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6일
어젯밤 KBS 청주방송 뉴스에서 언뜻 속리산 문장대가 스쳐 지나갔다. 눈이 하얗게 쌓였다. 봄눈이다. 파릇파릇 산죽에 하얀 눈이 신비스럽다. 와 - 갑자기 천왕봉이 그립다.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내일 일찍 천왕봉을 가야겠다." 아내가 들었는지 문장대까지만 가자고 한다. 최근에는 등산을 잘 하지 않는 아내가 문장대를 따라가겠다는 말이 의아했으나 그럼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걱정도 되었다. 그래, 그럼 가는 거지 뭐. 갔다가 안되면 그냥 내려와도 되고. 올라갔는데 눈이 아직 있으면 더욱 좋고. 사는게 다 그렇잖은가 말이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7시 50분에 출발했다. 괴산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증평, 괴산, 문광, 사기막리, 송면, 화북으로 달렸다. 50 분만에 문장대 주차장에 차를 댈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비는 집에서 부터 챙겨오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데 아내는 방수자켓도 입지 않았다. 오랜만의 산행이라 챙겨야 할 장비를 다 잊어버린 것이다. 나도 나만 챙겨 입고 온 것이 후회되었다. 아내 감기를 걱정해서 돌아서고 싶었는데 아내가 자꾸 올라가자 고집을 부린다. 좋다 그래 가면되지. 그런데 가다가 분명 도로 내려올 것이라며 차 안에 있는 스틱도 가져 가지 않았다. 그래도 눈이라 해서 사갈만은 배낭에 있다.
그렇게 우리는 허술하게 출발했다. 그런데 해발 한 700m 쯤 올라가니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끗희끗 남은 겨울눈처럼 보였으나 깨끗한 걸 보면 어제 내린 눈이다. 그리고서 한 20분 정도 더 오르니 완전히 눈 세상이다. 아내는 머리가 내리는 눈에 젖으면서도 그냥 내려가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완전히 눈에 취해 버렸다. 모처럼 산행인데 힘들어 하지도 않는다.
봄눈은 겨울 눈보다 더 부드럽고 촉촉하다. 촉촉한 눈은 나뭇가지에 꽃을 피운다. 가지는 온통 하얀 솜으로 덮은 듯하고 잔가지에 덩얼덩얼 묻어 꽃이 되었다. 눈꽃이 만들어 준 동화 속의 세계로 걸어 간다. 예상대로 파란 산죽이 하얀 눈을 쓰고 있다. 보이는 것은 모두 천국이고 순결의 세계이다.
전에 본 덕유산의 상고대나 방태산의 서리꽃이나 눈 덮인 오대산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얀 눈을 뒤집어쓴 태백산의 천년 주목도 잊었다. 문장대에는 전설처럼 구름이 머물러 있었다. 문장대 얼음을 디디고 서서 안개 속에 언뜻언뜻 보여줄 듯 말 듯 하는 관음봉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은혜처럼 슬쩍보고 또 기다리는 순간이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경업대든 입석대든 또 신선대는 마음으로 보면 된다. 아내는 이런 설산의 산행이 처음이라며 마냥 즐거워했다. 나는 설산 경험은 많지만 봄눈은 처음이다. 지난 주 금요일 문장대 산행 때에도 아직 눈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난 겨울의 잔설에는 먼지가 묻고 심술궂은 남정네들의 오줌 자국도 함께 남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순백이다. 부드럽고 촉촉하다. 영하 25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도 없다. 그냥 봄 자켓으로도 견딜 만하다.
내려오는 길이 즐겁다. 아내는 감기 기운이 홀랑 날아가 버렸다고 좋아한다. 이런 횡재가 있나. 온통 하얀 눈 세상이다. 나무도 바위도 산도 하나같이 하얀 눈꽃을 피웠다. 마음은 어느덧 눈 속에 뒹굴뒹굴 뒹굴고 있다. 구름 속의 해발 1054m 문장대도 우리 내외를 온전하게 받아 주었다. 내려가는 길도 이렇게 안전하다. 아내는 찌든 영혼이 헹구어졌는지 발걸음까지 가벼워 보인다.
산 아래 물소리가 계곡에 가득하다. 맑고 깨끗하게 바위틈을 흘러 내리는 물이 제법 많아졌다. 나는 계수가 읊어대는 시를 들으며 세상 더러운 소리에 찌든 귀의 때를 씻었다.
오성교를 지나니 생강나무가 노란 꽃을 피웠다. 언제 눈을 보았나? 봄의 전령이 여기와 있는데... 생강나무꽃에 먼지 낀 눈까지 씻었다. 귀씻고 눈씻으니 눈 앞이 온전히 새 세상이다.
(사진은 모두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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