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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여행기 - 제 3일차

느림보 이방주 2018. 1. 24. 16:50

세계자연유산 제주도 여행기 - 제 3일차


2018118() 흐림

 

여정 : 거문오름 국립 제주박물관(삼별초와 동아시아 특별전)

   

1. 거문 오름  


거문오름

화구 중심으로부터 유출된 용암류의 침식계곡은 도내 최대 규모로서 전방으로 유선형의 골짜기를 이루며 약 4km 정도 연속되어 나타난다. 오름 동남쪽의 목장지에는 화구 없는 화산체인 용암암설류의 원뿔꼴 언덕들이 집중 분포구좌읍 송당리에 있는 거미오름을 일명 동검은오름이라고 하는데, 이는 이오름(서검은오름)과 구별하기 위한 호칭이라고 한다. 지역주민들 사이에는 분화구의 별칭으로 거물창(거멀창) 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숲으로 덮여 검게 보인다 하여 검은오름이라 부르고 있으나, 학자들의 어원적 해석으로는 `검은`은 神이란 뜻의 고조선 시대의 ` ·감·검`에 뿌리를 두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즉 `검은오름`은 `신령스런 산`이라는 뜻이다. 해송, 삼나무, 측백나무가 조림되어 있고, 울창한 숲을 이룬다.

* 해발 456m의 복합형화산체인 거문오름으로부터 흘러나온 용암류가 지형경사를 따라 북동쪽의 방향으로 해안선까지 도달하면서 20여 개의 동굴 무리를 이루고 있는데, 용암동굴계 중에서 벵뒤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그리고 당처물동굴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복합형 화산체 - 산정부에는 커다란 화구가 깊게 패어 있고, 그 안에 자그만 봉우리가 솟아올라 있으면서 북동쪽으로 크게 터진 말굽형 화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 표고 456.6m / 비고 112m / 둘레 4,551m / 면적 809,860㎡ / 저경 1,188m


오늘 미세먼지는 최악이라 한다. 기상캐스터 말에 의하면 외출은 절대 금하라 한다. 그러나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제주도는 아무래도 중앙 뉴스만큼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아도 될 듯 싶다. 여긴 물도 좋고 공기도 좋다. 샴푸를 쓰지 않아도 머리가 보들보들하다. 벌써 발바닥이 만질만질해졌다. 공기나 물만 생각한다면 여기 살고 싶을 정도이다.

오늘은 거문오름을 예약한 날이다. 거문오름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자연유산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의 한라산 1200m 고지 이상, 거문오름, 성산일출봉 중의 그 하나이다. 미리 9시로 예약했기 때문에 그 시간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거리는 15분 미만이다. 810분쯤 출발하니 830분이 안되어 도착되었다. 매표를 하고 탐방자 등록을 하고 명찰을 받았다.


안내하는 분은 자연유산 해설사 김상돈씨이다. 무뚝뚝하지만 유머를 섞어가면서 그의 해박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친절하게 해설해 준다. 특히 세계자연유산을 탐방하면서 지켜야 할 교양을 알기 쉽게 설명해 준다. 우산을 쓰지 말 것, 음식물을 먹지 말 것, 물은 생수만을 마실 것, 쓰레기를 버리지 말 것, 정해진 길만 다닐 것, 대열을 이탈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탐방코스는 정상 코스, 분화구 코스, 일주코스가 있다. 전체 일주를 다 하면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분화구코스도 2시간 30분이라고 했지만 3시간 정도는 잡아야 한다고 한다. 오후 일정도 있어서 2시간 30분 걸린다는 분화구 코스를 택하기로 했다. 안내하는 분도 분화구 코스를 돌고 전체 코스는 개별적으로 가야 한다.


거문오름 정상까지는 40분 정도 걸렸다. 가는 도중에 모두를 세워 놓고 설명하고 또 숨이 찰만 하면 모두 모여 놓고 설명하곤 했다. 올라가는 머리부터 눈에 띄는 것은 삼나무 숲이다. 이 오름은 인공 숲인 삼나무와 자연 숲이 있다고 한다. 삼나무 숲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60년대에 대통령의 지시로 삼나무를 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의 주둔지였으며 그 후에 화전민의 근거지로 황폐했는데 화전민을 소개하고 조림을 시작하여 오늘을 이루었다고 한다. 독재자라는 대통령 박정희의 공적은 검은오름에도 머물러 있다. 그의 딸이 더 원망스럽다.


