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종묘추향대제 宗廟秋享大祭 봉행奉行
▣ 2016년 11월 5일 오후 1시부터
▣ 2016 종묘추향대제 봉행 제관으로 봉행
▣ 정전 16실 초헌관
▣ 사단법인 종묘제례보존회
▣ 종묘추향대제봉행위원회
2016년 종묘추향대제에 헌관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종묘대제는 조선시대에는 연 4회 봉행되었었다. 그러던 종묘와 사직이 땅에 묻힌 일제 강점기에 종묘대제도 사직대제도 지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종묘와 사직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다. 광복 이후 종묘제례를 부활하여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1970년대 즈음해서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완전 고증을 거쳐 《宗廟祭禮》라는 책을 내셨다. 그래서 제례악과 제례가 무형문화재가 되었다. 또한 종묘제례가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이 되는 기틀을 마련하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즈음하여 문화행사로 추계대제를 봉향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끌어 유네스코 지정 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 받았다. 그 후 2000년대에 들어 5월 첫째 일요일에 지내는 대제는 문화재청에서, 추향대제를 신설해서 종묘대제봉향위원회에서 주관하여 봉행한다.
나는 이번에 세번째로 헌관에 나간다. 처음에는 2004년 정전 16실 초헌관으로, 다음은 퇴직 이후에 영녕전 영녕전 5실 정종 초헌관으로, 이번에 다시 16실 헌종 초헌관으로 봉행에 참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많이 들뜨고 긴장했으나 이번에는 오원군 종중 부이사장이 되어 일종의 책임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종묘
사적 제125호.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묘(廟)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 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왕이 도읍을 정하면 궁전 왼편에 종묘를 세우고 오른편에 사직을 세우게 하였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송경(松京 : 松都)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뒤 현재의 종묘와 사직을 세웠다.
종묘의 기원은 중국 우(虞)나라 때 시작, 은(殷)·주(周)대까지는 각각 7묘제(7대조까지 묘에 봉안)로 하였다가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우리 나라는 신라 시대는 5묘제, 고려 시대는 7묘제로 하였고, 조선 시대 초기에도 7묘제로 하였다. 즉, 7대왕 이상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조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적이 큰 왕은 만세 불후(萬世不朽)·조공 숭덕(祖功崇德)의 근본 이념에 따라 7대가 지나도 부조위(不祧位)인 정전에 모셨고, 조천된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하였다.
종묘의 건축은 중국의 제도를 본떠 궁궐의 좌변(左邊)에 두었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종묘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종묘 터를 결정하였다.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일차 영건이 끝났으며,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수와 증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정전은 국보 제227호, 영녕전은 보물 제821호로 지정되었다.
궁장(宮墻)으로 둘러싸인 넓은 대지의 남쪽 끝에 자리한 정문을 들어서면 정전에 이르는 주 도로가 왼쪽인 서쪽으로 나고, 오른쪽인 동쪽으로 굽어진 길 옆에 향관청(享官廳)이 자리잡고 있다. 향관청을 지나면 재실이 있는데, 이곳은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주 도로에서 꺾어 들게 되어 있다. 재실의 서측에 종묘 정전이 자리잡고, 그 서측으로 영녕전이, 정전 서남쪽으로 악공청(樂工廳)이 있다. 정전이 자리한 곳은 장방형으로 담장을 둘러쌓았는데, 남측 담장 중앙에 정전 대문을 달고 양 쪽 동서 담장에 측문을 달았다. 정문을 들어서면 넓은 월대(月臺 : 정전 앞에 있는 섬돌)가 있고 정문 중심과 이 월대의 중앙을 잇는 어도(御道)가 정전의 기단(基壇) 중앙 계단까지 연결되어 있다.
정전은 현재 정면 19칸, 측면 3칸이고, 좌우 익실(翼室) 각 3칸이지만, 본래에는 태실(太室) 7칸, 좌우 익실 각 2칸이었던 것을 여러 번 증축하였다. 장대석으로 쌓은 넓은 월대를 앞에 두었는데, 그 상면은 박석(薄石)을 깔았고, 어도는 전(塼)을 깔았으며, 곳곳에 차일(遮日)고리가 박혀 있다.
