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고향 윗버들미
물을 가득 잡아 놓아서 거울 같이 맑은 다랑논에 녹음이 우거진 쇠재가 거꾸로 잠겨 있었다. 뻐꾸기, 꾀꼬리, 산비둘기의 노랫소리가 다랑논에 비친 산 그림자에서 울려 나오는 것 같았다. 송홧가루가 날아 와서 논둑 가장자리를 따라 노랗게 퍼져 있었다. 조용히 모내기를 기다리는 다랑논이 마치 날 받은 색시처럼 다 받아들일 듯 안존한 자세여서 내 마음이 조용히 잠기는 것이었다.
- 목성균의 「다랑논」에서-
목성균 선생의 「다랑논」을 읽고도 그의 고향을 그려보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기어이 찾아간 괴산군 연풍면 유상리 윗버들미는 비에 촉촉이 젖어 생기에 넘쳐 있었다. 지름티고개 아래 윗버들미의 마지막 마을인 요골은 선생의 작품 「새우젓」에 ‘윗버들미 놈의 입에 새우저-엇’, ‘요골 놈의 입에 새우저-엇’하는 우스개인지 비아냥거림처럼 고향 떠난 옛 개구쟁이를 맞이하듯 나를 받아 주었다. 멀리 수안보로 넘어가는 지름티 고개는 하얀 구름이 녹음을 감싸 안으면서 낭만적인 마을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내가 목성균 수필가를 처음 만난 것은 그의 작품집 『명태에 관한 추억』이 출간된 이듬해이다. 『명태에 관한 추억』은 구경도 못하고 홈페이지에서 작품 몇 편을 읽은 뒤라 만나 뵙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수필가의 출판기념회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누군가 ‘목성균 선생님 오셨네.’하고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듣고 어느 분인가 물어서 찾아갔다. 청주 사람이면 다 아는 분인데 나는 그렇게 어둡게 살았다. 인사를 드리자 ‘한번 만나고 싶었다.’면서 나의 졸작 「새우젓」에서 맛있는 새우젓에 대한 표현을 언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에게도 「새우젓」이란 제목의 작품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누비처네』를 보고 알았다. 서로 이웃에 사는 것을 알고는 ‘자주 만나 소주라도 마시자.’고 했다. 그것은 말뿐이었고 내가 직장일로 바빠서 단 한번 만나지 못한 채 부음을 들었다.
참 훌륭한 문인을 잃었다는 생각으로 닫히지 않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작품을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홈페이지까지 빗장을 걸게 되어 아쉽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 첫 작품집 『명태에 관한 추억』과 유고집『생명』에 실린 작품을 모아 목성균 수필전집『누비처네』가 나오자 수필문단에 바람이 일었다. 나도 바람에 휩쓸려 『누비처네』를 읽었다. 한 번 읽고 또 한 번 읽고 다시 한 번 읽었다. 처음 읽을 때는 하루에 한두 편씩 읽고, 두 번째 읽을 때는 열편 이상씩 읽고, 세 번째는 다시 천천히 읽었다. 『누비처네』를 읽으면서 이규보, 박지원, 이양하, 윤오영의 수필을 따르려던 나의생각이 더 굳어졌다. 한번 읽기를 마쳤을 때는 마음속으로 내가 따르는 수필문학 계보의 끝자리에 '목성균'을 더 적어 넣을까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래서 꼭 한번은 작가의 고향을 들러보고 싶었다.
윗버들미 마을은 꼭 수필처럼 안온하게 생겼다. 백두대간이 흘리고 떠난 한 줄기 지맥이 이 마을을 싸고돌았다. 말이 지맥이지 그 기상은 바로 가까이 꿈틀거리는 백두대간을 닮아 있다. 북으로 지름티 고개를 진산으로 하고 , 유지봉을 좌청룡으로, 포대봉을 우백호로 삼아 마을을 감싸 안았다. 백두대간 악휘봉이 골짜기 끄트머리에서 살그머니 얼굴을 보여준다. 포대봉 쪽으로 쇠재가 있어 바깥세상으로 통한다. 유지봉은 발아래 갈매실 냇가를 만들어 놓고 개구쟁이들의 영혼을 기르는 텃밭으로 삼았다. 산줄기 밖에서 보면 마을이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데, 갈매실 냇가를 따라 지금은 포장도로가 된 2차선 도로를 타고 윗버들미까지 들어오면 세상은 무릉도원처럼 넓고 평평하다. 도연명이 무릉도원에 가서 본 것만큼이나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묻어 있고 모든 푸나무들이 생기에 넘쳐 있다. 비 맞은 사과알에서 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한 지붕은 비를 맞아 윤기가 흘러 평화롭고, 동글동글 부푼 젖가슴처럼 포근한 봉우리마다 하얀 구름이 느릿느릿 게걸음을 걸어 녹음을 밟고 지나간다. 유지봉을 바라보고 동향으로 지은 작가의 생가를 두드리자 마음씨 넉넉해 보이는 칠십대 노인이 맞아주었다. 앞서 참깨밭에서 만난 작가의 어린 시절 친구나, 생가를 넘겨받아 살고 있는 분이나, 모두가 이승을 등진 작가가 정이라는 끈으로 이어 놓고 있는 지 따뜻한 정감을 지니고 있었다. 문자로 기록하지 않아 문학이란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뿐이지 이 마을 산야를 바라보면서 짠지 찢어 밥에 얹어 먹은 사람들 모두가 수필가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목성균 선생은 아주 짧게 작품 활동을 하고 아주 굵게 문학 인생을 마쳤다. 짧지만 굵게 문학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반은 고향 자연의 덕택이고, 반은 고향 사람들의 은혜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문인의 고향은 이렇게 소중하다. 내가 짧게 근무했던 연풍중학교 아이들이 습작으로도 제 선생을 놀라게 했고, 자모들이 학교 도서관을 학생만큼 드나들던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을 아름다운 자연에서 따뜻한 가족을 품에 안고 정겨운 친구와 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문학의 튼실한 씨앗을 뿌린 것인가 보다.
돌아 나오는 길은 몇 번이나 마을을 돌아보게 만들었다. 목선생과 닮은 이 마을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아 눈 쌓인 겨울에 오면 되겠구나. 명태나 서너 마리 사고 막걸리나 두어 병 받아 가지고 눈길을 결어서 오면, 정에 넘치는 따뜻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쉽게 골짜기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2014.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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