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문의 산덕마을과 신동문 시인

느림보 이방주 2013. 9. 28. 18:16

   문의  산덕 마을과 신동문 시인

 

- 제 1회 신동문 문학제에 참여하고 나서 -

 

 

 

 

 

시인 신동문 다룬 다큐 10일 방영

 문의면 소재지에서 후곡리로 가는 길에 산덕리라는  산골 마을이 있다. 작은 고개를 넘어 남쪽으로 돌아내려 가면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술레처럼 앞으로 툭 나서는 마을이다. 앞에는 제법 큰 느티나무가 마을 사람들이 모으기 좋은 그늘을 지운다. 뒤로는 나지막한 산이 산태미처럼 마을을 싸고 둘렀다. 얼마 되지도 않는 토지를 건너면 마주보이는 곳에 몇 채 농가가 보이고 작은 교회도 있다. 자동차를 몰고 소금이 넘나들던 염티 방향으로 달리면 아쉽게도 금방 지나쳐야 하는 마을, 여기가 바로 청원군 문의면 산덕리이다. 산기슭이나 호숫가에 붙어있는 농지가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 넉넉한 마을은 아니다. 이 마을이 영산靈山 신씨辛氏 집성촌이고 바로 시인 신동문辛東門 선생의 탄생지이다.

 

 

 

 문의에서 산덕리까지 가는 길도 아름답지만, 산덕리에서 염티리 문덕리를 지나 후곡리까지 가는 길은 환상의 드라이브코스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곳은 정말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봄에 모든 꽃이 한꺼번에 피어나거나 가을에 단풍이 들면 삶의 마을을 가는 길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극락세계를 찾아가는 기분이다. 그리고 여기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모두가 어린 아이 미소처럼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와서 죽음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여기에 이르는 길을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고 했다. 바로 시인 고은이다. 그런데 그의 시에는 산덕리에서 살다가 죽어 산으로 돌아가는 이가 볼 수 있을 것 같은 죽음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담지는 못한 것 같다. 죽음으로 가는 길은 인식하는 사람에 따라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길일 수도 있고, 습하고 칙칙한 것일 수도 있고, 또 컴컴한 공포의 길일 수도 있다. 고은은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 길에서 죽음은 삶으로 돌아오는 길이고 죽음은 곧 삶을 돌아보는 길이고 죽음은 삶과 하나가 되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가 산덕리로 가는 길에서 발견한 죽음으로가는 환상적인 드리이브 코스로 보지는 않은 것 같다. 하기야 지금 나보다 더 젊은 나이에 쓴 것이니까 그럴 수 있고, 나랑은 달리 잠시 승려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니까 또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문의 마을에 가서

 

                                                                                                        고은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거기까지 닿은 길이

몇 갈래의 길과

가까스로 만나는 것을.

죽음은 죽음만큼 길이 적막하기를 바란다.

마른 소리로 한 번씩 귀를 닫고

길들은 저마다 추운 쪽으로 뻗는구나.

그러나 삶은 길에서 돌아가

잠든 마을에 재를 날리고

문득 팔짱 끼어서

먼 산이 너무 가깝구나.

눈이여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겨울 문의(文義)에 가서 보았다.

죽음이 삶을 껴안은 채

한 죽음을 받는 것을.

끝까지 사절하다가

죽음은 인기척을 듣고

저만큼 가서 뒤를 돌아다본다.

모든 것은 낮아서

이 세상에 눈이 내리고

아무리 돌을 던져도 죽음에 맞지 않는다.

겨울 문의(文義)여 눈이 죽음을 덮고 또 무엇을 덮겠느냐

 

 

高銀은 1967년 이곳 출생인 신동문 시인의 모친상에 호상을 봤다고 한다. 그래서 모친의 주검을 모시고 신동문의 선산에 장례 절차를 주관했다고 한다. 이것은 고은의 회고담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신동문 선생은 당시에 고은보다 훨씬 잘 알려져 있었고 고은은 그냥 시를 스는 젊은이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동문 선생을 따라다니며 술을 함께 마시는 정도가 아니었나 한다. 신동문 선생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어서 고은보다는 형편이 좋았을 것이다.