기단은 장대석 바른층쌓기로 하고, 이 위에 주좌(柱座)를 둥글게 다듬은 돌 초석을 놓아 두리기둥[圓柱]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익공(翼工 : 檐遮 위에 얹혀 있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 두 개와 첨차(檐遮 : 三包 이상의 집에 있는 꾸밈새)로 짜 이익공식(二翼工式)을 이루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전면 반 칸은 퇴(退)로 모두 개방하였고, 각 칸마다 큰 판장문 두 짝씩을 안여닫이로 달았는데, 중앙 칸에는 밖으로 빗장을 달았다.
툇간과 각 실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장은 넓게 방형으로 귀틀을 짜고 그 위에 판장으로 천장을 해 칸이 넓은 우물 천장이 되었다. 측면과 배면은 모두 전으로 두껍게 벽체를 쌓았으며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이루었다. 용마루와 기타 마루에는 양성을 하고, 취두(鷲頭)와 잡상(雜像)들을 늘어놓아 장식하였다.
정전의 정문 담장 안 동쪽에는 공신당(功臣堂)이 정면 16칸, 측면 1칸 크기로 홑처마 맞배집으로 서 있다. 영녕전 또한 장방형으로 담장을 둘러치고, 정문과 좌우 측문을 둔 속에 넓은 월대를 앞에 두고, 주실(主室) 정면 4칸, 측면 3칸, 좌우 익실, 동익실 정면 6칸, 측면 3칸, 서익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월대는 정전 월대와 같은 모양으로 박석으로 마무리하였고, 기단 또한 장대석으로 높이 쌓았다. 이 위에 주좌를 둥글게 마무리한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에는 주두를 놓고, 익공과 첨차로 결구, 이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전면 1칸은 툇간으로 개방하고, 그 안쪽 각 칸마다 두 짝의 안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중앙 1칸은 빗장을 달았다.
툇간과 각 실의 바닥은 강회다짐이고 천장은 정전과 같이 귀틀을 우물 井자 모양으로 짜고 널판을 깔았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맞배지붕을 이루는데, 지붕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와 잡상을 늘어놓았다. 특히, 영녕전의 뒷 벽은 초석과 두리기둥 부위는 판장으로 구획하고 나머지를 전으로 벽체를 쌓아, 힘을 받는 부분과 단순한 벽체부를 구조적으로나 시각적으로 분리한 수법을 볼 수 있다.
종묘내에 만든 어도들은 중앙이 높고 좌우가 낮게 박석을 깔아 만들었으며, 정전과 영녕전의 담장 밑에는 빗물을 담장 안에서 흘려 내보내기 위한 석루조(石漏槽)들을 두었다.
종묘제례
1975년 5월 3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5월 18일 종묘제례악과 함께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어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연원 및 변천
종묘 제향은 정시제(定時祭)와 임시제(臨時祭)가 있었는데 대제(大祭)로 봉행하였다. 정시제는 춘하추동 사계절과 납일(臘日: 동지 뒤의 셋째 未日)에 지내다가 1909년에 납일 제향을 폐지하고 사계절의 첫 달, 즉 춘 정월, 하 4월, 추 7월, 동 10월의 상순에 지냈다. 영녕전에서는 정시제를 춘 정월, 추 7월의 상순 2회만 지냈다. 그밖에 나라에 흉사나 길사가 있을 때마다 임시제인 고유제(告由祭)를 올렸다. 또, 계절 따라 햇과일과 햇곡식이 나오면 약식 고유를 하였는데, 이것을 천신제(薦新祭)라고 하였다.
일제하에서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겨우 향화(香火)만 올려 왔고, 광복 후에는 혼란과 전쟁 등으로 오랫동안 향화조차 봉행하지 않고 있다가, 1969년부터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제향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복식(服飾)과 제찬(祭饌)을 제대로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러다가 1975년 종약원은 종묘대제봉향위원회를 구성하였고, 정부에서도 지원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 제례 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행사내용
조선 시대의 종묘대제에는 왕이 세자와 문무백관·종친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와 친히 제향을 올렸는데 이것을 친행(親行)이라 하고, 왕이 유고로 친행하지 못할 때는 세자나 영의정이 대행하였는데 이를 섭행(攝行)이라 한다. 현재 정전과 영녕전의 제관은 각 능봉향위원회가 주축이 되고, 각 시·도 지원으로 인품과 제례 경험이 많은 종친을 추천받아 제관으로 위촉하고 있다. 제관은 친행시와 섭행시 그 품계가 달랐다. 각 신실별 제관은 초헌관·아헌관·종헌관·대축관·묘사(廟司, 우전관)·내봉관·외봉관·집준관(執罇官) 등 8명으로 편성되고, 그밖에 각 전별로 집례·감제관(監祭官)·천조관(薦俎官)·봉조관(捧俎官)·당상·당하·찬의(贊儀)로 구성되어 정전 163명, 영녕전 137명, 공신당 2명 도합 302명으로 편성된다.
