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보 창작 수필/원초적 행복(맛)

守拙齋 옹기구이

느림보 이방주 2009. 7. 11. 12:51

친구로부터 꿈의 별장에 초대받았다. 언제 불러주려나 고대하고 있었기에 마음부터 바빴다. 올봄부터 한 직장에서 함께 내리막길을 걷게 되어 든든한 친구다. 내리막길에서 내가 미끄러지는 것을 붙잡아 줄 것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 길을 가다가 딴죽을 칠 솔뿌리가 있으면 넌지시 일러주기는 할 지음(知音)이라 생각한다. 나도 아마 그에게 그럴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옥화대 별장은 까막눈으로 봐도 명당이었다. 소박하고 단정한 통나무집이 들어앉아 있는 주변의 산수가 예사롭지 않다. 골짜기는 아늑하면서도 깊고, 산은 우뚝하면서도 동글동글하다. 깊은 골짜기에서는 그치지 않고 물이 흐를 것이고, 좌우로 둘러싸고 있는 산은 낙락장송으로 뒤덮여 푸름이 멈출 까닭도 없다. 통나무집은 청룡과 백호의 한가운데 어머니 젖무덤처럼 얌전하고 포근하게 내려앉은 돌기 아래 펑퍼짐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교묘하게도 앉은 자리는 정방형이다. 달천이 산줄기를 감돌아 흐른다. 거기 강안에 숲이 우거져 물을 가렸다. 물 건너 멀리서 점잖게 바라보는 조산(朝山) 격인 산봉우리는 혼자 있어도 벗이 될 만하다. ‘어떤 벗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말 그대로다. 통나무집 바로 뒤편에서 누에 눈썹 같이 도도록한 미사(眉砂)에는 밤나무 한그루가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다. 물받이로 충분하다. 필체조차 겸손한 ‘守拙齋’란 편액까지 산수에 어울린다. 바라볼수록 부러움인지 시기심인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클로버 한 줄기 없는 잔디밭이나 정갈하게 매달린 고추 열매는 주인의 얼굴 그대로다. 잔디밭 한 귀퉁이 단지에서는 노릇노릇한 냄새가 피어나와 정원에 앉아 있는 우리의 미각을 간질였다. 손수 삶은 감자를 내왔으나 미각의 궁금증만 흔들어 놓을 뿐이다. 궁금하다. ‘이건 뭐여?’ 가까이 가서 덮개를 열려고 하니 주인이 놀라 말린다. 그러나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감자 껍질이 제대로 벗겨질 리 없다. 연신 눈길은 엷은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단지 쪽으로 향한다.


알고 보니 그건 돼지고기 옹기구이였다. 정확히 말하면 오겹살 훈제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주인이 뚜껑을 열고 보여주었다. ‘후끈’ 열기가 얼굴에 올라온다. 단지에 철망을 걸치고 참숯을 피웠다. 단지 아가리에 가로대를 걸치고 두툼하게 썬 오겹살을 갈고리에 꿰어 참숯불에 달랑말랑하게 매달았다. 그리고 단지 뚜껑을 덮었다. 밑에서 솔솔 피어오르는 참숯의 열기로 오겹살에서 기름이 방울방울 흘러내린다. 아가리를 덮어 공기가 통하지 못해서인지 기름이 흘러내려서인지 불은 괄게 피지 않는다. 이렇게 은은한 열기로 3시간 정도는 지나야 때깔 좋게 익는다고 주인이 일러 준다.


다 익었는지 주인이 한 덩이를 들고 와서 도마에 올려 썰어 본다. 오겹살은 오색으로 색깔과 맛을 달리하며 익었다. 껍질은 연한 갈색이고 기름은 기름 색깔이고 살은 살색이다. 노릇노릇한 빛깔이 노릇노릇한 냄새를 풍긴다. 더 익은 곳도 덜 익은 곳도 없다.  더 마른 곳도 더 습한 곳도 없다. 타지도 않았다. 다만 살과 살이 맞닿은 곳은 생살 빛깔 그대로이다. 돼지고기 누린내는 참숯의 타는 연기 때문인지 향으로 변했다.


마음이 급해서 주인이 접시에 담아 내오기 전에 쫓아가서 한 점 입에 넣어 보았다.  냄새는 고소하다. 촉감은 바삭하다. 껍질은 약과라도 깨무는 듯 입안에서 고소하게 부서지고, 속살은 기름이 빠지고 육즙은 남아 있어 담백하고 연하다. 씹을수록 맛이 난다.  엷은 상추 한 잎을 손바닥에 깔고, 고기 한 점을 놓고 집된장으로 화장을 시켜, 풋고추로 예를 갖추어 곱게 싸서 입에 넣어보니, 조산이 달려와 빙그레 웃고, 청룡이 춤을 추고 백호가 노래를 부른다.


이번에는 훈제 단지로 가서 익은 고기를 가져다가 내손으로 썰어 보았다. 삶은 고기처럼 푸석하지도 않고 차지고 연하게 썰어진다. 익은 고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받는다. 기름을 빼니 돼지 살도 이렇게 순해진다. 세사에 순응한다. 왕소금을 슬쩍 뿌려서 구웠더라면 간간한 맛에 소금향이 배어 풍미를 더했으리라.


먹이에 만족하자 주인은 연꽃 같이 어여쁜 청룡을 바라보며 ‘저 애 이름 좀 지어줘. 저 애만 바라보면 아무 생각도 없어.’ 했다. 함께 가신 분이 문득 ‘생각이 없으면 무각(無覺)이라 하세요.’ 그래서 청룡은 무각이 되었다. 일상에 욕심 없이 기름을 멀리 하고 살아온 주인을 생각하면, 더 이상 깨우칠 일 없으니 시습(時習)대신 불습(不習)이라 말하려 했다. 그런데 무각이 나았다. 백호는 아무리 바라봐도 시기도 없고 변하지도 않으며 성낼 리도 없을 테니 불온(不慍)이라면 어떨까? 조산은 빙그레 웃으며 멀리서 바라보다가 눈이 닿으면 다가와 주니 원붕(遠朋)이라면 어떨까? 그러면 깨달음 없이도 기쁨이 있고, 바라보는 즐거움만으로도 삶의 멋을 흡족하게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守拙齋’, 본래 기름을 원하지도 않았으면서 맑은 곳에 맑은 통나무로 맑은 집을 짓고 스스로 보잘것없음을 지향한다고 하였으니 더 바랄 벗이 뭐가 있을까? 더 빠질 아무것도 없는 맑은 육신에서 뭐든 자꾸 빼버리려고 하는 주인의 삶이 향기롭다. 백동으로 빚은 얼레빗처럼 청순하게 맑은 반달을 바라보며, 원붕을 불러 술을 권하고 무각과 불온의 소리 없는 풍악을 듣노라니, 참숯의 은근한 열기로 세상의 기름을 걸러내는 주인의 비우는 뜻이 옹기구이 만큼이나 아름답다. 

(2009.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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