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홍주읍성 洪城洪州邑城 답사기
▣ 답사일 : 2017년 2월 11일 토요일 맑은 날씨▣
▣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 문화재 지정 : 사적 231호
▣ 건립시기 : 조선 문종 1451년
▣ 면적 : 37,009㎡
▣ 함께 간 사람들 : 백만사 회원 12명(백만사 정기 모임) 박호준, 이용원, 정우종, 이효정, 안중묵, 이방주 부부
▣ 답사 코스 :홍성역 주차장 → 김좌진 장군 동상 → 전통시장 → 홍주성 → 홍주향교 → 홍성고등학교 → 매봉 → 목장성→홍주의사총→홍성역 주차장
▣ 시간 : 약 3시간
▣ 개요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조선시대 읍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둘레는 약 800m이다. 동문인 조양문(朝陽門)과 성 안의 홍주아문(洪州衙門), 그리고 주변의 산성(山城)을 포함한다. 백제시대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처음 축조된 연대가 확실하지 않고, 고려시대에고쳐 쌓았다는 기록도전하지 않는다. 다만『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둘레가 533보 2척이고,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고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규식(規式)에 맞추어 각 지방의 읍성을 고쳐 쌓았다. 이 읍성도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벽은 원래 있었던 것보다 물려 쌓았는데, 둘레가 4,856척이고, 높이는 11척이며, 높이 2척의 여장(女墻)이 608개 있었다. 적대(敵臺) 24곳 중 6곳, 문 4곳 중 1곳에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을 두지 않았다. 성 안에는 우물 2곳이 있었고, 성 밖에는 해자(垓子)를 파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성문은 본래 3곳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현종 때 한계수(韓桂洙)가 다시 수리하였고, 1824년(순조 24)에는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과 홍주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수리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 등 3곳의 성문과 함께 관영(官營)을 지었다. 조양문은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의 다포계 문루로, 흥선대원군이 조양문의 편액을 친필로 하사하였다. 지금의 조양문은 1975년에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1978년 10월 7일에 강도 5°의 지진으로 인해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1979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1982년에 부분 보수를 완공하였다.
1906년에는 이 성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였다. 곧 1905년에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이세영(李世永, 1869~1938)·채광묵(蔡光默, 1850∼1906)·안병찬(安炳瓚, 1854~1921)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5월 19일에 1,1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6문의 화포로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덕산(德山)으로 쫓아냈다.
이 성은 특이하게 남문이 없고 북문에 문루가 없다. 특히 삼국시대∼조선시대의 치소가 있는 자리로 큰 변동이 없고, 조선 초기에 새로운 축성 규식에 의해 축조된 유적이라는 점에서 연구와 보존의 가치가 크다.
-한민족대백과사전-
백만사 정기 모임으로 홍성의 홍주성 천녕여행길을 행선지로 잡았다. 나는 홍성의 홍주 읍성을 돌아볼 기회기 되어 기뻤다. 홍성은 몇 번 가보았지만 일행과 함께 해야 되기 때문에 홍주성의 정문격인 조양문만 먼 데서 바라보고 막상 성을 둘러보지 못했기에 늘 기회를 보고 있었다. 최근에 예산의 임존성 서천의 건지산성, 한산 읍성을 돌아보고 홍성의 장곡산성, 학성산성을 돌아볼 기회를 보고 있는 터라 더욱 그렇다. 산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해미읍성이나 한산읍성을 돌아보면서 청주읍성이 보존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 빠져 있었다. 홍주읍성은 1978년 지진으로 어느 정도 무너졌는데도 복원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부러웠다.
오전 10시 사천동 성당에서 일행이 모였다. 날씨가 꽤 쌀쌀하다. 우리 부부는 안중묵 선생님 차에 동승했다. 12명이 움직이는데 3대의 승용차가 가야 한다. 차량 지원은 무순으로 돌아가면서 하지만 이효정 백만사 산행대장은 늘 빠지지 않고 운전한다. 차는 3차 병천 천안 아산을 거쳐 홍성으로 들어갔다. 홍성에 도착하자마자 홍성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이비가짬뽕집에서 짬뽕과 탕수육으로 점심을 먹었다. 짬뽕은 면이 좋아야 하는데 면은 수타면이 아니었다. 다행히 국물은 맛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짬뽕 하면 우리 마을의 금릉이나 감록관에서 수타면을 홍합 국물에 말아 놓은 짬뽕을 먹었기에 웬만해선 입이 놀라지 않는다. 대신 탕수육은 바삭바삭하면서도 연해서 맛이 좋았다. 소스가 좀 단맛이 세기는 했지만 튀김 기름이 깨끗한지 색이 연하고 식감이 부드러워 좋았다.
