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수도 도량 우암산 관음사
가까운데도 자주 못가는 관음사에 올라갔다. 어젯밤 태풍에 가까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아직도 떠나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몽니를 부리고 있다. 살아가는데 바람을 어찌 피할 수 있으랴. 부는 대로 맞으며 견뎌내는 것이 삶의 지혜이다. 관음사를 가려면 시내버스를 타고 청주대학교 앞에서 내려 대학 캠퍼스를 지나 후문으로 나가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걸어서 가기로 했다. 아파트를 나와 청주대학교 예술대학 캠퍼스를 지나 우암산 순환도로를 통하여 여유만만하게 걸으면 된다. 바람아 불어라. 한번 견디어 보리라.
카메라 가방에 물 한 병을 넣고 예술대학을 향하여 걸었다. 바람이 불어 오히려 시원하다. 그러나 볕은 따갑다. 바람막이를 벗어 가방에 넣었다. 서두를 것도 없이 천천히 걸었다. 예술대학에서 우암산 우회도로 올라가는 길이 조금 가파르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는다. 인문대학 후문에 이르면 바로 관음사 진입로와 마주친다. 인문대학은 1980년대초 초등학교에서 주경晝耕을 마치고, 해가 서산에 기웃하면 국어국문학과에 와서 야독夜讀을 했었다. 학문의 꿈이 진정 있었는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바람 많던 그날이 새삼스럽게 그립다.
일주문 대신 바위에 ‘대한불교 조계종 관음사’를 큰 글씨로 새겼다. 진입로에는 차를 타고 올라가는 신도가 많다. 도로가에 주차 시설이 없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몇 대밖에 주차할 수 없다. 그러니 절이란 걸어 다니는 곳이다. 부처님 앞에서나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욀 것이 아니라 걷는 수행을 해야 한다. 그것을 고통이라 생각하면 고행이고, 자신을 닦는 길이라 생각하면 곧 수행이다. 땀이 흘러 이마에 묻은 세파의 때를 씻어 내린다.
천불보전 앞에 도착했다. 천불보전은 웅장하다. 천불보전 앞에서 삼배를 올리니 희망이 보인다. 혹 나도 부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 말이다. 부처는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누구나 진리를 보면 바로 부처가 된다. 천불전에는 그렇게 성불한 많은 부처님을 모신 불전이다. 다불사상多佛思想에 따라 등장한 불전이다. 그러니 미몽을 헤매는 중생인 나도 가능할지 그건 모르는 일이다. 마당 가득 화려한 연등을 달아 놓았다. 절의 생동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보살 몇 분이 천불보전 안으로 들어간다. 스님은 보이지 않는다.
극락보전에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린다. 천불보전을 뒤로 하고 극락보전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계단에 포대화상이 크게 웃고 있다. 저 양반은 언제 봐도 사람 좋은 웃음이다. 그냥 동네 아저씨를 보는 것 같다. 사람들이 복을 받으려 배를 쓰다듬어서 배에서 수택이 인다. 그것도 수행이다.
극락보전에 들어가니 스님 혼자서 독경을 하고 계시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불전을 찾느라 지갑을 꺼내보니 천 원짜리도 오천 원짜리도 없다. "아, 이런" 작은 동전지갑에 분명 오천 원짜리가 있었는데 열어보니 없다. 할 수 없이 아깝지만 만 원짜리를 빼어 들고 법당에 들어갔는데 스님이 계시다. 꼭 그분이 내 치졸한 행동을 지켜본 것 같아 뜨끔했다. 아니 스님이 보지 못했더라도 일만 원짜리를 불전함에 넣으며 약간은 떨고 있었을 내 모습을 부처님이 다 보았을 것이다. 짚이는 대로 불전을 놓지 못하고 이리 저리 작은 것을 찾은 내가 잠시 부끄러웠다. 그러나 부처님은 다 이해하실 것이다. 아미타부처님은 불쌍한 중생을 정토로 인도하는 부처님 아닌가. 돈이란 돌고 돈다고 돈이다. 어쩔 수 없이 도는 것이 돈의 본질이다. 불전함에 넣지 않았다 하더라도 어차피 어딘가를 향하여 돌아갔을 것이다. 나올 때는 절대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건 언제라도 내 손을 떠날 돈이었으니까 말이다.
