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장곡산성 학성산성 태봉산성 답사
-내포문화 숲길 제11 코스 백제 부흥군길 -
▣ 답사일 : 2017년 2월 15일 (수요일)
▣ 날씨 : 대체로 맑고 포근했음
▣ 함께 간 사람 : 이효정 선생님
▣ 답사 코스 : 대현1리 마을회관 → 장곡산성 → 예당 큰집 → 학산산성 → 태봉산성 → 천태저수지 → 소구니고개 →노전리 마을회관 → 광시면 소재지 거리 14 km
오늘은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성 답사의 마지막 일정으로 장곡산성과 학산산성을 답사하기로 했다. 내포문화숲길 제 11코스로 홍성군에서 개척해 놓은 둘레길인데 임존성이 있는 12코스와 함께 이곳을 특히 백제부흥군길이라고 명명하였다. 홍성에서는 장곡산성을 '주류성'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학계에서 고증된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장곡산성이라고 하였다. 인근에 있는 학성산성도 두루미성이라 하여 주류성이라고 하지만 이도 역시 그냥 학성산성이라 하겠다. 이 성을 답사하는데 지도를 찾고 앞에 서서 나를 인도해주면서 성에 관하여 좋은 의견을 제시해 주고 함께 사진도 촬영해 준 이효정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전과 마찬가지로 사천동 성당에서 7시에 만나 병천 천안 아산 홍성으로 향했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임존성 갈 때처럼 청주 세종 공주 대흥 광시로 향하면 훨씬 가까운데 다른 길로 가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홍성의 산성지도
1. 홍성장곡산성(洪城長谷山城)
▣ 소재지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해발 255.5m
▣ 시대 : 백제시대
▣ 문화재 지정 :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360호 (1998년 7월 25일)
▣ 규모 : 약 1352m 58.025㎡
▣ 개요 :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해발 255.5m의 산에 쌓은 성으로, 성 둘레는 약 1,352m이다.
산성리 주변은 지세가 험하고 계곡이 좁아, 군사상 요충지로 적합한 지형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옛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 되는 예산 대흥임존성(사적 제90호)과는 12.6㎞, 당진 혜성과는 37㎞, 청양 정산의 두륭융성과는 23㎞, 공주와는 34.5㎞, 부여와는 27㎞의 거리를 두고 있는 곳이다. 장곡산성 주위에는 학성산성, 태봉산성, 소구니산성이 띠를 이루듯 이어져 있어, 지리적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산성은 동굴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산성 안에서 건물터의 주춧돌·기와 조각·토기류가 발견되었다.
이 지역 주변에서도 ‘사시’·‘사시량’·‘사라’라 새긴 기와 조각과 문초석, 돌덧널무덤(석곽묘)에서 발견된 청동제 방울, 백제 토기류 등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장곡산성은 백제 사시량현의 정치, 행정적 중심역할을 하던 곳으로 추정되며, 지형적 조건으로 보아 백제 부흥군의 거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현리 마을회관 앞에 주차하고 준비를 하는데 기온이 싸늘하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그래도 속에 입은 옷을 한 겹 벗고 출발했다. 아곳 저곳 살피며 들머리를 찾았다. 이정표는 아주 작고 예쁘게 세워 놓았다. 길을 찾았으니 올라가면 된다. 바로 앞산처럼 보이는 낮은 산 정상에 있으니 오르막길이 가팔라도 참을만 했다. 시멘트 포장길이 다리를 팍팍하게 했다. 성문지에 이르니 땀이 난다.
문지에서 양쪽을 바라보니 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나무를 베어 성벽 위로 길을 냈다. 길은 산책길처럼 편안하게 걸을 수 있을 정도였다. 길 위에 솔잎과 활엽수의 낙엽이 떨어져 포근하기까지 했다. 남쪽 성벽위를 걸었다. 성벽은 돌로 쌓았는데 매우 가파를 산에 돌로 외벽을 쌓고 내벽은 흙으로 채웠다. 외벽 산비탈에는 나무가 빼곡해서 밖이 보이지 않았으나 서쪽으로 바다를 통하여 오는 길머리가 다 보일 듯 했다. 성벽 위에는 잡초를 베어 냈지만 낙엽이 쌓이고 잡초가 우거져 성돌은 잘 보이지 않는다. 천오백년 역사가 낙엽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이다. 잡초더미에 묻힌 돌은 정교하게 다듬지는 않았지만 다듬어 쓴 흔적이 보인다.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도로 내려왔다. 북쪽 사면은 가지 않고 성안으로 들어 갔다.
