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포토에세이

자모리 소나무에게

느림보 이방주 2011. 11. 18. 14:25

자모리 소나무에게 

 

 

 

  

 다산 선생은 역사를 인용하지 않은 글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역사의식이 주춧돌로 놓이지 않은 글은 문학이 아니란 말이다.  먹고 사는 이야기, 술 마시고 춤추는 풍류만 담은 글이 무슨 문학이냐고 개탄했다. 문학이란 그릇에는 뼈아픈 당대의 고민을 담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부닥치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역사 속에서 찾는 슬기를 가르치는 글이 진정한 문학일 것이다.

 

내가 문학에 담으려는 슬기는 어떤 것일까? 대상에 대한 진솔한 사랑, 현실에 대한 뼈아픈 고민일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림은 제대로 그리고 있는가? 자기만족의 빈 깡통은 아닌가?  맞다. 깡통이다. 빈 깡통이니 감동이 없다. 감동이 없으니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지난여름은 백제 멸망의 안타까운 길이라고 전해오는 탄현을 찾아 옥천의 산성을 헤집었다. 오늘은 옥천 군북면 자모리 장고개에 올랐다. 길도 없는 자모리 골짜기에는 우거진 망개나무 덩굴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겨우 고갯마루에 올랐다. 바짓가랑이가 엉망이다.

 

세상이 훤하다. 사람들의 발자국에 산은 마당이 되어 있었다. 세천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로나 마찬가지이다. 마루터기에 솟아나는 자모샘으로 보아 예전에는 주막이 서넛쯤은 있었을 것 같다. 장보러 넘나들던 고갯마루 주막에는 잠시 쉬어가는 길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투전에 빠지고 어떤 이는 계집에 빠져 삶의 곁길로 헛걸음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서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자리를 잡았다. 바로 앞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무리 서 있다. 자모샘에서 솟아오르는 물길만큼 내게도 글발이 솟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한글 백지 파일을 펼쳐놓고 생각을 다듬었다. 문득 전에 써 둔 작품이 궁금해서 목록을 더듬어 본다. 정성을 들였다고 하지만, 역사의식도 시대에 대한 아픔도 문화도 담지 못한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가 읽었을까? 앞이 흐려진다. 가까운 수필가나 몇몇 지인들만 읽는 글은 문학이 될 수 없다. 다산 선생의 꾸짖음 대로 다만 넋두리이고 푸념일 뿐이다. 앞이 더욱 흐려진다.

 

시인 조지훈도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라며 혼자서 앉아 시를 써도 읽어줄 사람이 없어 동물원 창살 너머 짐승들에게 시대의 답답함을 고백했다고 한다. 소나무들 앞에 섰다. ‘원초적 행복’을 클릭했다. 이 작품은 음식문화에 대한 민족의 자긍심을 드러내려고 쓴 글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별 수 없이 먹고 마시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없다. 독자에게 감정과 사상의 전이(轉移)를 소망하는 것은 거품 같은 나의 욕망이다. 소나무는 나무 중의 군자라니 참고 들어줄까? 실낱같은 소망을 붙잡고 소나무를 향하여 ‘원초적 행복’을 읽는다.

 

 “……온 들판이 푸르다. 세상이 아름답다. 허해진 나를 안쓰러워하는 우정, 전통음식에 대한 어머님의 정성과 지조, 믿음, 표현할 수 없이 황홀한 맛,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여 오늘은 원초적 행복에 온몸이 흠씬 젖은 기분이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 가 계신 세상처럼 불빛은 찬란하기만 하다. ……” 


갑자기 울컥 헛것이 넘어온다. 헛것이 넘어오는데도 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수군거린다. 내가 떨고 있으니 소나무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냐. 아, 소나무가 듣는구나. 소나무가 내 글을 들어주는구나. 소나무가 문학을 아네. 소나무가 수필을 알아. 소나무가 우리 문화를 알고, 우리 음식을 알고, 소나무가 민족의 긍지를 아네. 아, 소나무랑 통했어. 나는 용기가 자모샘 솟아나듯 한다. 소나무랑은 통했으니까. 

읽을 만한 작품이 또 없을까? 있다 있어. 신선암봉의 중암이란 절집 앞 너럭바위에 앉아서 써 내려온 ‘칠월의 만남’을 읽었다. 정말 자신 있게 읽었다. 소나무도 이렇게 들어주는데, 모여든 사람들은 다 뭐냐?