마애불은 자연적인 바위벽에 부조한 것이 아니라 돌을 다듬어 세운 것이다. 자연의 큰 바위벽에서 부처님을 찾아내고 믿음을 불어넣어 모신 마애불이 아니라서 섭섭하기는 했다. 그러나 불상이란 다 허상인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부처님이 참 부처이다. 불상이란 그래서 부처님이라 하지 않고 불상이라 하지 않는가? 마음속에 모신 부처님을 상으로 형상화하여 모신 것이 불상이다. 어디에서 무엇으로 만들었다하여 더 못한 불상 더 나은 불상이 될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마음에 모신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다.
관음사는 매우 오래된 절이지만 그대로 남은 것은 아니다. 후기신라 때 창건한 이름도 아름다운 계향사桂香寺의 맥을 잇고 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조선 중기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43년 인봉스님이 석등에 불을 밝혀 불법의 향기를 이어 청주시내 중생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였다. 우암산 관음사가 대한불교조계종 법주사 말사로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사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83년 이두二斗스님께서 주지로 부임하면서부터이다. 이두스님은 퇴락한 법당, 요사를 헐고 화려한 고려양식의 40평 목조 극락보전을 건립하고, 천불전, 계월사, 삼성각 등 중창불사를 거듭하여 도량의 면모를 크게 개선했다. 그래서 관음사는 수행과 포교의 중심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연세가 많으신 이두스님은 지금 관음사에 계시지 않고 요양 중이시라고 들었다. 이두 스님은 내가 내륙문학회 회장일 때까지 가끔 모임에 나오시던 문학 동인이시다. 시조를 쓰시는 시조시인이신데 나오셔도 별 말씀이 없이 빙긋빙긋 웃으시다가 속세의 음식을 몇 술 뜨고는 말없이 산으로 올라가셨다. 그런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렇게 조용하시던 시인 스님께서 관음사 부흥을 위해 큰일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후에 듣고 부처님의 원력의 크기는 가늠할 수가 없는 일이라 생각하게 되었다.
관음사는 신도가 많고 각종 신도회가 조직적으로 잘 움직인다고 들었다. 몇 해 전 찬불가 작곡 발표회도 열었는데 주지 스님이 직접 찬불가를 작사한 것도 많아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친구 내외분이 출연하는 바람에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런 모임이 잘되는 관음사가 부러웠다. 올라와서 직접 보니 조금 비좁고 갑갑한 면은 있으나 생명력 넘치는 모습에 흐뭇했다.
관음사는 우암산 제 3봉 아래에 있다. 흥덕사지가 있는 나지막한 산봉우리를 안산으로 하고 그 사이에 무심천이 청주시내를 감돌아 흐른다. 밤에는 시가지가 온통 부처님의 세계처럼 아름다운 꽃밭으로 변한다. 중생이 밝힌 전기불이 미리내가 되어 흐른다. 아름다운 산중에서 참선하며 불법을 깨우칠 수도 있겠지만, 속세의 이렇게 아름다운 불빛을 보며 깨우치는 불법도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올라간 길을 되짚어 내려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종교와 신앙과 나의 이념에 대하여 말이다. 뭔지 모르겠다. 대학 캠퍼스에 내려오니 학생들의 생기가 새롭다. 머리 긴 여대생들이 책을 끼고 걷는 모습, 반바지만 입은 남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런 자유가 부럽다. 젊음이 부럽다. 그러나 젊음을 재는 척도는 나이가 절대적인 아닐 것이다.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변하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는지, 새로운 책을 읽고 있는지, 자신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찾아 추구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도 젊음을 재는 척도가 될 것이다.
▣ 위치 : 청주시 청원구 우암동 36-69 (우암산)
▣ 역사 : 후기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계향사가 조선 중기 폐사
▣ 유물 : 철확鐵鑊, 고려시대의 향로, 발우, 찻잔, 기와, 연화문 수막새(후기신라 시대), 계향사명문 있는 기와
▣ 답사일 : 2016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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