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 동구 고봉산성古鳳山城, 질현성迭峴城, 견두산성犬頭山城 답사
▣ 답사일 : 2017년 3월 1일 수요일 흐리지만 따뜻한 날씨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천개동, 효평동 일대
▣ 건립시기 : 백제시대
▣ 함께 간 사람 : 이효정 선생님
▣ 답사 코스 : 주산동 → 고봉산성 → 질현성 → 견두산성 → 효평고개 소공원 → 함각산 → 효평동 당산 마을 → 효평초등학교(폐교)
▣ 시간 : 약 4시간 30분
오늘은 몇 번이나 벼르고 별렀던 개머리산성(견두산성)을 가기로 했다. 개머리산성은 대전의 계족산성과 백골산성 사이에 있는 계족산성의 자성자성이고 계족산성에서 개머리산성 백골산성 고리산성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로도 보인다. 또한 직동의 성치산성에서 노고산성, 마산동산성에서 개머리산성, 질현산성, 고봉산성으로 띠를 이루어 계족산성의 전진 기지를 이루고 금강과 옥천 회인 청주 서울로 이르는 대로를 지키고 보은 삼년산성에서 넘어오는 적으로부터 웅진이나 사비를 방어하는 산성의 연결선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더 가고 싶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계족산성이라는 지휘부에서 질현성에 오면 거기가 사거리가 되고 보은 쪽으로 나가는 전진 기지가 계족산성이 될 것이다.
지도를 보고 주변에 있는 계족산성, 성치산성, 백골산성, 고리산성 등을 답사했는데 이 산줄기의 산성들만 남았고 개머리 산성을 특히 마음에 두고 있었다. 몇 해 전에 효평고개를 찾다가 못찾고 그냥 지나갔고 작년에 효평 마을에서 이정표만 보고 올라가려고 하다가 길을 찾지 못했다. 계족산성에서 보면 바로 손에 잡힐 듯하고 대청호수길에서 봐도 바로 거긴데 들머리를 못 찾아 답답했다. 그래서 대청호 500리길, 대전 둘레길을 거의 다 답사한 이효정선생님에게 얘기했더니 바로 길을 안내해 주어 오늘 속 시훤하게 3개의 산성 답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었다. 밀린 숙제를 한 것처럼 후련하다. 백제 부흥운동에 관련된 산성과 신라 백제 쟁패의 산성 돌아보기를 주제로 몇 년간 산성 답사는 이제 이 근처의 마산동 산성만 답사하면 끝날 것 같다. 그러면 나의 산성답사는 또 다른 주제와 길을 찾아야 한다.
질현성의 남아 있는 부분
지도
답사중
1. 고봉산성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동구 주산동 산 19-1번지
▣ 문화재 지정 :대전광역시 시도기념물 21호
▣ 건립시기 : 백제시대
▣ 면적 : 151,604 ㎡
▣ 둘레 : 250m
▣ 개요 : 대전시 동구 주산동에 있는 백제시대 성곽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21호. 둘레 약 250m. 질현성(迭峴城)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있는 표고 304m의 고봉산(古鳳山) 정상부에 석축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이다. 동쪽의 암석부에는 너비 10m, 길이 30m 정도를 석축으로 보축한 부분이 남아 있다. 서쪽 돌출된 부분에 너비 3.5m, 길이 4m 정도의 치성(雉城 : 성벽에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 부설되어 있다. 이 산성의 입지적 조건이 남쪽에 질티고개를 두고 질현성과 위치하고 있어 이 고개를 감시하기 위하여 축조한 산성으로 판단되며, 질현성의 자성(子城) 구실을 했을 산성으로 판단되고 있다.
주산동에 마을 어느 마당에 이 대장의 차를 주차하고 고봉산성으로 올라갔다. 고봉산은 해발 약 300m 정도 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시작부터 경사가 급하다. 사람의 발길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이 산은 특히 청미래 덩굴이 많고, 산초나무가 번성하였다. 밤나무도 꼭 사람 키 정도여서 얼굴에 회초리질을 해댔다.
정상까지는 1km가 안된다고 이정표에는 되어 있었지만 산성을 기다리는 마음인지 가파르기 때문인지 마음이 바빴다. 드디어 돌무더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일인가? 카메라가 이상음을 낸다. 알고보니 메모리 카드를 끼우지 않고 온 것이다. 할 수 없다. 스마트폰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이 대장의 블로그에서 사진을 빌려오는 방법도 있다. 실제로 사진 중에 이대장님의 사진을 빌려 왔음을 밝혀둔다.
