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사랑의 방(가족)

내 남자와 남의 남자

느림보 이방주 2011. 11. 1. 14:57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오늘 돌아오기로 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받는다. 그런데 누구랑 함께 있는 분위기이다. 청주에 도착했으면 내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데리러 가겠노라고 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안 오셔도 돼요.”

말투로 보아 사양하는 수준이 아니다. 완벽한 거부이다. 굳이 간다면 낭패가 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한 번 딴죽 걸기를 해 보았다. 그래서 도착했는데 누구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기어이 이끌어 냈다. 큰 가방이 거추장스러울 텐데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서울에서 4일 간의 연수를 받는 동안 엄마보다 더 그리웠던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파란불이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자갸, 정신 차려요.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내 아들이 이제는 남의 남자가 되어 가고 있어. 그 사람은 이제 당신의 품을 벗어났어. 영역 밖이야. 이제부터 내 남자나 잘 챙기시라고.”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잡아 집에 와서 출퇴근하게 되면서 아내에게 나는 아주 찬밥이었다. 출근 시간이면 으레 아들 방에 가서 아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셔츠는 이걸 입어라. 넥타이는 이게 예뻐 보인다. 바지는 저걸 입어라. 손수건은 넣었느냐. 로션은 발랐느냐. 자식을 시기할 수도 없는 나는 노타이 차림으로 아들 방 앞을 힘없이 지나쳐 먼지 묻은 구두를 신었다. 이렇게 아내는 남의 아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내 아들에게만 온갖 정성을 다 하였다. 남의 아들로 밀려난 나는 늘 외롭고 서글펐다.

 

아내의 '남의 아들'이 아니라 '내 남자'로 복귀할 날은 언제일까. 참고 견디기는 기약조차 없어 지루했고, 아내의 내 아들에 대한 집착은 깊어만 갔다. 아들의 결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결혼한 후에 남의 남자가 되어 벗어나 버린 아들을 바라보며 지붕이나 쳐다보는 닭 모양을 한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며 쓰린 속을 달래었다.

 

하늘은 말없이 참고 기다리는 남의 아들 편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명언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들의 행동거지가 달라졌다. 아내의 내 아들에게 드디어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눈치이다. 고마운 새 주인은 이미 자신이 지켜야 할 영역에 굵직한 선을 그어 버린 분위기이다. 이미 성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치를 살피면서 그것이 나의 헛된 소망이 아니기를 빌었다.

 

주말에도 제 방에서 따분한 전공서적을 들여다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남의 나라 말을 주절거리던 사람이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갔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는 허겁지겁 등산복 차림으로 나갔다. 또 하루는 난생 처음 장미꽃을 사 보았노라고 말을 흘렸다. 퇴근 후에도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많았다. 서서히 누군가의 영역으로 건너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의 걸음은 늦은 여름 오후에 들판을 건너가는 구름 그림자처럼 가지 않는 듯해도 매우 빠르게 아내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 아들이 남의 남자가 되어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눈치 챈 아내는 남방을 하나 사왔다. 제법 유명메이커 상표를 달고 있는 데다가 뚝눈으로 봐도 멋져 보였다. 나는 아내의 마지막 몸부림을 보면서 측은해 하면서도 멋진 셔츠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 셔츠는 바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어느날 아들은 남방셔츠를 비롯한 스웨터, 재킷 같은 패션 모델이나 입을 법한 옷 몇 벌을 한꺼번에 들고 들어왔다. 옷 사기를 그렇게 거부하던 사람이 웬일일까? 게다가 아내의 취향과는 다른 새로운 무늬와 색깔을 시도하고 있었다. 벌써 다른 주인의 안목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순간 나는 아내의 커다란 눈에서 쓸쓸함을 읽었다.

