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상견례 하는 날

느림보 이방주 2012. 3. 4. 18:17

2012년 3월 4일

 

 

오늘 우리 장남 용범과 이미영 선생의 가족이 상견례 날이다. 나는 이 날을 마음 속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 사람들이 지난 2011년 9월 18일 처음 만난 후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한 마음으로 애태운 것을 생각하면 정말 어찌 표현해야 할 줄 모르겠다.

 

그런데 지난 설날에 용범이 옥천에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아내는 선물을 준비하면서도 어찌해야 되는지를 잘 몰라 했다. 나는 진심만 담겨 있으면 된다고 아내를 격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취소되었다. 이유는 으레 있는  것 같은 칭병이었다. 정말로 아픈 것인가? 아니면 칭병인가? 며칠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드디어 2월 12일에  갑자기 옥천에 간다고 했다. 정말로 사부인 되실 분이 편찮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잘 다녀 왔다. 그 다음 주말인 2월 18일에 형제들을 만나본 다음 이튿날 2월19일에 우리집에 온다고 했다. 뭐가 너무 빨리 진행되는가 싶다. 우리 가족들과 산하춘에서 점심을 먹은 날, 이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이 놓였다. 진작에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섭섭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주일만인 오늘 두 가족이 모여 점심을 먹기로 한 것이다.

 

약속 시간은 12시 30분이다. 12시 20분경에 도착해서 예약해 둔 상을 확인해 보았다. 종업원을 불러 방석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 바로 바꾸어 주었다. 분위기도 좋고 아늑한 방에 자리 잡았다. 용범을 밖에 나가서 어른들을 기다리게 했다. 그쪽에서 동생이 모시고 오는데 길이 밀려 한 10분쯤 늦게 도착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나 첫 눈에 두 분 부모님을 보고 안심이 되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너무 수수하지도 않은 그런 모습이었다. 바깥 어른은 늠름하고 안어른은 다소곳하였다. 이미영 선생 모습 그대로이다. 동생은 참으로 사나이답게 생겼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분위기를 주도하려는 욕심을 내지 않았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주가 들어오기까지 어색한 시간이 숨막히듯 지나갔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따님을 참 훌륭하게 잘 키우셨습니다."

이런 자리에서 으레 하는 말이겠지만 그 때 내말은 알맹이 없는 말은 아니었다. 나는 빈 말은 잘 안 하는 성격이지만, 이 때는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빈말이 아니라 정말 이런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에서는 사양하는 말만 하고 내 아들을 만족할 만큼 칭찬하지 않았다.

"처음 보니께 참 착하고 순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 속에는 장작불에 구운 고구마의 불에 탄 두거운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노란 고구마살처럼 구수한 맛이 담겨 있었다. 그 때 나도 이분도 옥천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을 했다. 하긴 나는 2년을 함께 있으면서 두고 본 내용이고 두 분은 단 두 번 만나본 내용이었다. 그러는 동안 안주가 들어왔다. 술을 여쭈었더니 소주로 하자고 한다. 정말 맘에 들었다.

 

소주가 들어왔다. 나는 용범에게 이제부터 장인 장모님이 되셨고, 아내의 부모님은 부모님이나 마찬가지니까 술을 따라 드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따라 하라고 말을 시켰다. "아버님 한잔 받으세요." 이렇게 따라해 보라. 지금 못하면 영원히 못한다. 나는 돌아가신 장인 장모님을 그렇게 불러드리지 못한것이 후회된다. 이렇게 여러 말을 했다. 여기에는 내가 이미영 선생에게 하는 기대도 감출 수가 없었다. 용범은 아주 어렵게 말이 나온다. 두 분이 아주 기분 좋게 술잔을 받았다. 그 분이 용범에게 술을 한잔 따라 준 다음 나는 이미영 선생에게 잔을 내밀었다.

"아버님 잔 받으세요"  "어머님 잔 받으세요."

"그래 미영아 고맙다. 미영아 너도 한 잔받아라."

