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답사/해외 여행

중국 장가계 삼림공원 5 (제 4일 : 장사시 관광)

느림보 이방주 2010. 1. 28. 23:48

   2010년  1월 20일

 

◈ 장가계 무릉원에서 장사까지 ◈

 

오늘 일정 : 광성호텔 → 열사 공원 → 호남성 박물관 → 潮宗古街(大韓民國臨時政府 活動 長沙 古址)→중국농산물 장사  분점 → 장사 공항

 

長沙 시가지

 

오늘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다. 6시 30분쯤 일어났는데 7시에 프론트에서 전화가 온다. 이른바 모닝콜이다. 씻고 7시 좀 넘어서 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 갔다. 몸이 거뜬하다. 호텔이 장가계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  장가계도 깨끗했지만 욕실, 침구가 모두 깨끗하다. 특히 아주 따뜻해서 좋았다.

 

식당에 내려가니 우리 일행들이 몇 분 벌써 내려 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주 간단히 식사를 했다. 밥은 먹지 않고 흰죽 한 탕기와 보리빵 두 개를 먹었다. 속이 아주 편안하다. 오전 일정도 비교적 여유 있다고 한다. 장사시는 최근에 경제를 중심으로 발전한 도시라고 한다. 호남성의 중심도시로  역사가 아주 깊은 古都라고 들었다. 특히 唐詩에서 많이 등장하는 湘江이 도시 가운데를 흐른다. 또 東庭湖가 바로 북쪽에 있다. 내가 잠시 한시에 빠져 있을 때 중국의 명시인이라고 하는 屈原의 漁父辭 중에 생각나는 글귀가 있어서 상강에 놓인 다리를 건너는  감회가 깊었다.

 

屈原曰               (굴원이 말하기를)

吾聞之               (내가 들으니)

新沐者必彈冠      (새로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모자를 털어서 쓰고)

新浴者必振衣      (새로 멱을 감은 사람은 반드시 옷을 털어서 입는다 더라)

安能以身之察察   (어찌 깨끗하고 깨끗한 몸으로)

受物之汶汶者乎? (세상의 더럽고 더러운 욕망의 먼지를 받을 수 있겠는가?)

寧赴湘流            (차라리 상강의 흐르는 물에 나아가)

藏於江魚之腹中   (강에 사는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安能以皓皓之白   (어찌 깨끗하고 깨끗한 이 몸에)

而蒙世俗之塵埃乎 (속세의 먼지와 티끌을 뒤집어 쓰겠는가?)

 

고등학교 때 한문 선생님께 이 시를 배웠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 리듬이 아주 좋아서 외우면서 다녔다. 한학을 하신 아버지께서 그게 무슨 글인지 아느냐고 해서 그냥 배운 대로 말씀드렸더니, 굴원과 어부사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상세하게 해주셨다. 이 시는 선비의 도를 말하는 글이다. 아무리 초라하게 사는 한이 있더라도 세상의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죽음과도 바꿀 수 없는 지조를 읊은 것이다. 그래서 선비 정신을 지향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도 널리 익혀온 시이다. 이 시를 읽으며 상강이라는 강이 중국에 정말로 존재하는 강인가 신비롭게 생각했었다. 굴원이 초췌한 모습으로 걷던 그 강가를 버스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새삼 감회가 깊었다. 상강은 소수와 합쳐 소상강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상강이나 소수는 모두 양자강의 지류라고 한다. 상강 이외의 여러 개의 지류가 합쳐 동정호를 이룬다고 하니 중국의 강을 모두 따라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일었다.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주체인 모택동의 시를 읽은 적이 있다. 공산주의자인 그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아예 모택동의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었는데, 모택동을 통하여 공산주의는 포악하고 권위주의적이라는 편견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杜甫의 시에서 느낄 수 있는 인간애, 측은지심이 드러나 있었다. 공산주의는 그런 것일까? 겨레에 대한 사랑과 측은지심이 있어 똑같이 잘 살게 하자는 것이 공산 주의일까? 그러면 왜 방법으로 폭력 혁명을 선택하는가? 골 아프다. 아무튼 모택동은 호남성 출신이라고 한다. 모택동 시대의 인물인 유소기나 호요방도 호남성 출신이라고 한다. 상강과 동정호가 있어 아름다운 시가 나오고, 杜甫나 李白 같은 문인들이 동정호를 읊고 악양루를 노래한 것과 백성에 대한 어진 마음과 공산주의 혁명과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버스를 타고 가면서 끝없는 의문의 꼬리를 감출 수 없었다.   