대제 전날에는 전향축례(傳香祝禮), 제찬진설(祭饌陳設), 분향(分香), 분축(分祝) 행사를 한다. 전향축례는 종약원에서 정전 제1실의 초헌관이 제1실 대축관에게 축문과 향을 전하면 대축관이 이를 받아 종묘의 향안청(香案廳)에 봉안하는 행사이다. 당일 오전 9시에 영녕전 제향을 먼저 올리고, 12시에 정전 제향을 봉행한다. 제례는 신관례(晨祼禮, 강신례)·초헌례(初獻禮)·아헌례(亞獻禮)·종헌례(終獻禮)·음복례(飮福禮)·망료(望燎)의 순으로 진행된다.
(1) 신관례
찬의가 각 실 초헌관을 인도해 관세위(盥洗位: 제향 때 제관이 손을 씻는 곳)로 나아가 손을 씻은 뒤,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각기 자기가 복무할 신실 준소(罇所: 제향 때 술상을 차려 놓는 곳)에 서향하고 서서 감작(監爵)한다.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과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올린다. 각 실 준소 사준관이 용작(龍酌)을 잡고 술을 떠낸다. 집준관은 멱(冪)을 벗기고 용작으로 술을 떠서 용찬에 따른다. 이 때 외봉관은 용찬을 받들어 집준관이 따르는 술을 받는다.
각 실 초헌관이 신위 앞에 나가 꿇어앉아 향을 세 번 향로에 넣는다. 우전관은 향합 뚜껑을 열고 향합 밑을 받쳐 들고, 대축관은 향로를 받들어 초헌관이 분향하도록 한다. 초헌관이 용찬을 잡고 술을 땅에 붓는다. 외봉관은 준소에 준비된 용찬을 내봉관에게, 내봉관은 초헌관에게, 초헌관은 제상 앞의 구멍에 따른다. 빈 용찬을 내봉관에 주고 내봉관은 이를 받아 준상 위에 놓는다.
아버지께서 편찬하신 《종묘제례》
이후 종묘제례의 틀이 되었다.
외봉관이 준상에 준비된 폐백(幣帛)을 내봉관에게 주면 내봉관이 이를 받아 초헌관에게 주고, 초헌관은 이를 받아 대축관에게, 대축관은 제상의 작판 안 줄 가운데
위치에 놓는다. 찬의가 각 실 초헌관을 인도하여 본래의 위치로 내려간다.
천조관과 봉조관이 관세위로 나아가 손을 씻고 찬소(饌所)로 나간다. 대축관이 모혈반(毛血槃: 종묘와 사직의 제향에 쓰던 희생의 털과 피를 담은 쟁반)과 간료등(肝膋㽅)을 받들고 들어가 신위 앞에 올린다. 대축관이 간(肝)을 받들고 신실 밖으로 나와 숯불에 태우게 된다.
다음으로 찬(饌)을 올리는데, 이 때 모든 집사는 제찬을 덮은 복지를 벗겨 종이를 한데 모아 제상 아래에 보이지 않게 단정히 놓는다. 또한, 집준관과 외봉관도 준상에 있는 작은 종이를 벗겨 보이지 않게 놓아둔다. 찬의가 천조관·봉조관을 인도해 정문으로 들어간다. 풍안지악(豐安之樂)을 올린다. 대축관은 모혈반을 거두어 외봉관에게 주고, 외봉관이 이를 준소에 놓는다. 천조관이 상을, 봉조관이 조(俎)를 받들고 태계(泰階)로 올라가면 대축관은 계 위에서 읍을 하고 맞아들인다.
