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답사
▣ 문화재 지정 : 사적 제5호
▣ 건립시기 : 백제시대
▣ 지정면적 : 98만 3900㎡ 둘레 2200m
▣ 소재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 요약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부소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 답사일시 2016년 8월 24일
[부소산성 개요]
부소산의 산정을 중심으로 테뫼식 산성을 축조하고 다시 그 주위에 포곡식(包谷式) 산성을 축조한 복합식 산성으로, 성내에는 사비루(泗沘樓)·영일루(迎日樓)·반월루(半月樓)·고란사(皐蘭寺)·낙화암(落花巖)과 사방의 문지(門址), 그리고 군창지(軍倉址) 등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사비성(泗沘城)’·‘소부리성(所夫里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산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으로 불리고 있다.
[부소산성의 내용]
이 산성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泗沘)를 수호하기 위하여 538년(성왕 16) 수도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이나, 이보다 먼저 500년(동성왕 22)경 이미 산봉우리에 테뫼형 산성이 축조되었다가 천도할 시기를 전후하여 개축되었고, 605년(무왕 6)경에 현재의 규모로 확장,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축성의 구체적 방법을 보면 성벽 안쪽의 흙을 파서 호(壕)를 만든 한편, 그 파낸 흙을 내벽에 보축(補築)하였다. 성의 바깥 벽면은 기반토(基盤土)를 마치 판축(板築)하듯이 황색사질토와 적색점질토를 겹겹이 다져놓았고, 그 위에 돌을 3∼5단으로 쌓고 흙을 덮었다.
이런 방식으로 축조된 산성의 입지는 경사면이어서 원래의 경사도보다도 더욱 가파른 경사를 이룰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이 산성의 아래 너비는 7m 가량이며 높이는 대략 4∼5m에 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창지와 영일루가 있는 부근의 표고는 전면 70m, 후면 90m의 등고선을 따라 둘레 1,500m의 성벽을 거의 토축으로 축조하였다.
1981년의 사비성 복원 때 토성의 단면을 자른 결과 대개 아래로부터 A·B·C·D의 4층을 확인하였다. 맨 아래층인 A층은 붉은색의 진흙으로 판축하여 하부를 축조하였는데 층의 높이는 1.9m이며, 토루 바깥면에는 토루를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4단의 석축이 남아 있다. B층은 황갈색토층으로 북반부는 A층 위에 퇴적되었고, 남반부는 A층과 같이 아래서부터 쌓아올렸는데, 이는 A층을 고쳐쌓기 위해 B층이 축조되었음을 알려주며, 생토층으로부터 B층까지의 높이는 3.2m이다. 이곳에서는 연질의 백제시대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C층은 황갈색사질토로 판축기법을 사용하여 두께 3∼6㎝로 축조되었는데, B층의 바깥쪽 경사면을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수축된 것으로 보인다. 석재는 6합식(合式) 5단으로 쌓여 있는데 높이는 103㎝로 이 층에서도 B층과 같이 백제시대의 기와조각이 출토되었다. 맨 위층인 D층은 조선시대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부소산성이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수축·개축을 거치며 사용된 이용편년을 증명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전체성벽의 높이는 내면의 높이가 7.6m, 외면 높이가 3.4m, 너비는 8.6m이다.
한편,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표고 106m의 사비루 부근의 산봉우리 중심으로 약 700m의 테뫼형 산성이 있는데 50×50㎝, 70×60㎝의 백제시대 초석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 산성은 위의 두 산성이 연결되어 백제시대의 독특한 복합식 산성양식을 하고 있다.
성안에는 동·서·남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북문과 수구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동문지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대형철제 자물쇠가 발견되어 문지였음을 입증해주고 있으며, 남문지에는 아직도 문주(門柱)를 받쳤던 초석 2개가 동서로 나란히 있다.
1978년 금강상수도사업 공사로 인하여 성벽의 단면이 드러났는데 성벽 내부는 잡석으로 적심석(積心石)을 넣었음이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목책지(木柵址)와 수혈상(竪穴狀)의 주거지가 발견되었다.
