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생활과 일상/삶과 문학

단양군 영춘면 의풍, 영월군 김삿갓 계곡

느림보 이방주 2012. 7. 30. 22:43

아들 내외와 단양 의풍, 영월군 김삿갓 문학관 방문

 

2012년 7월 29일

 

노루목 앞 냇물이 수정처럼 깨끗하다. 

 

  오늘은 아들 내외와 함께 초임지인 의풍을 다녀왔다. 지난주 일요일에 가기로 하고 서울에 근무하는 딸까지 내려 왔었는데 새벽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 떠나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늘 출발하기로 했다. 딸이 안되었지만 일찌기 다녀온 적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아침 7시 30분에 집에서 내 차로 출발했다. 아들이 운전을 하겠다고 하는 것을 굳이 내가 했다. 길이 예사롭지 않고 초행길에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익숙한 내가 운전하면서 돌아가든 바로 가든 경치좋은 곳을 생각나는 대로 보여 주고 싶었다. 아내는 음료수와 떡 과자 같은 것을 준비했다.

 

  아들이 사는 아파트에 도착하니 벌써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앞에 타고 아이들을 뒤에 태웠다. 하상도로로 가려다가 동부우회도로를 선택했다. 증평-사리 -괴산을 거쳐 칠성까지 가니 쌍곡에는 이미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자동차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었다. 아마 토요일이 이곳에 와서 야영을 한 사람들이 것이다. 더위는 이미 시작되었다. 연풍에서 3번 국도로 접어 들어 수안보쪽으로 달렸다. 도로는 한산하다. 연풍에서 주변의 산들을 다 설명해 주었다. 연풍 현감으로 있던 김홍도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주었다. 연풍중에 2년을 근무하고 시내로 들어갈 때 청주여고나 상당고로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미영 선생을 며느리로 맞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인연이었다면 미영이가 그 학교로 왔을 수도 있겠지.

 

 수안보 가기 전에 송계로 향하는 지릅재길을 택했다. 길이 좋지 않고 송계로 가는 차들이 험하게 차를 몰았다. 주변의 산들을 설명해 주었다. 앞서 악휘봉, 백화산, 조령산부터 김홍도가 기생을 데리고 가서 술과 그림으로 나날을 보냈던 상암사가 있던 신선암봉, 고사리의 진산인 신선봉, 마패봉, 지릅재를 넘어 서면 북바위산, 미륵사지 근방의 포암산, 만수봉, 용암봉, 용마봉, 그리고 덕주사에서 올라가는 월악산을 일러 주었다. 미영이는 덕주사를 거치는 길로 월악산을 가보았다고 했다. 송계 계곡에는 주차장에 차가 넘쳐 갓길에도 온통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차를 피하고 사람들을 피해 간신히 야영장 앞 마을 앞을 통과했다. 아내가 갑자기 양파를 사고 싶다고 해서 차를 세우고 양파 한 자루를 샀다. 알이 굵고 실하다.

 

  제천 덕산을 지나고 수산을 지나면서 전에 구담봉을 다녀오면서 무소가 퍼져서 고생했던 생각이 났다. 아내가 그런 기억을 뭣하러 새삼스럽게 하느냐고 핀잔을 해서 '참 그 말이 옳구나' 생각했다. 제비봉아래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쉬면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사진을 찍었다. 구담봉, 제비봉은 물론 마항산(말목산) 일주하던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적성면 하진나루에서 말목산을 올라 능선을 타고 둥지봉을 거쳐 옥순대교까지 가는 길이다. 그 절경에 대한 감동과 그 스릴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효정선생, 연철흠선생과 함께 간 길이었다. 지금 휴게소에서 바라보면 과연  갈 수가 있을까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다 부딪치면 해내는 것이다.  

                   제비봉

                  강선대쪽-시어머니는 참선에 드시고

                   

                   장회나루 휴게소 전경

                  나루터 너머로 구담봉과 둥지봉이 보인다.

 

  장회나루 휴게소에서 출발하면서 생각해 보니 강선대와 두향이 얘기, 두향제를 처음 지내던 일을 얘기하지 않았다. 젊었을 온갖 일을 다 벌이고 다닌 것이 자랑거리도 못될 것 같아 그냥 참았다.구담봉 절경을 뒤로 하고 구단양에 들어섰다. 용범은 이곳을 더 뜻깊게 생각했다. 하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4살 부터 초등학교 1학년까지 살았던 곳이니까 기억이 아련하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전혀 기억이 없을 수도 있겠다. 나는 그 때의 기억이 다 나는데 아이들은 왜 나지 않을까? 아내가 아이들에게 구단양에서 있던 일을 이야기 해 주었다. 대부분 용범 어린 시절의 고집, 아이들과의 관계, 바깥에서 놀이에 심취하던 일 같은 기억들이 나도 생생하다.

