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필작가회 문학세미나가 3월 16일 문학의집 서울에서 있다. 나는 이날 고동주 선생님의 주제발표에 이어 지정토론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날 발표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여러가지 여건이 좋지 않았다. 첫째는 내 원고를 비롯한 지정토론자 3명의 원고를 세미나 자료에 싣지 않았다. 둘째 정기 총회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세미나를 열 분위기도 못되었다. 셋째 소용되지 않은 손님이 시간을 많이 잡아 먹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하여 정작 세미나 시간을 줄여 달라고 실무진의 요청이 있었다. 그래서 원고대로 발표하지 못하고 줄여서 말했다. 여기 본래 원고를 싣는다.
내일을 여는 오늘의 과제
-한국수필작가회
고 동 주
1, 들어가며
고대로부터 국문학적 유산 중에 수필의 범주에 들어 갈만한 글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한문시대 일부와 훈민정음 반포 이후, 갑오개혁 이후까지를 고전수필시대로 보고, 그 시대를 지나서 오늘날까지를 현대수필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고전수필시대의 작품 종류를 보면, 대개 궁중비화를 비롯한 기행문, 일기, 야담 등 비교적 그 시대적 특성을 다룬 내용이었으며, 그런 배경 때문인지 대개 간명하게 관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현대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 이후 많은 세월이 흘렀으나 본격적인 문학의 범주에는 들지 못하면서도 독자를 매료시키는 품위를 유지하면서까지 이어져 왔다.
그러다가 1971년에 언론계, 학계 등의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수필문학회가 드디어 탄생하게 되었다. 창설 당시 조경희 회장을 비롯한 서정범 주간을 중심으로
『수필문예』를 발간하였으며, 그것이 『한국수필』의 모태(母胎)였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수필이 문학 장르에 정식으로 포함된 텃밭이 되었으며, 우리시대 수필문학의 새로운 터전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별도로 수많은 수필 전문지가 따로 나타나는 등 수필은 급속도로 성장하였으며, 지금은 (2015년) 한국문인협회 총 회원 12,700여 명 중 수필가가 3,200여명을 차지하여 시인 다음으로 두 번 째 비중이 되었다.
이런 급성장이 반드시 긍정적인 평가 보다는, 질적 저하로 인한 부정적인 평가도 더러 있다. 그러니 한국수필작가회 만은 수필의 새 시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별한 결의를 다지고, 거듭나기 위해 총력을 기우려야할 처지에 놓여있다.
2, 당면과제
가, 시대적 배경
수필문학 잡지사와 수필가가 급속도로 증가되는 것까지는 바람직한 현상이나, 디지털 시대를 맞아 전자매체가 문자매체를 흔들고 있음이 또 다른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한편 수필가를 등단시키는 풍토마저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등단 희망자 중 우수한자를 가려서 등단시키던 전통마저 무너지고 있어 아타까운 현상이 초래되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학장르가 이렇게 어두운 현상을 빚고 있지만, 그런 결과를 보고 수수방관할 처지가 못된다. 어떻게 해서라도 수필문단의 위상을 실추시키는 구체적인 원인을 찾아 개선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다.
나, 작품의 질적 향상
어떤 조건이 닥치드래도 우선 급한 것이 작품의 질적 향상이다. 더 깊이 통찰하고, 사색하고, 고뇌하면서 수필의 매력을 독자 들이 느끼게 해야 한다. 신선한 소재로 흥미 있고, 정과 진실이 묻어 있고, 개성과 감동이 녹아있는 질 높은 수필을 대했을 때라야 비로소 작가와 독자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
3, 구체적인 발전 방향
수필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어렵거나 길지도 않고, 허구가 아닌 진실을 바탕으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을 제시해주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문장이 곧 수필이며, 인격이라는 등식이 성립 될 정도로 문장을 중요시 하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수필은 디지털을 비롯한 새로운 시대, 새로운 여건 속에서도 적응하고 발전할 수 있는 유력한 문학 형태다. 더구나 한국수필 작가회 회원들은 수필의 종가(宗家) 다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수필의 질적 수준을 위한 남다른 노력이 요구된다. 그래서 여기에 신입회원들을 위하여 ‘좋은 수필’과 ‘좋지 않은 수필’의 대강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좋은 수필
1) 읽기 쉬운 글
문장을 읽어가는 가운데 군더더기가 없이 산뜻하게 이어져야 한다.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우선 표현을 쉽게 하여야하며, 내용은 진지하고 구수하게 엮어야 한다.
