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31일
지난 밤 가이드의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야 한다는 말의 부담감 때문에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아내는 5시 30분부터 일어나서 준비를 시작한다. 한국시간으로 4시 30분이니 한밤중이 아닌가? 계림에는 비가 내린다. 일어나 보니 호텔은 밤에 본 것보다 더 고급이다. 아침은 간단하게 호텔식으로 하였다. 양식에 중국 전통음식이 곁들여진 뷔페였다. 나는 쌀죽과 토스트와 양배추 샐러드를 먹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려고 했는데 다른 분들이 가져다 드시는 것들이 맛있어 보여 한 가지 씩 추가하다보니 과식이 되었다. 그래도 점심 식사 시간이 늦어진다니 그런대로 잘 한 일이다.
식사 후 바로 이강 유람을 하려고 관암선착장으로 향했다. 계림에는 계수나무가 많아 계림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광서 장족 자치구라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자치구에 대한 설명과 계수나무의 쓰임에 대한 설명도 쉴새없이 했다. 계림시의 규모와 생활 풍습 같은 것도 줄줄이 꿰고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하였다. 한국인 관광이 많아지면서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삶의 영역이 넓어지고 지위도 향상되었다는 말은 참으로 흐뭇했다. 장족은 이 자치구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장족 이외에도 요족, 묘족이라는 소수 민족이 더 있다고 한다.
계림은 광주처럼 웅장한 큰 도시는 아니지만 번화하고 사람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도시였다. 호텔에서 나오자 특이한 것은 카르스트 지형의 특히한 봉우리들이 우뚝 우뚝 서있는 모습이었다. 중국 영화에서나 보던 신비스러운 봉우리들을 여기서 다 본다. 광서장족자치구는 베트남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남쪽으로 많이 내려왔나를 짐작할 수 있었다.
◈ 계림 (구이린 [桂林, Guilin]
중국 광시좡족[廣西壯族]자치구 북동부에 있는 도시.
위치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북동부
행정구분 5구 10현 2자치현
인구 66만
주장[珠江] 수계의 구이장[桂江]에 임한 하항(河港)으로, 일찍이 진(秦)나라 때부터 발달한 화난[華南] 최고(最古)의 도시이며, 한때 광시성[廣西省]의 성도(省都)가 된 적도 있다. 계림의 명칭은 이곳이 예로부터 계수나무가 많은 지역으로 ‘계수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빼어난 풍치로 예로부터 시인과 화가들의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어왔다.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다(桂林山水甲天下)' 라는 명성을 들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중의 하나이다. 특히 독특한 모양의 기암괴석으로 유명한데, 이 기암괴석은 카르스트지형인 이곳에서 지각변동으로 인해 해저가 지형적으로 돌출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기묘한 형태의 지형은 각종 영화의 배경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중국 영화 《소림사(少林寺)》도 이곳을 무대로 한 것이다.
연평균 기온은 18.8℃이다. 아열대 기후로 4계절 내내 따뜻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다. 예로부터 하천교통의 요충지였고, 오늘날에는 샹구이[湘桂]철도가 개통되어 전통적인 상업 외에 면방직을 중심으로 화학·정비·농기구·제사·제지공업이 활발하다.
구시가는 당(唐)나라 때 구축한 석회암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대안(對岸)에는 시가지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 지도]
1. 이강 유람선 (관암-양재)
이강 유람선을 타기 위해 한 시간 정도를 버스로 이동했다. 중국에서 한 시간 이동은 이웃 마을 가는 수준이라고 한다. 이동하는 동안 계속 비가 내렸다. 그래도 차안에서 바라보는 신비스러운 풍경은 우리를 지루함으로부터 해방해 주었다. 처음보는 산봉우리들이 아주 멀리서 도시를 감싸고 있는 듯하다. 이곳 사람들은 산은 당연히 이렇게 생겼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비스럽다.