“…… 칠월의 산행에서 지나간 오월의 꽃을 만났다. 내 안에 오월의 수련이 피었다. 한 순간일지라도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것만 같다. 칠월의 만남으로 깃을 달고 날아갈 것만 같다.……”

 

 사람들은 더 많이 모여들었다. 지성을 잃은 그들은 내 모습에서 헝클어진 정서를 읽었을 것이다. 노트북을 덮었다. 빨강색 덮개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았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았다. 풀썩 먼지가 난다. 아무래도 나는 내 글이 부끄럽다. 소나무에게나 들려 주어야 하는 나의 수필이 부끄럽다. 소나무밖에는 아무도 메아리를 주지 않는 나의 문학이 부끄럽다. 나의 넋두리가 나의 푸념이 부끄럽다. 사람들이 웃으며 흩어진다. 나는 목구멍에 마른 떡이 걸린 듯하다.

 

자모샘으로 다시 내려갔다. 목을 축였다. '싸르르' 시원한 기운이 가슴에 물감처럼 번진다. 쉬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 그 용솟음 때문에 작은 모래알들이 보글보글 일어난다. 이 샘물은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마지막을 보러 갈 때 병졸들의 목을 축여주었다고 한다. 옥천에서 대전으로 넘나드는 장꾼들의 갈증도 달래 주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갯마루 주막집 아낙의 뒷물도 되었을 것이다. 샘물은 세월도 사람도 역사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솟는다. 마시는 사람이 있건 없건, 돌아보는 이가 있을가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메아리도 기대하지 않고, 화도 울분도 없이 솟아난다. 자비로운 어머니 젖줄처럼 기대를 잃어버린 열정이 되어 솟아난다.

 

내려가자. 나도 기대를 버리고 내려가자. 기대를 갖는 문학은 진실을 잃어버리기 쉽다. 진실을 잃은 역사의식은 주추가 될 수 없다. 문학이 부끄러웠던 나는 허깨비 같은 울분이 더 부끄럽다.  열정도 없는 나의 거품 같은 기대가 더 부끄럽다. 바람도 없는데 나무 중의 공자라는 소나무가  ‘휘이익’ 가지를 흔든다. 본질을 모르는 나에게 보내는 비소(誹笑)처럼 보였다.

                                                                                                                                                             (2011.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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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뜨락 - 자모리 소나무에게

실낱같은 소망을 붙잡고 너를 향해 나의 글을 읽는다

기사 댓글(8)   인터넷뉴스부 webmaster@inews365.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등록일: 2012-05-13 오후 5:4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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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약력
청주출생, 1998년 '한국수필' 신인상충북수필문학상(2007),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내륙문학 회장 역임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여시들의 반란' 편저 '윤지경전' (주식회사 대교)

공저 '고등학교 한국어'

현재 충북고등학교 교사
다산 선생은 역사를 인용하지 않은 글은 시가 아니라고 했다. 역사의식이 주춧돌로 놓이지 않은 글은 문학이 아니란 말이다. 먹고 사는 이야기, 술 마시고 춤추는 풍류만 담은 글이 무슨 문학이냐고 개탄했다. 문학이란 그릇에는 뼈아픈 당대의 고민을 담아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했다. 부닥치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역사 속에서 찾는 슬기를 가르치는 글이 진정한 문학일 것이다.

내가 문학에 담으려는 슬기는 어떤 것일까? 대상에 대한 진솔한 사랑, 현실에 대한 뼈아픈 고민일까? 역사와 문화에 대한 그림은 제대로 그리고 있는가? 자기만족의 빈 깡통은 아닌가? 맞다. 깡통이다. 빈 깡통이니 감동이 없다. 감동이 없으니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

지난여름은 백제 멸망의 안타까운 길이라고 전해오는 탄현을 찾아 옥천의 산성을 헤집었다. 오늘은 옥천 군북면 자모리 장고개에 올랐다. 길도 없는 자모리 골짜기에는 우거진 망개나무 덩굴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아 주지 않는다.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겨우 고갯마루에 올랐다. 바짓가랑이가 엉망이다.

세상이 훤하다. 사람들의 발자국에 산은 마당이 되어 있었다. 세천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로나 마찬가지이다. 마루터기에 솟아나는 자모샘으로 보아 예전에는 주막이 서넛쯤은 있었을 것 같다. 장보러 넘나들던 고갯마루 주막에는 잠시 쉬어가는 길손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는 투전에 빠지고 어떤 이는 계집에 빠져 삶의 곁길로 헛걸음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서 '피식' 헛웃음을 웃었다.

자리를 잡았다. 바로 앞에 아름드리 소나무가 한 무리 서 있다. 자모샘에서 솟아오르는 물길만큼 내게도 글발이 솟을 것 같은 기분이다.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한글 백지 파일을 펼쳐놓고 생각을 다듬었다. 문득 전에 써 둔 작품이 궁금해서 목록을 더듬어 본다. 정성을 들였다고 하지만, 역사의식도 시대에 대한 아픔도 문화도 담지 못한 글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누가 읽었을까? 앞이 흐려진다. 가까운 수필가나 몇몇 지인들만 읽는 글은 문학이 될 수 없다. 다산 선생의 꾸짖음 대로 다만 넋두리이고 푸념일 뿐이다. 앞이 더욱 흐려진다.

