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해외 여행

중국 장가계 삼림공원 4 (제 3일 : 장가계 무릉원)

느림보 이방주 2010. 1. 26. 23:12

 2010년 1월 19일

 

◈ 장가계 무릉원에서 장사까지 ◈

 

오늘 일정 : 십리화랑 → 황룡동굴 → 토가족 풍정원 → 만복온천 → 장사시 광성호텔 투숙

 

 장가계 무릉원 관광지도

 

▣ 십리화랑 관광  

 

 아침 여섯시에 기상, 재빨리 몸을 씻었다.  어젯밤 늦게 잠든 것을 생각하면 일찍 일어난 것이다. 날씨는 여전히 좋다. 오늘 첫 여정은 기이한 봉우리들이 늘어서 있다는 십리화랑을 둘러본다. 더구나 모노레일을 타고 간다니 차 안에서 보는 경치가 일품일 것이다.

 

무릉원 입구에 가서 어제 한 번 써먹은 카드를 가지고 입장했다. 지문을 또 찍었다. 셔틀 버스를 타고 어제 갔던 길을 꾸불 꾸불 올랐다. 이 길을 가려면 굴을 두세 개 지난다. 비록 길지는 않지만 모두 인력으로 뚫었다고 한다. 폭약을 쓰면 경관이 무너질 것이 염려되기도 하고, 길 아래에 있는 호수에도 지장을 줄까 염려해서라고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이 돌을 정으로 쪼아 이만한 굴을 뚫는다는 것은 대단한 참을성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동안에 충격의 파장이 아주 작으면서도 강력한 폭약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그렇게 정성들였다는 것을 자랑한다.

 

멀미가 날 정도로 돌고 돌아 모노레일 승차장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계단을 한참 걷고 아주 긴 통로를 지나 승차장으로 갔다. 승차장의 모습으로 보아 평상시 성수기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차는 사방이 투명하게 되어 있어서 경관을 구경하기 아주 좋았다. 전동차가 미끄러지듯이 삐걱거리며 골짜기로 들어서자 원가계나 양가계에서 본 것과는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사방으로 둘러 보느라고 고개가 아프다. 사진을 찍어 봐야 뭐 하나. 그런데 또 안찍으면 뭐 하나. 눈에 담자. 마음에 남기자.  

 셔틀버스에 오르는 회원들

 승차장으로

 승차 직전

 레일 위에서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아래에서 본 십리화랑

 바위로 만든 선인장인가

 저기도 오른다면 어떻게 가야 하나

 

넋을 놓고 바라보다, 사진을 찍다 하다 보니 어느새 종점에 다가 왔다. 더는 가지 못한다. 아주 작은 마당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사진도 찍고 주변을 조망하도록 했다. 그러나 사진사나 다른 장사들의 등쌀에 견딜 수가 없다. 어느새 사진을 찍어다가 열쇠고리를 만들어 '천원' 이라고 한다. 끝까지 사지 않으려다가 어찌나 보채는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냥 '천원'을 주어 버린다. 그렇게 나가는 외화가 얼마나 될까?

 

세 자매라는  바위가 있었다. 거기에도 전설은 있을 것이다. 무릉원에서 느낀 것인데 안내자들이 들려주는 전설은 모두 가족 관계이다. 어떻게 들어 보면 전해내려오는 전설이 아니라 안내원들이 만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두가 비슷하다. 국문학에서는 구비문학 중에 전설의 구조를 보면 대부분 주인공이 어떤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전설에는 주인공에게 반드시 어떤 금기나 과제가  주어진다. 주인공에게 그 금기를 고의든 실수든 지키지 못하거나 과제를 이행하지 못하는 여건이 딜레마로 다가온다. 그래서 결국 주인공은 과제 수행을 못하거나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패배하고 좌절하여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의 모습은 우리 문학 뿐만이 아니라 인류 문학의 일반적 양상이다. 그런데 가이드들이 들려주는 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렇게 구조적인 것이 아니다. 게다가 내용까지 모두 가족 관계이다. 재미로 만든 것이 아닐가? 관광 안내원도 조선족들에겐 괜찮은 직업이라는데--------.