우리 내외는 드디어 미영이의 아버님이 되고, 이미영 선생은 우리 내외의 며느리 미영이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이미영 선생'이라는 호칭을 잊어버려도 된다. 아니 잊어버려야 한다. 내 자식이 된 것이다. 그렇게 아름답고 믿쁘던 이미영 선생이 내 자식이 된 것이다.

젊은 사돈의 술잔에도 술을 한잔 채워 준 다음 우리는 건배를 제의했다. 정말로 한 번 해 보고 싶은 '사돈'이란 단어를 써서 '사돈 건배합시다' 했다. 내게도 사돈이 생긴 것이다. ㅈ어말로 어른이 된 기분이다. 

"미영이 용범이 행복과 우리 두 가정의 화목을 위하여."

이렇게 기분 좋은 술잔을 나누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계속해서 음식이 들어왔다. 산하춘의 손님 접대하는 예의는 거의 최상이었다. 우리는 그냥 고추밭에서 잘 익은 고추를 따면서 두런두런 이야기 하듯이, 서늘한 가을 저녁에 마루에 앉아 장아찌 담글 깻잎을 재우면서 나누듯이, 아이들 키우는 얘기. 농사 짓는 얘기, 형제들 얘기, 살아온 얘기를 나누는 동안에 서로의 가정 문화를 배웠다. 아니 탐색하지 않아도 스르르 온몸에 배어 들었다. 조금 어색했던 분위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사라졌다. 우리는 동네 친구를 만나듯이 오래된 동창생 내외를 만난듯이 그렇게 쉽게 동화되었다.

 

 여자분들은 이미 장 담그는 이야기, 장아찌 담그는 이야기, 메주 쑤는 이야기 등에 흥이 겨웠다. 사부인께서는 동네 노인들이 사랑에 모이는 이야기, 마당에 원두막을 짓고 삼겹살를 구워 먹을 이야기까지 진도가 나갔다. 아내더러 운전을 할 줄 아니 친구들과 옥천에 놀러 오라는 말까지 하신다. 두 여자분들이 우리 남정네보다 더빨리 진행되고 있었다.

 

분위기가 무르 읽을 때 쯤해서 나는 슬쩍 화제를 돌려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란 말을 건네고 준비해 온 내 수필집과 칼럼집을 선물했다. 첫 수필집인 '축 읽는 아이'는 두 권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 한권에 서명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손맛', '여시들의 반란'을 모두 서명을 하고 낙관을 찍었다. 아내에게 부탁해서 사부인께 드리라고 했다. 책에 대해 설명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만 두었다.

그런 가운데도 혼인의 절차는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중간중간 다 이야기했다. 아주 쉽게 합의를 이룬다. 이쪽에서 먼저 이렇게 하자면 저쪽에서 바로 화답하고, 저쪽에서도 우리가 바로 화답할 의견만 우리에게 건네었다.

 

어느덧 3시 30분이 넘었다. 두 분이 문을 열어 놓은 고추 온상이 걱정되는지 강아지 밥 줄 것이 걱정이 되는지 조금 초조한 낯빛이었다. 그 때 석류차가 들어왔다. 마셨다. 문을 여니 12시 20분부터 시끄럽던 상견례하던 다른 집, 시할머니 생일 잔치하던 정겨운 가족들이 모두 흩어졌는 모양이다. 대궐 같은 이 한정식집이 어느덧 조용하고 고즈넉해졌다. 이렇게 늦게까지 앉아 있었는데 일하시는 분들이 한 번도 눈치를 준 일이 없고, 두 분의 말씀이 잘 익은 고사떡처럼 구수하고 진실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바쁜 분들을 붙잡아 정원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어른보다 용범과 미영이 더 좋아한다. 미영이를 집으로 데려와 오미자 차를 마셨다. 둘이서 전화로 알아보고 바로 나가서 예식장을 예약했다. 시원하고 맛깔스럽게 그리고 이상스러울 정도로 순탄하게 일이 진행되었다. 

 

2012년 6월 3일 11시  아름다운 웨딩홀

 

사진 몇장 올려도 되겠지?

 

 용범이와 미영이

 인연을 맺은 양가 가족

 미영이네 가족

 우리 가족(빠진 사람이 있어 섭섭)

누구 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