2) 간결한 문장
문장이 너무 길면 호흡처리가 곤란하고, 산만하여 글의 뜻을 파악하기 힘들게 된다. 간결하면서도 짧은 문장이야말로 수필에 있어서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나, 때로는 긴 문장과도 어우러져 리듬을 유지해야 되는 때도 있다.
3) 강한 인상을 주는 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거나, 다른사람이 흔히 쓴 글을 다시 쓰면 진부하여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다. 자기만의 독특한 소재나 단어를 발굴하여 생기가 넘치게 써야한다. 그래야만 강한 인상을 주는 살아있는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즐거움을 주는 글
시적인 그윽한 정서가 감돌고, 소설처럼 잘 짜인 이야기가 있고, 재치도 있고, 진리가 들어있어야 재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진실성과 예술성이 있어야 하고,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여야 한다.
5) 품격이 넘치는 글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이, 글에서도 문격(文格)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더러 저속한 내용으로 품격을 상실한 경우를 만날 때가 있다. 그런 경우를 면하려면, 복잡한 세상사의 일을 글로 쓰되 그대로 쓰지 말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여과시켜 품위 있게 써야 할 것이다. 그것을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이라 하는데, 그 심안을 반드시 거쳐야할 것이다.
난(蘭)에 대하여 글을 쓰면 여기에 향이 머물러야하고, 인생을 이야기하면 사랑이 깃들어야 한다. 바다를 노래하면 물새들이 머물러야 하고, 황야를 그리면 역사 속의 말발굽소리가 들려야 한다. 연인끼리 애정을 그리되 일정한 간격이 있어야 하고, 지나간 추억 속에는 절실한 그리움이 머물러야 한다.
그것이 글의 품격, 즉 문격(文格)이라 할 수 있다.
6) 진솔한 글
수필은 진솔해야 함이 생명이다. 그것이 최대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솔직하면서 구수하게, 담담하면서도 거짓없이, 유머스러우면서도 지성적인 감각이 있어야 한다. 수필의 문학성을 위하여 소설처럼 허구(虛構)를 인정해야 된다는 일부 주장도 있으나 많은 수필가들은 수긍하지 못하고 있다.
나, 좋지 않은 수필
1) 표현이 서툰 글
아무리 좋은 내용의 글이라도 서툰 표현이 나타나면 문학적으로 실패작이라 할 수 있다.
쉽게 표현할 수 있고, 간단하게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어렵고 장황하게 늘어놓거나, 별 의미도 없는 것을 횡설수설하는 것도 서툰 축에 든다. 다 읽고 나서 마음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고, 무엇 때문에 이 글을 썼는지 감을 잡을 수 없으면 수필의 범주에 들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 남을 가르치려 들거나 자기를 내세우는 글
남에게 설명조로 가르치려 들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도 수필에서는 금하는 사항이다.
또 남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지식을 자기 혼자 아는체 하는 것과, 설교조의 어설픈 철학을 펴는 것도 독자에게 정감을 주지 못한다.
