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내 아들과 남의 아들

느림보 이방주 2010. 7. 28. 17:04

벼르고 별러서 등산화를 한 켤레 샀다. 두 켤레나 있지만 가까운 산을 가거나 가볍게 걸을 때 신는 경등산화가 갖고 싶었다. 아내의 여름 바지를 사주기 겸해 함께 가서 큰맘 먹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쌀 열두 말 값이나 주어선지 가볍고 발에 꼭 맞아 아이들처럼 기분이 좋았다. 집에 와서 다시 한 번 신어 보았다. 그런데 바닥으로 이어지는 면에 붉은 색 테두리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해서 멋있어 보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붉은 색이 마음에 거슬리는 것처럼 공연히 한 마디 했다.

“에이 붉은 줄만 없으면 최상품인데.”

그랬더니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갈이다.

“맞아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아들이나 줘요.”

아, 나이를 생각한다. 그래 나는 나이를 잊고 살았어. '내가 보기엔 더 멋있는데 뭘 그러느냐'는 말을 목마르게 기다렸으나 역시 허사였다. 거기서 그냥 멈추는 것이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마음을 다치지도 않는다. 또 이제 심상해졌는데 자꾸 섭섭해 할 필요도 없다.

  

  저녁상에 굴비가 구이가 올라왔다. 굴비 굽는 냄새도 없었는데 고들고들하게 잘 구워진 녀석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접시 위에 누워 있다. 먹음직스럽다. 어떻게 이렇게 매끈하게 구워낼 수 있을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몸통이 조금도 부서지지도 타지도 않은 채, 더구나 한 점 냄새도 없이 깨끗하게 구워졌다. 새삼 아내의 솜씨에 감동한다.

당연히 내 젓가락이 굴비 구이로 향했다. 민물 짠물을 가리지 않고 생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군침부터 삼키는 내 입맛을 돋우려는 아내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래서 허발하며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나를 배려하고 나는 아내를 신뢰하는 것이 참살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입맛 없을 텐데 짭짤한 굴비하고 먹어라.”

갑자기 아내가 생선 접시를 들어 아들 앞에 옮겨 놓는다. 이건 아주 절망이다. 우리 어머니가 장성한 내 앞에서 아버지에게 저질렀던 과오를 지금 아내가 자식 앞에서 나에게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착각한 엄마들의 오류를 자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힘없는 젓가락을 다른 곳으로 일단 돌렸다. 세 마리 중 가장 튼실한 한 마리가 아들의 젓가락에 잘려나갔다. 내가 옛날 아버지 앞에서 그리 했듯이 자식도 내 앞에서 나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인 나는 갑자기 아들 옆에서 얻어먹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옛날 초라하던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셔츠를 한 벌 샀다. 그런데 그게 요즘 말로 좀 튀어 보였다. 진열대에서 한눈에 딱 뜨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욕심은 났지만 색깔이나 디자인이 젊은이들에게나 맞을 것으로 보였다. 나를 늙은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지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면 별 수 없이 망설이게 마련이다. 점원 아줌마가 한번 입어보라고 권하기에 용기를 내어 입어 보았다. 거울을 보는 순간, '아 딱 내 옷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값을 물어 보지 않고 그냥 카드로 결제해 버렸다. 옷가방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기분이 마냥 좋다. 마음이 둥둥 뜨는 기분이다.

셔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한 보름은 날마다 갈아 입어도 될 만큼은 되지 않나 싶다. 사람들은 왜 늙으나 젊으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가? 공자님도 “文勝質則史”라며 내용도 없이 문채만 아름다운 것을 사치스럽다고 나무랐는데 나도 속 빈 속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민망한 셔츠를 다시 입고 아내의 눈치를 보아가며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괜찮다. 아무래도 한 30년쯤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다. 그려 맞아. 이렇게 입으면 되는 거야. 나는 흡족했다. 그 때 아내가 들어왔다.

“어 멋있네요. 좋은 거 사셨네.”

“그런데 사람들이 주책이라고 안 할까?”

이렇게 응원을 구해 보았다. 그러면 언제나 내편인 착한 아내는 '누가 주책이라고 말하겠느냐? 남들이 그러면 또 어떠냐? 자신 있게 입어라. 좋기만 한데 뭘 망설이느냐.' 이렇게 위로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튀어 나온다.

“그럼 아들 줘요. 아들이 입으면 딱 좋겠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미리부터 아내의 마음은 아들 쪽에 가 있었다. 언제나 착각 속에 있는 내가 불쌍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을 잘도 구분해낸다. 앞뒤도 가리지 않고 남의 아들은 푸대접하고 내 아들만 챙긴다. 그렇게 소중해 하던 남편은 안중에도 없다. 여성들이 아들 쪽으로 마음이 옮겨간 모습을 보이면 그 때는 이미 자신이 늙었다는사실을 왜 모르는가.

요즘 오십대 남편들은 대부분 아내로부터 남편이 아니라 남의 아들로 치부된다. 세월이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부터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아내의 소중한 남편이 아니라, 남의 아들로 전락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010. 7. 28.)

 

내 아들과 남의 아들
이방주
2010년 09월 24일 (금) 00:33:22 지면보기 10면 중부매일 jb@jbnews.com
   

벼르고 별러서 등산화를 한 켤레 샀다. 두 켤레나 있지만 가까운 산을 가거나 가볍게 걸을 때 신는 경등산화가 갖고 싶었다.