이동하는 동안 이 고장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아 알 수 있다. 우리가 60년대나 70년대 시골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모내기 하는 풍경, 밭 매는 모습이 그대로다. 다만 같은 들판에서도 한 배미는 벼가 누렇게 익어가고, 또 한 배미는 이제 이삭이 패고, 또 한 배미는 벼를 베어 볏단을 세워 놓았고, 다른 배미에서는 모내기를 한다. 한편에는 못자리에 어린 모가 자라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아이들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데 차는 계속 터덜거리고 흔들려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이곳은 중국 최대 소수민족인 좡족이 주로 농경생활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밖에도 먀오족, 통족이라는 소수 민족이 이 광서 좡족 자치구에서 거주한다고 한다.
◈ 좡족
좡족( 壮族, 정체: 壯族, )은 중화인민공화국 최대의 소수 민족으로 광시 좡족 자치구에 주로 살고 있다. 인구는 1800만 명으로 한족 다음으로 많다.
원래의 이름은 獞族이다. 그런데 글자 ‘獞’은 야생 개과를 뜻하는 글자이기도 해서 인종적인 오명으로 간주되었다. 1948년에 부수를 큰 개를 뜻하는 ‘犭’에서 사람을 뜻하는 ‘亻’으로 바꾸어 僮族이 되었다. 나중에 ‘僮’을 ‘壯’으로 바꾸었는데, 바뀐 ‘壯’의 뜻은 ‘억센’ 또는 ‘강한’이다
좡족의 언어는 한장어계 좡동어(壮侗语)족 좡타이어지이고, 남북의 2대 방언으로 나눌 수 있다. 1955년 라틴어 모음을 기초로 하여 좡문을 만들었다.
좡족(壮族, 정체: 壯族) 주거지역은 광시[廣西] 지방을 중심으로 윈난[雲南]·광둥[廣東]·구이저우[貴州]·후난[湖南] 등 여러 성(省)에 퍼져 있으며, 총인구 약 1800만을 헤아리는 중국 최대의 소수민족이다. 타이계(系)의 언어를 사용하며, 문자는 중국 공산정권 수립 후 로마자가 사용되고 있다. 계곡이나 분지에 정주하여 농경생활을 하며, 작물은 쌀·옥수수·감자류·콩류·보리류 등이다.
사회생활은 촌락을 단위로 하여 이루어지며, 일부일처(一夫一妻)의 소가족이 일반적이다. 가옥은 항상주거(杭上住居)이며, 하층에서는 물소·돼지 등의 가축을 사육한다. 일찍부터 수도(水稻) 경작을 생활의 기초로 하여 왔기 때문에, 밭의 신(神)이나 곡령(穀靈)에 대한 신앙이 있었으며, 연중행사는 농경의례를 기축으로 하여 전개한다. 이들이 한(漢)민족에 의하여 퉁[僮,獞]이라 불린 것은 원(元)·명(明)나라 때부터이며,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여 한민족과의 접촉도 긴밀하였으므로 한화(漢化)되었다. '광시퉁족자치구(自治區)'가 성립하였으며 뒤에 광시 좡족[壯族]자치구로 개칭되었다.
◈ 먀오족
먀오 족 (苗族)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다. 중국 남부의 중국인과 같은 민족이다. 주로 중국 남부와 동남아시아(라오스, 타이, 베트남)등지에 거주한다. 일부는 미국(27만5,000명), 프랑스(1만5,000명), 프랑스령 기아나(1,500명)에도 거주한다.
먀오족의 역사를 거슬러 내려가 보면, 약 4000년 전 중국의 역사 이전의 시대에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전 중국의 중부와 남부에는 본래 먀오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최초로 먀오족과 접촉하면서 제1차 전쟁을 하였는데 이것이 한족의 영주인 황제와 먀오족의 수장인 치우와의 전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초국이 형성하기도 했는데, 일부는 한족화(숙묘)하고 일부는 서남방으로 이주(생묘)하여 지금의 먀오족의 선민이 되었다. 이 당시 남쪽으로 옮겨간 먀오족 집단은 귀주성이나 사천성 남부의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터전을 잡거나 산간계곡, 산간 저분지에 거주하였다.