골짜기는 넓지 않다. 임존성이 너른 골짜기를 둘러 싼 테메식 산성이라면 이곳은 좁을 골짜기를 싸 안은 포곡식 산성으로 보였다. 좁은 골짜기에는 건물지도 있고 풀더미에 묻힌 저수지도 보였다. 저수지 부근에 우물이 있었을 듯한 웅덩이가 있다. 우물지 주변에 사람이 살았던 집터가 보였는데 아마도 최근까지 사람이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것 같았다. 석축을 쌓은 모습이라든지 건물터에 보이는 감나무, 뽕나무, 앵두나무, 두릅나무 같은 나무들이 인가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직도 펀펀한 건물지는 아마도 산성이 있던 당시에 큰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판에서도 밝힌 것과 같이 산성의 둘레가 1352m 정도인 것으로 보아 골짜기는 그리 넓지도 않고 상주하는 사람이든, 주두한 군사가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포곡식 산성은 서쪽인 장곡면으로 성벽이 있고 동쪽인 광시면 쪽으로 골짜기가 틔어 있어 서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는 용도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당이나 고구려가 바다로부터 침입할 경우 방어하기 위한 용도였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신라를 방어하는 성은 아닐 것 같다. 임존성의 경우는 테메식 산성이기에 사방에서 오는 적을 방어하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그래도 서족으로 비스듬히 성 내부를 보여주는 형식이라 동쪽에서 오는 군사를 방어하는데 편리하게 되었다.
성의 내부에서 이곳 저곳을 살피고 다시 안내 이정표를 따라 남쪽 성벽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정상 쪽으로 올라가 보았는데 성벽의 생김새는서벽과 다름이 없다. 거의 같은 방식으로 쌓은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약간 다른 모습은 성의 내벽과 외벽의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비록 무너진 성벽이라 쌓기의 방법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성의 모양을 어느정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상에서 장곡면 쪽을 바라보니 훤하게 다 보였다. 다시 내려오면서 북쪽 성 줄기를 다 살피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서문지-대현리에서 올라오는 길
성벽의 흔적이 돌무더기 처럼 남아 있다.
성벽의 흔적
안내판
가파른 기슭에 쌓은 성벽의 모습
성 길을 걸으며 성벽을 살피는 이효정 대장
성의 모습
인가나 군의 주둔지 흔적으로 보이는 곳
너른 건물지
저수지 - 인근에 우물터와 건물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보임
남쪽 성벽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성벽의 모습이 뚜렷하다.
정상에서 장곡면 대현리 쪽의 모습 - 멀리까지 보인다.
자연을 이용한 성벽
답사하는 모습
돌무더기처럼 남아 있는 성벽의 모습
성벽과 건물지 위에 나무가 무성하다.
홍성 사람들은 이 산성을 석성산성이라 하면서 분명히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근거지인 주류성이라고 주장한다. 백제 부흥운동의 과정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대련사를 세운 스님 도침, 왕족 복신, 장군 흑치상지, 의자왕의 차남 부여풍등의 행적과 공적, 그리고 배신의 과정에서 백제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역사적 사실에는 이의가 없으나 이들의 마지막 은신처 또는 부흥운동의 거점인 주류성이 어디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있다. 홍성 사람들은 학자의 주장까지 근거를 대면서 이곳 장곡산성이 가장 확실한 주류성이고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고 주장한다. 홍성 사람들의 주장과 그 근거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금강 하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이병도는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일본인 津田左右吉은 한산 지방, 池內宏은 서천군 길산천 부근의 구릉이라 하였음.
②전북 지방으로 보는 견해 : 일본인 今西龍은 전북 부안의 금암산성(金巖山城)이라고 하였음.
③충남 연기군 전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김재붕은 연기군 전의의 두졸성(豆卒城)과 소류성(疎留城)이라고 하였음.
④충남 홍성으로 보는 견해 : 김정호와 박성흥은 충남 홍성 지역에 있는 성이라고 하였음.
