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읍성의 배후, 상당산성
상당산성과 청주시민
청주 시민들은 상당산성을 그냥 '산성'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친근한 시민의 안식처이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사적지라기보다 심신을 다지고 친목을 돈독하게 하는 든든한 배후이다. ‘산성에 간다’는 것은 청주시민에게는 긍지이고 자부심이다. 산성에 갈 수 있을 만큼 체력을 유지해왔다는 것이고, 산성에 갈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다는 것이고, 산성에 함께 갈 수 있는 마음 통하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퇴 이후에 상당산성에 갈 수 있는 것은 아직도 든든한 꿈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청주 사람들은 ‘어제 산성에 갔다가 친구들하고 막걸리 한잔 했어.’라고 은근히 자랑한다.
나는 대개 산성에 혼자 간다. 누구랑 시간을 맞추어 만나서 올라갈 여유도 없거니와 왁자하게 성을 돌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 나는 대로 백화산 쪽으로 올라가서 상당산성 미호문弭虎門까지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하고, 때로 공남문控南門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심하게 변덕이 난 날은 한 바퀴 일주하기도 한다. 그리고 되짚어 내려온다. 서너 시간 걸리므로 하루 운동량은 충분하다. 그게 전부이다. 그런 날은 상당산성이 내게도 그냥 ‘산성’이고, 나는 긍지를 지닌 청주 사람이다. 참 많이 다녔다.
오늘은 답사란 이름으로 상당산성에 간다. 공남문 앞 주차장에서 8시 40분에 출발한다. 둘레 4.2 km를 일주하는데 1시간 30분이면 충분하지만 답사니까 2시간 30분을 예정한다.
어떤 사람은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대에 쌓은 것이라 한다. 또 어떤 이는 고구려가 청주를 점령하여 쌓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백제가 쌓았다 하고, 신라가 손을 댔다고도 한다. 승장 영휴英休가 쓴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는 궁예는 상당산성을 쌓고 견훤은 정북동토성을 쌓아 맞서 싸웠다고 한다. 견훤과 궁예가 각각 정북동토성과 상당산성에서 대치했을 수는 있어도 산성을 쌓았다고 하기에는 그들의 청주에서 머문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나 다 맞는 말이라고 하자. 그 만큼 상당산성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주는 삼국 힘겨루기의 각축장이다. 청주는 삼국 세력에 따라 주인이 바뀌었다. 그래서 상당산성이 필요했을 것이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시대 '상당현上黨縣'으로 불렸던 것으로부터 연유된다. 조선 영조 40년 (1764년) 충청병사 이태상이 그려 올린 상당산성도를 토대로 상당산 정상부에 상당산성 치소가 있고 최근에 이를 발굴 조사하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 치소가 있었다고 상당현 치소가 상당산성에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다. 치소가 있었기에 정상부를 상당산이라 했을 것이다. 백제가 최초로 상당현이란 말을 사용했다면 이곳에 처음 성을 지은 것은 백제이다. 조선 숙종 때 기록에 '상당의 성터에 석축으로 고쳐 쌓았다'란 말이 있는 것으로 봐서 조선 숙종 때 고쳐 쌓은 것이지 처음 쌓은 것은 아니다. 공남문 근처에 보면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를 보면 토축산성의 귀재인 백제가 토축한 것을 조선 숙종 때 석축한 것으로 결론은 났다. 어떤 사람은 토축 당시의 판축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해서 토성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은 신을 보지 못했다 해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과 비슷한 논리의 오류이다. 신라는 잠시 차지했을 때 수리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고구려 군사가 낭비성까지 내려왔는데 신라의 김용춘 장군이 김유신과 함께 5천명을 목 베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구려가 쌓았다고 하는 것도 억측이다. 그 일은 부연리 낭비성인지 상당산성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상당산성을 중심으로 한 낭비성, 노고성, 구라성인 것을 그냥 낭비성이라 표현했을 것이라고 본다.
상당산성은 유사시에 관아는 물론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보민保民 산성이다. 청주읍성이 있으나 청주읍성이 위험할 때 우암산 토성으로 피했다가 상당산성으로 피할 수 있는 보민용 산성이다. 그래서 나는 청주읍성에서 당산토성, 와우산토성, 상당산성으로 이어지는 산성의 고리를 청주 나성羅城이라 하고 싶다. 아니 청주나성이다.