3)개성이 없는 글
남들이 아직 찾아내지 못하는 주제를 선택해야 신선한 맛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다. 남들이 이미 표현했거나 수없이 반복한 단조로운 문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싱겁고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
글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여 문학의 체로 걸러서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때 개성 없는 평범한 글이 되어 독자로부터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4)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
옛날 집 짖는 목수가 기둥을 깎을 때, 먹줄로 선을 긋고 불필요한 부분을 도끼로 깎아내듯, 글도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야 한다. 그러나 군더더기는 글 쓴 사람에게는 잘 발견되지 않는 법이다. 같은 또래의 글벗끼리 바꾸어 보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군더더기가 없으면 글을 이해하기 쉽고, 읽는데 리듬감도 있어 부드러운 인상으로 마음에 와 닿게 된다.
4, 나가며
『한국수필』이 탄생한지 45년째를 맞이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헤치면서 사단법인으로 성장하는 등 진취적 기상을 보였다.
1987년도부터는 추천 받은 사람들끼리 한국수필 작가회를 결성하여 동인지를 발행하고 친목을 도모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바와 같이 한국수필을 문학의 대열에 올려놓은 종가(宗家)집 답게, 그 구성원의 수준도 남달라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후(産後) 진통만큼의 아픔도 이겨내면서, 발전을 위한 전진의 길을 달려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전 회원이 감미로운 향취와 빛깔을 지닌 감동스런 수필을 쓰도록 힘써야 하리라. 항상 질적 성숙의 과제를 짊어지고, 선도적 역할을 하는데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역사적인 바람직한 임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질의 토론 원고
융합시대融合時代에 적응하는 수필의 문학성 제고의 방향
한국수필작가회
이방주
평소에 존경하는 고동주 선생님, 높으신 연세에 먼 길 오셔서 긴 시간 동안 적절한 주제로 발표해 주셔서 저희 후배들에 깊은 깨달음을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고전수필에서부터 현대수필에 이르기까지 발전과정을 짚어 주시고, 특히 한국 현대문학에서 수필이 단단한 터전을 마련하는데 기여한 한국수필작가회의 공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셔서 자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한국수필작가회가 수필문학 발전을 위하여 기우려야 할 방향을 제시하여 주셨습니다. 그중의 하나로 수필의 특성을 이해하고 좋은 문장으로 질 높은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현대 수필의 종가宗家로서 책무를 다하는 것이라 말씀하시면서 일일이 좋은 수필과 좋지 않은 수필의 요건을 나열하셔서 작가들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현대 문학에서 차지하는 수필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그 만큼 많은 문제를 안고 있어서 수필 문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는 데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하는 것이 해결 방안을 찾아내는 지름길이라 생각하여 두 가지만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현대 사회를 융합의 시대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모든 생활 문화에서 양식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통합으로 보다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스마트 폰이라는 이름으로 전화와 컴퓨터 카메라가 통합된 것이 그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학도 이에서 벗어날 수 없어서 수필 같은 소설, 수필 같은 시가 나오고 있습니다. 본래 서정과 서사의 융합적 성격을 지닌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들과 아주 쉽게 통합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허구적 서사로 일관한 수필, 서정적이고 음악성이 강화된 문장으로 시적 성격을 지닌 수필, 아포리즘 수필, 낯설게 하기의 남용 등 전통 수필의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수필의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한다는 이름으로 시도되는 갖가지 색깔의 어려운 실험수필은 대중이 수필을 떠나는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수필의 본래 문학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최근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중에서 수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의 밥상’ ‘걸어서 세계 속으로’ 같은 영상물 쪽으로 독자들의 눈이 쏠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우려됩니다. 융합시대에 맞는 수필은 형식적 융합이어야 하는지 주제나 소재의 융합이어야 하는지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둘째, 선생님께서 수필가의 숫자를 제시하시고 문단에서 차지하는 수필의 비중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작가의 숫자가 ‘문학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한 작가가 다른 많은 작가의 벼릿줄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문단의 현실은 정치가 문학을 닮아야 하는데 문학이 타락한 정치의 세계를 닮아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바람직한 수필의 발전을 위하여 원로 수필가로서 수필가가 지녀야 할 건전한 작가의식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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