수·당 시대에는 남북통일로 인해 중국 분열상태가 마치고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촉진함과 동시에 먀오족의 수도 늘어났으며 귀주를 중심으로 하여 운남 등지로 이주를 하였고 전국이 먀오족분포의 중심이 되었다. 원·명·청의 3대는 중국봉건사회 발전의 전성기였으며 이 시기에 먀오족은 정치와 경제적 요소의 촉진 아래 이주가 극히 빈번해졌으며 점차 호남, 호북, 귀주, 운남, 광서, 하북, 섬서성 등의 분포 구조를 형성함과 동시에 동남아 각국으로 유입되로 국제적 민족이 되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먀오족은 문자가 존재는 했지만 정확한 기원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먀오족과 한족과는 오랜 역사 동안 투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한족문화 형성에 먀오족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 야오족(瑤族)
광둥[廣東] ·광시성[廣西省]을 중심으로 인접 여러 성에 분포하며, 인도차이나반도 북부에까지 미친다. 중국에서는 瑤[야오]로 표기하는데, 푸젠[福建] ·저장[浙江]의 서[畬]도 이 민족의 분파이다. 베트남에서는 만[蠻]이라고 부른다. 언어의 계통은 여러 설이 있어 확정된 바 없다. 원주지는 둥팅호[洞庭湖] 부근이며, 12, 13세기경 오늘날의 거주지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전(火田) 경작을 하며, 작물은 밭벼 ·옥수수 ·기장 ·타로토란 등이 있는데 광둥 ·광시에서는 계단식 관개전(灌漑田)에 의한 논벼경작도 많이 한다. 소 ·돼지 ·닭 등을 사육해 희생용으로 쓴다. 정치적 단위인 촌락은 조상제사 ·외혼제(外婚制)를 특색으로 하는 부계적 친족집단으로 구성된다. 종교는 조상제사가 두드러지지만 신 ·성령을 믿으며 거기에 통달한 무사(巫師)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도교(道敎)의 영향이 현저하고, 또한 개를 시조로 하는 ‘반호신화(槃瓠神話)’를 공통으로 소유한다. 주요 거주지역에는 자치현이 있는데, 그들의 사회는 커다란 변혁기를 겪고 있다.
계림에서 이강으로 가는 길의 산
벼를 벤 논, 모내기가 한장인 논, 멀리 벼가 한창 자라는 논이 보인다
이강에도 비는 내린다. 그러나 심하게 내리는 것은 아니다. 선착장까지 걷는 동안 원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거리는 포장은 되었으나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고 가축의 배설물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자연 그대로이고, 그런 환경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여유있어 보였다. 동네 사람들이 비내리는 길가에 나와 대화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나가는 우리를 바라보고 신기해 한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이 오니 그렇게 신기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그들보다 덩치가 크고 훨씬 풍만하다. 옷이 더 깨끗하고 고급스럽다. 그런 우리들에게 여러가지 농산물을 내놓고 "천원, 천원"하고 외치고 있다. '천원 천원'이니 천원짜리 두장을 내라던 장가계 노인들보다는 훨씬 순진해 보인다. 그 천원이 장가계의 소득을 높인 것 만큼 계림에 다녀간 한국인들은 그렇게 넉넉치 못했나 보다. 언젠가는 중국이 우리를 추월할 것이다. 추월 후에는 지금도 항공기에서 한국인에게 중국어로만 설명하듯 그렇게 우리에게 보복할 것이다. 고려, 조선 시대처럼 우리를 한국인이 아니라 東夷族이라며 오랑캐 취급을 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중국인도 이제 돈을 향해 절하는 법을 배웠다. 돈맛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유람선 앞에서
어린 날 마당에 놀던 토종닭이 여기와 있다
선착장으로 가는 길에 바라본 산
구름과 산봉우리 시선의 세계이지만 거기 손님을 실어나르는 자동차가 있다.