천조관이 제1실 신위 앞에 나아가 상을 놓고 꿇어앉는다. 봉조관이 조를 받들고 꿇어앉아 천조관에게, 천조관은 대축관에게 주면 대축관이 신위 앞에 올린다. 제1실 대축관은 서(黍)와 직(稷)을 기름에 섞어 숯불에 태운다. 악이 그치고 찬의가 천조관·봉조관을 인도해 제자리로 내려간다.
(2) 초헌례
각 실 초헌관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가 준소 앞에서 서향하고 감작한다. 보태평지악과 보태평지무를 올린다. 집준관이 술을 떠내어 작에 붓는다. 이 때 외봉관은 작을 받들고 있어야 한다. 외봉관이 작을 내봉관에게 주면 내봉관은 이를 헌관에게 준다. 헌관이 이를 대축관에게 주면 대축관은 맨 서쪽 작판에 올린다. 외봉관이 다시 작을 내봉관에게 주면 내봉관은 헌관에게 주고, 헌관은 이번에는 우전관에게, 우전관은 이를 비위(妃位)전 작판에 올린다. 헌관과 집사 및 참반원(參班員)이 부복하면 악을 그치고 대축관이 동쪽을 향해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다시 악을 올리고 헌관, 집사 및 참반원은 일어난다. 찬의가 각 실 초헌관을 인도해 원 위치로 내려가면 악을 그친다. 다시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올린다.
(3) 아헌례
아헌례 때는 삼상향(三上香)과 독축(讀祝)이 없고, 악과 무(舞)는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과 정대업지무이다. 그 밖의 순서와 절차는 초헌례와 같다.
(4) 종헌례
아헌례와 순서와 절차가 같다.
(5) 음복례
제1실 초헌관이 음복할 위치로 나아가 작과 조를 받는다. 제1실 대축관이 제1실 준소로 나아가 작으로 뇌(罍)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 신위 앞의 조육(俎肉)을 덜어내고 대축관은 작을, 내봉관은 조를 받들고 음복위로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선다. 초헌관이 음복위에 나아가 서쪽을 향해 앉고, 대축관이 초헌관의 왼쪽으로 나아가 북향해 꿇어앉아 작을 초헌관에게 주면 초헌관이 이를 받아서 마신다. 마신 작을 내면 대축관이 빈손으로 받아 점(坫)에 놓는다.
대축관이 북향하고 조를 초헌관에게 주면 초헌관이 받아서 집사에게 주고, 집사는 초헌관이 제자리로 내려간 다음 대축관과 함께 제자리로 간다. 음복례 때 쓰인 조는 준상에 놓는다. 모든 헌관과 천조관·봉조관·공신헌관이 국궁사배한 뒤 일어나면 변(籩: 대오리를 결어 만든, 과실을 담는 제기)과 두(豆: 제사 때 쓰는 목제 식기)를 거둔다.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올린 다음 흥안지악(興安之樂)을 올린다. 모든 헌관과 천조관·봉조관·공신헌관이 국궁사배하고 일어나면 악이 그치면서 대축관이 독을 덮고 신주를 모셔 들인다.
(6) 망료
초헌관이 망료 자리로 나아간다. 이 때 제1실 대축관이 각 실에서 모아 온 축문을, 제1실 우전관은 각 실에서 모아 온 폐를 받들어 망료위(望燎位)로 나아가 축문과 폐를 태운다. 초헌관이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든 집사가 배위(拜位)로 내려가서 국궁사배하면 예필(禮畢)을 알린다.
정전 16실 헌종성황제, 효현성황후 김씨, 효정성황후 홍씨
헌종 1827년(순조 27) 07월 18일 ~ 1849년(헌종 15) 06월 06일
본명 이환(李奐)
외척 풍양 조씨의 보도 속에 즉위한 헌종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였다. 이름은 환(奐), 자는 문응(文應)이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純元王后,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어 1837년(현종 3)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孝顯王后)를 왕비로 맞이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헌종이 14세가 되던 1840년(헌종 6)에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씨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되었다. 조만영의 아들이자 신정왕후의 오빠인 조병구, 조득영(趙得永)의 아들 조병현(趙秉鉉) 등이 조인영과 함께 헌종 시대의 세도정치를 이끌었다.