①은 주류성을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보는 이병도의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최근 충청매장문화연구원의 건지산성 조사보고서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 보고서는 건지산성의 축조 방법, 발굴된 유물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되어 이어져 오다가 조선 시대에 폐성(廢城)된 것으로 믿어진다.”고 하여 건지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위의 여러 견해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④이다.
19세기 말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목 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唐)이 지심주(支潯州)라고 고쳤다.”고 하고, 공주목 조에서는 “왕(문무왕)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에게 함께 두릉윤성(豆陵尹城, 지금의 定山),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洪州)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고 하여 주류성은 지금의 홍성임을 밝혀 놓았다.
19세기 말에 김정호가 이런 견해를 발표하였는데도, 그 뒤에 ①, ②, ③의 견해가 나온 것은 이에 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때문이라 하겠다. 최근에 박성흥은 문헌 기록과 현지답사 결과를 바탕으로 김정호의 기록이 옳음을 확인하고, 주류성은 대흥의 임존성과 가까이 있는 홍성의 석성산성이고, 주류성과 관련이 깊은 백강(白江)은 당진 해안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홍성 석성산성의 건물지 발굴조사를 한 상명대학교 박물관 조사팀 역시 주류성은 홍성의 석성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석성산성은 백제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양산성(驪陽山城)이라고도 한다. 홍성군 장곡면과 청양군 비봉면의 경계지에 위치한 장곡면 산성리의 양성중학교 뒤편으로 표고 약 240m에 달하는 산이 있는데, 여양산성은 이 산 정상 부의 두 봉우리를 포함하는 포곡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200m에 달하는 대규모의 석축(石築) 산성이다. 이 산성에 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위 기록을 보면, 지금의 홍성인 홍주목의 남쪽 37리 지점에 여양현이 있고, 그곳에 여양산성이 있다고 한다. 여양현은 백제 때는 사시량현, 신라 때는 신량으로 결성군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여양산성의 축조 시기는 백제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
석성산성에 관해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성산성의 성벽은 표고 240m의 산 정상부분 남쪽과 북쪽의 높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의 형태로, 대부분 석축으로 쌓았다. 성의 최고봉에 달하는 남쪽 봉우리에서 동쪽 벽과 북쪽의 높은 봉우리까지는 암벽과 가파른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북쪽 벽과 서쪽 벽은 자연석의 석재를 막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석축의 대부분은 거의 붕괴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는데, 서쪽과 북쪽의 일부분에는 1m 내외의 성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성 안에는 동쪽에 형성된 계곡 부분에 평탄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고, 현재에도 우물지가 1개소가 남아 있어 건물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문지(門址)는 지형상 동쪽과 서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성 안에 있는 건물 터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기와에 ‘사시랑(沙尸良)’, ‘사라범초(沙羅凡草)’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 기와가 백제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출처: 최운식(한국교원대학교 교수)의“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에서 발췌함>
이 글은 나의 스승인 최운식 교수님의 <오누이 성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이라는 논문에서 전에도 읽은 내용이다. 오누이 성쌓기 내기 전설은 전국의 성에 비슷한 유형의 전설이 전해진다. 청주 근방의 구녀성, 예산의 임존성 등 성마다 전해지는 이야기이다. 최교수님이 쓴 이 논문을 읽어 보고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은 연기의 운주산성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버리고 정말 장곡산성이 주류성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번 답사를 끝내고 아직 가보지 않은 학성산성이 근거지가 아니라면 분명 운주산성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2. 학성 산성
▣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 산 24-1 해발 212.1m
▣ 시대 : 백제 시대
▣ 문화재 지정 : 없음
▣ 개요 :1174m, 포곡식 석성, 학성산 정상을 중심으로 봉우리 5개를 연결하는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장곡산성을 내려와서 한국 식기 박물관을 들러 얼공원과 사운고택을 지나 학성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시멘트 포장길은 어디서나 걷기 힘이 든다. 시멘트 포장길이 끝나자 숲 속으로 계단길이 나 있다. 그런데 이것 좀 봐라 계단을 만든 돌이 심상치 않다. 비슷한 크기로 잘 다듬었다. 이 계단은 최근에 홍성군에서 백제부흥군길을 조성하면서 다듬은 것 같은데 이렇게 돌을 다듬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다듬은 흔적이 최근에 다듬은 것이 아니다. 분명 성돌을 주워다 계단을 만든 것이다. 문의 구룡산 산성을 허물어 탑을 쌓은 것이나 일제 때 청주 읍성을 허물어 무심천 제방을 쌓은 것이나 훼손은 다를 바가 없다.
