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아내가 된장찌개를 준비하면 막 퇴근한 남편이 쌀을 씻는다. 된장찌개에 매운 고추를 한 개쯤 썰어 넣으면 어떨까하고 남편이 의견을 낸다. 아내는 곧 농사짓는 친정에서 가져온 매운 고추를 썰어 넣는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는다.
이렇게 마주 앉은 식탁에서 부부 갈등은 생각할 수도 없다. 다음번에는 애호박을 넣어볼까, 된장을 조금 더 넣을까. 이런 이야기가 밥상의 화제로 오른다.
또 가을맞이 여행은 어디로 떠날까, 시골 어른들은 언제쯤 찾아뵐까. 이런 의견이 존중과 사랑의 눈길 속에서 오고 간다.
나이 든 시어머니가 잡채를 무친다.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시어머니가 사리 한 가닥을 예쁜 며느리 입에 넣어준다. 간을 더할까, 깨소금을 더 넣을까. 의견을 묻는다.
아들이 들어오자 온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다. 고등학교 3학년짜리 막내까지 돌아오면 식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둘러앉은 식탁에 웃음꽃이 핀다.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에게 신세대의 사고를 배우고,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른의 가치를 받아 이어간다. 형은 아우에게 인생의 조언을 들려주고, 형수는 시동생에게 이상적인 여인상을 심어 준다. 아버지는 막내에게 밥상머리 가르침을 준다. 이런 가정에선 고부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 폭력을 모른다.
이것은 꿈이다. 꿈을 그려본 것이다. 일상이 행복한 청춘, 이루기 어려운 꿈은 이렇게 두가지만 그려 보겠다. 우리 젊은이들의 저녁 시간은 이렇게 행복할 겨를이 없다. 임금 없는 시간외 근무와 원하지 않는 회식으로 저녁 시간의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OECD에 진입한 국가들 중 우리 젊은이들만큼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빼앗기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저녁 시간을 반납해야 한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 어른들은 미래를 담보로 저녁시간을 빼앗아간다. 아이들의 주변에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를 만들어 놓고, 노출될까 두려워 학교에 잡아 둔다. 대학에 입학한 청년들은 그들의 따분한 미래를 준비하느라 집밥을 먹을 틈이 없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도 아버지의 밥상머리 훈계도 들을 여유가 없다.
대학을 마치고 그들의 꿈인 대기업에 입사를 한다. 그 순간 젊은이들은 기업에 저녁시간을 헌납한다. 행복을 가져다 줄 일상을 희생하는 것이다. 행복의 시간을 경쟁의 시간으로 바꾸어 갖는다.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젊은이일수록 저녁의 행복이 없다. 심야에 퇴근할수록 가족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고통을 극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손잡고 영화관에 가는 짜릿한 행복은 경쟁사회라는 독재 권력에게 박탈당한다. 일상의 행복은 아주 먼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어떤 이가 돈의 권력인지 신분 사회라는 독재인지에게 빼앗긴 젊은이들의 저녁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단다. 참으로 산뜻한 말이다. 정치인들의 말에 무디어진 귀인데도 산뜻하게 다가왔다. 얼어붙은 귀라도 녹일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표로 몰고 가기에 그보다 더 신선한 말은 없을 것이다. 혹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그런 산뜻한 말을 생각해 낸 머리가 기특하다.
그러나 신뢰도가 바닥인 정치인의 약속을 믿었다가 좌절할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사회가 얼마나 깨끗해지면 가정에서 꿈같은 저녁시간을 갖게 될까? 언제쯤 GNP 2만불을 넘어선 우리의 젊은이들도 저녁시간이 만들어주는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언제쯤 내 자식과 제자들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위로하지 않아도 될까?
일상이 행복한 청춘
이방주
젊은 아내가 된장찌개를 준비하면 막 퇴근한 남편이 쌀을 씻는다. 된장찌개에 매운 고추를 한 개쯤 썰어 넣으면 어떨까하고 남편이 의견을 낸다. 아내는 곧 농사짓는 친정에서 가져온 매운 고추를 썰어 넣는다.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에서 고향의 냄새를 맡는다. 이렇게 마주 앉은 식탁에서 부부 갈등은 생각할 수도 없다. 다음번에는 애호박을 넣어볼까, 된장을 조금 더 넣을까. 이런 이야기가 밥상의 화제로 오른다. 또 가을맞이 여행은 어디로 떠날까, 시골 어른들은 언제쯤 찾아뵐까. 이런 의견이 존중과 사랑의 눈길 속에서 오고 간다.
