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산성에서
백골산에서 바라본 대청호반
여기는 백골산, 아니 백골산성이다. 나는 백골산성 망루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지금은 대전시 동구 신하동. 백제 땅도 아니고 신라 땅도 아니다. 성을 차지하려고 다툴 사람도 없이 그냥 우리 겨레붙이가 함께 사는 대전광역시 신하동 뒷산이다. 누구도 가릴 것 없이 어느 때를 따질 것도 없이 여기에 올라 올 수 있고, 마음 닿는 대로 내려갈 수 있다.
백골산, 이름은 괴악해도 산은 아주 작고 부드러운 야산이다. 아니 그냥 동네 뒷산이다. 신하동과 신상동을 잇는 산줄기이다. 마을 사람들이 나무하고 산나물 캐던 그런 산이다. 아이들이 산딸기를 따고, 억새를 꺾어 활을 쏘던 그런 민중들이 디딘 일상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언덕배기이다.
덥다. 예보보다 더 덥다. 셔츠가 다 젖었다. 산 아래보다 여기 아름드리 참나무 우거지고, 성으로 테를 두른 산마루 망루라 더 덥다. 땅이 뜨겁다. 하늘이 뜨겁다. 나무는 하늘을 찌르고 풀은 성석을 덮었다. 열려있는 하늘이 닫힌 듯 갑갑하다. 시간을 넘어 그날의 열기가 오늘까지 뜨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여기서 백제 성왕의 백성 삼만이 죽었다고 일러준다. 소중한 목숨 팽개치듯 버린 가련한 백성의 백골 위에 내가 앉아 있는 것이다. 1500년 전 여기에 버려진 백골을 깔고 앉아 있는 것이다. 나무도 풀도 돌도 흙도 백제인의 혼이고 백제인의 살이고 뼈이다. 서성거리는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다 백제인의 한이다. 성왕의 백성이기 이전에 아가들 웃음소리에 행복해 하고 아낙네 뒤태에 가슴 설레던 소박한 민중이었기에 그들의 한은 더 깊다.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출가시키고 신라가 느슨해지기를 기다리며 기회를 노렸다. 때를 타서 태자 여창이 신라 손안에 있던 옥천의 관산성을 점령해 버렸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세력을 넓혀가던 진흥왕의 자존심은 성처럼 무너졌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성왕은 고작 50명 군사를 데리고 아들을 격려하러 고리산성으로 향했다. 그 시대에도 세작(細作)은 있었다. 첩보를 접한 신라군은 구진벼루에서 성왕을 기다렸다. 경솔했던 성왕은 사로잡혔다. 백제의 영웅적 제왕인 성왕은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관산성 바로 아래 개울가에서 일개 졸병의 칼 아래 목을 늘여 치욕적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영웅의 싸움은 필부의 피를 부른다. 아니 영웅은 자신의 이름에 필부의 피를 묻혀 이루어낸다. 영웅은 자신의 이름을 필부의 피로 쓴다. 진흥왕과 성왕이라는 신라와 백제 두 영웅의 싸움은 구진벼루에서 종말의 기미를 보이고 여기 백골산성에서 끝이 났다. 역사의 갈림길은 여기서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젊은 황태자에게 차분한 작전이 있었을 리 없다. 그의 무모한 공격은 여기 백골산성에 이만구천육백이라는 자기 백성의 피를 뿌리고 뼈와 살을 묻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랴부랴 부여로 도망가 위덕왕이 되었다. 그렇게 백골 산성은 삼국쟁패의 분수령이 되었다. 나는 그 분수령에 앉아 있다. 백제의 병사가 진흥왕의 목을 베어 경주로 보냈다면 오늘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바로 저기 관산성이 보이고 부여 창이 주둔했던 고리산성이 코앞이다. 아마도 그들은 해일처럼 밀려오는 신라군의 공격에 몰려 여기까지 쫓겨 왔을 것이다. 여기서 가문날 무자리에 올챙이 모이듯 기진맥진하여 말발굽에 짓밟히며 칼을 받았을 것이다.