1728년 조선 경종의 뒤를 이어 연잉군이었던 영조가 즉위하였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정권이 축출되고 영조를 지지한 노론 정권이 세력을 잡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인좌는 반란군 대원수가 되어 1728년 충청병사 이봉상을 죽이고 청주성을 함락시켰다. 이인좌는 청주성의 배후산성인 상당산성까지 손에 넣었다. 반란군은 황간·회인·청안·목천·진천을 차지하고 창고를 열어 백성에게 관곡을 나누어주고 죄인들을 석방하고 하층민을 규합하여 세력을 확장하려 했다. 반란군은 영남 호남에서 패하였으나 도성을 향하여 진천, 안성, 죽산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3월 24일 안성·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어 이인좌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그래서 결국 청주읍성과 여기 상당산성이 한 때 반란군의 휘하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인사정책을 새롭게 바꾸고 제도를 개선했다고 하니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목적이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진정 나라를 위한 것이었다면 지옥에 가서도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공남문으로 올라가는 오른쪽에 비석이 하나 있는데 '戊申倡義事蹟碑'이다.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킨 1728년이 무신년이기에 무신년 반란에 청주 지방 유생 14명이 목숨을 걸고 청주읍성과 상당산성을 지킨 미덕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생들이 세운 기념비이다.
공남문에서
상당산성 공남문은 산성 공부하기 좋은 산성 교실이다. 여기서 상당산성이 우리나라 보민 산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추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우선 성문은 홍예문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은 무지개 모양을 성문을 의미한다. 견고한 대리석으로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아름다운 석문을 지어 냈을까 감탄한다. 문에 들어가기 전에 오른쪽에 치성雉城이 있다. 치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치성은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시켜 각이 지게 쌓아서 외부에서는 공격이 어렵고 내부에서는 방어를 쉽게 하려는 지혜로운 축성법이다. 치성은 왼쪽으로 성위 길을 걸으면서 올라가면 바로 또 있고 서남암문에도 있다.
성문을 들어가면서 천장을 보면 두꺼운 널빤지로 되어 있다. 적에 의해 성문이 열렸을 최후의 순간에 누각 위에서 널빤지를 하나씩 걷어내면서 문을 밀고 들어오는 적에게 뜨거운 물세례를 할 수도 있고 기름을 끓여 부을 수도 있다. 갖가지 공경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성문의 양쪽을 보면 커다란 구멍이 있는데 이곳은 장대로 가로 막는 시설이다. 설사 성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더라도 적은 안심할 수 없다. 문안에 옹성이 있어서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방어군으로부터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옹성은 대개 밖에 있을 때 매우 효과적이지만 상당산성 공남문은 밖의 지형적인 특징으로 옹성이 크게 필요하지 않으니 내옹성을 마련했을 것이다.
성문의 양쪽 벽에 흐릿하게 축성 책임자의 이름과 소속을 새겨 넣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부분의 읍성에 이런 표식이 남아 있다. 공남문 누각에 올라서 동쪽으로 나가보면 성첩이 있다. 이른바 성가퀴라고 한다. 조선 순조 때 훼손된 것을 1970년대 공남문을 복원하면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본래의 모습을 살려 복원한 흔적이 보인다. 성첩에서 포를 쏠 수 있는 구멍을 보면 몇 개는 평평하게 또 몇 개는 아래로 비스듬하다. 슬기롭지 않은가.
공남문에서 연못으로 내려가는 길도 석축했다. 이곳에서 성안 마을이 다 보이고 동장대(보화루)가 슬쩍 보인다. 가만히 내려다보면 마을 안에 있는 연못을 다만 성내의 용수를 위한 것이라고만 말할 수 없다. 조금만 더 생각하면 연못도 성벽의 일부이다. 성 밖에 운하를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해자垓字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인도 암베르성은 둘레가 14km나 되는 대규모 테메식 산성이다. 이 성에도 상당산성의 연못과 같은 인공저수지가 있다. 상당산성을 보고 가서 공사를 한 것처럼 테메식 산성의 골짜기 터진 부분에 인공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암베르성에는 약 7000명의 군사와 민가가 있었다는데 인공저수시설은 이들의 용수를 충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인도의 성들의 특색은 서구에서 볼 수 있는 영주의 거주를 위한 성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의 보민 산성의 장점을 보완 결구한 형식이었다. 상당산성이 바로 그렇다. 연못은 석성의 일부로서 용수도 충족시키는 일석이조의 기능을 한다. 상당산성에는 이 외에도 연못이 또 하나가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물의 용도를 달리했을 것이다.