 

나는 날마다 즐거워하며 응원을 보냈다. 남의 남자에게 애처롭게 매달리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아들이 은근히 엄마보다 아버지 쪽으로 다가오는 느낌도 받았다. 제가 안고 가야 할 여자가 생긴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갸 이제부터 당신의 아들은 이미 당신의 품을 벗어나 남의 남자가 되었어요. 정신 차려요. 인제는 추위와 허기에 떨고 있는 당신의 내 남자에게나 따뜻한 눈길을 보내 보시지. 나는 한편으로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입가에 자꾸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 여자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모성애의 단계를 넘어 집착에 가깝다. 결혼하여 이미 자신의 품을 벗어나 남의 남자가 되어도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신혼 때 내 남자를 참견하던 시어머니를 목불인견으로 평가절하했던 과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이 그 목불인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한국의 아내들이여! 이제 그만 남의 남자로부터 벗어나시지요? 이제 당신은 헛된 집착에서 벗어날 때가 온 거예요. 손에 넣고 고심할  필요 없어요. 부질없는 짓이에요. 내 던져 버려요. 섭섭할 것 없어요. 남의 남자이니까요. 돌아갈 내 남자의 너른 가슴이 있잖아요. 집착이란 본래 벗어버리기는 어려워도 내던져 버리면 시원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겨 보세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넌지시 바라보세요. 사랑이 느껴지지 않나요.

 

자갸, 이제 당신도 그만 지독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당신의 남자에게 돌아와요. 다 용서할게요. 모든 섭섭함은 다 잊을게요. 나는 당신의 남자, 당신은 나의 여자이니까.

(2011. 10. 31)

 

뚝눈 :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소양이나 안목이 전혀 없다는 뜻의 청주지방 사투리

자갸 : 자기(自己)를 이인칭이나 삼인칭으로 정중하고 친근하게 부르는 예스러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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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뜨락 - 내 남자와 남의 남자

기사 댓글(1)   김수미 ksm00sm@hanmail.net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등록일: 2012-04-01 오후 6: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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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 약력
청주출생, 1998년 '한국수필' 신인상충북수필문학상(2007), 충북수필문학회 회원, 내륙문학 회장 역임한국수필가협회 회원,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수필집 '축 읽는 아이', '손맛', '여시들의 반란' 편저 '윤지경전' (주식회사 대교)

공저 '고등학교 한국어'

현재 충북고등학교 교사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면서 오늘 돌아오기로 한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바로 받는다. 그런데 누구랑 함께 있는 분위기이다. 청주에 도착했으면 내가 집에 들어가는 길에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데리러 가겠노라고 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안 오셔도 돼요."

말투로 보아 사양하는 수준이 아니다. 완벽한 거부이다. 굳이 간다면 낭패가 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다시 한 번 딴죽 걸기를 해 보았다. 그래서 도착했는데 누구를 만나고 있다는 말을 기어이 이끌어 냈다. 큰 가방이 거추장스러울 텐데 누구를 만나고 있을까? 서울에서 4일 간의 연수를 받는 동안 엄마보다 더 그리웠던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파란불이 들어왔다. 현관에 들어서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자갸, 정신 차려요. 자기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던 내 아들이 이제는 남의 남자가 되어 가고 있어. 그 사람은 이제 당신의 품을 벗어났어. 영역 밖이야. 이제부터 내 남자나 잘 챙기시라고."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직장을 잡아 집에 와서 출퇴근하게 되면서 아내에게 나 는 아주 찬밥이었다. 출근 시간이면 으레 아들 방에 가서 아들의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다. 셔츠는 이걸 입어라. 넥타이는 이게 예뻐 보인다. 바지는 저걸 입어라. 손수건은 넣었느냐. 로션은 발랐느냐. 자식을 시기할 수도 없는 나는 노타이 차림으로 아들 방 앞을 힘없이 지나쳐 먼지 묻은 구두를 신었다. 이렇게 아내는 남의 아들에게는 관심이 없고 내 아들에게만 온갖 정성을 다 하였다. 남의 아들로 밀려난 나는 늘 외롭고 서글펐다.

아내의 '남의 아들'이 아니라 '내 남자'로 복귀할 날은 언제일까. 참고 견디기는 기약조차 없어 지루했고, 아내의 내 아들에 대한 집착은 깊어만 갔다. 아들의 결혼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결혼한 후에 남의 남자가 되어 자신의 품을 벗어나 버린 아들을 바라보며 지붕이나 쳐다보는 닭 모양을 한 아내의 모습을 상상하며 쓰린 속을 달래었다.