산성은 허물어져 돌무더기가 되어 있었다. 어느 성이나 그렇듯이 돌 무더기는 산정에서 커다란 덤프트럭으로 돌을 쏟아부은 것처럼 흘러내렸다. 조금이라도 석축 방법을 알 수 있는 부분이 남았나 둘러 보았다.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한 군데가 남아 있다. 이런 작은 성에도 치성이 있었을까? 치성처럼 약간 튀어 나온 부분에 2m 정도 6층이 남아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전문가들은 축성의 방법을 짐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화강암을 가로 40cm, 세로 20~30cm, 깊이 30~40cm정도로 다듬어서 썼다. 다듬기 작업은 육면을 모두 다듬은 것은 아니고 외부로 나오는 부분과 가로 부분과 다듬어서 쌓은 것 같다. 성쌓기는 외부를 돌을 쌓은 다음 안에서 흙으로 채워 넣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 근거로 흙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성돌을 다듬지 않았다. 석축은 그렇게 정교하게 쌓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중간중간 쐐기돌을 넣기는 했지만 돌과 돌이 닿는 부분이 정교하지 않아 쉽게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남아 있는 부분에는 돌 이끼가 파랗게 끼어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사람들이 무너진 돌을 모아 탑을 쌓았다. 둘레 280m 정도의 작은 성이라면 주로 한 개 소대 정도 또는 그보다 더 작은 인원이 주둔하였을 것이다. 안내판에는 질현성의 자성이라고 한다. 자성이라고 하면 아마도 그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의 크기가 보루의 수준은 넘어선 것으로 파악된다. 보루라면 척후병이나 첨병의 주둔지 또는 초소 정도가 될 것이다. 탑을 쌓은 곳에서 기와편이나 그릇 조각을 하나라도 보일까 하고 찾아 보았으나 눈에 띄지 않았다.
이 성이 백제 시대에 쌓았다면 분명 백제와 신라의 쟁패의 현장에서 금강과 영남에서 옥천을 거쳐 대전, 회인, 문의, 청주로 향하는 인원과 물자를 감시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니면 상주 보은 회인을 거쳐 사비로 향하는 신라군을 방어하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또한 삼년 산성에 본부를 둔 신라군을 여기서 방어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계족산성에 본부가 있는 부대가 질현성에 중대급 정도로 파견되어 이 곳까지 책임지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한다. 만약 고봉산성이 무너지면 바로 계족산성이 타격을 받고 웅진성이나 사비성으로 이르는 위기가 닥칠 것으로 당시에는 생각했을 것이다.
성안에 묘가 있다. 쌍분이다. 아마도 부부일 것이다. 주산동에 거주하는 양반의 무덤인지 알 수는 없지만 명당이라고 생각했는 모양이다. 여기서 대청호반이 내려다 보이고 주변의 산야가 다 보이니 명당은 명당일 것이다. 산소 주변에 성돌을 주워다 다시 축대를 쌓으니 영혼을 지키는 성이 되었다. 그러나 묘주는 이곳에서 성을 쌓다가 죽은 사람, 성을 지키다가 죽었을 많은 원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았나 궁금하다. 얼마나 많은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이 여기서 파를 흘렸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그 흙 속에 조상의 유택을 마련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을 답사하면서 처음에는 문화재라고 생각했는데 답사를 거듭하여 더 많은 성을 다니노라니 성을 그냥 단순한 성으로 보아지지 않는다. 성은 옛사람들의 한과 원통함을 쌓아 놓은 것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 원한의 피가 맺힌 이곳이 현대인의 주검의 집으로 좋은 자리일지 자손들이 한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닐까 한다.
주산동에서 산성으로 가는 입구
고봉산성엔 기와 조각도 없다.