점심을 서둘러 마치고 홍성역 앞 유로주차장에 차를 주차 시켰다. 유료주차장인데 매표소에 사람이 없어서 돈을 낼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주차장은 텅 비어 있고 주차장 앞 노상에는 불법 주차한 차량이 도로를 메웠다. 나부터 왜 얼마 안되는 주차비가 아까운지 모르겠다. 이런 의식부터 없애야겠다. '주차비는 당연한 것이다.' '사찰 입장시 문화재 관람료도 당연한 것이다.'를 계속 외고 다녀야겠다.
홍성에는 충절의 인물이 많다. 홍성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한다. 김좌진 장군, 만해 한용운, 성삼문, 최영 장군 등 충절의 인물들이다. 성삼문은 30세도 되기 전에 한글을 만들기 위한 국어 음운 체계를 완성한 분이다.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힘을 합쳐 한글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성삼문의 국어 음운체계가 완성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일이다. 음운 체계가 와성되고 기호를 붙이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성삼문은 그 후 세조 때에 세조의 권력 쟁취 과정에서 저항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했다. 성삼문이 논산에서 횡사하였기에 그의 무덤은 논산에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은 설립 당시부터 왕권과 신권이 계속하여 줄다리기를 하느라 충신과 왕자들이 많이 죽고 왕이 탄핵되기도 했다. 왕의 개혁정치를 신하들이 반대하다가 왕이 탄핵되기도 하고 외척들이 신권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당쟁이 심해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어린 왕이 많았던 것은 신권을 잃지 않으려는 벼슬아치들의 횡포라고 할 수도 있다.
김좌진 장군 동상을 길 모서리에 있었다. 가장 크고 번화한 오거리 한가운데에 세워 놓지 않고 오거리길 모서리에 세웠다. 여기도 땅값은 만만찮은 모양이다. 부여에 가면 성왕의 동상이 거리 한 가운데 세워져 있고 백제 대향로도 로터리에 세워져 있고, 계백의 동상도 로터리에 세워 놓았다. 누가 조국을 위해 자신을 함부로 버릴 수 있을까? 나는 정말 자신 없다. 그래서 나는 김좌진 장군이 두렵고 무섭다.
전통시장을 지나 홍주읍성으로 향했다. 읍성으로 향하는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뜨인 것은 홍주읍성의 정문 격인 동문 조양문이다. 이름부터 볕이 환하게 비칠 것 같은 느낌이다. 조양문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예스럽고 읍성의 정문치고는 꽤 웅장하다. 다만 어느 읍성이든 마찬가지이지만 성문만 남아 있고 문에서 이어지는 성벽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도성의 남문인 숭례문도 그렇다. 그러나 청주읍성은 문마저 사라지고 남문로, 북문로하는 길 이름만 남아 있으니 더 안타까운 일이다. 해미 읍성에 가보면 문과 성벽이 온전하게 남아 있어 얼마나 웅장한가?
조양문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고종조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석성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도 다시 세웠다.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대원군이 친필로 하사하였으며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이었다. 북문은 역대 목사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하였는데, 동학운동(1894) 때는 수백 명의 동학군이 여기에서 처형되었다. 고종 광무 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 보인다. 일본인들에 의하여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조양문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하여 자세히 보았다. 문은 홍예문으로 무지개 모양 매우 아름답다. 성벽의 돌에 전쟁의 자국이 남았다. 이 건물은 1975년 해체하여 복원하여 옛모습이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홍성에 많은 건물이 들어서 있어도 먼데서도 보이니 홍성의 상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 한가운데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이 한 채쯤 서 있는 것이 도시의 품격을 얼마나 높여 주는가? 사람들은 조양문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푸른 하늘과 맞닿은 잿빛 기와지붕을 보면서, 아름다운 단청을 보면서, 반듯반듯하게 다듬어 빈틈없이 쌓아올린 벽을 바라보면서, 벽면에 있는 전쟁의 흔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특히 홍성에 뿌리박고 있는 사람들은 말이다. 청주에 이런 문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안타깝고 이 건물을 지켜낸 홍성 사람들이 대견하다. 외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도 가끔 고향에 찾아와 이 조양문을 대하면 가슴이 벅차 오를 것이다.
