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살아 있는 술 막걸리

느림보 이방주 2009. 12. 15. 11:25

 

저녁상에 막걸리가 올라왔다. 우리집 밥상에 반주가 웬일인가? 아들이 퇴근길에 사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걸리치고 병이 고급이다. 프랑스 코냑처럼 멋있다. 아랫도리는 초록색으로 동그랗고, 목은 길쭉하게 빠졌다. 초록 너머로 보이는 젖빛처럼 뽀얀 술이 고급스럽다. 가라앉은 찌꺼기도 없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윳빛 와인도 있나보다고 생각했다.

 

애주가는 못되지만 소주에 맛을 들이고 나서는 막걸리는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술이라도 한 병 사오는 자식이 기특해서 한 잔 받았다. 대포를 마시듯이 벌컥벌컥 들이키지 않고, 와인을 마시듯 조금씩 입에 머금어 맛과 향을 음미했다. 향이 맑고 맛이 깨끗하다. 전통 막걸리의 단맛, 쌉쌀한 맛, 새콤한 맛, 톡 쏘는 듯한 청량감이 조화롭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막걸리 특유의 걸쭉한 맛은 좀 덜한 것 같았다. 전통 막걸리의 다섯 가지 맛을 다 살리면서 신세대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걸쭉한 맛은 감한 것 같다. 향도 단순하고 깊어졌다.

 

돌이켜 보면 나도 막걸리에 젖어 살던 때가 있었다. 자랑이라고 할 수 없지만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미 막걸리를 자주 마셨다. 하굣길에 넘어야하는 배티고개를 거의 오르면, 인심 좋은 할머니의 주막이 하나 있었다. 어느 겨울날, 주막 앞을 지나노라니 할머니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연탄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아궁이 앞에 나를 앉히고, 부뚜막에 묻어 놓은 단지를 휘저어 커다란 사발에 젖빛처럼 뽀얗고 따뜻한 막걸리를 따라 주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니까 이 추위에 얼마나 배가 고프냐며 술이 아니라 밥이니까 얼른 마시란다. 주는 대로 받아서 벌컥벌컥 마셨다. 지금도 그 따뜻하고 상큼한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그 후로는 출출하면 스스로 할머니의 부엌을 찾았다. 그러면서 차츰 막걸리 맛을 알게 되었다. 여름에는 갈증을 달래기 위해서, 겨울에는 추위를 잊기 위해서 마셨다. 토요일 오후엔 대포 한잔이면 점심을 걸러도 시오리 길이 거뜬했다. 우리 민족에게 대포 한잔은 한 끼 끼니이기도 했다.

 

그렇게 배운 막걸리를 대학에 가니 숨어서 마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강의가 끝나는 오후에는 으레 친구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셨다. 막걸리 잔을 들고 시대의 모순에 울분을 토했다. 젊음의 이상이 끝없이 추락하기만 했던 그 시대, 막걸리는 절망의 탈출구였다.

 

서른을 막 넘어 단양에서 근무할 때는 석연집이라는 인심 좋은 할머니의 막걸리집이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발걸음도 가볍게 석연집으로 퇴근했다. 묵은지와 두부를 구워 막걸리를 마시면서 묵은지 맛 같은 선배의 철학을 들었다. 이 시대엔 막걸리가 삶의 족적이었고 믿음의 무늬가 되었다.

 

지난 8월 아주 무덥던 어느날, 친구와 함께 용암동에서 상당산까지 3시간쯤 걸은 적이 있다. 갈증을 달래려고 산성동 어느 막걸리집에서 대포 두 잔을 마시고 희한한 경험을 했다.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산성길을 내려오는데 온 세상이 모두 보랏빛으로 반짝이는 것이다. 길가의 나뭇가지, 사람들의 등산 모자에 보랏빛별이 붙어 반짝거렸다. 정류장에 내려서도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지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보랏빛으로 흔들렸다. 그날의 막걸리에는 아무래도 순수하지 못한 성분이 섞였던 모양이다.

 

막걸리 맛은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전통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가장 막걸리다운 맛이 가장 좋은 막걸리가 아닐까? 누룩에 의한 자연 발효로만 향을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섣불리 와인 흉내를 내려고 인공 감미료를 첨가했다가는 막걸리도 와인도 아닌 것이 된다. 온 세상을 허영의 보랏빛으로 만드는 것은 겨레의 얼을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김치가 제 맛을 지탱해서 기무치를 꺾었듯이 막걸리도 정체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막걸리 특유의 오미(五味)와 누룩 향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살아있는 술이다.

 

지난 한 해 동안 히트 상품으로 막걸리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막걸리 전성시대가 다가온 것이다. 판매량도 위스키와 와인을 누르고 맥주 판매량에 육박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양조 사업을 하는 이들이 막걸리에 눈을 돌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막걸리 붐을 타고 어느 경제 전문 일간지가 막걸리 품평회를 열었다고 한다. 별 희한한 품평회도 다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대보다 훨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출품된 막걸리도 다양했고 맛의 수준도 대단했다고 한다. 또 국내의 전통주조 기업의 경영자나 양조 연구자들이 대거 참석했다고 한다. 막걸리 시음하는 사진을 보니 자못 진지한 표정이다.

 

약삭빠른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이름 있는 ‘포천이동막걸리’를 이미 상표로 등록했다고 한다. 문화를 상품화하는 것도 사실은 우리의 자존감을 지켜나가는 한 방편이다. 최근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이 입증되자 우리의 음식, 옷, 영화, 예술, 한글 등이 세계에서 환영받기 시작했다. 어떤 문화가 고급스럽게 보이면, 그 문화의 산물까지도 고급스러워 보이게 마련이다. 그런데 세계로 뻗어나가는 막걸리 문화를 일본에 빼앗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자식 덕분에 모처럼 젊은날의 향수에 젖어본다. 한잔 더 마시며 맛을 음미한다. 五味를 잃지 않았으면서도 깔끔하고 상쾌한 맛에 마음마저 한결 들뜨는 기분이다. 이 정도면 그간 소주에 빼앗긴 술에 대한 미각을 되돌리고, 젊은날의 낭만이 되살아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코냑’이나 ‘보드카’처럼 우리 술 이름인 ‘막걸리’가 지구촌 애주가들의 기억에 남는 단어가 되는 새로운 술 문화시대가 바로 코앞에 와 있다고 해도 충분할 것 같다.

(2009. 1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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