석축의 방법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남은 부분
무너진 성벽과 널부러진 성돌
성의 내부 펀펀한 곳
성의 내부
제대로 다듬은 성돌
성안에 있는 묘
산소주변의 잘 생긴 바위
산소주변의 바위
2. 질현성
▣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 산 31-1번지
▣ 문화재 지정 : 대전광역시 시도기념물 8호
▣ 축성시기 : 백제시대
▣ 면적 : 11,107㎡
▣ 둘레 : 800m, 높이 1.5m
▣ 개요 : 대전광역시 대덕구 비래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8호. 지정면적 11,107㎡, 둘레 약 800m. 현재 문지(門址)·수구지(水口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이 성은 안으로는 흙을 다져 쌓고 밖으로는 돌을 쌓는 내탁외축(內托外築)한 규모가 큰 테뫼형산성(산 정상을 둘러쌓은 성)으로, 동쪽 성벽 일부는 안팎으로 돌을 쌓는 협축(夾築)을 하였다. 이 성은 오늘날의 대전과 회덕 방면에서 동쪽으로 충청북도 회인(懷仁)과 문의(文義) 방면으로 통하는 요로를 지키기 위하여 백제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데, 성벽의 높이는 1.5m이고, 석루(石壘)의 상부 너비는 4.2m이며, 남문지의 너비는 약 6m, 동문지의 너비는 약 3.5m이다.
성안에는 지금도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샘물이 나오고 있다. 성의 동북쪽 성벽은 90×20㎝ 정도의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되어 있다. 성안에서는 백제시대 토기조각을 비롯하여 신라시대 토기조각과 조선시대 자기조각까지 출토되고 있어서, 삼국시대부터 조선 말엽까지 계속해서 사용하여 온 산성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에는 주위에 7곳의 보루(堡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5년(문무왕 5)에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 융(扶餘隆)과 더불어 웅진 취리산(就利山)에서 백마를 잡아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맹약을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그 웅진의 취리산은 현재의 공주(웅진)지방에 있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이 성의 부근에 주산리(注山里, 줄뫼)와 비룡리(飛龍里, 줄골)가 있고 질현은 곧 질티이므로 이곳이 취리산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봉산성에서 조금 내려오니 임도가 있다. 질현성이 있는 산은 칠현산이라고 한다. 임도에서 안내 이정표를 따라 칠현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가파른 길을 얼마 오르지 않아서 성의 윤곽이 뚜렷한 질현성이 보였다. 가파른 산길을 정신 없이 올라가보니 길이 40m ~ 50m 정도의 성석으로 쌓은 성이 거의 원형대로 남아 있었다. 나무 가지를 휘어 잡으며 성벽 가까이 가보았다, 잡목이 자라서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지만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자로 재어 보았다. 대부분의 돌이 너비는 다르나 높이는 일정하다. 너비는 45~100cm정도 되었고 높이는 28cm, 깊이는 50cm 정도가 넘었다. 너비가 다르므로 돌을 엇갈리게 쌓을 수 있고 높이가 일정하므로 더 튼튼해 보였다. 아직도 약 15개 층 정도가 남아 있다. 약간 무너진 곳을 들여다 보니 돌이 묻힌 깊이는 50cm가 넘어 보였고 돌과 돌 사이에 잔 자갈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흙에 작은 자갈을 섞어서 다져 넣었을 것으로 보였다. 성벽 바깥 쪽은 돌의 모양을 일정하게 다듬어 쌓았고 안 쪽은 자연 그대로 두어 더 단단해 보였다. 정확하게 외축내탁의 공법을 사용하여 정교하게 쌓은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1500년을 넘어 오늘까지 이렇게 성의 모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완벽한 성벽의 모양이 남아 있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지나칠 수 있겠지만 그 세월을 생각하면 경이로운 것이다. 혹자는 중국의 만리장성의 견고함을 보라고 할지도 모른다. 인도의 아그라 성을 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성들은 대개 벽돌로 찍어서 견고하게 쌓았거나 아주 연한 돌을 정교하게 갈거나 다듬어서 쌓은 것이다. 그러나 질현성과 같은 백제의 산성을 비롯한 우리나라 산성은 단단한 화강암을 정으로 쪼아 정교하게 다듬어서 쌓았다. 돌이 단단해서 다듬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무겁기 때문에 이동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단단하고 무거운 돌에 사람들의 몸도 많이 상했을 것이다. 모든게 얼마나 어려웠을까 하는 것이 짐작이 간다.