정상에서부터는 걷기 아주 좋았다. 정상에서 내려오니 정상 코스는 끝났다. 정상코스만 원했던 이들은 탐방안내센터로 내려가고 우리는 다시 용암협곡을 향하여 걷기 시작했다. 아내는 여기서 탐방 안내소로 내려갔다. 우리는 약 1시간 30분 정도를 더 걸어야 한다. 나는 선두에 섰다. 협곡은 크지는 않지만 화산의 현상을 미루어 볼 수 있었다. 붓순나무 단지, 숯가마터, 풍혈, 병참도로를 지나 다시 용암협곡을 지났다. 이 분지에 일본군이 수천 명 주둔했고 수많은 일본군 갱도진지가 있다고 하니 일본인은 철저하게 독종이라는 것을 여기서도 본다. 그 독종들도 견디지 못한 것은 모두 정의의 힘인 것 같다. 역사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다. 역사는 처음에 부정한 쪽의 손을 들어주는 듯 하다가 그가 더 오만하고 악독해졌을 때쯤 그를 파멸에 이르게 한다

 

거문오름 수직동굴을 지나 오늘 탐방을 마무리한다. 거문오름은 작은 한라산이라고 할 만큼 한라산이 갖추고 있는 지질공원, 동식물 등 모든 것을 다 지니고 있는 것 같았다. 거문오름은 지질학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식물생태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와봐야 할 것으로 본다. 나는 풍혈이란 말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가고 땅 밑에서 뜨거운 불이 화산으로 폭발하여 그것이 뜨거운 쇳물처럼 흘러내린다는 말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 후지산에 갔을 때 그 분화구를 보면서 검은 잿더미 같은 것이 보여도 과연 저기서 불이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었다. 백두산 천지에서는 물이 괴어 있어서 전혀 불덩이가 나왔을 것이라는 상상은 할 수도 없었다. 거문오름은 화산 작용에 있는 용암지대에 고사리 종류나 덩굴식물 종류 아열대 나무 같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 물을 저장하고 공기를 맑게 하는 곶자활이라는 것을 배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 거문오름으로 인하여 만장굴을 비롯한 여러개의 용암동굴이 생겨났다는 말도 처음 알았다.

갈대숲을 지나 탐방 안내소 옆에 있는 거문오름 카페에서 카페라테로 몸을 덥히었다.


거문오름 안내소

안내소 앞 하르방

정상 456m

정상에서 분화구를 내려다보니

용암협곡

일본군 갱도

일본군 천막 터


화산탄


분화구내 걷는 데크


풍혈

삼나무 숲


거문오름 정상부분


3. 국립 제주박물관


국립제주박물관

제주지역의 문화재를 발굴·연구·관리·전시함으로써 제주의 고유한 전통문화를 재조명하고 국민들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주 고유문화의 보존·전승 및 유물의 수집·연구·전시와 문화관광자원 개발을 목적으로 1993년 10월에 착공되었으며, 2000년 12월 28일 건물을 준공하고, 2001년 6월 15일에 개관하였다.        

55,580㎡의 대지에 건물은 단일 건물로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건물의 지붕 모양이 제주지역의 전통 민가를 본 딴 형태를 취하고 있어 주위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만 5천여 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으며,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야외전시실로 등에는 약 1천여 점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상설전시실은 중앙 홀을 비롯하여 모두 7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홀에는 제주읍성(濟州邑城) 디오라마가 전시되고 있는데, 제주읍성은 1702년(숙종 28)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에 그려진 제주읍성의 모습과 1990년 이후 제주목(濟州牧) 관아터[官衙址]의 발굴조사를 토대로 재현한 것이다.

먼저 선사·고고실은 화산섬 제주의 탄생부터 첫 제주인의 정착과정에 대해 살펴보고, 구석기시대부터 탐라국이 탄생하기 전까지의 문화상을 볼 수가 있다. 특히 청동기시대 삼양동 유적의 복원모형을 통해 선사시대 사람의 삶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려실은 한반도의 통일왕국 고려와 탐라가 하나의 나라가 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는 제주의 문화를 보여준다. 화려한 도자문화의 유입과 융성했던 불교문화, 아시아의 거국에 당당히 맞서 싸웠던 대몽항쟁의 역사를 볼 수 있다.