나이 든 시어머니가 잡채를 무친다.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다. 시어머니가 사리 한 가닥을 예쁜 며느리 입에 넣어준다. 간을 더할까, 깨소금을 더 넣을까. 의견을 묻는다. 아들이 들어오자 온가족이 식탁에 둘러앉는다. 고등학교 3학년짜리 막내까지 돌아오면 식사가 시작된다. 이렇게 둘러앉은 식탁에 웃음꽃이 핀다. 시어머니는 젊은 며느리에게 신세대의 사고를 배우고, 젊은 며느리는 시어머니에게 어른의 가치를 받아 이어간다. 형은 아우에게 인생의 조언을 들려주고, 형수는 시동생에게 이상적인 여인상을 심어 준다. 아버지는 막내에게 밥상머리 가르침을 준다. 이런 가정에선 고부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자란 아이들은 학교 폭력을 모른다.
이것은 꿈이다. 꿈을 그려본 것이다. 일상이 행복한 청춘, 이루기 어려운 꿈은 이렇게 두 가지만 그려 보겠다. 우리 젊은이들의 저녁 시간은 이렇게 행복할 겨를이 없다. 임금 없는 시간외 근무와 원하지 않는 회식으로 저녁 시간의 행복을 빼앗기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다.
OECD에 진입한 국가들 중 우리 젊은이들만큼 자신의 행복한 일상을 빼앗기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저녁 시간을 반납해야 한다. 학교에서 저녁을 먹고 학교에서 공부해야 한다. 어른들은 미래를 담보로 저녁시간을 빼앗아간다. 아이들의 주변에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를 만들어 놓고, 노출될까 두려워 학교에 잡아 둔다. 대학에 입학한 청년들은 그들의 따분한 미래를 준비하느라 집밥을 먹을 틈이 없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도 아버지의 밥상머리 훈계도 들을 여유가 없다.
대학을 마치고 그들의 꿈인 대기업에 입사를 한다. 그 순간 젊은이들은 기업에 저녁시간을 헌납한다. 행복을 가져다 줄 일상을 희생하는 것이다. 행복의 시간을 경쟁의 시간으로 바꾸어 갖는다.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젊은이일수록 저녁의 행복이 없다. 심야에 퇴근할수록 가족들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고통을 극복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맛있는 식사를 하고, 손잡고 영화관에 가는 짜릿한 행복은 경쟁사회라는 독재 권력에게 박탈당한다. 일상의 행복은 아주 먼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정치하는 사람들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지만, 어떤 이가 돈의 권력인지 신분 사회라는 독재인지에게 빼앗긴 젊은이들의 저녁 시간을 돌려주겠다고 말했단다. 참으로 산뜻한 말이다. 정치인들의 말에 무디어진 귀인데도 산뜻하게 다가왔다. 얼어붙은 귀라도 녹일 수 있을 것 같다. 참으로 좋은 아이디어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여 표로 몰고 가기에 그보다 더 신선한 말은 없을 것이다. 혹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말일지라도 그런 산뜻한 말을 생각해 낸 머리가 기특하다. 그러나 신뢰도가 바닥인 정치인의 약속을 믿었다가 좌절할 미래가 두렵기만 하다.
사회가 얼마나 깨끗해지면 가정에서 꿈같은 저녁시간을 갖게 될까? 언제쯤 GNP 2만 불을 넘어선 우리의 젊은이들도 저녁시간이 만들어주는 일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까? 언제쯤 내 자식과 제자들을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궁색한 변명으로 위로하지 않아도 될까?
(2012. 8. 21)
오피니언
일상이 행복한 청춘
이방주 수필가·충북고 교사
데스크승인 2012.08.30 지면보기 | 20면
충청투데이 | cctoday@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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