성은 상당히 큰 규모이다. 물론 임존성이나 학성산성, 장곡산성 같은 대규모의 성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이 성을 계족산성의 자성이라고 한다면 규모가 큰 성이다. 견고하고 큰 규모를 보면 그 만큼 이 성이 중요한 요새였을 것이다. 앞서 설명했지만 옥천에서 회인 문의 청주로 가는 길목이고 견두산성과 고리산성을 잇는 요새였을 것이다. 질현성과 계족산성의 사이에 있는 질티라는 고개를 넘으면 바로 대전이고 대전을 지나면 웅진 사비로 바로 통한다. 질티를 지키는 역할도 했을 것이다. 또한 지금은 안전지대이지만 당시는 현재의 비무장지대만큼 긴장감이 감도는 전방이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산성이다.
질현성은 일설에 의하면 백제 부흥군의 지도자들인 복신, 도침, 흑지상지 등이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융을 일본에서 모셔와 이곳에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한 취라산일 수도 있다고 한다. 정말로 말을 잡아 피를 마시며 맹약을 했는지 몰라도 백제 부흥군은 결국 세가 약해지기도 했지만 내분에 의해서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 맹약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취라산은 웅진 부근에 있다고 하고 이렇게 작은 성에서 중요한 맹약을 하는 것도 성왕이 50명 군사만 데리고 적진을 시찰한 것만큼 위험한 일이라 생각된다.
질현성 정상에서 고리산과 백골산성, 개머리산성과 계족산성이 다 보였다. 대청호의 작은 섬들이 다도해처럼 보였다. 과연 요새는 요새였다.
질현성에 뚜렷하게 남은 성벽
성벽 답사
축성의 방법을 알 수 있을 만큼 뚜렷하게 남아 있는 질현성
성곽 위의 남은 흔적들
돌의 높이가 일정하다
낙엽에 쌓인 성벽
견두산성(개머리산성)으로 가는 길에 몇 개의 보루를 발견하였다. 봉우리마다 다 보루가 있었다. 내 눈에 띈 것만도 6개 정도 되었다. 보루는 크기가 대부분 비슷하다. 크기도 비슷하고, 무너지기는 했지만 축성의 방법이나 축성의 시기도 비슷했던 것 같다. 성 돌의 크기도 종류도 다듬은 방법도 비슷하다. 작은 보루 하나를 쌓는데 돌을 잘 다듬어 쌓은 것을 보면 모두 한 장소에서 돌을 다듬어 각 봉우리로 옮겨서 보루를 지었을 것으로 보인다. 모두가 현대 군대 체제로 약 1개 분대 정도가 주둔할 수 있는 초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성(母城)과 자성(子城) 사이에 보루를 만들여 요새를 철저하게 지킨 것은 현대와 다를 바 없는 선인들의 지혜이다. 그러니 보루들도 하나 같이 소중한 문화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모성과 자성 사이를 모두 이어 놓는다면 만리장성과 다름 없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질현성 보루 1
질현성 보루 2
질현성 보루 3
보루4
질현성 보루 4
보루5
질현성 보루 6
보루6
멀리 높은 산이 고리산 가까이 마루가 편편한 것이 백골산
왼쪽 높은 산이 견두산성
계족산성
3. 견두산성
▣ 위치 : 대전광역시 동구 효평동 산 83번지 개머리산 해발 363m
▣ 문화재 지정 : 대전광역시 시도기념물 20호
▣ 축성시기 : 백제 시대
▣ 규모 185,058㎡
▣ 개요 : 대전시 동구 효평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성곽. 개머리산의 정상부에 석축한 테뫼식 산성이다. 육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계족산성의 자성 구실을 했을 산성으로 추정된다.
계족산성(鷄足山城)에서 동남쪽으로 1.3㎞ 떨어져 있는 표고 363m의 ‘개머리산’의 정상부에 둘레 280m 정도로 석축한 테뫼식 산성이다. 성은 자연 암석을 이용하면서 잡석으로 축조하였는데, 남쪽 성벽의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무너져 내려 윤곽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내 동쪽 부분에 직경 6m 정도의 고대(高臺)를 인공적으로 구축해 놓았는데 아마도 장대지(將臺址)일 것으로 추정된다. 산성 내에는 너비 3m, 길이 2m, 높이 2.5m 정도의 문자리가 남아 있으며, 백제시대 토기편을 수습할 수 있다. 이 산성은 육로와 수로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계족산성의 자성(子城) 구실을 했을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동학운동 때에는 건장동(建長洞) 주민들이 직접 돌을 날라다 쌓은 민보(民堡)라고도 전한다.