 

고은은 대청댐이 건설되지 않았을 당시 오가리 강가를 통해서 난 길을 따라 산덕리 산골 마을에 도착했을 것이다. 서울 생활에서 이런 산골을 어디서 보기나 했을까? 더구나 산덕리 마을에서 바라보는 산 능선들은 거뭇거뭇하여 정스럽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이야 녹음이 짙어 아름답지만 당시 헐벗은 산에 흰눈이 쌓이고 어둑어둑한 밤의 상가 마당에는 화톳불만 불티를 날리는 으스스한 풍경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은이 호상을 했다고는 하나, 신씨 집성촌이니  장례절차는 신씨 집안에서 알아서 너무나 잘 모셨을 것이고, 그는 현재의 거침없는 성격으로 보아 따라간 몇몇 서울 친구들과 술이나 마시고 마음 속으로 시나 읊조렸을 것이다.

 

고은은 산덕리 신동문 선생의 상가에서 죽음과 삶에 대한 영감을 얻은 것이 아닌가 한다. 산덕리 마을을 북쪽으로 싸 안고 있는 산이나, 마을 앞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 안산에 쌓인 눈이 죽음의 의미를 깨우쳐주지 않았겠나. 고은은 그 영감을 가지고 시집 〈문의 마을에서〉를 발간하고 시인으로서 자리를 확보한다. 결국 고은은 문의에서 받은 영감으로 오늘날 노벨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시인이 된 것이다. 신동문 시인의 모친상 호상의 대가로 받은 보상치고는 너무나 큰 것을 받은 것이다. 그의 시를 좋아하지만, 언젠가 대관령 눈길 위에서 만난 고은 선생은 문인으로서 그렇게 존경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지금도 가끔 그의 삶과 인품에 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당시 시골에서 장례를 모시는 정경을 상상해 보자. 우선 삼일 내지 오일간 밤낮으로 마당에 불을 피운다. 아름드리 참나무나 소나무를 베어다가 쌓고 피우는 화톳불은 비가 와도 꺼지지 않는다. 밤이 되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불티를 날린다. 가난하고 먹을 것이 귀하던 시대,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다투어 일을 봐주고 며칠씩 끼니를 해결한다. 이럴 때 모인 할일없는 사람들은 화톳불 주변을 둘러선다. 나는 어린시절 그 화톳불 주변에서 어른들 흉내를 내어 뒷짐을 쥐고 등줄기로부터 엉덩이를 지나 장딴지까지 느껴지는 화톳불을 따뜻함을 느끼며 이야기에 취해 밤을 새웠다.

 

충북 청원 여행길 우연히 찾은 문의문화재단지

대개 화톳불가에서 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는 故人의 생전의 일화이다. 시골 사람들이 지나치듯 하는 그 이야기 속에는 故人에 대한 호평도 있고 아쉬운 점도 있다. 그러나 비난은 아니다. 고인의 아쉬운 삶을 이야기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우호적으로 표현한다. 우리 민족은 누구나 다 文人이다. 이야기의 소재는 삶과 죽음이다. 그에 대한 인식은 철학적이다. 그 인식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매우 문학적이다. 이것은 글줄이나 읽은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이다. 고통이나 슬픔을 해학으로 표현할 줄 알고 모순된 현실을 반어로 표현할 줄 안다. 죽어 누워있는 고인을 위해서 그의 삶을 긍정하거나 이해할 줄도 안다.

 

나는 그런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결국 삶이란 죽음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명제를 그 때 바로 생각해 낸 것은 아니지만,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화톳불 가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그것을 하나의 명제로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삶이란 결국 죽음을 위한 끊임없는 여로旅路이다.

