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이작도 풀등에 갔다. 아침 햇살이 바다 위에 은빛 은혜를 쏟아붓고 있었다. 풀등은 해안에서 모터보트로 3분쯤 거리에 있는 나지막한 모래톱이다. 배에서 내려 서니 파도에 다져진 모래 언덕이 딱딱하다. 파도가 씻어 놓은 모래는 물결무늬가 그대로 남아 파도인지 모래인지 구분이 안될 지경이다. 맨발로 나긋나긋한 촉감을 느끼며 걸었다.
아침 그림자가 길게 앞장을 선다. 엄청나게 길다. 내 그림자가 이렇게 길고 큰가? 내가 이렇게 커질 수도 있는 인물이었나? 나는 내 그림자의 키가 너무 크고 긴 데 놀랐다. 태양이 은혜의 빛을 얼마만큼 주는가에 따라 생명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만 알았었다. 그런데 태양이 존재하는 위치에 따라 이렇게 커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태양이여, 이제라도 그곳에서 영원이 나를 비추어 주소서. 이런 지나친 욕망을 가져 보았다.
나는 그림자를 따라 걸었다. 나는 내 그림자인데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내가 밟을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림자의 발등뿐이다. 무릎은 너무 멀고 장딴지라도 밟아보려고 애를 썼으나 밟으면 거기는 바로 발등이 된다. 나는 내 그림자의 장딴지를 밟을 수 없다. 따르고 싶은 곳을 따를 수 없어 안타깝다. 아, 나는 그림조차도 따를 수 없구나. 그러고 보니 태양이 등 뒤에 있으면 내가 그림자를 따르게 되지만 따르고 싶은 곳을 따를 수 없다. 내가 따를 수 있는 것은 다만 그림자의 발등뿐이다.
태양이 나의 앞에서 비추어 주면 어떨까? 내 그림자의 크기는 마찬가지이겠지. 내가 태양을 안고 있으면 나는 그림자를 데리고 내 길을 떠나야 한다. 그림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 발등 이상을 따를 수 없다. 태양은 우리에게 어디에서 얼마만큼만 능력을 허용하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냥 섭리일 뿐이다.
모래섬 위에 아직도 흘러가지 못한 작은 호수가 있어서 발을 담가 본다. 웅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름다워 호수라고 부른다. 물이 장딴지까지 올라온다. 거기에 서 보았다. 그림자가 앞에 선다. 그림자가 아까만큼 크고 길다. 그런데 빛이 다르다. 그림자에 기름이 돈다. 맑은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 얇은 명주에 그려놓은 수묵화 같다. 내 안의 더러움이 소금물에 씻겨버린 것이다. 깨끗하다. 맑고 투명하다.
그렇구나. 태양은 내가 설 자리는 어쩌지 못하는구나. 나를 키워주는 것은 태양이지만 서 있는 모습은 내 의지적 선택에 따를 뿐이다. 나는 어디에 무엇으로 서 있어야 할까? 어디에 서는 것, 무엇으로 서는 것, 어떤 크기로 서 있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은 내가 알 수도 없다. 다만 좀 더 투명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것만을 풀등에서 그림자에게 배운다.
(2013. 9.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