아내의 여름 바지를 사주기 겸해 함께 가서 큰맘 먹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쌀 열두 말 값이나 주어선지 가볍고 발에 꼭 맞아 아이들처럼 기분이 좋았다.

집에 와서 다시 한 번 신어 보았다. 그런데 바닥으로 이어지는 면에 붉은 색 테두리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여기 저기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해서 멋있어 보인 것이었다. 그런데도 붉은 색이 마음에 거슬리는 것처럼 공연히 한 마디 했다.

"에이 붉은 줄만 없으면 최상품인데."

"맞아요.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아들이나 줘요."

아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갈이다. 아, 나이를 생각한다. 그래 나는 나이를 잊고 살았어. '내가 보기엔 더 멋있는데 뭘 그러느냐'는 말을 목마르게 기다렸으나 역시 허사였다. 거기서 그냥 멈추는 것이 핀잔을 듣지 않아도 되고 더 이상 마음을 다치지도 않는다. 또 이제 심상해졌는데 자꾸 섭섭해 할 필요도 없다.

저녁상에 굴비가 구이가 올라왔다. 굴비 굽는 냄새도 없었는데 고들고들하게 잘 구워진 녀석이 눈을 지그시 감고 접시 위에 누워 있다. 먹음직스럽다. 어떻게 이렇게 매끈하게 구워낼 수 있을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몸통이 조금도 부서지지도 타지도 않은 채, 더구나 한 점 냄새도 없이 깨끗하게 구워졌다. 새삼 아내의 솜씨에 감동한다.

당연히 내 젓가락이 굴비 구이로 향했다. 민물 짠물을 가리지 않고 생선이라는 말만 들어도 군침부터 삼키는 내 입맛을 돋우려는 아내의 배려에 감사했다. 그래서 허발하며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나를 배려하고 나는 아내를 신뢰하는 것이 참살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입맛 없을 텐데 짭짤한 굴비하고 먹어라."

갑자기 아내가 생선 접시를 들어 아들 앞에 옮겨 놓는다. 이건 아주 절망이다. 우리 어머니가 장성한 내 앞에서 아버지에게 저질렀던 과오를 지금 아내가 자식 앞에서 나에게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착각한 엄마들의 오류를 자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힘없는 젓가락을 다른 곳으로 일단 돌렸다. 세 마리 중 가장 튼실한 한 마리가 아들의 젓가락에 잘려나갔다. 내가 옛날 아버지 앞에서 그리 했듯이 자식도 내 앞에서 나의 역사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인 나는 갑자기 아들 옆에서 얻어먹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옛날 초라하던 아버지의 뒤를 따르게 된 것이다.

셔츠를 한 벌 샀다. 그런데 그게 요즘 말로 좀 튀어 보였다. 진열대에서 한눈에 딱 뜨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욕심은 났지만 색깔이나 디자인이 젊은이들에게나 맞을 것으로 보였다. 나를 늙은이라고 생각해 본 일은 없었지만,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면 별 수 없이 망설이게 마련이다. 점원 아줌마가 한번 입어보라고 권하기에 용기를 내어 입어 보았다. 거울을 보는 순간, '아 딱 내 옷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값을 물어 보지 않고 그냥 카드로 결제해 버렸다. 옷가방을 들고 집으로 오는데 기분이 마냥 좋다. 마음이 둥둥 뜨는 기분이다.

셔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한 보름은 날마다 갈아입어도 될 만큼은 되지 않나 싶다. 사람들은 왜 늙으나 젊으나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가? 공자님도 "文勝質則史"라며 내용도 없이 문채만 아름다운 것을 사치스럽다고 나무랐는데 나도 속 빈 속물이 되는 것은 아닐까.

민망한 셔츠를 다시 입고 아내의 눈치를 보아가며 거울 앞에 서 보았다. 괜찮다. 아무래도 한 30년쯤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것 같다. 그려 맞아. 이렇게 입으면 되는 거야. 나는 흡족했다. 그 때 아내가 들어왔다.

"어 멋있네요. 좋은 거 사셨네."

"그런데 사람들이 주책이라고 안 할까?"

이렇게 응원을 구해 보았다. 그러면 언제나 내편인 착한 아내는 '누가 주책이라고 말하겠느냐? 남들이 그러면 또 어떠냐? 자신 있게 입어라. 좋기만 한데 뭘 망설이느냐.' 이렇게 위로해 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튀어 나온다.

"그럼 아들 줘요. 아들이 입으면 딱 좋겠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이럴 수가 있을까? 미리부터 아내의 마음은 아들 쪽에 가 있었다. 언제나 착각 속에 있는 내가 불쌍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나이가 들면 내 아들과 남의 아들을 잘도 구분해낸다. 앞뒤도 가리지 않고 남의 아들은 푸대접하고 내 아들만 챙긴다. 그렇게 소중해 하던 남편은 안중에도 없다. 여성들이 아들 쪽으로 마음이 옮겨간 모습을 보이면 그 때는 이미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요즘 오십대 남편들은 대부분 아내로부터 남편이 아니라 남의 아들로 치부된다. 세월이 이렇게 야속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부터 어쩌다가 무슨 이유로 아내의 소중한 남편이 아니라, 남의 아들로 전락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청주 출생
▶'한국수필' 신인상(1998)
▶충북수필문학상(2007)
▶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회원
▶내륙문학회장 역임
▶충북수필문학회 주간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 맛'
▶산남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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