 

청주에 살았으면서도 당시에는 신동문 선생을 알지 못했다. 그 분은 나 같은 시골 사람에게 알려질 만큼 충분하게 활동하지 못하고 절필하고 단양으로 내려온 것이다. 내가 단양고등학교에 근무하던 80년대에  신동문 선생이 증도리 건너 애곡에서 포도 농사를 지으면서 아픈 사람들에게 침을 놓아 준다고 들었다. 일면식도 없기에 찾아갈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그의 시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그의 시는 노동의 가치를 편협하게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하고 부그러운 시각을 가지기도 했었다. 지금이라고 그의 시를 다 아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신동문 선생의 본래 이름은 신건호이다. 우리 집안에 그 가문으로 출가한 분이 있어 그 댁에 建 자 항렬이 있다는 것은 안다. 청원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한 신경식씨가 형님의 손자인 종손이라는 이야기도 언뜻 들은 바가 있다. 항렬을 버리는 것은 특별한 사연이 있거나 가문에 대한 부정이다. 그런데 왜 항렬을 버리고 東門이라는 이름을 썼을까? 그는 병약해서 결핵성 늑막염, 페결핵 등 병마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병원 신세를 많이 졌다. 지금 중앙공원 자리에 있던 충북도립의료원(일명 도립병원)은 청주의 유일한 종합병원이었다. 거기서 요양 생활을 하는 동안 하필이면 그의 병실이 유명을 달리한

시신이 영구차에 실려나가는 도립의료원의 동문이 바라보이는 곳에 있었던 모양이다. 병실에서 늘 그곳을 바라보면서 자신도 언젠가는 東門으로

나가는 신세가 될 것이라고 단정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보면 東門이란 결국 시구屍柩가 나가는 門이라는 뜻이다. 시구문屍柩門은 대개 북문을 사용하게 되는데 특이한 일이다. 어찌 되었든지 그에게 동문이란 죽음을 의미했고, 삶이란 죽음이 종착역이니까 결국은 모두가 東門이 아니겠는가? 참으로 기발한 이름이다.

 

건강했던 내가 한때 청주 한국병원에 입원하여 폐렴 치료를 받았을 때와 참으로 대조적 경험이다. 2인실인데도 입원비가 비싸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혼자 쓰는 병실이었다.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면 길건너 청남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나는 종일 청남초등학교 어린 생명들의 뛰노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루 종일 뛰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오후가 되면 청남초등학교 축구 선수들이 코치의 가르침을 받으며 축구 연습을 아는 역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이면 주민들의 조기 축구가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한국병원 병실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것대한 산줄기만 바라보았다면 나도 산으로 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역동적인 생명을 바라본 일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어쩌다 창가에 다가가 바로 앞의 큰 길을 내다보면 병원 동문을 통하여 퇴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큰 가방을 들고 가족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도 손가락으로 집으로 돌아갈 날을 세었다.

 

신동문 선생의 노동의 시는 언제나 나를 감동시켜 부끄럽게 한다.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써 삶의 객관적 의미를 지닌다는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했는데 9월 26일 1회 신동문 문학제에서 특별 강연을 한 유종호 교수도 그런 말을 했다. 신동문 선생은 노동을 통하여 확실한 자아 실현을 선언한 것이다.

 

 

내 노동으로

 

내 노동으로청주문학 선구자 신동문 시인 업적 재조명 목소리 높아
오늘도 살자고
결심을 한 것이 언제인가
머슴살이하듯이
바친 청춘은
다 무엇인가.
돌이킬 수 없는 
젊은 날의 실수들은
다 무엇인가.
그 여자의 입술을
꾀던 내 거짓말들은
다 무엇인가.
그 눈물을 달래던
내 어릿광대 표정은
다 무엇인가.
이 야위고 흰
손가락은
다 무엇인가.
제 맛도 모르면서
밤 새워 마시는
이 술버릇은
다 무엇인가.
그리고 친구여
모두가 모두
챙백한 얼굴로 명동에
모이는 친구여
당신들을 만나는
쓸쓸한 이 습성은
다 무엇인가.
절반을 더 살고도
절반을 다 못 깨친
이 답답한 목숨의 미련
미련을 되씹는
이 어리석음은
다 무엇인가.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
내 노동으로
오늘을 살자고
결심했던 것이 언제인데.