홍주읍성의 정문인 조양문
천년 여행길 지도
백야 김좌진 장군 동상
홍성의 전통시장에는 사는 사람은 없고 파는 사람은 많다. 추운 날씨에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참 안타까울 정도이다.
조양문을 지나 성으로 갔다.읍성 안에는 건물이 없고 잔디 광장과 기념관만 있었다. 날씨가 추운데다가 바람이 부는데 잔디밭에는 봄 볕이 내리 쬐고 있다. 차가운 바람도 봄볕을 어쩔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안에서 바라보면 성벽은 그냥 언덕이다. 잔디가 잘 살아 있는 언덕이다 그래서 성의 윤곽을 내부에서 다 볼 수 있었다.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바깥으로 성벽을 보러 나갔다. 예상대로 바깥은 석축이다. 상당산성처럼 아니면 조양문의 성벽처럼 잘 다듬어 쌓은 것은 아니지만 돌을 다듬어 쌓았다. 돌의 크기는 일정하지는 않지만 대개 40cm×30cm정도 되어 보였다. 두께도 20cm는 넘어 보였다. 밖에 돌을 쌓고 안에서 흙으로 메우는 공법이다. 안에서는 따뜻해 보이고 밖에서는 웅장해 보였다. 성벽이 있고 성벽 앞으로 잔디를 깔아 사람들이 성벽에 바짝 붙어 다닐 수 없도록 했다. 이런 시설은 현대에 이르러 성벽을 보호하기 위하여 관청에서 시행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성은 검은 화강암처럼 보이는데 아랫부분과 상층 부분의 석질이 달랐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축한 흔적이고 지진이후에 다시 쌓은 흔적이라 보였다. 밖을 대충 돌아보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홍주 아문
홍주아문은 역대 홍주목사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安懷堂) 외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철판을 대원군이 사액한 것으로,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군청 정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31호로 지정되어있다.
홍주아문 안에는 열간 반의 규모인 내삼문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서 지어 담장을 대신했던 큰 건물이 있었는데,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군수를 추방하는 한편 내삼문을 헐어버렸다. 그 이후 행랑은 보수하지 못해 스스로 무너져 버렸고 오직 외삼문인 홍주아문만 보존된 것이다. 이 역시 홍성군수 조영호가 문화재 관리국의 지원을 얻어 현재와 같이 보수하고, 종전에 이 문을 군청 정문으로 활용하던 것을 막고, 그 옆으로 현재의 정문을 세워 활용케 하여 홍주아문을 오늘과 같이 보존하게 되었다.
홍주아문은 우리나라의 아문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현판의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것이라고 한다. 대원군이 사액한 홍주아문의 글씨는 6.25 전후해서 망실되었다. 현존하는 홍주아문 글씨는 광천에 살았던 중국인 글씨라 한다.
-한민족대백과 사전-
멀리 홍주 아문이 보였다. 아문이란 지방수령이 집무를 보던 관아의 문이다. 그런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안에 홍성읍사무소와 홍성군청이 있으나 정문으로 사용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문을 내었다고 하니 기특한 일이다. 문은 삼문으로 되어 있었고 가운데가 솟아 멋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튼튼해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 현판도 흥선대원군의 글씨였으나 전쟁중에 없어지고 지금은 새로운 현판이라 한다.
일행이 모여 있는 남문으로 갔다. 사람들은 빨리 걸어야 하고 성에 관해 크게 관심이 없다. 남문으로 나가서 성벽을 따라서 나 있는 길을 걸으면서 성벽을 보니 새로 쌓은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옛모습을 그대로 살리느라 애쓴 흔적이 보인다. 특히 옛 사람들이 성석에 새겨놓은 글씨 같은 것도 망실하지 않고 살려 놓았다. 성벽과 관찰로 사이에 잔디를 깔고 홍성의 인물들의 흉상을 세우고 그들의 업적과 본받을 점을 적어 놓았다. 이러한 작업들을 보면서 홍성의 주민이나 관리들이 얼마나 홍성을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는지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홍주읍성 동벽
홍주아문
홍주읍성 남벽 내부에서
남문
남벽 성가퀴 위에 일부 성첩이 복원되었다.