이마에 땀이 솟는다. 땀을 닦으며 얼마를 올라가니 문득 무너진 성벽이 꽉 막아선다. 그 어마어마한 돌무더기에 입이 다물려지지 않는다. 돌 무더기로 보아 성의 규모는 엄청났을 것이다. 아마도 높이는 8~10m정도는 되었을 것이고 성의 너비도 1~2m 이상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은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것이 아니라 다듬은 흔적이 뚜렷하다. 너비 40~50cm, 높이 20~30cm, 두께는 대중이 없지만 몇 개를 측정해 보니 20cm이상이었다. 정교하게 다듬은 것은 아니지만 성의 외벽면은 발을 디디고 올라설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쌓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많은 돌을 어디서 운반해 왔을까? 그리고 이 많은 돌을 다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이 동원되었을까? 이렇게 높은 성을 수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쌓았다면 그만큼 백성에게 그 가치가 돌아갔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성가퀴를 걸으며 살펴보니 내벽과 외벽이 모두 돌로 이루어졌다. 대개 외벽은 돌이고 내벽은 흙으로 채워 넣는 방식인데 여기는 다르다. 호점산성이나 삼년산성처럼 내외벽이 돌이다. 훨씬 규모가 크다는 의미이고 그 만큼 요새였을 것이다. 계속 걸으면서 살펴보니 축성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본래의 형태가 남아 있는 곳이 있었다. 자연석의 한쪽면을 다듬어서 큰돌과 작은 돌을 서로 엇갈리게 쌓았다. 중간에 쐐기돌을 박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성벽은 아래 부분에 자연석을 무더기로 놓아 기초를 삼은 다음에 그 위에 좀 더 큰돌을 다듬어 정교하게 쌓았다. 가파른 비탈에는 2단계로 쌓은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얼마나 정교하게 쌓았으면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견디어 냈을까? 1970년대 홍성지진에도 견딘 부분이 너무나 경이로워서 한참 서서 쳐다 보았다.
성의 정상 부분에는 학산정을 세워 주변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정자에 올라 광시면 쪽을 바라보니 시야가 아주 넓다. 동으로 광시면 주변의 산야가 다 한 눈에 들어온다. 높고 낮은 산의 모습이 다 보인다. 이 성이 장곡산성과 다른 점은 같은 포곡식산성이면서도 장곡산성은 동쪽으로 주둔지가 있으면서 서쪽을 방어하도록 되어 있고, 학성산성은 북쪽 천태 저수지 쪽으로 주둔지로 삼을 골짜기가 있으면서 서, 남, 동의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쪽으로 구릉을 지나 산줄기를 다시 오르면 학성산성의 보조성이라고 할 수 있는 태봉산성이 있다. 그래서 장곡산성과 학성산성은 적의 침범에 따라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인의 전략적 슬기가 엿보인다. 그런 면에서 장곡산성에 비해 이 성이 훨씬 견고하고 웅장한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북으로 태봉산성을 지나 소구니 산성을 지나면 멀지않은 곳에 예산의 임존성과도 연계된다.
학성산성처럼 규모가 큰 석성을 보면서 그 웅장함이나 문화재적 가치보다 우선 생각되는 것이 당시 백성들의 고충이다. 배고프고 기운 없고 권력도 배경도 없는 힘없는 백성들이 가족을 이별하여 이곳까지 끌려와서 죽도록 돌을 다듬고 돌을 짊어지고 나르고 쌓으면서 돌에 맞고 돌에 치고 돌에 피를 바르면서 피눈물나게 가족을 그리워했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 아프다. 아무런 이념도 없는 삼국 전쟁, 그냥 자신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야망 때문에 힘겨운 삶을 살았던 소시민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이곳에서 의미없이 죽어 갔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현대에는 그런 정치가 없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학성산성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무너진 어마어마한 돌무더기
성의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외벽쪽만 다듬어 쓴 성돌의 모습
남문지
성의 내벽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네
새로 샇은 돌계단 - 잘 다듬은 돌만 주워다 쌓았다.