탐라실은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가 완성되고 꽃을 피웠던 탐라시대를 보여준다. 탐라국의 탄생에서부터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발굴유물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탐라순력도실은 300년 전 제주의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해 둔 탐라순력도를 통해 조선시대 제주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공간이며, 정보검색 코너를 통해서는 탐라순력도의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조선시대실은 조선시대에 전개된 제주와 중앙정부와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전시하였다. 2~3년마다 파견된 제주목사와 정치의 중심이었던 제주목 관아, 유배와 표류를 통한 새로운 문화의 수용, 옛 문서와 생활도구에 나타난 일반인들의 삶에 대하여 살펴볼 수 있다.

기증유물실은 개관 이후 기증된 수천여 점의 유물을 선별하여 정기적으로 교체전시를 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와 근․현대 제주인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한편 제주의 지역적 특성이 살아있는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해마다 수차례에 걸쳐 다양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문화강좌, 전통문화체험, 전통문화공연 등의 박물관 교육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연구사업으로는 제주문화의 원류를 밝히기 위해 개관 이후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제주 삼양동 선사유적, 제주 삼화지구 선사유적, 서귀포 생수궤유적 등에서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한편 제주를 중심으로 한 해상교류의 역사를 밝히기 위해 해마다 전 세계 여러 섬들을 대상으로 하여 ‘섬 문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일본 오키나와지역, 류큐열도 및 대만의 선사․역사시대 문화상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고 관련 기획특별전도 개최하였다.

조직은 관장아래 기획운영과와 학예연구실로 구성되어 시설관리 및 방호, 소장유물 및 유물수장고 관리, 유물구입·대여·기탁·국가귀속문화재 관리·유물보존처리 등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제주도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지역적으로 매우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왔으며, 또한 지리적으로 중국과 대만 그리고 일본을 잇는 해상교통로의 요지에 위치한 관계로 오랫동안 동북아시아지역에 있어 해양을 통한 문화교류의 거점으로서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 왔다. 따라서 국립제주박물관은 개방적인 해양문화 속에서 형성된 제주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의 전개과정과 더불어 제주 전통문화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제주박물관으로 가는 도중에 한 불고기집에서 유명한 흑돼지 목살로 점심을 먹었다. 숯불에 석쇠를 올려놓고 그대로 구워내니 옛날에 숯불에 구워먹던 돼지고기 맛이 났다. 값은 비싸지만 관광지이니까 그러려니 했다.


국립제주박물관에서는 삼별초 동아시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특별기획전을 보기 전에 제주의 생성과 신석기시대부터 역사를 알 수 있었는데 제주라서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았다. 삼별초와 동아시아 특별전도 의미 있게 보았다. 고려시대 13세기 경 침입한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와 원나라에 어쩔 수 없이 화친할 수밖에 없었던 고려 조정에 대한 반발과 저항을 한 삼별초의 40여년 간의 버팀이 오늘 우리를 일깨워 주는 점이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삼별초의 항쟁

요약 : 1270년 배중손은 삼별초를 이끌고 항전을 일으켜 온을 왕으로 삼고 관부를 세웠는데 사태가 불리해지자, 근거지로 진도로 옮긴 후 기세를 크게 떨쳐 남해·창선·거제·제주 등 30여 개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했다. 1271년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펼쳐 함락시켰다. 삼별초는 김통정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제주로 옮기고 항거했으나 1273년에 진압되다. 삼별초 항거는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고려 정부와 원에 큰 타격을 주었다.

 

과정: 삼별초는 본래 최씨 무신정권의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만든 야별초에서 시작되었다. 야별초는 좌별초와 우별초로 구성되었으며, 여기에 몽골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이들로 만들어진 신의군이 더해져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최씨 정권의 이익을 위해 싸웠다. 특히 농민들과 천민들이 정부나 최씨 정권의 수탈에 반대하며 봉기할 경우 이들을 진압하는 부대였다.

 

삼별초는 경찰로서의 치안유지 및 무인집권자들의 정권유지 기반의 역할을 했다(무인정권). 또한 대몽항쟁기에 모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씨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무인집권자들의 권력쟁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었다.

