우의 부처님
대웅전
나한전
아미타부처님
해월스님
해월굴
2. 4·3 평화공원
제주 4·3평화공원
역사 이래로 영웅만을 기념하던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민초들의 역사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제주 4.3평화공원은 4.3사건으로 인한 제주도 민간인 학살과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 인권기념공원이다.
제주 4.3평화공원 조성사업은 제주4.3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의 하나로 이루어졌으며, 4.3특별법 공포(2000), 공원부지 매입, 조성기본계획 연구 용역, 현상공모, 건축공사, 전시물 제작 및 설치 등이 이어여 2008년 3월 28일 개관하게 되었다.
제주 4·3사건
해방 이후 제주도는 사회주의 세력과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우파 세력이 대립하다가 1947년 3·1절 기념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 우파가 행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했다. 폭력적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반대, 단독 정부 반대, 민족 통일, 미군정 반대, 민족 독립 등의 정치적 구호를 내세웠다. 미군정은 군을 투입했고 진압 과정에서 약 28만 명의 도민들 중 약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군·경 토벌대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발 1년여 만인 1949년 봄에 종결되었는데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 들어서야 역사적 재조명 되었고 2000년 1월 국회에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12시가 훨씬 넘었지만 점심보다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4․3평화공원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제주 4․3사건이 많은 오해를 받아 제주도민이 상당히 억울한 처지였는데 최근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개선된 줄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당시의 사건이 남로당, 빨치산, 무장 공비 등이 국군이나 경찰을 공격한데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던 왜곡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 역사바로세우기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아무래도 공산주의 세력이 상당히 개입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모든 것은 너무 깊이 뿌리내린 왜곡된 역사 교육이다.
미군과 정부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대체 제주도민의 9분의 1이 학살 되었다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공산당이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곳에서 상당히 숙연한 마음으로 나왔다. 솔직한 고백으로 지금까지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주민들을 꼬드겨 일어난 봉기를 정부에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공원을 돌아보고 제주 4․3 사건에 대한 뿌리 깊은 오해를 떨쳐버릴 수 있었다. 제주 4․3 사건은 일부 남로당원도 있었지만 그들이 공산당이라는 것보다 제주도민이라는 생각으로 부당한 경찰과 국군 미군에게 저항한 사건이다. 정부에 의해서 재판없이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다. 이런 비극적 역사 이해는 이제는 없어야겠다. 그러나 지금도 권력에 의해서 죄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을 두고 후회만 할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억울하고 참담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무기력하게 살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햇살이 환하게 밝았다. 안개가 깨끗이 걷혔다. 바람은 아직도 차다.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대개 이념을 내세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만이 옳은 것이고 상대의 철학은 이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란 국민이 원하는 곳으로 실행을 하면 되는 것이다. 국민을 정치 이념으로 생각한다면 이념이 서로 다를 수가 없다. 이념은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국민의 복지와 국민의 행복이다. 4․3 사건도 정치권력의 유지를 위하여 이념을 수단으로 삼은 사건인 것 같다. 아마도 제주도민은 당시에 정부에서 제주도민 전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인 사건에 대하여 한이 맺혔을 것이다.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4․3 평화공원
제주 절물자연휴양림
제주 절물 자연휴양림은 제주시 봉개동 기생화산 분화구 아래 1997년 7월 23일 개장하였다. 총 300ha의 면적에 30∼45년생 삼나무가 주종을 이루며, 인공림이 200ha 자연림이 100ha 이다. 삼나무와 곰솔 조림지에 조성된 산책로와 그늘공간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절묘한 조화를 이뤄 한 여름에도 시원한 한기를 느낄 수 있다. 휴양림에 주 수종을 이루고 있는 삼나무는 60년대 중반부터 이 지역에 잡목을 제 제거하고 식재 한 것이다. 이곳 삼나무 우량 조림지는 자연휴양림으로 개발되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유명한 산림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휴양림 내에는 산책로, 약수터, 폭포, 연못, 잔디광장, 목공예체험장, 운동시설, 어린이 놀이시설, 숙박시설 등 다양한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 가족끼리 혹은 연인끼리 오붓한 한 때를 보낼 수 있다. 산책로는 비교적 완만하고 경사도가 낮고 계단이 없이 시설되어 약자나 어린이도 편하게 이용할 수 있으며, 보호자를 동반하면 휠체어 장애인도 다닐 수 있다. 기생화산인 절물오름은 해발 697m이며, 정상까지는 1시간 정도면 충분히 왕복이 가능하다. 절물오름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어 말발굽형 분화구를 볼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동쪽으로 성산일출봉이, 서쪽으로는 제주에서 제일 큰 하천인 무수천이, 북쪽으로는 제주시가 한 눈에 보인다.