참혹한 역사의 현장도 1500년 지난 지금에는 모두가 전설이 되었다. 저렇게 성석이 흙에 묻히듯 그렇게 묻혀 버렸다. 무너져 여기저기 흩어진 성석이 그날의 참혹했던 모습을 대신 말해 준다. 바위 이끼 낀 돌에서 얼룩진 핏자국이 보일 듯하다. 그날의 억울한 영혼이 잎사귀마다 흐느낀다.
아름드리 참나무가 하늘을 가린다. 성석도, 그날의 함성도, 비명도, 두런두런 그날의 얘기도, 피눈물 섞인 흐느낌도 뼈와 함께 다 땅에 묻혔다. 뼈는 나무가 되고, 그들의 피는 이슬이 되었다. 그들의 숨결은 바람이 되어 나뭇가지에 걸렸다. 하늘을 찌르는 참나무는 지금도 그들의 피를 길어 올려 광합성을 한다. 우리는 그날을 그냥 전설처럼 말한다.
그런 비극적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기서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다. 문의로 향하는 호반이 한 폭의 그림이다. 기다란 하늘색 깁을 펼쳐놓은 듯 호수는 한없이 푸르고 아름답다. 잔잔한 수면 위에 동동 떠있는 섬이 외롭지 않다. 어린 아이가 크레파스로 그려 넣은 것 같은 하얀 호안선(湖岸線)이 착하고 순하다. 아무런 불평도 없이 단정하게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그칠 줄 모르고 달려간다.
여기서 강을 사이에 두고 계족산성이 보인다. 옛날의 닭이 바로 앞에 삐쭉하게 솟은 개머리산을 한번 발로 차고 홰를 치며 계족산성으로 날아갔을까? 이름이 심상하지 않다. 첩첩한 산줄기가 원망스럽다. 옛사람의 고향이 여기서 얼마나 멀겠는가? 닭처럼 날아서 계족산성에 발을 디디면 거기가 바로 고향이 아니었을까?
아이들이 보고 싶고, 아내가 그립고, 부모가 걱정되어 성석에 앉아 한탄하며 별을 바라보았을 그들을 다시 생각해 본다. 그날의 비극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이 차를 몰고 음식점이 즐비한 이른바 꽃님이 반도로 들어간다.
그들은 왜 싸워야 했을까? 누구를 위하여 이웃 마을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누어야 했을까? 여기서 관산성은 백리도 안 된다. 그 마을에는 사돈도 살고 외가도 있었을 것이다. 그냥 거기서 각자 소 기르고 농사지으면서 소박하게 살면 되었을 것이다. 농사를 팽개치고 창을 들고 싸움터로 불려 나오면서 가진 소망은 무엇일까? 그들에게도 삼국 통일이, 제왕에 대한 충성이 어린 새끼를 안고 어르는 것보다 더 절실한 소망이었을까?
우리는 소망 때문인지 이념 때문인지 아니면 욕망 때문인지 싸우는 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북쪽에서는 남쪽과 상종도 안한다 하고, 남쪽에서는 북쪽을 독재라 비아냥거린다. 북쪽에서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연평도에 대포를 쏘았고, 남쪽에서는 연평도에 새로운 사령부를 창설했다. '무찌르자, 때려잡자, 쳐부수자'하는 것이나 '서울을 불바다로'라면서 으름장을 놓는 것도 영웅의 언어인가? 우리는 누구의 이념으로 전단을 보내고, 그들은 누구의 이념으로 대포를 놓았는가? 영웅의 영혼은 필부의 생각보다 잔인해야 하는가?
참나무가 스산한 바람을 몰고 온다. 수많은 잎사귀들이 햇살을 받아 되비친다. 바람에서 여리고 한 많은 영혼들의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난다. 바보 같은 우리를 꾸짖는 것인지, 모르는 체 하는 것인지, 초여름 하늘은 서럽게 푸르다. 하얀 노트 위에 비친 나뭇잎의 검은 그림자가 바르르 떤다.
(2011.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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