 

  신단양에 오니 용범도 거기의 추억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특히 성심의원 아들과 친해서 그 집에서 놀던 이야기를 흥미 있게 했다. 그 때 용범은 의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의사인 친구 아버지가 제 아빠보다 더 부자로 보였을 것이다. 왜 의사가 되고 싶으냐고 했더니 돈을 벌어 아빠 지프를 사주겠다고 했다. 그 때부터 아이 앞에서 지프를 사고 싶다는 얘기나 물질에 대한 쓸데없는 욕심을 말하지 않았다. 1학년 입학했을 때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빠 지프를 사주는 의사가 아니라  병들어 힘든 사람을 고쳐주는 의사가 되도록 가르쳐 달라'고 썼던 기억이 난다. 내가 잘못 가르친 것을 남에게 돌린 사례이다.

 

 고습재를 얼른 넘어 바로 보발 골짜기로 들어 갔다. 미영이는 그 좁은 골짜기를 처음 보는지 놀라고 감탄했다. 그런 골짜기로 차를 타고 들어 가면 웬만치 너른 농토가 나오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보발재에 올라 길가에 차를 세우고 전망대에서 영춘 쪽을 바라보면서 그 첩첩한 산줄기와 소나무 단풍나무들을 조망했다. 여기서 사진도 찍고 한참을 쉬었다.

                  보발재에서 바라본 구인사 쪽 구비길

                   친구같은 부부

                  위와는  너무나 대조되는 우리 내외

 

 구인사 입구를 지나 영춘에서 우회전하여 동대리를 지나 베틀재에 올랐다. 이렇게 먼 길을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또 걸어서  넘어다니던 젊은 날을 생각해 본다. 베틀재에서 보이는 삼도봉과 의풍 골짜기가 언제 봐도 예전 그대로이다. 길은 넓어지고 포장되었지만 산과 냇물은 그대로이다. 의풍에서 고개로 올라오는 바람 냄새도 새소리도 그대로이다. 눈이 오금까지 쌓인 날 배낭을 메고 이 길을 걸었고, 세상이 꽁꽁 얼어 붙어있는 달밤에도 미끄러지며 이 길을 걸었다. 계곡에 물이 넘쳐 쓸려갈 위험을 모르고 이 길을 걸었다. 개울에 가제를 잡아 먹는 산돼지떼를 피해서 고개를 넘던 비내리는 밤도 생각난다. 여기서 야학을 하고, 노인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동네 아낙들에게 토정비결을 봐주었다. 저녁에는 부진한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가감승제를 가르쳤다. 때로 의사가 되고, 때로 동네 사람들의 다툼에 판사도 되었다. 동네 청년들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띄워 주었다. 40년 전의 낭만과 열정이 베틀재만 넘으면 되살아나는 듯하다. 그러나 감회만 있는 것이 아니고 회한도 있다. 의풍은 교직관을 갖게 해 주기도 했지만 때로 좌절도 주었다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의풍학교는 야영장이 되어 있다. 한바퀴 돌아 노루목으로 갔다. 노루목상회 주인장이신 김성수씨를 만나 인사하고 아들과 며느리를 소개한 뒤  닭볶음탕 준비를 부탁했다. 가게 마당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니 제발 이웃 식당으로 가시면 감사하겠다'고 입간판을 세워 놓았다. 그래도 우리는 다른 집으로 갈 수가 없다. 손님이 엄청나다. 김삿갓 문학관 주차장에는 차가 가득하다. 길가에도 온통 자동차이다. 나는 다리 위에 차를 세웠다.

 

  김삿갓 생가지로 갔다. 이 골짜기는 정말 의풍 생활 기억중에서 가장 낭만적인 골짜기이다. 학부모들과 인간적인 만남을 가졌던 곳이다. 여기서 술을 마시고 여기서 옥수수를 먹고 여기서 밤을 새웠다. 꺽지 튀김을 잘 만들었던 이영희 아버지 이상운씨, 종칠이 아버지 성규씨가 당시에는 모두 삼심대이고 나는 이십대 초반이다. 이상운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김성규씨는 노루목 상회식당을 차려 돈을 잘 벌고 있다. 그 때 술을 마시면서도 이상운씨의 집 뒤 산소가 김병연의 산소라고 이야기들 했다.