 

고려 왕실은 대몽강화를 주도하면서 무인집권기에 빼앗겼던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를 해체했고, 이는 곧 삼별초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삼별초가 봉기했다. 한편 대몽강화 후 국왕 측근의 문신들이 몽골과 친선유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무인들의 집권을 방지하려 한 데서 비롯된 무인들의 반발과, 몽골의 압력에 의한 일본원정 준비로 고려가 입는 막대한 피해와 희생도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항쟁에는 몽골에 대한 고려의 종속을 막자는 의도도 있었다.

 

1270년 장군 배중손(裴仲孫)은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熺)와 함께 삼별초를 이끌고 항전을 일으켰다. 양반과 백성들을 강화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세웠다. 그러나 양반관리들과 군사들이 강화도를 빠져나와 육지로 도망함으로써 사태가 불리해지자, 선박을 모아 재물과 백성·노비 등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삼았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 정권은 그 기세를 크게 떨쳐 남해(南海창선(彰善거제(巨濟제주(濟州) 30여 개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했다. 육지에도 세력을 뻗쳐 육지의 물자를 진도로 옮겨 항전의 태세를 굳게 하고 장흥(長興합포(合浦지금의 馬山금주(金州金海동래(東萊) 등 연안 요지를 비롯하여 전라도 등지를 공격하여 그 위력을 떨쳤다. 이에 따라 조운(漕運)이 막힌 개경 정부는 경제적으로 큰 위협을 받았다. 이렇게 삼별초가 진도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자 주군(州郡)이 호응하여 진도까지 가서 알현했으며, 육지의 봉기세력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는 형편이었다.

 

한편 개경 정부는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가자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몽골군과 함께 이를 쫓게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이에 새로 김방경을 전라도토역사(全羅道討逆使)로 삼아 몽골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완강히 저항하는 삼별초의 기세를 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해는 겁을 먹고 후퇴했다. 몽골은 아해를 소환하고 흔도로 대체시키는 한편, 군대를 증강했다.

 

고려에서도 양반·백정(白丁잡색(雜色승도(僧徒)를 징발하고 다시 지방군까지 동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이리하여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12715월에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폈고, 진도는 이들에게 함락당해 승화후 온과 배중손이 여기에서 죽었다. 이에 삼별초는 다시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그 근거지를 탐라(耽羅濟州道)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항거 했다. 개경 정부는 몇 차례 회유했으나 실패하자 김방경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편성, 탐라를 공격하여 1273년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골과 강화한 뒤 민란으로 인해 민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왕실, 친몽골파 귀족들과 대립되는 친무인파와 기존의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고려 정부와 원에 큰 타격을 주었다그러나 삼별초 항쟁의 좌절은 민의 역동적인 사회변화 의식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14세기 민의 움직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삼별초는 처음에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대이면서 무신 정권의 유지을 위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입으로 무신정권이 무너질 지경이 되자 이에 항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는 무신 정권의 유지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무신 정권을 유지하는 것은 곧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처음에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다가 무신정권의 몰락으로 정부에서 친몽세력이 커지고  제주 민중의 참여로 결국은 반외세 반정부의 민중운동으로 변화된 것이다. 

삼별초가 진도까지 쫓겨갔다가 탐라로 들어가자 제주 민중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제주의 백성들은 따지고 보면 국가로부터 가장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왜구의 침입으로부터도 국가가 잘 지켜주지 못했고 조정이 백성을 위해서 해야할 일로부터 가장 멀리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위기에서는 진정으로 외세에 저항한 것이다. 제주민중의 반외세 운동은 4·3 항쟁에도 연결된 것 같다. 이런 정신은 당시 동아시아가 몽고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모두 굴복할 때 ㄱ숨을 걸고 저항한 유일한 민중운동이어서 감동을 준다.

제주 여행을 하면서 삼별초의 항몽운동이라든지 4·3 민중운동 같은 역사적 사건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제주가 옛날에는 척박하고 버림받다시피한 지역이지만 반외세 반민주  운동에 앞장선 깨어있는 고장이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시간이 많이 남았다. 아내가 바닷가를 가고 싶어 해서 함덕서우봉해변에 갔다. 바람이 많이 분다. 모래가 날리는 것 같다. 젊은 연인들이 쌍쌍이 걷는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는 젊지 않아서 그런지 한 바퀴 돌고 일찍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