 

장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로 생각된다. 상강이 중앙을 흐르고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루었다. 도로는 매우 넓고 훤하게 뚫려 있어서 죽의 장막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제는 장막을 걷어 버린지도 오래 되었지만 말이다. 시가지는 우리 한국의 대도시 못지않게 번화하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경제 중심도시라고 한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도 매우 활기차게 보였다. 그리고 차들도 고급차들이 많다. 현대 자동차의 매장도 눈에 띤다. 아직도 한국인은 중국인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언제 추월 당해서 무시당할지 모른다. 쉽지는 않겠지만----

 

 

   

 장사시

 

3000천년의 역사를 가진 고성(古城)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로, 전국24개 역사문화 유명도시 중의 하나이자, 우수한 관광 도시이다. 뿐만아니라 호남성의 정치, 경제, 문화, 과학, 교육, 비즈니스와 여행의 중심지이며, 중국의 남쪽 지역의 중요한 자원, 기술, 원자재의 집산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이다. 장사는 부용(芙蓉), 천심(天心), 악록(岳麓), 개복(開福), 우화(雨花) 5개 구(區)와 장사(長沙), 망성(望城), 녕향(寧鄕)34현, 류양시로 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총면적은 11,800평방킬로미터, 인구는 613만이며, 그중 도시 면적이 556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199만명이다. 20세기 초에 영국·일본 등과 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면서 개항장이 되었으며 1933년에 시(市)로 승격되었다.

1. 자연지리
장사시는 양 옆이 높고, 가운데 부분이 들어간 안장 형태의 지형을 하고 있다. 마치 매가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남쪽으로는 형악이, 북쪽으로는 동정호(洞庭湖)를 내려다 보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류양의 대위산(大圍山)이, 서쪽으로는 녕향의 위산이 위치하여 마치 튼튼한 두 날개와 같다. 장사는 호남성의 동북쪽에 있으며, 아열대 계절풍의 습윤한 기후가 나타난다. 연평균 기온은 17.20도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360mm이다. 장사는 북회귀선에 근접하여 4계절이 분명하고, 여름에 비가 충분히 내리며, 또한 매우 덥다. 거기에 토지도 매우 비옥하고 수량도 풍부한데다 하천도 밀집분포하고 있으며, 작물 생장도 기간도 길고, 풍부한 생물 자원이 매장 되어 있다. 고등작물은 1973종으로, 쌀, 과일, 야채, 약재 기타 경제 작물 등이 있어서, '미시(米市)'라는 별칭이 있었다. 유명하고 귀한 녹나무는 장사의 시목(市木)이며, 붉은 진달래는 장사의 시화(市花)이다.

2.교통
장사는 육지, 하늘, 해상교통이 매우 편리하여 사방으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경광(북경-광주),  낙잠 철로의 대동맥이 남북을 관통하고, 절강-강소 철로, 호남-귀주 철로,석문-장사 철로가 동서로 연이어 접해 있다. 또한, 319, 109,106 3개의 국도가 도시에서 교차되어 전국으로 가는 교통망을 형성한다. 황화(黃花) 공항은 호남에서 제일 큰 공항으로, 이미 30여 국제, 국내 노선이 개통 되어 있다. 훌륭한 위치와, 편리한 교통은 장사가 중부 지역의 물류, 정보, 인재의 집산지이자, 동서 경제 협력의 다리이자 요충지로 거듭나게 했다.