유람선 선착장에서
선착장에서
유람선에서 이용원 선생님
유람선에서 최태열교장 선생님
비는 그치고 멀리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이 두 분
떨어질 줄 모르는 잉꼬 부부
안개에 숨은 봉우리
이규필 장학관도 동심
이효정 선생님
仙界인가 佛界인가 人間이 아니로다
비가 쏟아져서 갑판에서 내려와 술을 마셨다. 계수나무 꽃으로 세 번 담가 빚었다는 三花酒는 아주 독하다. 그러나 맛이 좋아 나도 위험을 무릎쓰고 몇 잔 마셨다. 눈치를 보아가면서. 분명히 부작용이 있을 텐데. 안주는 이강에서 잡았다는 가재 튀김이다. 화기 애애하다. 가재가 산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처에 마을이 없으니 깨끗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마을 도랑에 가재가 다 죽은 것과 대조적이다. 모두 옛날 어린 시절 가재 잡던 추억으로 돌아가 그 때 얘길 한다. 학교길가 도랑을 다 품어 가재를 다 건져 내야 집에 왔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맛은 그 때 그 맛이다.
三花酒를 마시며
계림 삼화주와 가재 튀김
저 숲에서 수염이 허연 신선이 나올 것 같다
이강에는 유람선이 빽빽하다.
선착장에서
선착장에서
산 병풍을 둘러 치고 열두 식구가 함께
주변 경관이 심상해질 무렵 술판도 거의 식어간다. 그래도 신선같은 산경에 홀리는 마음이야 끝날 줄 모른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배는 떠날 때의 선착장이 아닌 관암동굴 입구 선착장에 손님을 쏟아 놓는다. 우리는 자연히 관암동굴로 올라 갈 수 밖에 없다. 가파른 계단은 숨이 차기 시작할 무렵 끝이 났다.
2. 관암동굴 관광
동굴 관광은 우리나라 고수동굴이나 고씨 동굴 같은 석회암 동굴과 별다른 것이 없다. 게다가 지난 번 장가계 여행 때 황룡 동굴을 보았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암동굴은 그 크기나 규모가 새롭다기 보다는 관광 시설을 다채롭게 해 놓아서 재미있게 관광을 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관광 수입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예를 들면 모든 출구는 상품 가게로 통하게 해 놓은 것이 장가계나 여기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중앙 정부의 정책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암동굴은 약 2km정도 된다고 한다. 종유석이 많고 내부는 넓고 웅장하다. 엘리베이터는 타지 않았지만 모노레일, 나룻배를 갈아타면서 관람했다. 아이들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다.
동굴 입구
석순
입구의 불자 사람 인변 대신 사람 형상을 그렸다
동굴 안에서
모노레일
양삭으로 이동하는 동안 밖의 경치도 신비경이다. 윗옷을 다 벗고 있는 모습을 내가 '살색 셔츠를 입었다'고 했는데 나도 60년대 중학교 다니던 시절 여름 방학에는 주로 그렇게 살았다. 돌아오는 길가에서 포도를 샀다. 포도가 깨끗하고 맛있다. 포도를 사는 동안 여자 분들이 길가에서 깻잎을 땄다. 점심에 삼겹살을 먹을 때 싸서 먹은단다. 그런데 점심상을 받고 보니 상추, 마늘, 고추, 고추장이 다 있다. 고추장 맛은 우리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효정 선생님 사모님이 집고추장을 싸오셨다. 상추는 우리 상추보다 쓴 맛이 없어 삼겹살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깻잎을 씻어 오셨기에 거기 싸서 먹으니 종업원들이 놀란다. 중국 사람들이 먹지 않는 것을 우리가 먹고 있으니 얼마나 이상스러울까? 몸집이 아주 작고 예쁜 아가씨는 한족일 듯하고, 거의 베트남이나 태국 사람 비슷한 아가씨는 좡족인가 보다.