이 산성은 성안에 군창지와 건물지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유사시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으로 보이나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는 비원으로서의 구실을 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사비천도 이후 백제 멸망시까지 국도의 중심산성으로서, 인근의 청산성(靑山城)·청마산성(靑馬山城) 등의 보조산성으로 왕도의 방어를 강화한 성곽발달사의 새로운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한민족대백과사전-
부소산성 입구
부소산문 앞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알림 표지비
부소산성은 서너번 갔었지만 다녀온지도 오래되었고, 산성이라는 생각이 없이 그냥 대문을 들어가 낙화암 위에 있는 백화정 百花亭까지 갔다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내려다보고 고란사에 가서 물 한모금 마시고 온게 전부 이다. 그런 것은 답사가 아니라 그냥 구경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소산성을 찾으면서 걸어보려고 부여행을 결정했다. 아내가 함께 가주었다. 날씨도 몹씨 더운데 함께 가주는게 고맙지만 때로 내 계획대로 답사가 되지 않으명 어쩌나 하고 약간 우려를 했다. 그러나 우려했던 것보다는 크게 방해 받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더울 것 같아 내가 다음으로 미루고 나왔다고 하면 좋을 것 같다.
부소산성에 대해 백과사전 수준의 공부를 하기는 했지만 산성의 윤곽을 거의 그리지도 못하고 출발했다. 부소산성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오니 온몸이 화끈할 정도로 뜨겁다. 지열이 온몸을 쪄내는 것처럼 덥다. 막바지 더위가 대단하다. 눈이 부셔서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선 매표소에 가서 입장권을 샀다. 대인 2000원이다. 그리고 매표소에서 부여군이 발행한 부소산성 안내서를 얻었다. 천천히 안내서를 살펴보니 부소산성길 위주로 안내되어 있다. 내가 찾는 산성 위주가 아니다. 사람들은 산성이라는 생각보다 부소산성은 하나의 산책길이라는 생각이 더 일반화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산성의 윤곽이 지도에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어 답사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부소산성 개념도
부소산성 축성 시대별 산성 개념도
부소산성은 다른 성과 다르다. 하나의 성으로 산정을 빙 두른 테뫼식 산성도 아니고 골짜기를 싸고 도는 포곡식산성도 아니다. 정상부를 빙돌아 쌓은 포곡식 산성이 합쳐진 이중의 성이다. 이 성은 총 길이가 2.5km 정도 되는데 포곡식 산성이 사비성이란 왕성의 외곽을 방어하면서 나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산성을 백제시대에 한꺼번에 쌓은 것이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증축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다시 쌓은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안내판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부소산문을 지나 안내도를 보면서 삼충사를 지나 영일루를 지나 조룡대 고란사로 가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 성을 제대로 보려면 그 길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삼충사 앞을 지나는 길이 아주 좋았다. 삼충사는 성충, 흥수, 계백 세 충신의 영정을 모시고 그 충렬을 기리는 사당이라고 한다. 밖에서 보아도 웅장해 보였다. 나는 성이 급하기 때문에 성을 찾아 발길을 재촉했다.
삼충사를 지나자 토성의 윤곽이 드러나 보인다. 삼충사를 뒤로 돌라 영일루 쪽으로 돌아드는 토성의 윤곽이다. 가슴이 뭉클하도록 반가웠다. 나무가 울창하고 지난해 가을의 낙엽이 그대로 있어서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산성은 흙으로만 쌓은 것이 아니라 아래 커다란 돌을 쌓고 위로 흙을 쌓은 것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영일루로 올라가는 이정표가 있었지만 나는 성 위로 난 비포장길을 따라 걸었다. 아내는 내가 산성을 따라 거친 길을 걷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말없이 따라왔다. 때로 성벽 아래로 내려가 보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가보기도 하면서 엉뚱한 길로 가는 나를 잘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윤곽이 뚜렷한 토성을 예전에는 왜 보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여기 저기 나 있는 길은 대부분 성벽 위로 나 있다. 생각에 길은 성벽을 피해서 성을 유지하면서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토성을 알아 볼 수 있도록 성벽만이라도 나무를 베고 잘 보존하면 어떨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문화재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알아서 할 일이다.
