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청주와 청주 사람들

산과 강 사이 -옥화구곡길을 걸으며-

느림보 이방주 2021. 1. 17. 07:01

 

 

산은 마을을 나누고 강은 마을을 잇는다. 산은 마을마다 조금씩 다른 사람살이를 만들어내고 강은 마을에 새로운 살림살이를 전하고 소통한다. 산은 나누고 강은 통섭한다. 산과 강 사이에 길이 있다. 산과 강은 자연이 만들었지만 길은 사람이 만들었다. 길을 따라 마을이 이웃으로 간다. 길을 따라 문명이 들어오고 사람살이가 쌓여 문화가 된다. 산과 강 사이에 길이 있고 길 위에 사람이 있어서 쉼 없이 문화도 역사도 이어간다.

옥화구곡길을 걸었다. 바람 불고 추웠다. 옥화구곡길은 미원면 운암리 청석굴 공원부터 어암리까지 달래강을 따라 이어지는 14.8km 길이다. 둔치를 걸어 마을 앞을 지나 산기슭을 내려서면 징검다리를 건너 이웃 마을로 간다. 강바람은 맵고 산바람이 볼에 시리다. 삶은 때로 바람이고 시련이다. 징검다리에 서서 얼음을 씻으며 흘러가는 겨울 달래강 맑은 물을 본다. 역사는 달래강 물빛처럼 맑을 때도 있고 바람처럼 차가울 때도 있다.

청석굴공원 주차장에 차를 두고 달래강 둔치에 깔아놓은 박석에 첫발을 놓는다. 이 물은 한남금북정맥 동쪽 기슭에서 모여들어 옥화휴양림에 이르면 속리산에서 발원한 물과 몸을 섞어 달래강이 된다. 용소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여울을 돌아 천천히 흐르며 천경대와 옥화대를 담아낸다. 물이 맑으니 담긴 구름은 그림이 된다. 물이 이토록 맑은 것은 낭성에서 속리산에서 맑게 사는 사람들의 심성을 담아 흐르기 때문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달래'는 물맛이 좋아 ‘달다’와 ‘내’가 합성하여 달래[甘川]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냇물, 달강이라고도 부른다. 누구는 슬픈 오누이전설을 말하기도 한다. 달래강은 산이 나눈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담아 부딪치고 부서지며 역사의 소리를 낸다.

옥화대에서 천경대를 오른쪽에 두고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면 강 건너 추월정, 세심정, 만경정, 옥화서원을 바라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이 가을 달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세상의 달달한 물에 삿된 마음을 헹구어내던 달래강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어디 물소리만 들리랴. 낙락장송도 있고 들꽃 들풀도 있고 새소리 말씀도 담아 흐를 것이다. 마을을 지나 구불구불 산과 강이 만들어낸 오솔길을 걸어 활처럼 구부러진 호산을 지나 징검다리를 건넌다. 길은 강을 끼고 산을 돌아 옥화리에서 월룡리로 월룡리에서 금관리로 통하게 된다.

길은 사람의 발이 자연에 닿는 순간순간이 모여 이루어진다. 원시의 자연도 사람의 발이 닿으면 문명의 길이 된다. 문명이라 해서 사람만이 주인은 아니다. 길에는 멧돼지도 고라니도 다닌다. 참새도 비둘기도 날아든다. 발이 없는 지렁이도 뱀도 주인이 된다. 들꽃도 향기를 뿜고 들풀도 덩굴을 벋는다. 그들의 자취가 모두 모여 길은 더 아름다운 길이 된다. 길은 사람만이 주인이 아니라 생태계 모든 이가 함께 주인이다.

길은 마을의 사람살이나 마을의 문화나 마을의 역사만 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네 속내에 품은 이야기도 전할 길을 찾게 마련이다. 보이지 않는 길이다. 금관리 산속 작은 마을인 갯골에서 초등학교가 있는 큰 마을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걷노라면 문득 내면의 길이 흐릿하게 보일 듯하다. 아카시나무 사이 아무도 보이지 않는 커다란 바위에 서서 시원하게 오줌을 내갈기고 나면 나도 모르게 어디론가 향하는 마음 줄기를 보게 된다. 그건 내 이념이 갈 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도 산이 있고 강이 있다. 이념의 산기슭에는 어렴풋이 길이 보인다. 마음이 나아갈 미래의 길이라 믿는다. 그 길을 걸어가는 속내는 아무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 나의 이념도 지렁이 발자국만큼 희미한 길이겠지만 뜻하지 않게 굵은 역사를 남길 수도 있다. 우리네 삶이 다 그렇다.

금관숲 못미처 갯골로 올라가는 다리에서 학당산을 바라보면 기슭에 작은 초등학교가 있다. 내가 스물여섯 살 때 2년간 근무했던 학교이다. 달래강 단물 같은 아이들과 살면서 나도 맑은 삶을 배웠다. 길가에는 내가 하숙했던 집도 남아있고, 멱 감을 때 옷을 벗어 놓았던 바위도 있다. 여기서 내게 글을 배운 이들은 선생님도 있고 기업의 경영인도 되고 법조인도 되고 동화작가도 되었다. 다들 남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젊은날에 만든 내 길이다.

언덕배기 갯골에 오르면 삼일독립운동 민족대표 신석구 선생의 생가를 만난다. 선생은 어린시절 공부한 유학을 주춧돌로 삼아 기독교라는 기둥을 세웠다. 고심 끝에 목사가 되어 항일운동을 한 분이다. 선생의 이념의 길은 달래강을 따라 서울로 갔기에 겁박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선생의 정신은 여기 맑은 산과 강을 닮아 마음길이 올곧게 나아간 것이다. 길은 산기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네 마음에도 있다. 선생의 길이 역사의 길을 따라 우리네 마음길에 전해온다.

금관숲을 지나 홍수 때 아이들을 건네주던 방마루를 지나면 애잔한 사랑이야기가 담긴 가마소뿔이 나온다. 가마소뿔에서 어암이 바로 저기다. 물은 여기서 건지산을 휘돌아 청천을 지나 괴산을 거치면서 달래강의 이야기를 담고 흘러 우륵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탔다는 충주 탄금대에서 영월 단양 충주호 이야기를 담은 남한강과 몸을 섞는다. 탄금대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금단산, 백악산, 조봉산, 청화산, 칠보산, 장성봉, 군자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을 다 받아들인다. 서으로 미동산, 선두산, 좌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도 다 받아들인다. 백악산이나 청화산에서 내리는 물이 백두대간 물이라도 뻗대는 법 없고, 좌구산에서 들어오는 물이 한남금북정맥의 물이라 주눅 드는 법 없다. 좌에서 오는 물이나 우에서 오는 물이나 함께 단물이 된다. 그냥 남한강이 되고 두물머리까지 가면 그냥 한강으로 하나가 된다.

강이 사람이나 고라니를 다 받아들이듯 길은 그들의 이야기를 다 받아 문화를 통섭하는 또 다른 길이 된다. 나는 옥화구곡 길을 걸으며 그 말씀을 받아 숨을 쉬고 에너지를 만든다. 내가 받아 쉬는 숨길을 그리운 이에게 뻗어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도타운 길이 된다. 그렇게 그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우리는 역사의 말씀을 받아 오늘도 영혼이 살찌운다. 세상이 내게 오는 길이 되고 내가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바람 불고 싸늘한 오늘도 그렇다.

(2021.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