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염티 마을 소금고개

느림보 이방주 2011. 5. 6. 08:43

염티 마을 소금고개

 

문덕이나 염티 마을에는 왠지 숨은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다. 염티는 문의면 염티리에서 회남면 남대문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이 길은 승용차로도 만만찮은 고갯길이다. 고갯마루에 염티(鹽峙)라는 한자 이름이 궁금증을 더한다. 그러나 두 마을만 소통되는 단순한 고개는 아니라는 것은 염티에 올라 내려다보면 알 수 있다. 염티에서 바라보면 회남에서 옥천 안내면으로 가는 구름재, 보은으로 오가는 밤재를 가물가물하게 볼 수 있다.

피반령에서 샘봉산까지 마루 금을 걸어서 월리사로 내려온 적이 있다. 이 산줄기는 백두대간 속리산 천왕봉에서 한남금북정맥으로 뻗어가다가 추정재에서 팔봉지맥으로 갈라져 다시 피반령에서 남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팔봉산까지 한 줄기와 샘봉산까지 뻗어가는 한 줄기로 나뉘게 된다. 그래서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고개는 피반령과 염티가 가장 큰 고개이다. 어느 고개를 넘든지 수리티를 넘어야 보은에 도달한다. 금강의 부강포구에서 보은이나 상주까지 가는 길은 염티가 지름길이다. 그러니 서해안에서 생산된 소금이 이 고개를 넘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소금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에서 마을과 도시 발달은 물론 국가가 형성되는데 기본적인 동력원이 되었다. 실크로드가 비단과 차가 오가는 길이었다면 소금길(salt road)은 소금과 더불어 뭍의 물자와 바다의 물자가 오가는 길이었다. 역사를 이루는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소금길은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여러 곳에 실크로드보다 더 다양하게 존재한다고 들었다. 히말라야를 넘어가는 소금길도 있었다고 하니 소금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만한 일이다. 우리나라의 소금길도 바다에서부터 뭍으로 다양하게 존재했다. 강원도 정선의 백복령은 동해안 소금이 정선으로 넘어오는 길이었고, 경북 언양에서 운문재를 넘어 청도로 소금이 넘었던 길도 있었다.

부강포구에서 내린 소금은 어떤 길을 지나 염티에 이르렀을까. 나주 영산포에 갔다가 황포돛대를 본 적이 있는데 강에 띄워놓은 전시품이었지만 옛날에 어떻게 강물을 거슬러 올랐는지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또 부여 부소산성 아래 고란사에 갔다가 백강에 떠가는 유람선을 봤는데 이 배는 아무래도 소금 배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부강포구에는 아마도 영산포 황포돛대 같은 배가 들어왔을 것이다. 염티 마을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부강포구에서 내린 소금은 부강에서 수레너미를 넘어 죽암, 홈너머, 두모실, 문의를 거쳐 구룡, 산덕이를 지나 염티로 왔다고 한다. 염티라는 이름으로 봐서 여기도 작은 소금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염티를 넘어가기 전 마지막 동네인 염티리나 문덕리에는 분명 주막이 있었을 것이다. 소금 지게를 지는 사람들은 대개 소두 10말을 지고 하루에 50리를 이동했다고 들었다. 50리라면 대강 20km를 말하는데 부강포구에서 염티 마을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소금을 지고 온 지게꾼들은 소금 뿐 아니라 생선이나 건어물은 물론 미역 김 같은 해조류도 함께 지고 왔을 것이다. 특히 조기나 문어 같은 건어물이나 김이나 미역 같은 해조류는 제수의 꼭 필요한 물건이므로 소금가마니 위에 얹어서 진다해도 크게 무게가 나가지 않을 것이다. 덤으로 얻는 이윤으로 노자를 보태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염티 마을에 오면 소금도 사고 제수도 장만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염티 주막에서 흥청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는 듯하다.

외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은 늘 물건만 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바다나 포구로 나가면 바다 이야기도 함께 담아 와서 풀어놓기 마련이다. 문명은 길을 따라 나가고 들어온다. 물길이든 산길이든 길이 있으면 사람살이의 문화는 흘러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삶의 방식이고 삶의 문화이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문명이 모이는 곳이고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소금길은 문명의 길이고 생명의 길이다. 거기에는 숨 쉬는 문화가 존재한다.

염티 마을에 흘러와서 괴는 문화는 어디가 시발점일까 궁금하다. 도로교통이 발달하기 전에는 강이 고속도로이다. 부강포구가 종점인 고속도로의 시발점은 하구인 강경포구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강경은 평양시장, 대구 서문시장과 함께 조선시대 3대 시장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쇠락했지만 강경에 가면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고 강경 중심가는 역사박물관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어물 젓갈은 강경시장을 무시할 수 없다. 강경에서 출항한 황포돛대는 소금, 조기, 새우젓, 건어물, 해조류를 싣고, 규암, 부여, 공주를 거쳐 부강포구 용댕이에 배를 댄다. 부강포구에는 배가 200여 척 정박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했다고 한다. 용댕이도 얼마나 흥청거렸을지 짐작이 간다. 보은 회남 상주 등지의 특산물이 모여 강경으로 나가고 강경의 해산물들이 용댕이에 다 모여 물물교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부강포구까지 올라오는 뱃길은 오늘날 고속도로나 마찬가지이다. 부강포구 부근의 산성을 거의 답사했는데 군사적인 요새이가도 해겠지만 포구를 오가는 배나 사람을 관리하는 기능도 했을 것이다. 부강포구가 시들해진 것은 모래가 쌓여 강바닥이 올라오고 강물이 줄어 배가 다닐 수 없게 되고, 경부선 부강역이 생겨 금강이 고속도로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염티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내가 염티 마을을 방문한 것은 소금길과 함께 해묵은 된장내 같은 그런 사람 사는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이다. 몇 안 되는 염티 마을 노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그분들도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기억을 더듬어 들려주었다. 일제 강점기 초기만 해도 짐꾼들이 염티 소금고개를 넘었다. 당시만 해도 호랑이가 나오고, 고개가 너무 길고 험해 소금 짐꾼이 염티 마을이나 문덕리쯤 와서는 넘어갈 일을 생각하면서 앉아서 울었다고 한다. 지게꾼들은 하루 50리를 걸으며 주막에서 잠도 자고 노숙도 했다. 노숙할 때는 잠자리에서 밥을 지어 먹기도 했다니 그들이 길에서 겪는 삶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만하다.

염티 마을은 오지이지만 과거에는 어느 마을보다 문명이 빠르게 들어와서 괴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대청호에 물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도회나 타지로 떠나 마을은 점점 공동화되어 간다. 상실의 아픔이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남은 이들의 얼굴은 언제나 스산함이 걷히게 될까 보는 사람 마음까지 스산해진다.

(2025.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