 

아무튼 세 자매라는 석주는 기묘하다.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으려니 배경이 형편 없다. 아마도 일부러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없다. 우리 것이 아니니

시간은 많지 않다. 장사들은 쉴새없이 대든다. 얼르고 속이고 뺨치고, 누군가 한 분이 여기서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 갔다. 사진을 찍고, 이름자로 문자도를 그리고, 그것을 또 어떻게 만들고 하는데 중국 사람들에겐 꽤나 큰 돈이 들어간 모양이다.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인정이 있으니까 그렇다. 다시 차에 올라 되돌아 나왔다. 나오는 길은 멀지 않다.

 

 세자매라고 한다.

 무릉도원이 이럴까

 산 아래에서

 나는 이렇게 젊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부럽다

 우리도 한 방(근경은 좋지 않네)

 

 강택민의 글씨

 

 

 

  여기가 라텍스 가게이던가

 

▣ 황룡동굴  

 

다시  시내로 내려와 이번에는 몇 군데 가게를 들렸다. 그러나 사지 않았다. 그리고 황룡동굴을 가기로 했다. 애초에는 용왕굴을 가기로 했으나, 용왕굴보다 더 좋다고 하는 황룡굴로 방향을 바꾸었다. 물론 일인당 30불이란 거금을 더 주었다. 그래도 이왕 온 것이니까 더 좋은 곳을 보고 가자고 모두 찬성했다.

 

<황룡동굴>

삭계곡의 북단으로 7km 떨어진 곳에 있는 황룡동은 용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용궁이라고도 불리운다. 1983년에 발견된 이 동굴은 지각운동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용암동굴이다. 중국의 10대 용암동 중 하나로, 동굴의 어마어마한 규모와 구성, 마법의 성과 같은 신비한 아름다움이 보는 이의 넋을 빼놓는다. 상하 4개 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종유 기둥의 길이를 모두 합하면 무려 14km에 달한다고 한다. 또한 1개의 물웅덩이와 2개의 하류, 3개의 폭포와 4개의 연못, 13개의 궁정과 96개의 길을 가지고 있어 과연 세계 최고의 동굴이라 할 만하다. 이중 정해신침(定海神針)이라는 곳은 황룡동에서 가장 기이한 풍경을 가진 곳으로, 종유석의 높이가 무려 27m에 달하며 1998년 중국평안보험공사라는 보험회사에서 중국돈 1억원의 보험을 든 것으로 유명하다. 이 외에도 미궁(迷宫), 용궁(龙宫) 등 기이하고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차 있다. 관람시간은 약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정도 소요되며, 10분 정도 모터배를 타고 이동한 후 나머지는 걸어서 돌아보게 되어 있다

 

 

황룡동굴 개념도

 

황룡굴로 가는 길목은 갖가지 구조물로 우리 눈을 즐겁게 했다. 황룡굴로 가기 위해서는 기념품 가게가 양쪽으로 늘어선 곳을 지나야 한다. 과일, 중국식 군것질  음식, 중국 고유의 기념품 등 사고 싶은 것이 진열되어 있었다. 특히 도장을 팔 수 있는  납석, 옥석 같은 것은 품질도 좋고 우리나라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값이 싸다. 그래도 꾹 참았다. 막상 사 가지고 가면 크게 쓸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값을 물어 보았다가는 사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그런 것을 그들도 다 아는지 가게를 비워 놓고 트럼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황룡굴 입구까지는 꽤 멀다. 걸어가는 거리가 거의 15분은 되는 것 같다. 가는 중에 공예품을 만드는 공장이라는데 특이하게 건물을 지어서 눈길을 끌었다. 공원 부근인데 민가도 있다. 민가에 빨래를 널어 놓은 모습이 우리 70년대 시골 풍경을 보는 듯하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물레방아이다. 물레방아를 볼거리로 만들어 놓았는데, 아름답기도 하지만 과학적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물레방아가 대부분 높은 데서 물이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했지만 이곳은 그런 방식 뿐만이 아니라 수차 아래로 흘러가는 유속을 이용해서 수차를 돌리는 방법을 썼다. 그리고 하나의 수차를 돌려서 수십 개가 한꺼번에 돌도록 만들어 놓았다. 게다가 수차에 의해서 돌아가는 위에 정자를 지어서 거기서 놀 수 있도록 했다. 빙글빙글 도는 정자 위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이색적인 놀이가 될만 할 것이다. 상상 속에서 그림을 그려보았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고, 기름진 안주가 있고, 향기로운 술이 있고, 여기에 나긋나긋한 여인이 술을 따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아, 눈앞이 침침하다. 기름진 세상은 상상도 하지 말자. 눈에 기름이 낀다. 기름 빠진 삶이 사실은 더 기름진 삶이다.