헌종은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며 궐의 아름다운 궁녀들과 모두 관계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사는 없었다.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가 1843년(헌종 9)에 죽자 이듬해 홍재룡(洪在龍)의 딸 효정왕후(孝定王后)를 계비로 맞이했다. 이 밖에 두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이들 모두 후사를 잇지 못했다.
천주교 탄압과 이양선의 출몰
헌종이 즉위한 시기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한 때였다. 18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들은 무역과 포교를 빌미로 동양에 대한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잦은 이양선의 출몰에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조정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한 풍양 조씨 세력은 척사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주도했다. 물론 헌종도 이에 동조했다. 헌종은 1839년(헌종 5)에 조인영이 지어 올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반포했다. 〈척사윤음〉은 유학을 정학(正學)으로 규정하고 그에 반하는 서학(천주교)은 사학(邪學)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척사귀정(斥邪歸正)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39년(헌종 5)에 시작해 1840년(헌종 6)까지 프랑스 인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해 천주교도 70여 명을 처형한 기해박해(己亥迫害)는 이러한 척사귀정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 세력을 함께 제거하고자 했다. 이때 이러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천주교 박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에도 헌종과 풍양 조씨의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846년(헌종 12)에 프랑스 해군 함장 세실(Cécille)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 충청도 홍주에 위치한 외연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에게 전달할 국서를 가지고 있었다. 국서의 내용은 기해박해 때 프랑스 인이 처형된 것에 대한 항의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협박이자 문호 개방에 대한 압력이었다. 세실은 국서를 조선의 왕에서 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외연도의 지방관과 주민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실은 국서를 두고 떠나면서 다음 해에 다른 군함이 답변서를 받으러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내용은 곧바로 헌종에게 보고되었다. 헌종은 영의정 권돈인(權敦仁)과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의논했다. 헌종은 이를 청나라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으나 권돈인은 앞서 기해년에 프랑스 인 신부를 죽인 일도 보고하지 않은 마당에 이 일을 보고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번 사술(邪術)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불랑선(佛朗船, 프랑스 배)이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라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천주교를 더욱 탄압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어 헌종은 당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사학 죄인 김대건(金大建)을 효수에 처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은 기해박해 때 처형된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사제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헌종은 세실 제독의 군함 출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김대건과 여러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천주교는 고단한 조선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듬해 프랑스의 군함 글로아르 호가 세실 함장이 전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며 조선의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군함이 전라도 만경의 고군산열도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고, 선원들은 고군산도에 약 1개월간 머물다가 중국 상해에서 빌려 온 영국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행여 후환이 있을까 우려해 대책을 마련했다. 결국 세실이 보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그간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 프랑스 선박의 동정과 기해년에 프랑스 신부를 죽인 사실 등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청나라 예부에 전달했다. 청나라에서 이 문서를 프랑스에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문서는 조선이 서양에 보낸 첫 외교문서였다.
흉흉해진 민심과 흔들리는 왕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조병구는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수레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만 수레가 뒤집어져 조병구는 땅에 머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외척 세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은 1849년(헌종 15) 6월 6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헌종이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왕실에는 그의 뒤를 이을 6촌 이내의 친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남은 친족들도 신유박해로 모두 죽고 없었다. 이것은 500년 가까이 이어 온 왕실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헌종 사후 그 후사를 잇는 일은 흔들리는 왕실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이것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세력 다툼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죽자마자 옥새부터 찾았다. 그리고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全溪君,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의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결국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간 셈이었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역병이 돌아 삶의 터전을 버린 백성이 수없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민란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층은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올랐다.
헌종의 능은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 내에 위치한 경릉(景陵)이다.
종묘제례를 학술적으로 완전한 복원을 이루신 아버지에 대한 한 기사
'인간문화재' 이은표 옹 별세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보유자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인 ‘종묘제례’ 보유자 이은표(李殷杓 사진) 옹이 향년 90세를 일기로 지난 11월29일 오전 2시35분께 충북대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1914년 충북 청주시에서 태어난 이 옹은 1977년 ‘종묘제례(宗廟祭禮)’에 대한 연구와 전승을 담당해온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전례연구위원회 간사를 지냈고 1988년 4월 중요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또 이 옹은 이후에도 궁중의례 복원 및 전승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왔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종묘제례 및 제례악은 UNESCO 세계인류무형유산으로 선정된 바 있다.
