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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청주 문화의 원형질 와우산토성

느림보 이방주 2017. 6. 28. 00:11

청주 문화의 원형질 와우산토성

 

 

 

오전 근무를 마치고 미루어 왔던 우암산성(와우산토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무심천이 청주의 상징이라면 우암산은 청주의 진산이다. 청주 시민들은 우암산 품에 안기어 살고 무심천을 마음에 품고 산다. 교가에 우암산 무심천이 언급되지 않은 청주시내의 학교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우암산 등산로 중에서 일부분이 와우산토성이라는 사실은 잊고 지낸다.

우암산 토성은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청주지방의 학계에서는 이미 1980년대부터 연구가 시작되어 성의 존재에 대하여 개괄적 파악은 하고 있다. 그런데 부모산성처럼 지표 조사를 통하여 성곽의 축성 시기나 용도 당시의 유물이 확실하게 밝혀내지는 못한 것 같다. 다만 기록에 의해서 성의 존재를 확인하고, 간단한 지표조사 결과 축성 방법 성곽의 외양을 추정하였으며, 와편들을 토대로 축성시기를 추정하는 정도인 것 같다.

와우산토성은 우암산(해발 338m) 정상에서 서남쪽과 동남쪽으로 뻗은 능선 사이에 길게 형성된 골짜기를 둘러싼 포곡식 산성이다. 다시 말하면 우암산 정상에서 성공회 쪽으로 벋은 서쪽 능선과 용담동쪽으로 서남향하여 뻗어 내리다가 당이산으로 가는 동쪽 능선을 타고 쌓은 토성이다. 성 줄기는 당산에 남아 있는 테메식 산성과 연결된다. 산성 전체는 도심을 향하여 골짜기로 내려서는 나성구조羅城構造의 외축내탁外築內托으로 축성했다. 내성의 전체 둘레는 약 2,997m이고, 외성까지 합하면 약 4가 된다고 한다. 동쪽 성벽에 있는 토성 동문지와 서쪽 성벽에 있는 토성 서문지에서 성의 내부인 골짜기 아래 토성 수문지를 향하여 성벽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단순한 포곡식 산성은 아니다. 테메식 산성인 당산성에 연결된 것까지 고려하면 포곡식 산성과 테메식 산성의 혼합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문지는 북문지·서문지·동문지가 확인되며, 골짜기 한 가운데 수구 쪽에 정문인 남문지가 보이며, 서벽과 북벽에 3~4개소의 문이 있었던 자리가 발견된다. 성안 골짜기는 비교적 넓은 편이고 샘이 있어 물도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羅城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성곽제도城郭制度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빠르게 산성으로 민간을 대피시켜 적으로부터 백성을 방어할 수 있는 시설이다. 우리나라 나성의 대표적인 형태는 사비도성을 들 수 있고 현재도 남아 있어 발굴조사 중이다. 와우산토성은 청주의 평지인 청주읍성과 연결되는 나성구조를 이루고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와우산토성의 배후 산성으로 상당산성이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성공회 수동 성당에 들어가 너른 주차장에 주차했다. 사실은 정문에 외부차량 주차 금지라는 표지가 보였다. 주차장이 텅 비어 있기도 했거니와 청주 와우산토성 답사를 핑계 삼아 별로 미안한 마음은 없었다. 성공회 정문에서 마주보이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조용하고 정원이 깨끗한 집들이 있고 주택들에 의해 작은 골목이 형성되어 있었다. 별장처럼 아름다운 집도 있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꽃을 좋아하는지 집집마다 마당에 맨드라미, 분꽃, 봉숭아 같은 꽃을 심어 가꾸어 야릇한 향수를 느끼게 하였다.

전에 이 길을 이용하여 가끔 우암산에 올랐지만 미처 성곽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우리는 성곽 위에 난 등산로에 바로 올라섰다. 길을 걸으면서 좌우를 살펴보니 토성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수목이 우거져 있지만 좌우가 언덕처럼 경사가 급하고, 길 가운데 돌이 많이 눈에 띤다. 그리고 돌 사이에서 가끔 기와 조각도 보인다. 등산로의 너비는 약 2m~2.5m 정도 되지만 풀이 우거진 부분까지 하면 더 넓다고 할 수도 있다. 등산로가 바로 평탄한 성곽 길이다. 성곽 길을 걸으며 보이는 양면은 사람의 힘으로 쌓은 흔적이 뚜렷하다.

평탄하던 등산로는 급경사를 만난다. 급경사 길을 오르면 대한불교수도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이곳에 평평하고 넓은 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기와조각이 다른 곳보다 더 많이 널려 있다. 여기가 서문지라고 한다. 기와조각들은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여기에 있던 건물들이 고려시대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9(689)에 쌓은 서원경성이 이 성일 가능성이 있고 또한 고려태조 2(919)에 태조 왕건이 청주에 행차하여 성을 쌓았고 같은 왕 13(930)에 다시 행차하여 나성을 쌓았다고 한다. 이 두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신라 때 쌓은 성을 고려 태조가 개축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발견되는 흔적들은 고려시대 축조되었다는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일 것이다.