삼겹살로 맛나게 점심을 먹고 우리는 서둘러 양삭으로 이동했다. 삼겹살집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한 중국인이 갑자기 한쪽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부치더니 천원을 내란다. 팔이 한쪽 없다. 나중에 들으니 일부러 잘랐다고 한다. 그렇게 사는 법도 있구나. 우리 나라에서도 누군가 수억의 보험금을 타기 위해 자해를 한다더니 바로 천원을 위하여 팔을 자르는 이가 있다. 세상은 조금씩 달라도 인간이 생각해 내는 사는 방법은 다 비슷한가 보다.
양삭으로 가는 길에 누렇게 익은 볏논, 모내기를 하려고 써레질을 해놓은 논이 함께 있다. 멀리 옥수수밭은 수확이 끝났다. 이모작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길가의 농가
살색 셔츠를 입은 사람
3. 世外 桃園
양삭으로 이동하여 서가래 시장을 보기 전에 내일 일정에 있는 세외 도원 관광을 오늘 한다는 것이다. 내일 일정을 여유있게 한다니 반가운 일이다. 아침에 늦게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세외도원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야기를 주제로 하여 만든 인위적 관광지이다. 그런데 마치 도화원기에 명시된 이상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자연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주변이 들판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입지조건이 적절하다. 도연명이 모델로 삼은 도화원은 중국 호남성 성도인 장사에서 장가계 가는 쪽의 숲 속에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에 만들어 놓은 것이 의아했다. 이곳은 숲이 아니라 들판이다. 더구나 도원으로 들어가는 쪽 양쪽에 전통 건물을 짓고 좡족, 먀오족, 야오족의 삶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좡족은 검은 옷을 입고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먀오족과 야오족은 옷감을 짠다든지 수를 놓는 시연을 보여 주고 있다. 마치 우리의 민속촌 모양을 흉내낸 것 같으나 규모도 작고 잘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도화원도 아니고 민속촌도 아닌게 되어 버렸다. 소수민족의 삶의 모습을 표현한 것도 우리 민속촌의 근처에도 가지 못할 정도로 단순해 보였다.
◈ 도화원기
동진(東晋)의 태원연간(太元年間:376∼396)에 무릉(武陵)에 사는 한 어부가 배를 타고 가다가 도화림(桃花林) 속에서 길을 잃었다. 어부는 배에서 내려 산 속의 동굴을 따라 나아갔는데, 마침내 어떤 평화경(平和境)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논밭과 연못이 모두 아름답고, 닭 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한가로우며, 남녀가 모두 외계인(外界人)과 같은 옷을 입고 즐겁게 살고 있었다. 그들은 진(秦)나라의 전란을 피하여 그곳까지 온 사람들이었는데, 수백 년 동안 바깥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산다고 하였다. 그는 융숭한 대접을 받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곳의 이야기는 입밖에 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당부를 어기고 돌아오는 도중에 표를 해 두었으나,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이 글의 배경에는 진인동(秦人洞)을 비롯한 실향민 부락의 전설이 담겨 있으며, 도연명이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을 유려하고 격조 높은 문장으로 그린 것이다. 이 글은 선경(仙境)의 전승(傳承)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 유토피아 사상은 후세의 문학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세외도원의 현판
호수에서 바라본 부근 산의 모습이 깎아 세운 것처럼 아름답다
도원에 북적이는 사람들(중국인이 많다)
모델로 삼은 도와원기가 입구에 있다
桃花源記 도화원기
陶潛 도연명
晉太元中, 진나라 태원 중에
武陵人捕魚爲業,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무릉 사람이 있어
縁溪行,忘路之遠近, 계곡 물따라 가다보니 어느 정도 왔는지 길을 잊었는데
忽逢桃花林。 홀연히 복숭아 꽃밭을 만났다.