3.역사적인 고성(古城)
일찌기 서주(西周)시기에 장사라는 지명이 있었으니, 이미 3000여 년이나 되었다. 춘추전국시대, 장사는 초(楚)나라의 중요한 진(鎭)으로, 진대(秦代)에는 장사군(長沙郡)이 설치되었고, 한대에는 장사국(長沙國)으로 거듭나, '초한(楚漢)의 유명한 도시'라는 이름을 얻었다.
현재 장사는 중요한 문화재 보호 단위(單位)가 140여 곳이 있으며, 그 중 국가급의 문화보호 단위가 7곳이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화재도 4만여 개에 달하며 그중 1급 문화재도 100여 개에 이른다. 1970년대 이래 장사는 계속해서 대량의 역사 문물이 출토되었으며, 그 중에 마왕퇴한묘와 삼국 손오기년간독(孫吳紀年簡牘)은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4.산업
농후한 역사,문화의 분위기 속에서, 근대에는 장사시의 공업, 특히 하이테크 산업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있어, 몇몇 유명한 고등학교를 의지하여, 악록산대학과학기술원과 류양생물의역원을 지었다. 교육기관으로는 국방과학기술대학, 중남[中南]공업대학, 호남[湖南]대학, 사범대학 등 23개 대학이 있다. 뛰어난 인재가 모이는 효과는 국가급의 하이테크 기술개발구, 국가급 경제기술개발구를 형성하었다. 국방과학기술대학의 은하컴퓨터, 엔지니어, 자기부상열차, 중남대학의 가루 야금등 하이테크기술 역시 그 명예를 오래도록 누렸다. .공업도 급속도로 발전하여 알루미늄, 유리, 방적, 동력기기, 무기 등의 공장이 세워졌으며, 상수(湘繡)라고 부르는 전통적 자수 제품도 유명하다. 그밖에도 전자, 기계, 식품, 방직 등이 발달한 종합 공업 도시이다.

5.혁명의 성지
파란만장한 중국의 근현대사 속에서 장사는 훌륭한 혁명가들이 배출되어 중국 혁명의 발원지의 하나가 되었다. 이 오래되고 신기한 토지위에서 담사동, 황흥등이 나타났으며, 모택동, 유소기, 호요방, 주용기등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태어났다. 지금도 장사는 공산당의 유적지가 관광 명소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곳이 많다.

 

▣ 열사 공원 탐방 ▣

 

<호남성 장사시 열사 공원>

 

호남성의 열사공원은 장사시의 제일 큰 공원으로, 동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변으로 산과 강이 자리하고 있어 조용한 곳이다.
1951년 인민해방 사업에 헌신한 혁명선열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호남열사공원을 지었다. 점유 면적은 118.2헥타르이며, 크게 두 곳으로 나뉘어 진다.
서쪽은 기념구역으로 남쪽에 큰 출입구가 있고, 긴 도로의 양쪽에는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화단을 지나면 돌계단을 따라 위쪽으로 기념 광장이 있는데, 히말라야 삼목이 늘어져 있고 잔디가 펼쳐져 있다. 기념광장의 언덕에 '호남열사공원기념탑'이 있는데, 이는 1959년 세워진 것으로 기념탑과 기념당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고, 상부의 기념탑만 높이가 38.6m에 달하는 8각형의 형태이다. 탑의 남향 정면으로 기양석비심을 끼어 넣었고, 위쪽에 모택동이 필체로 '호남열사공원기념비'라고 적혀있다. 하부는 기념당으로 기념당의 사각에는 벽에 감실(신주를 모시는 장)이 있고, 뒤에는 제당으로 비석이 세워져있는데, 여기에 "근 백년 동안, 특히 근 30년 동안 중국 인민해방 사업을 위해 희생한 호남 인민 영웅 열사들의 영광은 영원 불후할 것이다"라고 적혀 있다. 또한 기념당의 천정은 아름다운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기념당의 동,서쪽으로 전시실이 있는데 전시실에는 곽량, 하명한, 양개혜등 90여명의 열사들의 사진과 사적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전국의 76000여명의 열사들의 명단이 있다. 기념탑과 기념당 모두 표면이 화강암으로 지어졌다. 탑의 동북쪽에 송나라식을 모방하여 만든 기념정이 있는데 지세가 높고 서쪽으로는 록산이 바라보이게 되어 있으며, 동쪽으로는 호수의 빛나는 물빛을 볼 수 있다.
서쪽이 기념 구역이라면 동쪽은 관광구역으로 호수를 마주하고 지어진 제방이 있다. 아름다운 호남의 산수를 한눈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호텔에서 8시쯤 나와서 처음 찾아간 곳은 열사 공원이다. 열사 공원이 무슨 말인가 했더니 호남성 출신 공산주의 혁명 열사들의 혁명 정신을 기리기 위한 탑이 있고, 그 탑 아래 시민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혁명 열사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인민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반공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살아온 세대인 나의 입장에서 보면 어쩐지 반감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지 못하고 권위주의 시대였다면 중국에 와서 열사공원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주의 서쪽에 있는 충혼탑 정도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정문은 중국식으로 엄청나게 크다. 우리 일행은 북쪽 오솔길을 걸었다. 상록수가 우거지고 한적해 보인다. 평일인데도 걷는 사람들이 많다. 관광객 뿐 아니라 시민들이 더 많아 보인다. 우리는 매우 편안한 마음으로 공원을 돌았다. 어디에서 보아도  호남열사기념탑이 보였다. 길에서 보면 조름 넓은 마당이 많이 있고 그 마당마다 남녀 노소가 모여 춤을 추거나 체조를 하고 있다. 대개 모인 사람들의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춤이나 체조가 다르다. 그래서 중국인은 건강한 모습인가 보다. 중년 여인들도 허리가 굵거나 배가 나온 사람은 거의 없다. 나처럼 대책없이 먹어대지 않는 모양이다. 이 사람들을 보니 중국에 와서 더 나와 보이는 배가 부끄러웠다.