건물지를 지나면 다시 경사로가 나온다. 경사로에도 크고 작은 기와조각이 쌓이다시피 했다. 기와조각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다. 민무늬 와편 속에 줄무늬 조각이 눈에 띠는데 이것은 기와 조각이 아니라 토기의 조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성곽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같은 시대의 건축되었을 테니 같은 민무늬이고 그와 다른 토기는 또 그 시대의 것이므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함께 간 친구 이효정 선생은 기와 조각이 워낙 많이 발견되니까 아마도 토성 위에 담을 쌓고 담을 기와로 이은 공법이 사용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역시 정말 그럴 듯한 추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고고학자가 아니므로 확증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중에 발굴 조사에 의해 밝혀졌는데 우리의 생각이 거의 맞았다.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한 보고에 의하면 축성할 때 기초부분에 대석재를 이용하고 성벽 바깥쪽에 정연한 석축으로 1.35m를 쌓은 다음 안쪽으로 60cm정도 조잡한 석재를 채우고 다시 흙을 채우고 다지는 전형적인 외축내탁外築內托 방법으로 쌓은 것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또 토성 위에 다시 돌로 쌓은 여장 형태가 발굴됐는데, 이러한 형태는 전국적으로 그 유례가 없다고 한다. 그만큼 성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성곽 길을 따라서 송신소 쪽으로 계속 올라갈수록 와편은 더 많고 경사로는 바깥쪽으로 성곽의 모습이 뚜렷하다. 송신탑에서 또 한 번의 나무 계단 길을 올라가면 너른 대지가 보이고 청주대학교 후문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된다. 여기가 북문지라고 한다. 북문지에서는 성 안으로 통하는 찻길이 나있고 이곳을 통해서 차량이 송신탑으로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도 여기까지 차량으로 이동해서 우암산 정상을 가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이곳이 바로 천흥사 터라고 하는데 여기 샘이 있으나 폐쇄되어 물은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는 한 구비만 올라서면 우암산성 길은 문득 끊어지고 정상으로 착각할 정도로 높은 곳이다. 여기서 성은 갑자기 동쪽으로 틀어 용담동 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를 따라 당산토성으로 향한다. 정상 부근에 또 하나의 송신소가 있고 이곳에 홍천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용담동쪽으로 방향을 돌려 조금만 걸으면 우암산 정상 표지석이 나온다. 해발 339m이다.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산바람을 쐬고 있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물을 마신 다음 다시 용담동 쪽으로 하산로를 걷기 시작했다.

용담동 쪽으로 내려가는 성곽 길은 청주시에서 관심을 가지고 관리를 하고 있는 흔적이 여기 저기 보였다. 목책을 세우고 줄을 쳐서 통행을 막고 군데군데 성곽 보호에 대한 문구가 보인다. 그런데 왜 수동 쪽에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는지 알 수가 없다. 생각 없이 지날 때는 몰랐으나 이곳이 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걸으니 토성의 윤곽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성 안쪽으로는 성벽이 완만하고 성 바깥쪽으로 성벽이 더 높고 거의 수직에 가깝다. 거기에 나무와 풀이 무성하다.

우거진 숲길을 걸어 내려가니 지금도 흔적이 뚜렷한 넓은 동문지가 나타났다. 여기서 토성의 한 줄기는 성내로 나뉘어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우리는 당산 방향으로 계속 걸어 내려왔다. 이 지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숲으로 둘러싸인 청주향교가 지붕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성곽은 끝나지 않았는데 마을이 나타났다. 청주향교로 내려가는 골목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길게 능선이 형성되어 있는데 민가와 채소밭이 있다. 그래서 용담동과 경계를 이루는데 이 능선에 성곽의 흔적이 희미해졌다. 지도에는 여기서 계속 당산토성으로 이어진다고 되어 있지만 흔적은 뚜렷하지 않다.

와우산토성이 용도에 대해서는 추측하는 이론이 많다. 대부분은 당시 청주 지방의 주요 관아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는 지방 권력자의 주거지가 아닐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여지도서청주목 산천조輿地圖書淸州牧山川條에 보면 청주읍의 보좌처로서 시내에 있는 청주읍성과 청주산성이 연결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얘기하는 청주산성은 바로 와우산토성을 의미할 것이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 성은 다시 상당산성으로 이어진다.

와우산토성은 옛 사찰이 모여 있었던 흔적이 있기도 하다. 사찰의 유적지가 많은 것을 토대로 추정하면 사찰촌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고려시대 사찰 지대로 운천동 흥덕사지라든지 산남동 원흥사 주변을 드는데 이곳도 그런 곳으로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암사, 목우사지, 대성사지, 천흥사지, 흥천사지가 남아 있어 지금도 그윽한 목탁소리가 그치지 않는 듯하고, 흥천사 동종의 맥놀이 여음이 귓전에 맴도는 듯하다. 관음사를 비롯하여 보현사와 대한불교수도원도 이곳에 있다.

우암산은 소백산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으로 한남금북정맥의 한 봉우리인 상당산에서 남서쪽으로 갈려 나온 산이다. 그런데 지금은 상당산과 우암산 사이 바람매기고개가 매우 낮아서 독립된 산으로 생각된다. 이 고개를 넘어가는 청주 동부우회도로에 인조 터널을 만들어 상당산과 우암산의 맥을 형식적으로나마 잇고 있다. 이렇게 우암산의 혈맥을 이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그만큼 청주시민이 우암산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청주시민들은 우암산을 대모산大母山, 모암산母岩山이라 부르기도 하여 시민의 큰 어머니로 생각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우암산에 송신탑이 세워져 산의 혈기를 훼손하였다. 또 최근에 수동 상좌골에서 용담동 가좌골로 통하는 도로가 개통되었다. 이 도로의 개통으로 와우산토성에서 당산토성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교동터널이 뚫려 훼손 위기에 있다. 시민들의 반대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긴 했으나 이 터널을 지날 때마다 가슴 졸여야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소재지 : 청주시 상당구 우암동 우암산(해발 339m)

형식 : 포곡식 토성

시기 : 삼국시대

규모 : 길이 2,400m, 2,700m 혹은 2,997m

답사일 : 2009630(친구 이효정 선생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