 

신동문 시인을 추모하는 문학제가 사단법인 딩하돌하 문예원 주최로 이루어졌다. 딩하돌하에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 같다. 청주에서 대개 신동문 같은 시인을 추모하는 행사는 작가회 쪽에서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문협이나

작가회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은 것 같다. 특히생전에 교류가 있고 후배 문인으로 사랑받았던 딩하돌하 문예원의 박영수 이사장이나 주간을 맡은 청주대 임승빈 교수의 노력이 매우 컸었다는 것을 현장에 가서 느꼈다. 

 

신동문 시인 추모 문학제에 참여하고 돌아와서 특히 유종호 교수의 특강을 듣고 고은을 생각하게 된 연유는 두 사람이 친분관계라는 사실보다 신동문의 죽음과 고은의 시〈문의 마을에 가서〉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관심이 일었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 모두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았다는 사실, 젊은 날부터 고은과 신동문이 친근한 관계였다는 사실 같은 것 이외에도 신동문 시인이 담도암이라는 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는 사실들이 묘한 연관성으로 다가온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하여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실낱 같은 줄기 말이다.

 

유종호 교수의 말에 의하면 담도암 진단을 받은 다음날 신동문 선생을 찾아 갔더니 "신구문화사에 근무할 때 퇴근 무렵만 되면 아무개 아무개가 찾아와서 죽치고 기다려 그냥 보낼 수 없어 술을 많이 마셨노라"고 했다며 그들을 원망했다. 나는 그것이 누군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또한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 하는 것은 분위기로 어렵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의 판단이다. 그때 함께 찾아가 술을 마신 사람들은 지금 다 살아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어떤 하나의 원인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절필을 선언하고 단양으로 내려온 것이 꼭 중앙정보부의 핍박이라는 하나의 원인 뿐이 아니듯이 그의 죽음도 반드시 술 때문만도 아닐 것이다.

 

신동문 선생이나 그의 시를 아직 잘은 모르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그의 시나 삶의 여정으로 보아 고뇌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50여편의 시는 부정과 기다림으로 그리고 노동의 사명감으로 가득차 있다. 모순된 현실에 대한 분노, 모순을 극복하고 개선하지 못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무력감, 시를 쓰면서도 자신이 해야 할 만큼의 노동을 하지 못하는 양심 같은 것들이 암덩어리가 된 것은 아닐까?

 

오늘날 문학인은 범람하고 있다. 경쟁적으로 등단시켜 주는 허울좋은 등단의 절차를 거쳤더라도 문예지에 작품 한 편 발표한 이를 누가 감히 문인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신동문 선생이 어떤 철학과 가치를 가졌는지, 그의 시는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생전에 그는 어떤 정신적 고통을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면서도 아는 것 없이 공감하지도 못하면서 그의 추모 문학제 같은데 참석하여 추모하는 묵념을 올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 나오는 길이 부끄럽다. 나오는데 로비에 앉아 있던 문협에 관계하시는 분이 저녁을 먹고 가라고 잡는다. 무슨 면목으로 신동문 선생의 밥을 얻어 먹을 수 있을까? 

 

노동하지 않고 먹는 밥은 죄악이다. 노동하지 않으면서 삶의 객관적 의미를 확보할 수 없다. 노동은 삶의 필수 요건이다. 부끄럽다. 나도 무엇이든 노동을 해야 한다.

(2013.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