숲이 우거지고 사람들이 뜸하다. 영일루를 지나 군창터로가는 이정표도 지났는데 몇몇 남자들이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모습을 보았다. 지도를 보니 백제보 쪽에서 올라오는 것이다. 가만히 주변을 살펴보니 이곳이 테뫼식 산성과 백제보 쪽으로 백마강 가로 쭉 벋어나가 백제관광호텔 뒤편으로 갈라져 나가는 말하자면 산성의 사거리였다. 여기저기 살펴보니 백마강 쪽으로 가는 성과 군창지 뒤편으로 가는 테메식 산성이 보였다. 나는 너무나 신기해서 한참을 이곳에서 서 있었다.
성의 외벽은 상당히 높고 가파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백마강을 건너오는 적을 이곳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마도 부소산성은 아주 중요한 요새였던 것 같다. 평상시는 왕과 대신 등 고관들의 놀이터로 쓰이고 전쟁시에는 비상 피난지로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뚜렷하다. 성왕 시대에 쌓은 성이라고 한다면 족히 1500년은 되었을 텐데 많은 세월을 지나 현재까지 토성의 흔적이 뚜렷한 것을 보면 당시의 축성 기술을 짐작할 만하다. 문헌에서 토성의 단면을 보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4단계로 나누어 축성했다고 한다.(상단의 한민족대백과 사전 설명 참조) 오늘날처럼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힘으로 흙을 나르고 다지고 쌓았을 텐데 얼마나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인가? 오늘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는 하지만 동원된 백성의 고충을 생각해 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이다. 물론 축성의 기술이라든지 발굴되는 여러가지 유물 같은 것을 보면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고 높이 평가될 만한 일이다. 성을 보고 당시 사회 정치 경제 등 모든 면을 짐작하여 묻혀 있는 백제 역사를 다시 찾아 낼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이러한 문화 유산의 덕이다.
삼충사 뒤쪽에서 내려오는 산성의 모습
산성의 윤곽이 뚜렷하다.
성 위로 길이 나 있고 나무가 없으니 성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군창지 뒤쪽으로 가는 산성의 모습 -성 아래로 길이 나 있다.
백마강 쪽으로 벋어나가는 산성의 모습
무슨 작업을 했는지 훼손되었다.
테뫼식 산성의 모습
백제보로 내려가는 산성길
부소산 을 안고도는 산성길
멀리 백제관광호텔 뒤 백마강 앞으로 뻗어나간 산성의 흔적이 보인다
궁녀사를 지나 사자루를 지나 백화정에 이르렀다. 백화정에서 바라보니 백마강은 흐르는지 머물렀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최근에 마련된 백제보 때문이지 물이 많다. 백마강 유람선 선착자장은 타는 손님이 없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강 건너 들녘에 가을을 맞은 농작물은 옛날을 기억이나 할까? 평화롭기만 하다. 백화정에는 올라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몇명이 떠들며 사진을 찍는다. 백화정 아래 낙화암 설명은 마음 아프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근거로 적어놓은 삼천궁녀의 최후는 하나도 믿고 싶지 않다. 그 이야기가 진실로 있었던 사실이었는지 정말로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고 술에 취해 흥청거렸는지도 증명할 사람이 없다. 다만 일연이라는 한 스님의 기록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 전설의 목적이 삼천궁녀의 충절과 절개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장이고, 의자왕의 실정을 돋보이게 하려고 했다면 더욱 더 왜곡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의자왕이 패륜정치를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와 당나라가 가까워지는 사이 외교에 실패를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멸망한 나라의 역사가 긍정적이고 온전하게 기록되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왜곡되고 폄하되어 기록된 것이 안타깝다. 낙화암에서 백마강을 바라보며 낙화암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도 다만 몇 명의 궁녀나 백제 왕녀들이나 귀족의 부인이라도 몸을 날려 삶의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더위에도 마음은 서늘해졌다.