문루에서 내려와 다시 성문 밖으로 나가면 아주 작고 아담한 비가 하나 서 있다. 구룡사 사적비이다. 성 안에 있다가 폐사된 사찰 구룡사의 사적을 적은 비이지만 마모되어 읽기는 어렵다. 구룡사는 1720년 충청병마절도사 이태망과 상당산성을 책임진 병마우후 홍서일이 성 안의 군영을 건축하면서 창건했다고 한다. 구룡사는 전각의 총 규모가 66간이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극락보전이 있었다는 것은 성안이나 부근에 있는 우리나라 사찰의 공통점이다. 구룡사 이외에도 규모가 비슷한 남악사와 좀 작은 당대사가 있었다니 성의 규모와 당시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하긴 3500명의 군사와 승군이 이곳에 주둔하면서 성을 보존하고 청주를 수호했다고 하니 청주읍성의 배후 산성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한 것이다.
서남암문에서
공남문에서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면서 성을 돌아본다. 상당산성은 외축내탁법으로 축성했다. 돌로 외벽을 쌓고 안에서 흙과 자갈을 다져 넣는 방법이다. 대부분 읍성은 이런 형식으로 쌓게 되어 있다. 이유는 외벽은 적의 공격을 어렵게 하고 내벽은 특별히 오르내림 시설이 없이 아무 곳으로나 군사와 백성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비스듬하게 쌓는 것이다. 읍성이 고스란히 남은 해미읍성이 그렇고, 일부만 남아있는 홍주읍성이 그렇다. 서천 한산읍성은 좀 달라서 남은 일부구간은 내외협축석성이었다. 상당산성은 안쪽이 비스듬한 흙으로 되어 있다.
조금 올라가면 성첩의 모습이 확실하게 남은 성벽을 발견할 수 있다. 본래의 성벽에서 약 세로1.8m, 가로 2.5m 정도 장방형으로 밖으로 튀어 나갔다. 치성이다. 이곳에 성첩이 있고 포문이 있다. 치성 성가퀴에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높다. 그런데 그 아래 분명 토성으로 보이는 언덕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 토성이다. 저 흙을 파헤쳐 보면 그 속에서 갖가지 유물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백제시대에 최초에 쌓았다는 토성일 것이다. 조선 숙종 때 개축하면서 토성을 허물어 내고 그 자리에 석성을 쌓은 것이 아니라 토성 위에 석축했을 것이다. 산성 전체를 돌아가면서 보면 대부분 그렇다.
여기서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올라서면 서남암문이다. 암문 바로 옆에 치성이 또 한 군데 있다. 암문이라기에는 꽤 크다. 기어서 드나들어야 할 정도는 아니다. 높이 172cm 너비 166cm라고 한다. 몰래 드나드는 문이다. 암문의 구조는 그냥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내벽에 구멍이 있어 가로대를 끼울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암문 근처에 흙이나 다른 장해물을 장치할 수 있도록 조치를 했을 것이다. 안내판에 보면 여기서 것대산 봉수대까지 1.7km 라고 하니 옛날 장정걸음으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의 연락사항을 것대산 봉수대를 통하여 진천 봉화산으로 연락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청주시내 전망을 보면서 성벽 위를 걷는 맛으로 시민들이 산성에 오를 것이다. 이곳에서 땀을 식히는 분들도 많이 있다. 여기서 것대산 쪽으로 가면 낙가산을 거쳐 보살사로 하산할 수도 있고, 계속 산줄기를 타면 용암동 성당으로 내려 갈 수도 있다. 여기부터는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성길을 편안하게 걷는다. 우암산이 바로 아래고 우암산 동남쪽 기슭에 국립청주박물관이 보인다. 청주시의 남부지역과 북부지역 멀리 내수읍, 오창읍, 오송읍, 옥산까지 훤하게 터졌다. 우암산에서 산성으로 꿈틀거리며 오르는 산줄기가 마치 성벽처럼 보인다.