 

한적한 곳에는 네 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탁자가 있고, 거기에는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카드 놀이를 하고 있었다. 춤, 체조, 카드 놀이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모두가 건강을 위한 놀이이다. 몸과 정신이 건강해야 국가적으로 헛된 소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것도 하나의 국민 교육이 아닐까? 모두가 행복한 모습들이다. 우리만큼 국민 소득이 높지 않지만 전혀 바빠서 허둥대는 모습은 아니다. 늘 허둥대며 살다 보니 耳順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작은 언덕을 넘어 서니 내리막길이고 내리막길이 끝나자 너른 호수가 보인다. 여기는 관광을 할 수 있는 구역인가 보다. 성역과 놀이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모습이다. 호수에는 유람선도 있고 물새도 평화스럽게 노닐고 있다.

 

 곳곳에서 충믈 추고 있는 시민들

 산책로를 걷는 우리 일행

 먼 곳에서도 보이는 열사의 기념탑

 좀 더 역동적인 춤이다

 카드놀이를 하는 시민들(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인공 절벽

 동쪽에 있는 호수, 아주 넓고 공원처럼 잘 꾸며 놓았다

 열사의 기념탑 앞에서 춤을 배우고 있다. 아주 진지하다.

 

참배는 하지 않더라도 호남열사기념탑을 구경하기로 했다. 탑은 모택동이 직접 썼다는 '湖南烈士紀念塔'이란 글자가 금빛으로 뚜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산국가인 중국인들은 이 탑에 배향된 인물들이 자신을 해방시켰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인가?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인가? 계급으로부터 해방인가? 과연 그들은 진정한 양심의 해방을 맞이했을까?

 

탑앞에서 어떤 중년 여인 강사로부터 춤을 교습받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주 진지하다. 건전해 보였다. 춤이란 이렇게 건전해 보여야 한다. 공개된 장소에서 공개적으로 배운다. 잘 하지 못하더라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탑으로 가까이 가니까 마지막 계단 아래 표지석이 있다. 글자를 대충 알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어 설명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탑 가까이 올라서니 어느 노인들이 싸리비 만큼이나 커다란 붓을 들고 물을 찍어 땅바닥에 한시를  쓰고 있었다. 날마다 여기 나와서 이렇게 쓰는지 붓이 닳아 몽달이가 되었다. 참 멋있다. 공원에 있는 모든 시민들의 모습이 다 건전하고 의미 있어 보인다. 왜 우리는 경제적으로 더 여유 있으면서 이렇게 여유롭게 살지 못할까? 이렇게 포용하고 나를 개방하지 못할까? 竹의 장막 속에 가려 있다던 중국인들은 춤과 체조와 카드 놀이와 시로 자신을 활짝 공개하고 있다.