성석에 새긴 명문
홍성의 인물
매봉으로 가는 길에 홍주 천주교 순례길을 걸었다. 많은 천주교 신도나 성인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해미읍성, 연풍성지, 베티성지 등 성지를 갈 때마다 천주교 신자는 아니라도 성인들의 죽음이 가슴아프다. 특히 그와 같은 성자들의 죽음이 조선 후기 헌종대왕 때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면 내가 저지른 일처럼 마음 아프다. 이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까지 200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4분의 성인이 목숨을 잃었다니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서양 문물이나 서양 사상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사상적 생각보다. 신해박해, 정사박해, 신유 박해 등의 사건일 일어날 당시 세도를 누리던 외척들이 정치 권력을 잃는 것이 두려워 벌인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안타깝다.
따지고 보면 효종 때부터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일본에 주권을 빼앗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기독교 정신으로 민주주의 정치형식을 바꾸었다면 지금보다 더 성숙한 민주정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또한 상징적인 왕권 아래 신권을 중심으로 하는 실질 권력이 정치를 했다면 아직도 입헌군주제도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황제를 상징적 존재로 존경하면서 품격 높은 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공원처럼 조성된 성지에서 추위를 이기려 따듯한 대추차를 마시고 과자, 곶감 등 가져온 간식들을 내어 놓아서 먹고 매봉으로 출발했다. 매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향교를 지나고 향교에서 그 유명한 홍성고등학교 건물을 뒤에서 보았다. 홍성고등학교는 석사과정 논문지도를 맡아주신 최운식 교수님의 모교이고 그 분이 늘 자랑하던 학교이다.
매봉은 높지도 않은 나즈막한 산책로이다.
목장성터가 있는데 목장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고 그냥 목장성터라고만 되어 있다. 목장성터는 토성이었는지 그 윤곽이 70m 정도 아직도 남아 있다. 목장성이란 외적으로부터 방어나 전쟁을 위한 성은 아닌 것 같다. 성안에 동물을 사육하면서 동물들이 밖으로 나기자 못하게 하는 성터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짐승이었을까? 아마도 말이 아니었을까 한다. 홍주읍성에서 소요되는 말을 사육하면서 말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 성을 쌓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것을 어디서 확인해 보나? 홍주성 천년여행길에이라는 안내 책자에 설명이 있다. 조선 시대 초기 아미산 옆의 세천역이 있었다 한다. 그러니까 이 역에서 소요되는 말 목장이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말 사육을 위한 성이 존재하는 것을 여기서 처음 알았다.
홍주 천주교 성지
홍주 순교성지는 기록상 212명의 천주교인들이 목숨을 바친 순교성지이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까지 약700여 명이 넘게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순교성지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분들이 순교한 곳이다. 충청도의 첫 순교자 원시 장 베드로는 신해박해 때, 그 뒤 순교는 계속 이어져 정사박해 때 방 프란치스코, 박취득 라우렌시오, 신유박해 때 홍주의 백정 황일광 시몬이 순교 하였다. 그 뒤에도 병인박해 때 200여 명이 순교함으로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성지가 된 것이다.
홍주 순교성지는 예비 신자들이나 신앙심이 약해질 때 새롭게 신앙을 되찾는 은혜로운 성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국 유일하게 열차 순례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데 천주교 내포 순례길이 잘 조성되어 그 길을 따라 목사의 동헌, 옥 터, 진영장의 동헌, 저잣거리, 참수터, 생매장 터 등 6곳을 두루 참배하며 묵상이 가능한 내포의 새로운 순교성지이다.
- 바람이 머무는 곳에 http://blog.daum.net
천주교 성지
매봉 목장성 터
산책길로 쓰이는 목장성
매봉에서 내려오니 바로 홍주의사총 무덤이 있고 사당이 있었다. 홍주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의사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사당을 지어 홍주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홍성은 온통 정신 교육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을은 정말 이렇게 꾸며 나가야 된다. 홍주군의 살림이 값되고 품격 높다. 많은 지자체들이 배워야 한 일이 아닌가 한다.
홍성역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인도에는 홍주 천년 여행길 표지가 보도블럭 사이에 박혀 있다. 마치 로마에서 뜻깊게 보았던 표지와 비슷하다. 홍성은 작지만 큰 도시이다. 아직도 살아 있는 홍주 읍성이 감싸 안고 있는 이 고을에 감사하며 더욱 품위 있게 발전하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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