6개의 봉우리마다 있는 보루를 지나 임도에 내려섰다. 임도로 조금 걸어 가다 보니 이곳이 바로 지도에서 보던 천개동 가는 임도였다. 나무가 우거지고 임도 아래 인가가 몇 채 있고 개가 짖는다. 마을 이름도 천개동이고 동쪽을 막아선 산 이름도 개머리산이고 개가 짖어대니 온통 개가 아닌가 하는 웃기는 생각도 들었다. 임도에서 개머리산성 쪽으로 이정표가 있었다. 개머리산성은 그리 멀지 않았다. 하기 바로 코앞에 보인다. 대청호 자연 생태원에서 임도를 따라 이곳으로 오면 승용차를 가지고 와도 다시 한 번 올 수 있을 것이다.
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아주 좋았다. 마사토 위에 작은 소나무들이 정원수처럼 예쁘게 컸다. 그러나 정상 부분에 올라갈 때는 매우 가파르다. 정상이 바로 저긴데 큰 바위가 막아선다. 바위를 돌아 등산로를 올라가려다가 보니 큰 바위사이에 돌을 쌓아 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분명 자연 암석을 이용하여 바위와 바위 사이를 연결하여 성을 쌓은 것이다. 그 밖에는 성이 다 무너져 내려 성의 윤곽조차도 찾기 어려웠다. 동쪽 부분에 장대가 있다해서 둘러 보았다. 두둑하게 높은 곳이 있는데 그곳이 장대인가 보다. 이곳에 성돌의 낙엽에 많이 묻혀 있다. 파헤쳐 보면 그릇 조각도 나오고 기와 조각도 나올지 모른다. 문헌에 성의 둘레가 280m정도 된다고 하고 기와 조각이나 토기 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여 찾아 보았으나 흙에 덮여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동쪽 효평고개로 내려서는 지점에서 축성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는 곳을 발견하였다. 자연석을 자연 그대로의 크기를 바꾸지 않고 한쪽 면만 다듬어서 쌓았다. 이곳으로 오는 6개의 보루와 비슷한 모양이다. 문지도 있다고 하는데 찾아볼 수가 없다. 오늘 만난 산성들 가운데 흔적이 가장 미미한 산성이다.
개머리산성은 가장 동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고봉산성과 일직선으로 보이지만 산줄기를 타원형으로 빙돌아 여기까지 성이 이어진 것이다. 고봉산성에서 질현성 여섯개의 보루 개머리산성이 모두 테메식 산성이지만 산봉우리로 죽 이어져 커다란 하나의 포곡식산성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활처럼 동쪽 금강과 회인 문의 가는 도로를 감시하듯 싸안았고 타원 호의 뒷 쪽 가운데쯤에 계족산성이 있어서 지휘 체계를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천개동 입구에 있는 이정표
천개동에서 올라가면 견두산 정상에 자연석과 자연석을 연결하여 석축한 산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위와 바위 사이에 쌓은 석성
동쪽 효평동 방면으로 내려서는 부분에 남아 있는 개머리산성의 흔적
장대의 흔적이 이렇게 남아 있다.
효평소공원까지는 길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처음에 견두산 정상에서 내려올 때 경사가 급해서 줄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지만 그곳만 내려서면 평탄하다. 이 산에는 망개나무와 찔레나무 산초나무가 많이 있어서 가시를 많이 찔렸다. 효평소공원에는 차들이 있고 바로 대청호수길이다. 이 소공원도 지나다니면서 많이 찾았던 곳이다. 여기에 차를 세우고 견두산성을 다시 올라가도 아주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등산 가는 셈치고 다시 한 번 올라가서 주변을 살펴야겠다. 여기서 계족산까지 올라갈 수 있으니 그것도 괜찮을 것 같다. 소공원에서 표지기를 찾아 함각산을 올라갔다. 마지막에 길을 잃어 올려치느라 힘이 쭉 빠졌다. 함각산만 내려가면 당산마을이다. 당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있어도 사람이 다니지 않아 밤나무회초리가 얼굴을 때렸다. 청미래 덩굴이 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그들이 괴롭고 고독하고 억울했던 백제 옛 군사들의 원혼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자. 12시 40분쯤 오늘 4시간 30분 답사 길을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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