시인 조지훈도 '사람으로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짐승에게라도 하소해야지.'라며 혼자서 앉아 시를 써도 읽어줄 사람이 없어 동물원 창살 너머 짐승들에게 시대의 답답함을 고백했다고 한다. 소나무들 앞에 섰다. '원초적 행복'을 클릭했다. 이 작품은 음식문화에 대한 민족의 자긍심을 드러내려고 쓴 글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별 수 없이 먹고 마시는 이야기이다. 자신이 없다. 독자에게 감정과 사상의 전이(轉移)를 소망하는 것은 거품 같은 나의 욕망이다. 소나무는 나무 중의 군자라니 참고 들어줄까? 실낱같은 소망을 붙잡고 소나무를 향하여 '원초적 행복'을 읽는다.

"……온 들판이 푸르다. 세상이 아름답다. 허해진 나를 안쓰러워하는 우정, 전통음식에 대한 어머님의 정성과 지조, 믿음, 표현할 수 없이 황홀한 맛,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여 오늘은 원초적 행복에 온몸이 흠씬 젖은 기분이다. 어둠 속에서 어머니 가 계신 세상처럼 불빛은 찬란하기만 하다. ……"

갑자기 울컥 헛것이 넘어온다. 헛것이 넘어오는데도 소리는 점점 높아진다. 갈라지는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린다. 사람들이 모여든다. 수군거린다. 내가 떨고 있으니 소나무도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미친 사람이 아냐. 아, 소나무가 듣는구나. 소나무가 내 글을 들어주는구나. 소나무가 문학을 아네. 소나무가 수필을 알아. 소나무가 우리 문화를 알고, 우리 음식을 알고, 소나무가 민족의 긍지를 아네. 아, 소나무랑 통했어. 나는 용기가 자모샘 솟아나듯 한다. 소나무랑은 통했으니까.

읽을 만한 작품이 또 없을까? 있다 있어. 신선암봉의 중암이란 절집 앞 너럭바위에 앉아서 써 내려온 '칠월의 만남'을 읽었다. 정말 자신 있게 읽었다. 소나무도 이렇게 들어주는데, 모여든 사람들은 다 뭐냐?

"…… 칠월의 산행에서 지나간 오월의 꽃을 만났다. 내 안에 오월의 수련이 피었다. 한 순간일지라도 욕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것만 같다. 칠월의 만남으로 깃을 달고 날아갈 것만 같다.……"

사람들은 더 많이 모여들었다. 지성을 잃은 그들은 내 모습에서 헝클어진 정서를 읽었을 것이다. 노트북을 덮었다. 빨강색 덮개에 파란 하늘이 내려앉았다. 나도 그 자리에 앉았다. 털썩 주저앉았다. 풀썩 먼지가 난다. 아무래도 나는 내 글이 부끄럽다. 소나무에게나 들려주어야 하는 나의 수필이 부끄럽다. 소나무밖에는 아무도 메아리를 주지 않는 나의 문학이 부끄럽다. 나의 넋두리가 나의 푸념이 부끄럽다. 사람들이 웃으며 흩어진다. 나는 목구멍에 마른 떡이 걸린 듯하다.

자모샘으로 다시 내려갔다. 목을 축였다. '싸르르' 시원한 기운이 가슴에 물감처럼 번진다. 쉬지 않고 솟아나는 샘물, 그 용솟음 때문에 작은 모래알들이 보글보글 일어난다. 이 샘물은 김유신 장군이 백제의 마지막을 보러 갈 때 병졸들의 목을 축여주었다고 한다. 옥천에서 대전으로 넘나드는 장꾼들의 갈증도 달래 주었다고 한다. 누군가를 기다리던 고갯마루 주막집 아낙의 뒷물도 되었을 것이다. 샘물은 세월도 사람도 역사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솟는다. 마시는 사람이 있건 없건, 돌아보는 이가 있을까 기웃거리지도 않는다. 메아리도 기대하지 않고, 화도 울분도 없이 솟아난다. 자비로운 어머니 젖줄처럼 기대를 잃어버린 열정이 되어 솟아난다.

내려가자. 나도 기대를 버리고 내려가자. 기대를 갖는 문학은 진실을 잃어버리기 쉽다. 진실을 잃은 역사의식은 주추가 될 수 없다. 문학이 부끄러웠던 나는 허깨비 같은 울분이 더 부끄럽다. 열정도 없는 나의 거품 같은 기대가 더 부끄럽다. 바람도 없는데 나무 중의 공자라는 소나무가 '휘이익' 가지를 흔든다. 본질을 모르는 나에게 보내는 비소(誹笑)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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