2003년 11월 90세로 돌아가신 아버지
▣ 봉행기
오전 7시 30분 시외버스로 올라갔다. 종묘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좀 넘어서이다. 제복으로 갈아입고 제향을 준비하는 전사청으로 가니 아직 환복할 시간이 아니라 한다. 10시에 이미 제향이 시작된 영녕전으로 갔다. 정녕전 제향에는 참반원이 많이 없었다. 절차는 정전과 같으니까 종묘제레를 귀히 여기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우리는 외국에 나가서 외국 문화를 수십 달러씩 주면서 외국의 문화행사를 선택관광을 하는데 정작 우리 문화인 종묘제례 같은 어마어마한 행사는 돌아보지 않는다. 영국의 버킹검궁의 퍼레이드도 훌륭하지만 이만큼 장엄하고 음악과 제례가 함께 실제로 거행되는 행사는 보지 못했다. 들어가기도 쉽다. 종묘 입장료만 내면 된다. 아니면 정문 앞 종묘제레 안내소에서 참반원 표찰만 얻어서 차면 된다.
영녕전 제향을 보다가 시간이 되어 전사청으로 얼른 가 보았다. 오후 2시에 봉행되는 정전 제관들에게 도시락을 배부하고 있었다. 정전 제관은 모두 163명이다. 초헌관만 19명이다. 나는 줄을 서서 도시락을 받았다. 도시락이지만 진수성찬이다. 전사청 마당에서 제관들 사이에 섞여 천천히 도시락을 먹었다. 제관은 대개가 일가들이다. 그러나 왕의 외척 자손들이 제관으로 참여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실제로 제향을 봉향한다면 정부의 장관을 비롯한 벼슬아치들이 나와야 한다. 총리가 초헌관을 하고 장차관이 헌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복으로 갈아 입는데 하도 복잡해서 전례연구위원들이 도와주었다. 먼저 한복을 입고 도포를 입은 다음 그 위에 제복을 입는다. 검은 제복은 치마, 학대, 패옥, 금관 등 순서와 입는 방법을 잘 몰라 쩔쩔매었다. 두 번이나 해 보았지만 할 때마다 잊어버려서 알 수가 없다.
제복만 입으면 초헌관은 어려울 게 없다. 제관 행진은 15실 초헌관 뒤를 밟으면 되고 신관례와 초헌례만 마치면 된다. 나는 아버지를 이어 집례를 맡은 종묘제례 인간문화재인 이기전씨의 홀기를 들으면서 천천히 따라했다. 이기전씨의 홀기는 힘이 없었다. 그 분도 이미 80이 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80이 넘으셔서도 종묘 너른 마당이 쩡쩡 울렸었다.
사실은 봉행 직전에 기전씨에게 인사를 드렸다. 내게는 숙행이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하니 덤덤하게 받았다. "청주의 방주입니다" 하니 "아, 오랜만이라 몰라봐서 미안 해."했다. 손도 잡아 주지 않아 섭섭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10년이 넘으니 그 분도 아버지의 은혜를 잊었나 보다. 처음에는 그렇게 반가워하더니 말이다. 아버지의 그늘이 점점 흐릿해지는 모양이다. 아버지로부터 은혜를 받은 대표적인 두 분은 종묘제례 인간문화재가 된 기전씨와 사직대제 인간문화재가 된 건웅씨이다. 사직대제는 완전히 땅에 묻힌 것을 아버지가 부활하셔서 건웅씨를 기능보유자로 만들어 줬다. 그런데 그 후에 서울 지역 신문에서 마치 자기가 아버지 도움을 받아 사직대제를 부활한 것처럼 쓴 기사를 읽었을 때 배반 당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기전씨는 아버지를 배반하지는 않았다. 그 분의 기사를 보니 아버지에 대한 향수, 은혜 같은 것을 자세히 밝히고 있었다. 역시 아버지는 그 분을 잘 믿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기전씨도 이제 나이가 들었는지 창홀이 제례악 소리에 묻혀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창홀 소리에 맞춰 내가 할 일을 다 했다. 다만 마당에 서서 기다리는 동안 다리가 많이 아팠고 어느새 행전이 내려가서 바지가 다 보였다. 초헌례를 끝내고 아헌례 음복례, 망료가 끝날 때까지 지루해서 조금 두리번 거리다가 참반원석에 있는 이쁜 딸 기현이를 발견했다. 기현이가 손을 흔들었다. 반가웠다. 사진 한 장도 못 찍는 줄 알았는데 그리고 이 너른 서울 땅에서 이쁜 딸을 보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나중에 들으니 딸래미도 늘어선 제관들 속에서 아버지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종묘 정문
종묘 정문을 들어서면
조용한 종묘 내부
전사청 쪽에서 본 정전의 모습
정전은 아직 조용하다
정전 신실 배치도
영령전 가는 신도
전사청에서 정전 앞을 지나 영녕전 가는 길