미호문으로 향한다. 미호문으로 가는 중에 수구를 몇 군데 발견했다. 여기서 바라보는 상당산성 서벽은 예술품처럼 아름답다. 본래 산의 형세에서 흙 한 삽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살려 축성했다. 용이 천천히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아름답다. 그런 성벽 위에 공남문보다 작지만 아름다운 미호문이 있다. 이쯤에서 성벽 바로 아래에서 칡잎을 뜯어 먹고 있는 고라니 한 마리를 발견했다. 상당산성은 시민의 휴식처만이 아니라 자연이 와서 노는 곳이다.
미호문에서
미호문은 서문이다. 서문이란 말은 안 쓰는 것이 좋다. 본래 이름이 미호문이므로 그렇게 불러야 한다. '미호문弭虎門'은 상당산 정상에서 보면 우백호에 해당되는 곳인데 산세가 호랑이가 뛰려고 움츠린 모습이기에 호랑이가 달아나면 상당산성의 기운이 쇠하여지므로 호랑이 목에 해당되는 부분에 문을 세워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상당산성을 운동이나 등산을 목적으로 오를 때 주로 통과하는 문이다. 백화산을 거쳐 이곳에 오면 1시간 40분 정도 걸린다.
미호문은 공남문보다 작지만 매우 아름답다. 문은 공남문과 달리 평문이다. 문의 천정도 화강암으로 마감해서 공격이 용이한 것은 아니다. 미호문에도 치성이 있다. 서남암문 근처에 있는 치성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분명한 치성이다. 그런데 왜 상당산성 치성이 3곳이라 했는지 모르겠다. 미호문 문루에서 가만히 서서 북으로 가는 성벽을 바라보면 언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성벽이 안쪽으로 옮겨진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문루에서 밖을 향하여 오른쪽으로 보면 문지가 있다. 미호문도 안쪽으로 옮긴 것이다. 본래의 미호문은 백화산 쪽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주성동 마을 쪽으로 내려가는 계곡에 길이 있었던 것 같다. 문과 성을 옮겨 쌓은 것이 뚜렷하게 보인다. 미호문에도 축성의 책임자를 돌에 새겨 넣었다.
미호문에서 북쪽으로 걸어가면 본래 이곳에 있던 커다란 바위를 성벽처럼 이용한 부분이 있다. 거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15개의 포루砲樓 중의 하나인 포루지가 나온다. 포루지를 보면 이 성은 서쪽에서 오는 적을 막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 같다. 수구지를 몇 개 더 지나면 성벽은 갑자기 꺾이어 남쪽을 향하게 된다. 여기는 내리막이다. 그렇다고 성벽이 희지부지 되지는 않았다.
진동문에서 보화루까지
진동문 가까이에 동암문이 있다. 생각 없이 걸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암문이라 숨어 있다. 서남암문이 것대산 봉수대로 간다면, 동암문은 구라산성으로 통할 것 같다. 동암문으로 살그머니 빠져나가 한남금북정맥 등마루를 밟으면 이티재를 만나고 30분만 올라가면 구라산성이다. 동암문은 서남암문과 달리 안에서 보면 내옹성처럼 진입로가 직각으로 구부러졌다. 그러나 밖에서 보면 치성도 없다.
동암문을 지나 진동문으로 내려가는 길에 뚜렷한 토축 내벽을 발견할 수 있다. 외벽은 돌로 튼튼하게 쌓고 내벽은 흙으로 비스듬하게 쌓았는데 분명 성벽이다. 여기에 소나무가 멋지게 자라고 있다. 이쯤에서 최근에 복원한 진동문의 위용이 보인다. 전에는 암문처럼 문루가 없었는데 주변 정리를 하고 석축을 다듬어 쌓고 누각을 세웠다. 단청이 아름답다. 사실 이렇게 복원한들 본래의 것이 아니므로 큰 가치는 없는 것이다. 본래의 문화재를 잘 보존해야 한다.