삼천궁녀의 전설을 안고 있는 백화정
슬픔을 담고 있는 백마강
고란사에 들어 목을 축였다. 물도 가뭄을 타는지 많지 않아 자루가 긴 구기로 떠서 아내와 한 모금씩 나누어 마셨다. 물은 차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지만 달게 넘어갔다. 극락보전에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 나왔다. 낙화암 삼천궁녀의 전설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자왕보다 삼천궁녀가 먼저 생각났다. 또한 백제의 중흥을 꿈꾸다가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성왕의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찬란한 역사가 한꺼번에 기울기 시작한 백제에 대한 향수로 우울함을 견딜 수 없었다.
12시가 넘었다. 배가 몹씨 고프다. 고란사에서 백화정으로 오르는 계단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 없었다. 자꾸 아래서 누군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기분이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관광안내소 주변에 테메식 산성의 흔적이 뚜렷하다. 풀을 베어서 더욱 확연하게 토성이 보였다. 이 산성의 성벽 위를 하나도 빼놓지 않고 걸어 보고 싶다. 아니 어느날 다시 혼자서 와서 맘 놓고 걸어 보리라. 아니면 하루를 부여에서 자면서 부여의 모든 문화 유적과 나성을 더듬어 보리라 마음 먹었다. 오늘은 그 윤곽만 확인한 것으로 만족한다.
나오는 길에 관광안내소에서 문화해설사라는 여인을 만났다. 그 분에게 백제에 대한 설명을 약간 들었다. 백제에 대한 애착이 깊었고 멸망의 역사와 부여의 문화재에 대하여 많은 상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산성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내가 산성에 관한 얘기를 하니까 그제야 산성에 대한 공부도 하겠다고 한다. 말씀에 의하면 문화해설사 시험에 합격하고 꼭 한달이 되었다고 했다. 나성에 대해 물으니 그 위치와 크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성의 위치만이라도 확인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고란사
반월루 뒤쪽의 토성
성곽의 흔적
관광안내소 문화해설사가 일러준 대로 조각공원 앞의 구드래 돌솥쌈밥집을 찾아 갔다. 주변에 차량이 많이 주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맛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돌솥주물럭쌈밥정식을 주문했다. 1인분이 15000원인데 반찬이 정갈하고 간이 맞았다. 쌈도 싱싱하고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이 준다. 굴비구이도 두마리기 있고 게장도 있다. 돼지고기 주물럭 구이도 간이 맞고 양념이 입에 맞았다. 돌솥밥이 뜨겁고 맛있다. 누구나 부여에 간다면 한 번 권하고 싶다. 음식맛에 비례하여 손님이 엄청나게 많다. 참을 수 없을 정도인 시장기를 서둘러 달랬다.
돌아나오다가 성왕의 동상이 생각나서 사진을 찍었다. 구진벼루 이야기를 쓸 때 사진을 올리겠다. 사진을 찍고 돌아서 나오는데 벌써 오후 2시이다. 이른바 점심 시간만 허용하는 주차 시간이 지난 것이다. 주차 단속반이 삐용삐용 협박하며 소리지르기에 서둘러 빠져 나왔다.
백제 대향로 기념 조형물 앞에서 우회전 하여 논산 쪽으로 가다가 나성 복원 공사 현장을 발견했다. 사진을 찍고 나성을 다시 와서 정말 꼼꼼하게 밟아보리라 마음 먹었다. 백제의 고도 부여를 돌았지만 또 수박 겉 핥기를 한 것 같다. 정말 다시 오리라.
백제여! 성왕의 뜻이여! 의자왕의 안타까움이여!
성왕의 동상
나성 복원공사 현장
(2016.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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