 

 나는 김병연의 문학의 문학성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가 할아버지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방랑생활은 낭만도 속죄도 아니고 무책임한 핑계라는 생각뿐이다. 방랑이 아니라 방탕이 아닐까? 가족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혼자서 전국을 떠돌다가 화순에서 죽은 것을 아들이 여기다가 묻었다고 한다. 86년 쯤인가 김삿갓 묘에서 삿갓제를 처음 지낸 것은 그의 문학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술마시고 노는 핑계를 찾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영월군의 큰 문화행사가 되어 있다.

 

                    김성수씨의 노루목 식당에는 제발 이웃 식당으로 가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입간판이 서 있다

 

                  마대산으로 오르는 길에 작은꽃으아리

 

                   싸리꽃

                  으아리

                  골짜기를 오르며

 

  김삿갓 생가지는 예전과 똑 같은 집이 한 채 서 있다. 이곳에는 한문을 가르치던 어떤 훈장이 아주 젊은 여인과 살고 있었다. 그 여인에게 딸이 있었는데 그 중 3학년짜리가 하나 내 반에 있었다. 어느날부터인가 학교를 나오지 않아 학교에 다니기를 종용하느라 10리도 넘는 이 길을 열번도 더 쫓아다녔을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 오고 싶은데 아버지가 막는다. 이야기는 '지지바가 편지나 보고 거시름돈이나 받을 줄 알먼 된거 아이니껴? 뭔 글이 필요할라꼬요?' 그 훈장의 말이다. 나는 학교를 믿지 못하느냐고 따졌다.  학교를 믿지 못하는 것이 못마당해서 끝까지 찾아 갔었는지 모른다. 기어이 학교를 그만 두었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어른들의 잘못을 아이들에게 뒤집어 씌웠을까? 그 어린 어머니는 돌아앉아 울기만 했다. 그 젊은 여인이 담아주던 대추는 참 알이 굵기도 했다. 어쩌면 김삿갓의 생가지에 그렇게 글과 다른 삶을 사는 이가 살았을까? 인연도 남다르다. 덥기도 해서 바로 내려왔다.

 

  마대산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다. 사람들이 물에 들어가 발을 담그고 물장구를 친다. 이 계곡은 상수원이라는데 -------- 볕이 워낙 강해서 미영이 얼굴이 발갛게 익었다. 아들 내외는 즐겁고 아내는 신이 나 있다. 노루목 상회에 내려오니 그렇게 손님이 많은데 우리 자리를 따로 비워 놓았다. 점심상을 받았다. 감자를 많이 넣고 볶은 닭볶음탕이다. 묵은지, 고추장아찌 나물무침이 다 맛있다. 김성규씨 아들인 제자가 감자부침개를 내왔다. 조깝데기 술 한동이를 다 비웠다. 배를 두드리며 먹었어도 볶음탕을 다 먹지 못했다. 싸 올 수도 없다. 그냥 두고 일어서려는데 아들 내외가 없다. 냇물에 가서 발을 담그고 어린 아이들처럼 놀고 있었다. 좀더 기다렸다.

                   김삿갓 생가지

                   난고 김삿간 유허비 앞에서

 

                  점심상

                  마당에 옛날 구루마

                시냇물에 발을 담그고- 여기는 상수원이 아니다

 

 점심값을 계산하려고 하니까 주인인 제자가 가족끼리 오셨는데 어떻게 점심값을 받느냐고 굳이 받지 않는다. 서너번 권해도 받지 않아 그러면 내가 다시 여기 오지 못한다니까 '다른 손님들과 함께 휴가를 오면 당연히 받지요.' 하면서 굳이 받지 않는다. 도리어 칡즙까지 싸 준다. 공연히 더 있다가는 더 싸 줄 것 같아 아들 내외을 불러 돌아가자고 했다.

 

  돌아오는 길은 영춘에서 우회전하여 군간교 쪽으로 택했다. 용범이 운전을 했는데 가곡에 들어서기도 전에 졸음이 오는지 차를 길가에 세운다. 여기부터 다시 월악나루까지 내가 운전을 했다. 이렇게 교대로 운전하니 피곤하지 않다. 장연에서 아내가 옥수수를 두 포대 샀다. 아이들에게 몇 개 주고 처형에게 갖다 주었다. 저녁은 간단히 용범이 샀다. 아들 부부를 보내고 집에 돌아오니 피곤이 몰려 온다. 약한 피로에서 느낄 수 있는 야릇한 쾌감, 그리고 입에 담기 민망하지만 이 행복 가름할 길이 없다. 그러나 그것이 자꾸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