아무리 날이 가물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다는 약수터는 신경통 및 위장병에 특효가 있다고 하며, 제주도에서 분기1회, 제주시에서 월1회 수질 검사를 하는 사시사철 흘러나오는 깨끗한 물이다. 조선시대에 가뭄이 들어 동네우물이 모두 말랐을 때에도 주민들 식수로 이용했을 정도로 풍부한 수량을 자랑한다. 휴양림내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는데, 휴양림 주종인 삼나무 이외에 소나무, 올벚나무, 산뽕나무 등의 나무와 더덕, 드릅 등의 나물종류도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고, 큰오색딱따구리, 까마귀, 휘파람새 등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으며 새벽과 저녁 무렵에 노루가 풀을 뜯는 것을 볼 수 있다.
휴양림 인근에는 생태숲, 노루생태관찰원, 사려니 숲길, 43평화공원, 돌문화공원 등 많은 관광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부근 효섬 초가집이 유명하다 해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제주 음식은 전라도나 강원도 음식처럼 산뜻한 맛은 없는데 상당히 비싸다. 전복돌솥밥을 주문했다. 1인 15,000원이다. 정말 가격에 비해 큰 맛은 없다. 그래도 2인분 상에 고등어구이 반마리가 큰 역할을 한다.
점심을 먹고 절물자연휴양림에 갔다. 삼나무 숲이다. 절물이란 절 옆에 약수가 있다는 뜻이라 한다. 삼나무 숲에 걷기 좋은 데크길을 조성해 놓았다. 공기가 신선해서 그동안 나던 기침이 사라지는 듯하다. 삼나무는 건강에도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재목으로도 가치가 높다고 한다. 쓰시마에 갔을 때 우거진 삼나무 숲은 본적이 있다. 황폐하고 험한 산악지대에 심은 삼나무가 이제는 엄청난 숲을 이루고 있다. 농사지을 땅도 없고 거칠고 험한 산악지대라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우리가 일본에게 주어버린 산에 심은 삼나무가 미래를 위한 엄청난 자산이 된 것이다. 우리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래서 알아야 세상이 보인다. 1960년 대에 헐벗은 우리나라 산에 녹화사업을 한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어린 우리들도 산에 나무를 심고, 앙고초씨, 아카시씨, 시초시, 잔디씨를 채취하여 학교에 가져 가곤 했다. 그리고 마을에 의무적으로 나무를 심도록 정부에서 강요하기도 하고 밀가루 같은 구호품을 주어가면서 나무를 심게 했다. 그 바람에 우리 나라 산이 많이 푸르러졌다. 거문오름에서 안내원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박정희 대통령이 거문오름을 비롯한 한라산 중턱에 삼나무를 심도록 했다고 한다. 당시는 귀찮고 정부에서 강요하는 일이 부당하게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삼나무 숲이 우거지니 제주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있다고 한다. 미래를 위해 오늘 나무를 심는 것 그것이 바로 정치이다. 오늘은 바른 정치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미래로 향하고 있는지 과거를 뒤적이고 있는지 의문이다. 하긴 미래를 위한 과거의 뒤적임도 필요한 일이긴 하겠다.
효섬초가집 식당
절물자연휴양림
여기서 1시간 이상 걸었다. 몸이 가벼워진다. 조천읍에 들어가 먹을거리를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4․3평화공원에서 받은 충격으로 가슴이 얼얼하다. 역사는 영웅 중심으로 이야기 되더니 이제는 대중이 역사의 중심에 서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모르고 살아온 자신이 부끄럽다. 평화공원에서 챙겨온 여러 가지 서적을 읽으며 그간의 의문을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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