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구름 뒤에 숨어 있는 태양이 장엄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제 처절한 낙조를 보여준 바로 그 태양일까? 구름 속에서 내려오는 햇살이 마치 금빛 빗살을 늘이는 것 같다. 검은 구름은 더욱 검게 보이고 흰구름은 투명하게 속을 드러낸다. 바다에는 옅게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빛살이 수면에도 젖은 모래사장에도 비친다. 물결무늬에 비친 빛은 더욱 아름답게 반사한다.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본 낙조가 그립다. 해돋이의 신비도 심청의 이야기에 젖어 있고, 남북으로 갈린 애절한 삶이 있으며, 마흔 여섯 꽃 같은 영혼이 잠긴 두무진 처절한 낙조를 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마음이 가는 곳을 아름답다 하는 모양이다. 백령도는 낙조가 아름답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뱃길이 지루하다. 잠을 청할수록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뭔가 잃어버리고 배에 오른 것처럼 자꾸만 북쪽이 돌아 보인다. 눈을 감으면 핏빛으로 물들었던 두무진 낙조가 끊임없이 어른거린다.
<원문> 백령도는 낙조가 아름다워
백령도는 인천항에서 서북으로 173km나 떨어져 있다. 뭍이라면 그만큼 휴전선 북쪽인 셈이다. 2071톤급 하모니플라워호는 우리를 태우고 바다를 가르며 북으로 달린다. 정원 568명인 대형 여객선은 한산하지도 북적이지도 않아서 좋았다.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가슴이 시리다. 그래도 갑판 기운은 상쾌하다.
여관에 짐을 풀고 심청각으로 향했다. 버스 기사의 걸쭉한 입담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심청각은 심청이 자란 마을이나 몸을 던진 인당수가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라고 생각하여 기념시설을 이곳에 마련한 것이다. 심청전 연구에 획기적인 바탕을 마련한 은사님이신 최운식 박사님의 고증으로 이루어진 사업이다. 선생님을 뵌 듯 반갑다.
햇살은 따뜻했지만 북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차고 드세다. 장산곶은 여기서 40리, 소리치면 들릴 것 같다.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바다를 향하여 길쭉하게 벋어 있다. 밭에서 고구마라도 캐다가 '어이 막걸리 한잔 하세.’하고 소리를 지르면 바로 노를 저어 건너올 것만 같다. 백령도에 사는 사촌이 새벽 그물에 걸린 생선을 들고 장산곶 큰아버지 생신 상에 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바다는 가깝고 잔잔하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것처럼 평화롭다. 그러나 저 바다 밑에 어떤 폭력이 숨어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념의 허상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촌들의 가슴에 대못을 쳤다.
주변에는 탱크와 대포를 대기시켜 놓았다. 포신이 북을 향하고 있어 긴장감이 감돈다. 우리는 왜 심청과 같은 인간적 이념 곁에 죽음을 부르는 이념을 나란히 놓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장산곶까지 이어지는 옹진반도에도 불신의 쇠붙이들이 감추어져 있을 것이다. 잔잔한 바다 밑에서 수많은 숨바꼭질할 폭력을 생각하면 끔찍하다. 그래도 바다는 여전히 잔잔하다. 옹진반도는 어느 고향 산천 모습처럼 평화롭다. 심청각을 내려오면서 옹진반도의 긴 산줄기 등마루를 천천히 걸어 장산곶까지 밟아 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보았다.
유람선을 타고 두무진 해안을 돌았다. 바닷바람이 차갑고 왠지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선실 안에서 창밖으로 기기묘묘한 바위들을 내다보았다. 기도하는 사람, 촛불, 우애 있는 형제, 코끼리 모양에 얽힌 전설을 전해 주는 선장의 구수한 입담이 정겹다. 배달겨레가 자연에 의미를 부여하기 좋아하는 문학적 소양을 지닌 것도 남북이 다를 바 없다.
일렁이는 파도와 바위 그리고 맑은 물이 아름다운 세상이지만 절경이 오히려 씁쓸하다. 선장은 바로 저기가 천안함이 침몰한 곳이라고 일러 주었다. 문득 당시 희생된 열아홉 살짜리 어린 병사가 자꾸 마음을 붙잡았다. 어린 영혼이 퍼런 물속에서 얼마나 무섭고 추웠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듯하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갈가리 찢어졌을까. 젊고 아름다운 영혼을 삼킨 바다는 한 가락 일렁임도 없이 천연덕스럽게 고요하다.
유람선에서 내려 해변을 걸어 쓸쓸한 발길을 두무진으로 옮겼다. 우리가 배를 타고 돌았던 바다에서 바라보이던 바위벽이다. 사방은 시나브로 어둑해지는데 바다는 해넘이를 받아들이고 있다. 일출이 좋다지만 낙조만큼 아름다운 것도 없다. 그런데 두무진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더 아름답다. 형제 바위 사이로 바라보이는 낙조가 처절하다. 하늘과 바다가 온통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붉은 하늘 붉은 바다를 보면서 옅은 나의 영혼까지도 붉게 타오르는 기분이다. 태양이 풍덩 바다에 빠지자 물은 선혈이 되어 일렁인다. 나무계단을 밟아 해안으로 내려갔다. 하늘은 물결에도 자갈에도 바위벽에도 벌겋게 물을 들였다. 바다에 잠긴 젊은 영혼인양 갈매기 몇 마리가 ‘끼륵끼륵’ 낙조 속으로 빠져든다. 돌아오면서 떨어지는 해를 자꾸 뒤돌아보았다. 번번이 헛디딤이다. 내 속을 들여다보는 아는 아내가 비척거리는 팔짱을 끼었다. 젊은 영혼들은 영원히 물에 잠겼으나 떨어지는 해는 내일 아침에 다시 장엄하게 솟아오를 것이다. 자연은 신비롭지만 때로 야속하다. 하늘에 의미 부여를 하지 말자. 그냥 낙조일 뿐이다.
이튿날 아침 사곶 천연비행장으로 갔다. 백령도 해안에 정박한 항공모함 같은 모래장이다. 물때에 잠기는 부분이 그림처럼 물결무늬를 이루었다. 넓고 곧은 모래사장에 일정한 무늬가 이루어낸 자연 미술품이 일품이다.
마침 구름 뒤에 숨어 있는 태양이 장엄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어제 처절한 낙조를 보여준 바로 그 태양일까? 구름 속에서 내려오는 햇살이 마치 금빛 빗살을 늘이는 것 같다. 검은 구름은 더욱 검게 보이고 흰구름은 투명하게 속을 드러낸다. 바다에는 옅게 붉은 기운이 남아 있다. 빛살이 수면에도 젖은 모래사장에도 비친다. 물결무늬에 비친 빛은 더욱 아름답게 반사한다. 자연의 위대함과 신비로움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제 본 낙조가 그립다. 해돋이의 신비도 심청의 이야기에 젖어 있고, 남북으로 갈린 애절한 삶이 있으며, 마흔 여섯 꽃 같은 영혼이 잠긴 두무진 처절한 낙조를 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마음이 가는 곳을 아름답다 하는 모양이다. 백령도는 낙조가 아름답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뱃길이 지루하다. 잠을 청할수록 머리는 더욱 맑아진다. 뭔가 잃어버리고 배에 오른 것처럼 자꾸만 북쪽이 돌아 보인다. 눈을 감으면 핏빛으로 물들었던 두무진 낙조가 끊임없이 어른거린다.
(2012.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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