영녕전의 정문 가운데 문은 신위만이 지날 수 있다
영녕전이 멀리 보인다
영녕전에서 본 정전
제향이 진행되고 있는 영녕전
영녕전 제향-당상악 당하악이 뚜렷이 보인다
영녕전 제향 바로 앞이 당하악
영녕전 제향
정전 제향 중- 초헌관들
정전 제향 헌관들
제례를 마치고
긴장했던 제례는 끝나고
제례가 끝나고
종묘 앞 이상재 선생 동상
다시 내 옷으로 갈아입고 기현이와 함께 나오면서 헌종에 대해 이야기 했다. 8세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풍양조씨 세도에 묶여 왕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실정만을 거듭하다 23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딱한 임금이다. 왕권을 능가한 신권의 횡포가 가장 성했던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시대이다. 이 때 안동김씨 풍양조씨들이 나랏일을 휘둘렀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총명한 지도자가 나와서 막강한 권력으로 또는 총명한 두뇌로 나라를 바로 이끌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정말 왜 헌종 같은 임금 앞에 초헌관으로 잔을 드려야 했을까? 헌종은 여자를 좋아하여 궁녀들과 많은 관계를 가졌지만 왕자를 두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후손으로는 공주도 없다. 능침은 구리 동구릉의 경릉이다. 후손이 없어 기신제도 거르는 것을 아버지께서 경릉봉향회를 조직하셔서 오늘날까지 성대한 능제향을 지낸다. 올 봄에도 다녀 왔다. 나는 경릉에서도 몇 번 제관으로 참여했다. 아버지는 헌종의 정치를 다 아시면서 왜 그런 노력을 하셨을까? 그냥 아버지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떤 뜻을 가지셨을까? 아버지는 '예란 정에서 나온다(禮出於情)'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셨고 제례의 기본을 거기에 두셨다. 아마도 실정을 거듭하고 외척의 세력에 권력도 다 빼앗기고 실권도 없이 할 수 없이 여색에만 빠져 있다가 후궁까지 두었어도 자손도 없이 가버린 젊은 군주에 대해서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을 느끼셨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는 이러한 임금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가지셨을 것이다.
지금은 나라가 정말 혼란하다. 대통령이 한 여인에게 모든 권한을 내주다시피 했다. 아니면 한 여인이 대통령을 앞세우고 뒤에 따라가면서 모든 짐승을 호령하는 호가호위하도록 버려 두었다. 주변의 총리, 비서관, 장차관들이 다 보고 알았을 것이다. 아니 그 여인의 손을 통해 대통령 가가이에 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여당의 대표가 대통령을 만나기 힘들었던 것도 그런 연유일지도 모른다. 높은 벼슬아치들이 알면서도 직간을 하지 못한 것은 정치의 목적을 국민에 두지않고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을 이 앞에 헌관으로 세웠으면 어떤 생각을 하며 봉행했을까? 아마도 헌종 같은 이런 임금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안했을 것이다. 아니 절대로 저꼴은 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을 것이다. 복철지계나 타산지석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니 종묘제례는 국가행사니 만큼 우리 전주이씨들이 할 게 하니라 대통령을 1실 초헌관으로 하고 국가의 고위직 공무원이 제관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리하면 의외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늘 자신을 역사에 비추어 돌아보는 지도자가 이 나라에는 절실히 필요하다.
딸이 사주는 저녁을 먹고 내려오면서 내가 만약 누군가의 지도자, 작은 모임이라도 리더 노릇을 해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힘들었지만 오늘 참 뜻 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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