 

 동굴 입구에 있는 기념품 가게들

 목공예 공장이라고 한다(자연과 하나되는 건물)

 정원으로 올라가는 회원들

 민가인지 빨래를 널어 놓은 모습이 정스럽다

 거대한 수차

 황룡동이란 현판이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황룡동이란 현판이 현란하다. 조선시대의 우리의 현판을 보는 듯하다. 우리는 왜 이런 멋을 잃어버렸을까? 동굴 앞에는 저명 인사들이 황룡동굴에 대한 찬사를 적어 벽에 새겨 붙였다. 글씨도 아름답다. 글귀는 무슨 말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지만 좋은 말들이다. 사실 우리 눈으로는 중국인들이 쓴 글씨를 알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중국인들의 말에 의하면 전세계에 중국 문화재를 알아보는 사람이 한국에 제일 많다고 한다.

 

동굴은 멀고도 길었다. 모두 3층으로 되어 있는데 길잡이를 따라다니며 종유석, 석순을 보면서 놀랐다. 종유석과 석순은 우리 나라의 고수동굴이나 고씨굴, 온달굴, 제주 만장굴과 다를게 없다. 오히려 우리나라 동굴의 석순이 더 아름답다. 그러나 굴의 규모나 석순이나 종유석의 크기는 비할 수 없었다. 왜 큰 나라는 동굴도 더 커야 하는지 모른다. 더구나 굴 속에서 배를 타고 10여분 유람을 할 때는 부럽기까지 했다. 중국인들은 동굴의 보호를 위해서 현란한 조명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동굴 안은 더웠다. 20도도 넘는 것 같다. 나중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동굴 안에도 원가계에서 보는 것 같은 절벽도 있고 난간도 있다.

 

 동굴 입구엔 저명 인사들이 동굴을 치하한 글귀가

 입구의 찬사

 만석괴동

 석순

 동굴에 흐르는 강에서 타는 유람선

 석순(많이 닮았네)

 염전 모양 같다

 12지신상 앞에서 개띠 여인

 

동굴에서 나와 점심 식사를 하러 발해관이라는 곳에 갔다. 조선족이 아닌 한국인이 경영하는 삼겹살 집이다. 모처럼 한국식 삼겹살을 먹었다. 고기 맛도 아주 좋았다. 된장은 집된장처럼 숙성이 잘 되었다. 마늘, 고추, 불판이 모두 한국식이다. 김치맛도 우리 김치 맛이다. 모처럼 삼겹살을 안주로 마시는 소주맛 일품이다. 모듬식으로 주는 중국의 다른 식당과 달리 앞앞이 공기밥으로 나온 밥을 상추 위에 올려 놓고, 잘 익은 된장을 찍어 바른 다음 삼겹살 한 점을 곁들인 다음 마늘과 고추로 마감하여 한 입에 먹노라니 꼭 개신동 삼겹살 집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 

 

 

 발해관에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회원들

 

