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운영담에서-
운영담은 아침 햇살이 바위벽에 부딪혀 반사되면서 하늘 그림자를 담고 있다. 알맞게 솟은 암벽 아래 구름 그림자가 어리는 물이다. 주자의 시 ‘天光雲影共徘徊’가 아니라도 쪽빛 물에 잠긴 구름이 발길을 머물게 한다. 모래가 깨끗하여 물이 맑은 것인지, 물이 맑아 모래가 깨끗하게 보이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바위 사이를 시끄럽게 흐르던 물이 만동묘 앞에 와서 머물러 배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 흐름과 깨끗한 모래만 보면 계곡이 아니라 낙동강 하류라도 되는 것 같다. 물은 고요하다. 출렁이지도 않는다. 흐르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분명히 흐른다. 구름이 머물러 있다. 하늘은 여기에 구름을 비치는데 사람들은 여기 서서 무엇을 비치어 보고 지나갈까? 누구나 가슴에 구름은 있는 법이 아닌가?
노자는 최고의 善은 물과 같다고 하였다. 노자가 말한 善은 무엇일까? 좋은 것인가? 잘하는 것인가? 착한 것인가? 그 모두인가? 나는 대학에서 말하는 학문의 목표인 止於至善의 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옛 선비들은 溪水든 池든 潭이든 澤이든 물을 지향했는지 모른다. 나는 구름까지 비치는 운영담이 까닭 모르게 두려워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노자는 물이 낮은 곳에 있다고 했는데 나는 낮은 곳으로 향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은 낮은 곳으로 향할 뿐 아니라, 많은 곳에서 자꾸 적은 곳으로 향한다. 그래서 결국 수평을 이룬다. 평등함이다. 물은 이렇게 진정한 평등을 지향한다. 맞다. 공평함을 이루는 것이 바로 물이다. 본래 하늘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남의 것을 빼앗아 보다 많이 소유하려 한다. 그것은 이미 탐욕이다. 애초에 자신의 지분으로 하늘이 분배해 준 것만을 가지면 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산다.
나는 가진 것을 나누어 줌으로써 권력이 만들어진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이제 수정해야겠다. 분수에 넘치게 소유한 것을 본래 소유해야 할 사람에게 되돌림으로써 권력은 창조된다. 정치 권력도 경제 권력도 많이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이 원리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임기를 마치고 능력 운운하면서 연임하지 말자. 좋은 자리를 세습하지 말자. 가진 것을 못 가진 사람에게 흘려보내야 한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많이 괸 곳에서 덜 괸 곳으로 흘러가듯이 흘려보내야 한다. 둑을 막아 흐름의 원리를 겨역해서는 안된다. 운영담의 물처럼 고요하게 출렁이지 말고 흐르는 것 같지 않게 흘려보내야 한다. 아, 내가 많이 가진 것은 무엇일까? 이제부터 그걸 찾아야겠다.
(2012. 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