夾岸數百歩,中無雜樹。 계곡은 수백보인데 중간에 다른 나무는 없었다
芳草鮮美,落英繽紛。 향기로운 풀은 아름답고 떨어지는 꽃이 분분했다
漁人甚異之,復前行, 어부는 이를 매우 이상히 여겨 앞으로 다시 나아가
欲窮其林。 그 숲 끝가지 가보기로 했다.
林盡水源,便得一山。 숲이 다한 곳에 수원이 있었는데 문득 산 하나가 있었다
山有小口。 산에는 작은 입구가 있었다
髣髴若有光 마치 어떤 빛이 있는 듯해서
便舎船從口入。 바로 배를 놓아두고 그 입구로 들어가는데
初極狹,纔通人。 처음에는 매우 좁아 겨우 사람이 드나들수 있었지만
復行數十歩,豁然開朗。 다시 수십보를 가니 갑자기 넓어져 밝아진다
土地平曠,屋舍儼然, 땅은 평평하게 넓고 집들은 높이 솟아있다
有良田美池桑竹之屬。 좋은 밭 저수지와 뽕나무와 대나무 무리가 있고
阡陌交通,鷄犬相聞。 밭두렁으로 길이 나 서로 소통하는데 닭과 개소리 들린다
其中往來種作, 그 사이를 왕래하며 씨앗을 뿌려 농사짓는다
男女衣著,悉如外人。 남여 모두 옷이 뚜렷한데 모두 이방인과 같다
黄髮垂髫,並怡然自樂。 노인도 아이도 모두 흡족해라며 스스로 즐긴다
見漁人,乃大驚,問所從來。 어부를 보더니 크게 놀라며 어디서 왔느지 묻는다
具答之,便要還家。 사실대로 답하자 갑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設酒殺鷄作食。 술상을 마련하고 닭을 잡아 음식을 장만했다
村中聞有此人, 마을에서는 이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咸來問訊。 모두 와서 물었다
自云 先世避秦時亂,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들이 진나라 때 난을 피해
率妻子邑人來此絶境, 처자와 마을 사람을 데리고 이 절경에 와서
不復出焉。 다시는 나가지 않아서
遂與外人間隔。 결국 외부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問今是何世, 지금이 어떤 세상인지 물었는데
乃不知有漢,無論魏晉。 한나라가 있었는지 몰랐고 위진은 말할 것도 없었다
此人一一爲具言所聞,皆歎惋。 그가 낱낱이 밝히고 들은 바를 말하자 모두 탄식을 했다
餘人各復延至其家,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는
皆出酒食。 술과 음식을 내었다
停數日,辭去。 며칠을 머문 후에 하직 인사를 하자
此中人語云 이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不足爲外人道也。 다른 바깥사람에게 말하지는 마세요
既出,得其船, 나와서 그 배에 이르러
便扶向路,處處誌之。 왔던 길에 의존해 돌아오며 곳곳에 길을 표해두었다
及郡下,詣太守,説如此。 군에 도착해 태수를 예알하고 이를 말하자
太守即遣人隨其往, 태수는 즉시 사람을 보내 온 길을 쫓아
尋向所誌, 표지있는 곳을 찾았다
遂迷不復得路 그러나 끝내 길을 찾지 못했다
南陽劉子驥,高尚士 남양의 류자기는 고상한 선비인데
之欣然規往。 이를 듣고 기꺼이 가보기로 했다
未果,尋病終。 그러나 성과가 없었고 곧 병으로 세상을 마쳤다
後遂無問津者。 그 뒤로는 마침내 나루터를 묻는 자가 없어졌다
인간세계와 별유천지와의 경계가 되는 문
누가 쓴 글인가
우리는 도화원기의 주인공처럼 배를 탔다. 배는 평지에서 탔다. 연꽃이 피어 있고 부들이 한창 자라는 늪을 지나 부래연이 꽃을 피운 물위를 지나 한참을 달렸다. 과연 굴이 나왔다. 컴컴한 굴을 지나니 무릉도원이 나왔다. 복숭아꽃이 만발해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 사시사철 피도록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다. 원주민인지 무릉의 사람들인지 나와서 소릴 지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무릉도원처럼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은 아니었다. 나무에는 군데군데 짐승의 유골을 붙여 놓았다. 과연 신선의 세계로 인간의 이상향 모습이 이럴까? 우리 나라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한 번 보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배에서 내려 좡족, 먀오족, 야오족의 생활 모습을 보면서 기념품 판매 가게을 지나 나와서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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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외도원의 모습
3. 서가래 시장
서가래 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중국인들이 대부분이고 한국인도 많다. 한국인들이 주 고객인듯 싶으나 흥청거릴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것은 아닌가 보다. 장가계와 다른 점은 서구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비가 내려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지만 우리나라 서울 어디의 벼룩시장을 간 듯 착각할 만했다.