 

 열사 공원 현판

 안내 표지판, 돌에 새겼다

 

 멋진 필적으로 땅에 글을 적고 있다. 언듯 보아도 백화문은 아니다

 글씨와 그림을 치는 노인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일행

 

탑의 내부

공원 내의  쓰레기통(분리 수거를 하도록 되어 있다)

 

호남성 박물관

 

<호남성 박물관>

고묘진열관(古墓陳列館)과 마왕퇴한묘진열관(馬王堆漢陳列館)으로 구성된 박물관으로, 고분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특히 1972년 마왕퇴한묘에서 발결된 한대 여성 미라가 유명. 이 여성은 서한(西漢) 장사국(長沙國) 재상의 부인인 신추(辛追)로, 발견 당시 피부에 탄력이 남아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완벽해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열사 공원 바로 가까운 곳에 호남성 박물관이 있었다. 호남성 박물관은 한대의 여성 미라로 알려져 있다. 입구에 馬王堆漢墓陳列(마왕퇴한묘진열)이라 쓰여 있었다. 이 박물관은 마왕퇴한묘에서 발견된 한대 여성의 미이라와 묘의 구조 부장품을 중심으로 해서 진열하고 있다. 발굴 당시의 묘의 모습을 모형으로 진열하였다. 묘는 모두 세개로 이루어졌다. 특히 놀랄 만한 것은 관을 3중으로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관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미이라도 잠든 모습처럼 보였다. 발굴 당시에는 피부의 탄력이 살아 있는 사람 같았다고 한다. 장기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어떤 병으로 죽었는지도 알아냈다고 한다. 최근까지는 장기도 전시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볼 수 없었다. 박물관이기 때문에 사진 촬영을 가급적 삼갔다. 

 호남성 박물관

 입구

 발굴 당시 묘의 모형

 부장품들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옷(명주)

 가장 안에 들어있던 관

 2100년 전 미이라

 관 모형

 관의 단면

 박물관의 외부 모습

 

  潮宗古街 (大韓民國臨時政府 活動 長沙 古址

 

우리는 호남성 박물관에서 나와 김구 선생이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장사 활동 유지를 방문하기로 했다. 이 거리는 독립 운동을 하던 우리 지사들의 활동 무대였기에 방문하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 중국 근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마치 개화기 영화의 한 장면 속을 걸어 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 거리를 애국지사들이 남의 눈을 피해 드나들었다 생각하는 감회가 깊었다.

 

거리는 매우 무질서 한 듯 보였다. 아무렇게나 주차되어 있고, 구형 아파트로 들어가는 전선이 엉켜있었으며 아파트 베란다에는 갖가지 살림살이들이 너저분하게 보였다. 그리고 세탁물을  널어 놓기도 했다. 우리 70년대 아파트 창 밖에 널어 말렸던 세탁물 생각이 났다. 세탁물은 아파트 뿐 아니라 골목의 전선에도 예전 시골 마당에 쳐 놓았던 빨랫줄 같은 줄을 늘이고 횡으로 널어 놓았다. 심지어 속옷까지도 부끄럼없이 나와서 자신만만하게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조종 고가 안내 표지석

 골목의 모습

 세탁물 (더 많이 걸린 줄도 있는데 여긴 이것만 공개)

구두 가게 앞을 지나서 유적지 쪽으로 - 많이 본 얼굴이네 독립투사인가

 

거리 모습을 살피고 있는 이효정 선생님

과일 가게 (귤이 맛있고 싸다)

빨래 뿐 아니라 돼지 고기도 널어 말린다.

 

임시 정부 古址임를 알리는 표지판이 군데 군데 붙어 있어서 안내가 없더라도 찾아가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마지막 골목에는 그 옛날 그 시대처럼 지나는 사람도 없다. 현관에 들어서니 김구선생의 흉상이 있고 태극기와 오성기가 나란히 걸려 있다. 아주 늘씬하고 예쁘게 생긴 처녀가 나와서 설명을 했다. 우리말을 아주 잘 한다. 이렇게 젊은 아이가 어떻게 우리말을 이렇게 잘 할까? 가끔 튀어 나오는 억양이 분명 북쪽 여자인 것 같다. 내용은 모택동이나 주은래 같은 사람들이 김구선생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이 중심이다. 결국 중국이 한국을 도와 임시정부가 버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장개석 총통 얘기도 한 번인가 나오긴 했다. 이런 소중한 구지를 왜 우리가 운영하지 못하는 것일까? 안타까운 면이 있었다. 2층 독립 투사들의 생활 공간을 둘러 보고 내려왔다. 착잡하다.  