성의 외벽 - 가파른 곳은 2단계로 쌓은 흔적이 보인다.
안내 표지판
성벽위에 난 산책길
광시 쪽의 산야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성벽
성 위의 산책길
2단계로 쌓은 성벽의 모습
보루인지 정상 부분의 돌 무더기
잡목에 묻혀 있는 성벽의 모습
답사 중
전망
홍성에서는 이 학성산성도 장곡산성과 아울러 주류성이라고 주장하고 았다. 그 근거로 조선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임존성이 대흥에서 13리 떨어져 있다고 되어 있어 대흥현에 있는 임존성은 봉수산성이고 이곳 학성산성이 임존성이니 임존성이 주류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산성의 둘레가 200보(1140m)라고 한것은 학성산성이 1156m이므로 이성과 일치한다는 주장이다. 현재의 임존성은 백제부흥운동의 마지막 거점지인 학성산성을 점령하고 신라와 당이 이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봉수산에 새로 산성을 구축하고 임존성을 그곳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대련사에 있던 도침이 이곳 학성산성에서 부흥군을 일으켰고 임존성은 신라의 산성이라는 말이 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성의 높이나 부분적 규모는 크지만 포곡식 산성이 둘러 싸고 있는 공간이 좁고 전체 규모가 작은 성이 삼만 이상이 웅집했던 부흥군의 근거지라는 말은 현장에 와서 보면 결코 이해되지 않을 것 같다.
3. 태봉산성
▣ 소재지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천태리, 학성산성에서 직선거리 800m지점 해발 193m
▣ 시대 : 백제시대
▣ 문화재 지정 : 없음
▣ 개요 : 187m 테메식 석성 보루
학성산성에서 낮은 구릉으로 내려와 이정표를 보면서 태봉산성을 찾아갔다. 태봉산성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석성임이 분명한 돌무더기가 있다. 학성산성과 비슷한 종류의 돌이 흙과 낙엽 속에서 그 옛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성도 자연석을 그대로 쌓은 것이 아니고 다듬은 흔적이 보이고 학성산성의 돌보다는 작은 돌들이다. 성의 규모가 크지 않아 학성산성의 보조산성이든지 학성산성의 척후들이 경계를 서는 보루쯤으로 보였다. 보루치고는 규모가 커서 적어도 1개 소대급은 있지 않았을까?
돌무더기를 파헤쳐 보면 분명 기와편이나 토기 조각들이 나올 것 같았다. 여기서 천태 저수지로 내려서면 바로 소구니고개가 나오고 소구니고개에서 서쪽으로 소구니 산성이 있다고 지도에는 나온다. 태봉산성에서 천태저수지로 질러 내려올다가 길을 잃었다. 그냥 다시 돌아가서 행정리 마을로 내려오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그냥 가파른 산을 긁히고 찔리면서 질러내려왔다.
저수지를 돌아 소구니고개를 넘어 광시면 소재지로 돌아오는 길이 참 멀었다. 소구니 고개를 넘으면서 소구니산성의 이정표를 보았지만 너무 지치고 힘들어 그냥 지나쳤다. 소구니 산성은 태봉산성에서 직선거리 약 1.4km 정도 거리의 해발 232m 정상에 있는 석성이라는데 규모는 크지 않고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것 같다. 이곳에서 석탄 광업소가 들어서는 바람에 거의 훼손되었다고 한다.
태봉산성 가는 이정표
태봉산성의 모습
대봉산성 무너진 성돌
장대인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천태저수지
광시 면 소재지로 걸어 들어왔다. 오늘 답사는 높지도 않은 산을 다녔는데 태봉산성에서 길을 잃어 조금 힘들었고 마을로 내려오면 대부분이 시멘트 포장길이라 무릎이 많이 아팠다. 광시는 한우의 산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한 번 한우 고기를 먹은 적이 있는데 이대장이 한우를 먹자고 한다. 한우를 사준다고 한다. 좀 미안하고 염치없기는는 했지만 맛있게 먹는 것으로 보답했다. 한우고기모듬 1인분 20g이 38000원인데 맛은 좋다. 육회, 한우고기 초밥, 간, 처녑, 선지해장국이 곁들여 나온다. 우리는 소주까지 한잔식 걸쳤다. 기분 좋다.
광시 한우고기 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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