시장 구경을 한 다음 우리는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식사는 신서가 대주점에서 햇다. 호텔과 식당을 겸하고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잠을 잘 곳은 신서가국제대주점이라고 했다. 다른 때와 다르게 볶음밥이 아니라 맨밥이 나왔다. 이 지방의 쌀은 쌀이 아주 잘아서 씹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쌀이 윤기가 흐르고 갸름하다. 우리 쌀이 찰기가 있는데 비해 찰기가 없어 숟가락에서 부서진다. 그러나 밥맛은 좋았다. 식사시간에 이효정 선생님 사모님이 매실 짱아치와 고추장을 내놓아서 입맛을 돋구었다. 여행할 때 채식을 많이 하면 변비가 나지 않는다. 비교적 과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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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삭 거리의 모습
서가래 시장
물소 뿔 제품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는 일행
거리 모습
저녁 식사는 이렇게
4. 印像劉三姐 관람
저녁 식사 후에 호텔로 돌아와 짐을 정리했다. 짐을 신서가국제호텔이라는 으리으리한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바로 인상유삼저라는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버스를 탔다. 양삭의 모든 관광버스가 극장으로 향하는 듯했다. 야외극장이라고 하는데 비가 계속해서 내린다. 버스는 아무리 기다려도 움직일 줄 모른다. 그만큼 관람객이 많다고 한다 한 자리에서 3000명이 볼 수 있다고 한다. 관람 비용은 입장권에 15불이라고 되어 있었다. 주차장까지 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내려 걸어 들어 갔다. 입구에서 표를 확인하고 비닐 우비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는데 입어 보니 정말 가관이다. 중국인의 몸에 맞추었는지 저고리를 입은 것 같다. 어깨에 힘을 주니 소매 부분이 찢어져 버렸다. 그래도 세게적인 명 공연이니 보지 않을 수 없다.
인상유삼저는 세계적인 영화감독 장예모가 5년 동안의 준비기간을 거쳐 공연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내용은 이 지방의 劉三姐 설화를 바탕으로 구성한 수상에서 공연하는 오페라이다. 유씨 집안의 셋째 딸의 설화를 다룬 이 이야기는 꾀꼬리의 환생인 셋째 딸이 악독한 지주와 맞서 싸우고 결혼하는 과정을 통하여 소수 민족인 좡족의 삶의 풍속도를 그리고 있다. 한 족 중심인 중국이 소수민족의 문화에 눈을 돌렸다는 큰 마음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을 열어 놓은 것처럼 스케일이 큰 공연이다. 이강의 약 2km 주변과 산을 배경으로 호수처럼 되어 있는 수상에서 공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더욱 감명 깊었다. 그래서 빛과 색을 최대한 활용했기에 야간 공연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카메라가 좋지 않아 그 장면을 다 찍지 못한 것이 한이다. 대사나 노래 가사는 알 수 없지만 음악이니 만큼 대충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규모와 공연 모습만 보더라도 감동적이었다.
이강 산수 극장
공연 시작
공연 시작
수상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모습
공연 모습
공연 모습
공연 절정
공연을 하는 동안에도 비는 계속 내렸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것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 작품으로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공연 문화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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