보화루는 동장대이다. 말하자면 지휘소이다. 서쪽에서 적이 온다는 것을 가정하면 동장대는 매우 안전한 곳이다. 장수가 적진을 바로 보고 작전을 세우고 명령을 내릴 만한 위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서쪽 날망에 서장대지가 있다. 평화시에는 먹고 마시기 좋은 위치이다. 전시에도 장수들이 모여 작전회의를 하기도 편리한 위치이다.
동장대에서 되돌아보면 상당산성은 참으로 기묘하다. 포곡식 산성이라고 하지만 뚜렷하게 정상이라고 할 만큼 높지 않은 상당산과 함께 산줄기 자체가 크게 원을 그려 하나의 포곡식 산성이다. 산의 형국이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것처럼 골짜기를 감싸 안은 테메식 산성처럼 보인다. 한국전쟁 때 알려진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펀치볼Punch Bowl과 비슷하다. 산당산성은 작은 펀치볼이다.
동장대에서 내려와 발굴조사를 하는 연못 아래에 가 보았다. 성석을 찾아 정연하게 쌓아 놓았다. 다듬은 돌도 있고 자연석 그대로도 있다. 궁금한 것은 연못의 둑에 해당되는 부분에 성벽이 있었을까, 그냥 댐처럼 둑만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지금 형태로 보면 그냥 둑만 있었는데 둑을 성벽처럼 쌓았을 것이라 추정한다.
마을 안에는 시민들이 참 많이 와 있다. 가족 동반으로 산책 나왔거나 친목 모임으로 온 사람들이다. 연못을 한 바퀴 돌면서 마을 안을 본다. 여기에 민가도 있고 관아도 있고 남쪽 기슭에 사찰 3곳이 있었다고 한다. 관아는 청주병마우후가 거처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대적으로 토속음식점을 지으면서 관아를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사찰도 복원하면 안 될까? 백제의 산성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1500년 고성古城이 있으면 1500년 고찰古刹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극락보전이 있어 성에서 명을 달리한 사람들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있었다. 보민의 성에 사찰이 있으면 피신한 백성의 정신적인 안정을 줄 것이다. 유럽의 성 몇 군데를 보니 성안에 성당이 있었다. 인도의 암베르성에도 몇 개의 힌두사원이 있었다. 신을 우러르고 발원하는 마음은 동서가 다르지 않다.
상당산성의 특징은 우선 보민 산성의 원형이면서 청주읍성, 당산토성, 우암산 토성과 연결되어 하나의 나성구조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청주읍성의 충실한 배후 산성이다. 둘째는 산성의 양식을 제대로 갖춘 훌륭한 건축예술이다. 안으로 관아와 사찰, 연못 등이 있고 성에도 치성, 내옹성, 문지, 암문, 수구, 포루를 모두 갖추고 정상에 치소까지 있다. 또 평화시에는 군사들의 훈련을 할 수 있는 충분한 터전이 되고 승병들이 수도와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사찰이 3개나 있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적으로부터 백성의 생명을 보호하는 보민이었다면 현대는 시민의 몸과 마음을 지켜 치유하는 참살이의 쉼터이다. 다만 찾아오는 이들이 역사와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면 한결 선진적인 참살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시 공남문으로 나왔다. 잔디밭에 매월당 김시습의 시비가 있다. ‘유산성遊山城’이라 한 것을 보면 자연을 아는 매월당이니 그냥 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깨닫고 느낀 것이 많은가 보다.
정오가 가깝다. 3시간도 더 걸렸다. 배는 고팠지만 그냥 구라산성으로 향했다.
상당산성
▣ 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 시대 : 삼국시대 백제가 짓고 신라가 개축, 조선 숙종 때 1716년(숙종 42) 대대적인 개축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212호
▣ 규모 : 둘레 4.2km, 높이 3~4m, 내부 면적 704,609㎡ (2십만 평 정도)
▣ 시설 : 공남문, 미호문, 진동문, 치성 3개, 암문 2개, 장대 2개, 포루터 15개 곳, 연못 2개소, 공남문 주변에 3개의 치성과 4포루
▣ 형식 : 포곡식 석축 산성,
▣ 답사일 : 2017년 7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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