하늘은 말없이 참고 기다리는 남의 아들 편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는 명언이 현실로 나타나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들의 행동거지가 달라졌다. 아내의·내 아들에게 드디어 새로운 주인이 나타난 눈치이다. 고마운 새 주인은 이미 자신이 지켜야 할 영역에 굵직한 선을 그어 버린 분위기이다. 이미 성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눈치를 살피면서 그것이 나의 헛된 소망이 아니기를 빌었다.

주말에도 제 방에서 따분한 전공서적을 들여다보거나 이어폰을 끼고 남의 나라 말을 주절거리던 사람이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갔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는 허겁지겁 등산복 차림으로 나갔다. 또 하루는 난생 처음 장미꽃을 사 보았노라고 말을 흘렸다. 퇴근 후에도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으로 나가는 시간이 많았다. 서서히 누군가의 마당으로 건너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그의 걸음은 늦은 여름 오후에 들판을 건너가는 구름 그림자처럼 가지 않는 듯해도 매우 빠르게 아내의 울타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내 아들이 남의 남자가 되어 울타리를 넘는 모습을 눈치 챈 아내는 남방을 하나 사왔다. 제법 유명메이커 상표를 달고 있는데다가 뚝눈으로 봐도 멋져 보였다. 나는 아내의 마지막 몸부림을 보면서 측은해 하면서도 멋진 셔츠에 대해서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그 셔츠는 바로 찬밥 신세가 되었다. 어느 날 아들은 남방셔츠를 비롯한 스웨터, 재킷 같은 패션모델이나 입을 법한 옷 몇 벌을 한꺼번에 들고 들어왔다. 옷 사기를 그렇게 거부하던 사람이 웬일일까? 게다가 아내의 취향과는 다른 새로운 무늬와 색깔을 시도하고 있었다. 벌써 다른 주인의 안목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순간 나는 아내의 커다란 눈에서 쓸쓸함을 읽었다.

나는 날마다 즐거워하며 응원을 보냈다. 남의 남자에게 애처롭게 매달리는 아내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심으로 쾌재를 불렀다. 게다가 아들이 은근히 엄마보다 아버지 쪽으로 다가오는 느낌도 받았다. 제가 안고 가야 할 여자가 생긴 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자갸 이제부터 당신의 아들은 이미 당신의 품을 벗어나 남의 남자가 되었어요. 정신 차려요. 인제는 추위와 허기에 떨고 있는 당신의 내 남자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내 보시지. 나는 한편으로 아내가 안쓰러웠지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듯 입가에 자꾸 비어져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한국 여자들의 자식 사랑은 가히 세계적이라고 할 만하다. 그것은 모성애의 단계를 넘어 집착에 가깝다. 결혼하여 이미 자신의 품을 벗어나 남의 남자가 되어도 자신의 영역 안에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신혼 때 내 남자를 참견하던 시어머니를 목불인견으로 평가 절하했던 과거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자신이 그 목불인견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사랑하는 한국의 아내들이여! 이제 그만 남의 남자로부터 벗어나시지요? 이제 당신은 헛된 집착에서 벗어날 때가 온 거예요. 손에 넣고 고심할 필요 없어요. 부질없는 짓이에요. 내 던져 버려요. 섭섭할 것 없어요. 남의 남자이니까요. 돌아갈 내 남자의 너른 가슴이 있잖아요. 집착이란 본래 벗어버리기는 어려워도 내던져 버리면 시원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남자에게 시선을 옮겨 보세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넌지시 바라보세요. 사랑이 느껴지지 않나요.

자갸, 이제 당신도 그만 지독한 집착을 벗어던지고 당신의 남자에게 돌아와요. 다 용서할게요. 모든 섭섭함은 다 잊을게요. 나는 당신의 남자, 당신은 나의 여자이니까.

*** 참고

뚝눈 : 어떤 분야에 전문적인 소양이나 안목이 전혀 없다는 뜻의 청주지방 사투리
자갸 : 자기(自己)를 이인칭이나 삼인칭으로 정중하고 친근하게 부르는 예스러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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