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느림보 이방주 2010. 6. 28. 23:21

 

친구 최 선생으로부터 밥이나 한번 먹자고 전화가 왔다. 우리가 너무 격조했으니 시간을 맞추어 만나자는 얘기다. 우리는 밥을 먹어야겠기에 만나는 것인지 만나야겠기에 밥을 먹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만나면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우리는 세상사는 이야기를 한다. 집을 수리할 계획이라든지 자식들이 취업을 했다든지 그놈들이 연애는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서로 묻고 걱정한다. 그 중에서 가장 화젯거리는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다. 운동을 좋아해서 우리 나이에도 남부럽지 않은 탄탄한 몸을 지니고 있는 최 선생은 만나기만 하면 약골인 나를 걱정한다. 그래서 내 밥걱정을 해주는 건지도 모른다. 하긴 그렇게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사니 누구의 밥은 걱정되지 않으랴.

 

우리 겨레는 예로부터 만나면 서로 밥 안부를 먼저 물었다. ‘밥 먹었어?’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고 가라.’ ‘진지 잡수시고 가셔요.’ ‘밥 먹으러 갑시다.’ 이런 말은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정겹게 마련이다. 고향에 갔다가 돌아 나오는 길에도 고향 어른들에게 이런 말씀을 듣지 못하면 내가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혼자 사시는 집안 할머니에게 ‘호박잎된장국 끓여 밥해 줄게 먹고 가라.’ 이런 말씀을 들으며 돌아 나오는 모롱이에서는 호박잎된장국 냄새가 난다.

 

초등학교 등하굣길은 온통 들길이었다. 개울둑을 지나 논두렁을 밟고 학교에 다녔다. 논두렁콩이 바짓가랑이를 적실 정도로 무성해지면 이듬매기를 한다. 이즈음에는 들에 농기가 펄럭이고 북장단에 맞추어 메기는 선소리의 구성진 가락에 버들가지도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다. 하굣길은 대개 저녁곁두리 시간과 맞물렸다. 길가 버드나무 아래 아낙네들이 이고 온 광주리에는 잔치국수가 가득 담긴 양재기에 깨소금이 동동 떴다. 국수를 먹으면서도 일꾼들은 ‘밥 먹고 가라.’ 하고 불러 세웠다. 어린 소견에 배고파도 공밥은 안 먹겠다는 자존심이었는지 그냥 지나쳐 온다. 그러나 입안에는 침이 괴었다. 이제 알고 보니 들밥은 나누는 것이라고 하는데…….

 

마을에 잔치가 있으면 밥을 나누었다. 어른 생신이 돌아와도 온 동네에 밥을 나누었다. 모내기 때도 제사 때도 장가가는 날도 밥을 나누었다. 이웃에 새사람이 들어와도 우리 집으로 불러 밥을 나누고, 군대 가는 이웃집 아들에게도 밥을 나누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첫 임지로 갈 때는 온 마을을 돌며 밥을 먹고 나서야 보내 주었다.

 

밥은 나누는 것이다. 밥은 마음이 있으면 아주 쉽게 나눌 수 있지만, 마음도 없이 밥을 나누다가는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모두 모래알을 씹게 마련이다. 그러고 보니 밥은 마음으로 나누는 것이다. 아니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내 친구처럼 진솔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바로 밥이다. 그래서 밥상머리에서는 우정도 도타워지고 정분도 난다.

 

우리 속담에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이 밥에도 해당이 된다면 어떤 말로 고쳐야 할까? 밥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고 고쳐보니 마늘 안 넣은 배추김치처럼 밍밍하다. 이렇게 만들면 어떨까? ‘먹을 놈은 생각도 없는데 밥 준다고 한다.’ 이 시대에는 이 말이 참 적절할 것 같다. 밥이 흔해지니 마음에도 없으면서 밥을 산다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먹을 사람의 밥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밥 너머에 있는 잿밥을 탐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다. 하긴 나 같은 사람이야 밥 너머에 숨겨둔 잿밥 같은 건더기가 없으니 꺼림칙할 것도 없다. 그래선지 최 선생 같은 몇몇 친구들 말고는 내게 밥걱정을 해주는 사람은 아예 없다. 다행이다.

 

좋은 말만으로도 부족한 밥을 놓고 할 말은 아니지만 이 얘기는 하고 싶다. 지난 지방 선거에 나선 사람들의 화두는 한결같이 학생들에 대한 무료 급식이었다. 이미 10% 이상 무료급식이 시행되고 있는 현실에서 전원 밥을 공짜로 먹여준다는 것이다. 생명을 중시하는 정책이라고 역설하지만,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말로 생색을 내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정작 아이들이 굶주리는 건 마음의 양식인데 본질은 안중에도 없고 밥이나 공짜로 준다는 것이었다. 공짜로 주는 밥이 은혜를 베푸는 교육 정책으로 알고 있다. 교육이 겨누는 과녁은 아이들이어야 하는데 공짜로 밥을 준다는 말은 밥값을 내야 하는 학부모를 겨냥하는 것 같아 우습다. 교육 행정의 신앙은 바로 아이들이어야 한다는 본질은 잊어버리고 엉뚱한 우상에 공을 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먹을 놈은 생각도 없는데 밥 준다고 한 것이다. 밥 너머에 숨어 있는 잿밥에 두는 감추지 못한 속마음이 이빨에 낀 고춧가루처럼 치졸해 보였다. 그보다도 아이들이 밥은 힘써 일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는 진리를 잃어버릴까 두렵다.

 

우리는 밥으로 살아온 겨레이다. 밥은 진실해야 한다. 잿밥에 두는 속마음이 따로 있으면 안 된다. 밥은 땀이 배어 있어야 제 맛이 난다. 우리네 살아가는 얘기가 묻어 있어야 밥다운 밥이다. 진정을 나누고자 하는 밥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 최 선생의 전화가 눈물겹게 고맙다

(2010.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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