 

안내 표지판

 

안내 표지판

  

 김구 선생이 드나들던 바로 그 문 앞에

 나도

 김구 선생 흉상

 요인들의 좌석

 회의실

 침실

 침실

 그 앞 골목(재개발하면 어쩌나)

 돌아오는 길

 안마하는 집

 미용실의 남자 미용사

 

점심을 먹고 여자분들이 참깨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가이드의 안내로 중국농산물 장사 분점에 갔다. 깨를 구경하는 동안 밖에 서 있었다. 궁금해서 들어가 보니 깨 뿐 만이 아니라 기장, 좁쌀, 땅콩 같은 농산물들이 있었다. 연변에서 내려온 농산물이라고 한다. 연변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라는 말을 자꾸하낟. 우리민족이 지은 산물임을 강조하는 까닭은 무슨 의미일까? 연변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걸려야 하나? 전에 중국인들은 참기름을 먹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을 위해서 깨 농사를 지었을 것이다. 깨는 분명히 한국보다 싸다. 샀는지 여부는 비밀로 하겠다.

 

다시 밖에 나와서 건물을 돌아가 보았다. 가끔 사람들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철공소도 있다. 방학을 하지 않았는지 어린이들이 노랑색 옴니버스에서 내려 뛰어 집으로 간다.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식당

 농산물 가게

 거리 모습

 학교에서 돌아오는 어린이들

 

가이드에게 들으니 인천에서 우리 돌아갈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했다고 한다. 안개가 심해서 출발하지 못했으니 우리는 제 시간에 장사를 떠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할 수없이 차 안에서 술판이 벌어졌다. 가져온 음식을 모두 비웠다. 소주와 각종 안주들이 나왔다. 나도 몇 잔 마셨다. 그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다가 얼굴이 벌개지도록 마셨다. 나는 여수에서 오신 분들과 서먹했는데 아주 가까워졌다. 그러나 출국 수속할 일은 걱정되었다.

 

인천에서 승객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을 듣고 공항에 들어가 보니 공항의 종사원들이 모두 퇴근했다. 한참을 기다리니 퇴근했다는 사람들이 저녁을 먹고 돌아 왔다. 일사천리로 출국 수속을 하고 탑승구로 가니 대한 항공에서 기내식으로 준비된 것인지 도시락을 하나씩 주었다. 시장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노라니 시간도 잘 간다. 항공사 직원이 나와서 인천에서 비행기가 출발했다고 알려 주었다. 곧 알림판에 10시 20분에 출발 예정이라고 불이 들어 왔다. 우리 시간으로 11시 20분이다. 6시 40분 출발예정이었으니 약 4시간 정도 늦은 것이다. 장사에서 늦게 출발하면 인천까지 부른 콜밴이 또 문제가 된다. 이효정 선생님이 한국으로 전화를 해서 그 시간을 맞추어 놓았다. 인천에 우리 시간으로 두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짐을 찾고 콜밴을 만나 졸다가 자다가 하면서 아파트 마당에 도착했다.

 장사 황화 국제 공항

 공항에서 기다리는 일행

 기다림은 끝이 없고

 

 "돈은 대출을 받을 수 있어도 시간은 대출이 안된다."

우리 백만사 이효정 대장의 말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늘 잊고 사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 여행을 결심했다. 이번 여행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 하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내외와 우리랑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쁨이나 고달픔이나 함께 나누는 이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함께한  열 분이 모두 소중하다.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지 말아야겠다.

 

또 눈을 크게 떠야한다는 것이다. 눈을 크게 뜨면 넓은 세상도 좁게 아주 가까이 그리고 상세하게 보인다. 눈을 크게 뜨면 대륙도 한 마을이다. 대륙 사람들만 큰 눈으로 살라는 법은 없다. 좁은 곳에서 태어나서 좁은 곳만 뚫어져라 헤집고 살아온 우리가 얼마나 갑갑한 존재인가? 먼 곳을 훑어보는 눈을 가져야겠다. 틈만 나면 세상을 훑어보는 기회를 마련해야겠다.  

 

또 중국인들의 삶을 보면서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찾아서 갖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중국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득이 높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대충 살아오지 않았고 그만큼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사 공원에서 여가를 즐기는 그들의 표정을 보니 매우 행복한 모습이었다. 행복은 그렇게 찾아서 갖는 것이다. 그들이 행복한 것은 우리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얼마나 살기 편리한지 경험해보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생각만 바꾸면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집에 돌아오니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집이 있고, 자식이 있고,  창가에 게발선인장이 여전히 꽃을 피우고 있다. 모처럼 맞은 중국 여행, 이렇게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