점심을 먹고 중국인들이 경영하는 한의원인지 한약국인지 동인당이라는 곳에 갔다. 그러나 동인당이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한의사라는 분들이 셋이 나와서 진맥을 무료로 해 준다고 한다. 그런데 부부가 함께 가서 진맥을 같이 했다. 여자 통역하는 이들이 교수라는 이들의 말을 통역했다. 그런데 의사들은 한두 마디밖에 하지 않아도 통역은 매우 길게 했다. 자세히 설명까지 붙여주는 친절일까? 나에게는 혈압이 있는냐 물었다. 없다고 했다. 혈당이 있느냐고 묻는다. 없다고 했더니 고혈압, 고혈당, 고지혈의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우리 나이에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려다 말았다. 그래서 그런 가능성, 위험성을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우황을 5주만 먹어 보라고 한다. 우황을 5주만 먹으면 죽을 때까지 염려없이 살 수 있단다. 솔깃해 진다. 그리고 나에게 인삼과 녹용을 먹으면 절대 해롭다고 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왜냐하면 2009년도 퇴원한 후 하늘소 한의원에서 녹용을 중심으로 한 기를 보충하는 약을 한 재나 먹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약을 먹고 어느 정도 기를 회복했다. 한 3,40년 후에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때 먹은 녹용 때문이라고 알면 될 것 같았다.

 

사실 진맥에 들어가기 전에 정우종 선생님의 강의가 더 들을만 했다. 앞에 나가서 한의학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 매우 그럴 듯했다. 적어도 5년은 한의원을 경영한 의사 같았다. 진맥 이후 우황이나 사향을 사는 사람은 없었다. 날더러 자꾸 마사지를 받으라 해서 인사로 3000원을 주고 팔 마사지를 받았다. 시원하다.

 

 정우종 한의학 박사의 강의

 

한의원에서 나와 무슨 가게인지 한 군데 더 들렀다. 나는 밖에 서 있었기 때문에 무엇을 파는 곳인지 모른다. 다만 가게 앞에서 사탕수수를 파는 이가 있어서 우리 어릴 적에 옥수수대를 씹어 단물을 짜먹던 생각이 났다. 차는 또 출발하여 이제 장사시로 향했다.

 

장사시로 가는 길은 아직 어둡지 않아서 장사에서 장가계로 올 때 보지 못했던 시골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름다운 산과 구릉 그리고 잘 정리된 들판이 우리나라 어느 농촌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다른 것은 건물의 모양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다 자신들이 삶의 양식을 토대로 집을 짓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여행을 세 번째지만 전에 보지 못한 풍경을 이번에 본 것이 중국의 묘지이다. 중국은 모택동 이후 화장이 일반화되었기 때문에 묘지가 없다고 하는데 이곳 호남성에는 우리나라처럼 산에 묘지가 많이 보인다. 우리나라 묘지처럼 잘 다듬고 가꾸어 놓은 것은 아니지만, 금방 보아도 묘지라 할 수 있는 곳이 고속도로변에 여기 저기 보였다.

 

 사탕수수를 파는 노점상

 중국인들의 묘지

 시골 마을 풍경

 

 만복온천

 저녁 식사를 한 사해 찬청

 

  가는 중에 토가족들의 생활을 살펴 보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으나 이튿날 김구 선생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사 유적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만복 온천에 들러 온천을 했다. 그렇게 흐뭇하지는 못하였다. 온천을 하고 사해 찬청이라는 중국음식점에 들러 저녁식사를 했다. 지금까지 먹었던 중국음식의 일반적인 차림과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다만 사해 찬청이라는 음식점도 엘리베이터를 타야할 만큼 큰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여 있고 흥청거렸다. 주로 가족 모임이나 우리 나라의 칠순 잔치 같은 것이 열리는 것 같았다. 그런 흥청거림 속에서 서둘러 식사를 하고 식당을 나왔다.

 

  또다시 밤길을 끝없이 달려 장사시로 향하였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중국의 버스는 괴롭다. 앞뒤 좌석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다리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우리가 로버트라면 다리를 분해해서 선반에 얹어 놓고 편안하게 여행한 다음 다시 조립하여 차에서 내릴 수도 있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럴 때 가장 섭섭하고 억울한 것은 비좁은 좌석을 탓하고 항의해 주는 것이 아니라 다리 긴 사람을 마치 장애인 취급을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든 건물이나 시설물이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 버스는 큰 문제가 없어 다행이다. 아무튼 수백번 고쳐 앉고 몸을 뒤틀면서 그런 고통 속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12시 가까이에 장사시 광성호텔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